이 연구는 18세기 유럽지도에서 동해가 한국해로 표기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프랑스 지도학자 기욤 드릴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드릴이 루이 15세에게 가르친 지리학 내용과 장 밥티스트 놀린과 벌인 지도 표절소송을 통해 지도 표절 방지 규정이 제정된 과정을 살펴보았다. 또한 드릴은 과학적 지도학의 선구자로 지도의 정확성을 추구하기 위한 논문과 지리학 서적을 집필했는데, 이 내용을 통해서 당시의 지리학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등편각선 지도를 소개했으며, 그가 동해를 한국해로 단독 표기한 근원을 안트안느 토마스 지도와의 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연구는 한국 교회의 1세대 선교학자들 중에 이광순 교수에 대한 연구이다. 전재옥, 전호진, 강승삼, 이태웅 등과 더불어 이광순 교수는 한국 선교학자의 1세대에 속한다. 그는 1986년 풀러에서 박사 학위 취득 후 장신대에서 가르쳤으며 많은 예장 통합 선교사 훈련에 참여했다. 이 연구는 이광순 박사의 선교학과 예장 통합 선교사들과 한국 교회에 대한 공헌을 이해하고자 했다. 이것을 위해 본인은 이 박사의 연구논문들과 저서들과 박사 학위 논문을 참고했다. 본인은 우선 그 이전의 두 명의 장신대 선교 관련 교수들에 대해 간략히 고찰한 뒤에 그의 생애와 사역을 정리했다. 그 뒤에 본인은 그의 연구 주제들을 여섯 개의 주제와 몇 개의 작은 주제들로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본인은 이광순 박사의 사역에 대해 논의했다. 이광순 박사와 그의 연구가 영어권에서 비교적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생활과 사역을 보다 자세히 살펴 보았다. 이 연구는 이신형의 선행 연구보다 광범위하게 이광순 박사에 대해 살폈다.
현대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전용 단말기로 전자책을 읽을 수 있는 시대이다. 최첨단 시대일수록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정보의 공유와 보존이 바탕을 이루는 디지 털화가 이루어져 있다. 즉 디지털화는 ‘정보의 공유와 보존’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효 율적인 ‘공유와 소통’을 위한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 한자학자 들의 연구문헌 DB 구축은 종이라는 2차원적 정보매체를 세계 모든 사람에게 어디서 나 제공할 수 있는 3차원의 정보로 바꾸는 것으로 DB 속에 있는 다양한 정보를 공 유하고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본 연구에서 구축하고자 하는 세계 한자학자 연구문헌 DB는 현 시대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다. 구축된 세계 한자학 자 연구문헌 DB는 한자학사와 중국학, 언어학사 등의 넓은 영역에서 정확하고 통합적인 학술적 기초자료를 마련함으로써 앞으로 학계의 심화 연구 발전에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기대된다.
The life and astronomical activity of Lee Deok-Seong (李德星, 1720-1794) was studied using various historical sources, including the astronomical almanac, Seungjeongwon-Ilgi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and the Gwansang-Gam’s logbooks during Joseon dynasty (A.D. 1392– 1910). We present the results of the study including the following main findings. First, from the investigation of Lee’s family tree, we find that a number of his relatives were also astronomers, notably Samryeok-Gwan (三曆官, the post of calendrical calculation). Second, we find that he took part in the compilation of an annual astronomical almanac over a period of at least 16 years. His major achievements in the astronomy of the Joseon dynasty were to establish a new method of calendar-making calculation and to bring astronomical materials to the Joseon court through a visit to China. The Joseon dynasty enforced the Shixianli (時憲曆, a Chinese calendar made by Adam Shall) in 1654 without fully understanding the calendar. So an astronomer and an envoy were dispatched to China in order to master the intricacies of the calendar and to learn as much of Western science as was available in that time and place. Lee Deok-Seong worked at the Gwansang-Gam (觀象監, Royal Astronomical Bureau) during the reigns of King Yeongjo (英祖) and Jeongjo (正祖). As best as we can ascertain in relation with the calculations in the Shixian calendar, Lee visited China four times. During his trips and interactions, he learned a new method for calendar-making calculations, and introduced many Western-Chinese astronomical books to Joseon academia. Lee greatly improved the accuracy of calendrical calculations, even while simplifying the calculation process. With these achievements, he finally was promoted to the title of Sungrok-Daebu (崇祿 大夫), the third highest grade of royal official. In conclusion, history demonstrates that Lee Deok-Seong was one of the most outstanding astronomers in the late-Joseon dynasty.
