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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5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서서평(徐舒平)의 22년 선교활동과 그의 전도부인들과 의 동역 관계를 통해 선교전략과 활동들을 분석하였다. 호남지역을 중심의 다양한 선교 활동으로 지금까지도 그는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남장로교 선교부 간섭을 최소한으로 받으면서 그는 ‘걸어다 니는 하나의 선교부’처럼 의료선교를 위한 병원간호사업에만 국한되지 않고 간호사양성 및 국제무대 진출, 여학교사업, 순회전도 및 교회개척, 확장주일학교, 사경회, 부인조력회활동, 사회사업 등을 하였다. 이렇 게 그가 단독으로 엄청난 사역의 양을 감당하고 전문적 역량을 사용하며 비전을 상당히 실현해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일제 강점 식민지 아래서 생존의 욕구가 강했던 현지 한국여성기독교인들의 계몽의지와 순수신 앙으로 그의 선교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동역했기 때문이다. 성육신적 선교를 이행했던 그의 물음에 구원의 희망으로 응답한 전도부인들로 인해 한국교회의 부흥, 기독교문화 형성, 여성지위향상, 사회개혁의 기반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6,700원
        2.
        2022.05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우리나라에서 소비자라는 용어가 최초로 사용된 시점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과거 신문기사를 통해 1800년대 후반에 이미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 연구는 소비자 관련 키워드의 트렌드를 분석하고 자 100년간의 신문기사를 수집하여 텍스트마이닝 분석을 수행하였다. 연대별로 소비자 관련 이슈가 무엇 이었고 어떤 사건과 연관성을 갖는지 실증적으로 탐구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분석 대상은 1920년부터 2019년까지 신문기사에 등장한 소비자 관련 기사 31,085건이며 분석 방법으로는 빈도분석과 네트워크분 석을 사용하였다. 분석 결과, 연대별로 최빈 단어 결과에서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는 연대별 시대상 황과 그에 따른 소비자 관련 이슈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으로 연대별 최빈 단어 결과를 바탕으로 소비자 개념의 변화 시기를 구분하였다. 본 연구는 100년이라는 기간 동안의 기사를 대상으로 분석함으로써 소비자 관련 키워드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역사적 사건들과 연관성을 파악하였 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10,100원
        3.
        2022.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Bongik-dong, Kwonnong-dong, Ikseon-dong and Nakwon-dong are areas around Donhwamun-ro in Seoul. These residential areas began to be developed collectively from the 1920s and the construction period was the fastest among hanok residences collectively formed in urban center. At that time, houses were developed with high density. In the 1920s, many medium-sized plots of less than 3,300㎡ were distributed around Donhwamun-ro. Private developers such as Jeong Se-kwon(Konyangsa), Shin Tae-jong, and Yoon Heung-rim, who were active at the time, purchased medium-sized plots. Developers sold out the land directly or after constructing Hanok on the divided plot and then selling them. This method of developing hanok residences by private developers in the 1920s have influenced on hanok residences which began to be developed after the 1930s. Currently, many urban Hanoks still remain in areas around Donhwamun-ro. The initial aspects of the hanok development in the 1920s could be grasped through blocks, plot division, alleys, row house Hanok etc around Donhwamun-ro.
        4,900원
        4.
        202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한반도의 인삼은 중국의 비단과 차, 일본의 은과 함께 동아시아 상품교역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중요한 상품이었고, 지금도 그 상품가치를 높여가고 있다. 인삼이 해외 수출상품으로 확립된 것은 개성상인들의 노력에 힘입은바가 크고,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개성상인 孫鳳祥과 孔聖學은 紅蔘과 白蔘 등 인삼제품을 해외시장에 수출한 주역이었다. 전통학문에 대한 깊은 소양을 갖춘 儒商 손봉상과 공성학은 중국, 대만과 홍콩 등지의 홍삼판매처를 시찰한 자신들의 활동을 『中遊日記』와 『香臺紀覽』에 남겼다. 그러나 개성상인들이 남긴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시장 시찰기라 할 두 책을 텍스트로 한 홍삼판로 시찰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상황이라 이에 대한 연구가 시급하다. 본고는 일제강점기, 개성상인들의 중국 및 세계 인삼시장에 대한 인식과 함께 고려 인삼의 해외시장 개척에 대한 그들의 의지와 노력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6,000원
        6.