The present study investigated the characteristics and trends of academic research by Korean scholars of English education. The main focus was on the extent to which active scholars focus on their primary major areas. The study surveyed 11 journals of major academic societies in Korea, and analyzed a total of 5,072 research papers written by 1,639 scholars. The results showed that the most popular topic was acquisition/learning (19.30%), followed by English (applied) linguistics (17.90%), English materials (14.59%), teaching methodology (12.03%), and learning psychology (10.11%), the top five collectively comprising 73.93% of the total papers. The 99 most productive scholars published 1.01 papers per year on average. Younger scholars published more papers per year on average than older scholars. As for the concentrated efforts in their primary areas of research, the top 99 scholars wrote 46.84% of their papers on their primary areas, and 20.03% on their secondary areas of study. Younger scholars concentrated more efforts on their primary areas than older scholars. The results were interpreted, and suggestions were made for the future research.
언어 교육에서 오류 분석은 언어를 배우는 학습자들의 언어를 연구하거나, 효과적인 교수-학습 방안을 고안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방법론의 하나이다. 하기에 많은 학자들이 학습자들의 작문이나 발화에서 오류문을 추출하여 연구를 시도하고 있으며 또한 많은 연구 성과들이 나오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마다 오류에 대한 견해에서 서로 다른 의견들을 제기하고 있으며 그 판정에서 어려움을 시사하고 있다.본고에서는 학자들의 견해를 기초로 하여 한국어 교육에서 오류의 판정, 오류와 실수, 중간언어와의 관계에 관한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 보고 필자의 견해도 밝히고자 하였다. 그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1. 오류는 외국어 학습자 자신에게 있어서 필요 불가결이며 교사는 오류 분석과 오류 교정에 주목해야 한다.2. 오류 판정에서 문법성, 체계성, 반복성을 고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원인을 밝힐 수 있으면 오류로 보아야 한다.3. 오류는 학습자가 스스로 판단할 수 없고 교정할 수 없지만 실수는 학습자 스스로가 인식할 수 있고 교정할 수 있다.4. 오류는 중간언어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고 원인을 밝힐 수 있다.
본 연구는 일본 최초로 일본 전국을 실측하여 「大日本沿海與地全圖」를 제작한 이노우 타다타카라는 인물의 일생과 업적에 대하여 고찰한 것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지도학자인 이노우가 50세에 이르러 학문에 입문하기 전까지의 삶과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고, 그가 일본 전국을 측량하여 지도를 제작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고찰하였다. 이노우는 천문현상을 보다 정확히 예측하기 위하여 위도 1도의 실제 거리 등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하여 측량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련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지도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인식되었으며, 결국 에도막부의 공식사업으로 인정되어 「大日本沿海與地全圖」가 완성될 수 있었다.
본 연구는 일본에서는 높게 평가되는 인물이지만 Hamel에 이어 한국을 서양에 알린 두 번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지도학계에서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한 Siebold의 일생과 업적에 대하여 고찰한 것이다. 특히 의사인 동시에 지도학자 혹은 지역연구가로서의 Siebold가 어떤 삶을 살았으며, 그의 출생부터 학창시절의 자료를 검토함으로써 사회·문화적 배경을 고찰해 보았다. 그 결과, Siebold는 의사 가문에서 성장하였으나 외삼촌의 영향을 받아 다방면에 걸쳐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노력하여 의학자․식물학자․지도학자․지역학자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그가 재작성한 「일본변계약도」에는 울릉도와 독도를 한국령으로표시하였고, 「朝鮮全圖」는 한국에서 제작된 지도가 16세기 경 일본으로 전달되어 1785년 하야시[林]에 의해 모사된 된 것이 일본 국내에 유포된 타미야[田宮]의 「朝鮮八道之圖」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Siebold가 제작한 「일본지도」는 유럽 지도에울릉도와 독도를 혼동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중국이 역사지도를 제작한 것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북송AC.1094년에 석각으로 제작된 우적도에서부터 력대지리지장도 (AC.1099년), 장안지도(AC.1342년), 명조말기 금고여지도(AC.1648년)로 이어졌으며 청대에 이르러 행정구역연혁을 위주로 한역사지도가 제작되었다.이 시기 청대 학자들은 여지고증 결과를 끊임없이 흡수,확장하며 그 깊이를 더해갔으며 지도 편폭이 증가하고 내용을 수정 확장해갔다.특히 청대 중기 건륭 가경연간(AC.1736-1820년)은 중국에서 전대의 역사지리를 연구한 황금시기로더 깊고 자세한 역사지도를 제작하기 위한 기초를 다져놓았다.이렇게 청대에 여지연혁도(AC.1804년), 력대지리지운편금석(AC.1937년), 력대여지연혁험요도(AC.1879년), 수경주도(AC.1905년), 력대여지도(AC.1911년) 등의 역사지도가 제작되어으며 이중 수경주도와 력대여지도는 청대 건가시기의 순 학술성 역사지리고증학과 도광 함풍 이후 경세치용의 여지지학, 이 두 갈래의 학술풍조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위대한 결과물이다.
Vesely explains, the main source of our confusion and nihilism comes most probably from the ambiguous relationship between modem architecture, technology and aesthetics. Also, to overcome such crucial problems, many theorists recently emphasize to take part in cultural civilization and to preserve creative genes of great culture that is based on our interpretation of 'ethical and mythical nucleus of mankind,' rather than in technical modernization that constitutes a sort of subtle destruction of mytho-ethical nucleus of a society. They for architecture also strongly stress on a mythopoetic imagination and an ontological construction of building, which could make a form symbolic and mythical rather than mathematical and aesthetic representation. On this point, 'myth' becomes a vital idea for constructing and construing architectural form and space. And it is also one of the essential concepts to understand both the motive power of cultural continuation of place and the meaning of architecture. Nevertheless, its meaning and the citation of word in architectural essay are still obscure. It might be because the original concept of myth not only has been lain in the matter of philosophical contemplation. Thus, the intention of the research is focused on lightening the meaning of myth in architectural term. Especially, it is, first, concentrated on interpreting philosopher Ernst Cassirer's reflections which were written in order to emphasize the importance of 'mythical consciousness' for the world's cultural civilization. And, the second, it will continue to interpret the myth as a sign within the semiotic concept of Charles Sanders Peirce, and further to emphasis the significance of mythic signs for the continuance of artistic and cultural idea including architecture. The contents of the paper is not that of architectural planning and design methodology, rather architectural philosophy and epistemology. Nevertheless, in regard to architecture, the research will, against today's un-discriminated use of symbolic motifs and instrumental representation of form, suggest a concrete architectural and aesthetic theory of myth and sign, especially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idea of semiology and the function of cultural continuity.
한국은 독도를 양국 간의 외교 교섭의 대상으로도, 제3자에 의한 분쟁해결의 대상으로도 인정하지 않지만 일본은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독도 문제를 국제적인 법정에 강제적으로 제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일본으로서는 국제 사회의 여론을 독도 문제에 관한 가상 법정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최근 일본의 영토 문제와 관련하여 “국제적으로 영향력·발신력이 있는 제3국에서 일본 입장에 대한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하면서 영토 문제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영어로 전달하는 정보 발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일본 정부의 움직임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학자가 아닌 제3국 학자의 독도 관련 연구 동향을 살펴보는 것은 독도에 관한 국제사회의 여론 동향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독도 문제에 관한 법적 연구에 한정하여 보면 제3국 학자의 연구는 시기적으로는 1990 년대 이전에는 보기가 어렵다. 1990년 말에 영어로 된 제3국인의 독도 연구 논문이 등장하여 2000년대에 그 수는 늘어났다. 그러나 2010년 대에 들어 가장 많은 논문이 발표되고 있다. 제3국 학자들의 독도 영유권에 관한 논고들은 거의가 독도에 관하여 한국이 일본보다 우월한 법적 영유근거를 가지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한국이 일본의 독도 문제 제소 주장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하는 것이 많다. 이들 제3국 학자들의 독도 연구에는 한국 학자가 영어로 제공하는 지식과 정보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제3국 학자의 독도 연구 논고들은 일종의 가상의 법정과 같은 역할을 하여 독도에 관한 한국과 일본의 국내 여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독도 문제에 관해서는 제3국 학자와 국민과 같이 객관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자국의 주장에 동의하도록 하는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과 논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