        2020.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construction industry of Korea from the 1920s to the 1930s by analyzing activities of construction-contractors trying to overcome the recession of the construction industry and intensified competition in the industry. In this paper, I looked at the activities of Hanazono Sakichi as concrete examples. First of all, with the strategy of the vertical integration, by manufacturing and selling building materials, Hanazono Sakichi expanded his company and the scope of contract business. The second, he attempted to diversify related projects. Through related diversification, he seemed to have earned not only land management profit but also advantages from related construction. These aspects were not only seen by Hanazono’s activities but also by other contractors’. On the other hand, a few contractors have taken over a trust company to secure the funds for land management. Attempts to maximize personal interests through the expansion and diversification of contractors' business can be seen as overcoming the pre-1920s environment, where almost construct works were ordered under the government, and creating opportunities for the private sector to work and make profit by themselves. In the end, it can be mentioned that ‘the contractor’ established ‘the construction industry’ through this process.
        4,300원
        7.
        2020.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중국의 현당대 문학사 안에서 1920년대 초의 신문학론과 작품창작은 대체로 이론 발생 후 이론과 어울리는 작품들이 다수 창작되는 것으로 서술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에 관한 동시 기적 진술 중에 이와는 다른 맥락의 서술이 존재한다. 이는 중국의 신문학-오사문학-현대문 학으로 이어지는 개념의 발생 당시부터 현재까지 인위적이면서도 강제적인 개념화 작업이 이루어짐에 따라 예외적 진술을 삭제한 결과일 수 있다. 동시에 ‘새로운’ 문학으로의 질적인 변화를 철저하게 추구하는 혁명으로서의 이론과는 충돌하는, 신문학론 자체에 내재 된 중도개 량적 특성이 이론을 구체적으로 응용한 높은 수준의 작품을 창작하는 데 있어 장애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본고는 루융헝의 『중국 신문학 개론』에서 보이는 ‘신문학 위기론’을 통해 실제 동시기에도 이에 관한 문제의식이 존재했었음을 서술하였다.
        5,400원
        8.
        2019.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아키발트 모틀리(Archibald J. Motley Jr, 1891-1981)의 흑인 여성 초상화 연작에 나타난 ‘신 흑인’ 도상을 통해 탈식민주의적 성격을 밝히는 연구이다. 모틀리는 동시대 ‘신 흑인’의 모습을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구현하며, 할렘 르네상스시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모틀리의 명성과 달리 국내에서 그에 관해 이루어진 연구는 미비한 실정이다. 따라서 모틀리의 전반적인 작업경향의 시작되는 흑인 여성 초상화 연작을 연구하는 것은 모틀리에 작업 전반에 대한 이해를 제공할 수 있다. 모틀리의 흑인 여성 초상화 연작은 획일적인 흑인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다양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도상을 연구하는 작업임을 발견할 수 있다. 모틀리는 미국 사회의 인종개념에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진실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이미지를 알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기 때문에 흑인 인종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체적, 문화적, 경제적 조건을 가진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모습을 포착하는데 주목했다. 또한 다양한 피부색과 개성 을 가진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모습은 정형화된 흑인의 모습을 전복시킬 뿐만 아니라 인 종차별에 관한 관념 및 사고들에 관해 재해석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모틀리의 흑인 여성 초상화 연작은 인종구분이 사회적 환경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다는 담론을 시사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모틀리의 흑인 여성 초상화 연작은 인종구분에 대항 하는 탈식민주의적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6,100원
        9.
        2019.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이탈리아 태생의 미국화가 조셉 스텔라의 1910-1920년대 작품에 나타난 종교성에 대한 연구이다. 스텔라는 뉴욕의 도시풍경을 묘사한 대표작 <빛의 전쟁, 코니 아일랜드, 마디 그라 Battle of Lights, Coney Island, Mardi Gras>(1913-1914)와 <해석 된 뉴욕 도시의 음성 The Voice of the City of New York Interpreted>(1920-1922) 등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미래주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스텔라는 산업도시 이외에도 여성 누드, 마돈나, 식물 등 다양한 주제와 양식으로 풍성한 다작을 남겼다. 그러나 대부분의 스텔라 작품 연구는 미래주의 시각에서 아주 짤막하게 소개되었고, 간혹 정밀주의에서 스텔라의 이름이 언급되지만 그 관계는 매우 미미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스텔라의 작품 속에 내포된 의미에 접근해야할 것인가. 스텔라는 1896년에 도미(渡美)하면서 대도시 뉴욕의 모습에 압도되었다. 그는 산업적 풍광에서 심미적이고 위대한 아름다움을 느꼈으나, 이내 건물에 가려진 햇빛과 주변의 노동자와 이민자들의 현실은 망향(望鄕)이 깊어지고 내면적 감정을 작품에 투영하게 했다. 스텔라가 간직한 고향 풍광은 교회종탑이 있었고 이는 그리움과 종교적 근원처럼 그의 무의식을 지배했다. 따라서 스텔라는 대도시 뉴욕의 수직적 공간에서 발생한 양가 적 감정을 천상과 소통하려고 하는데 유연한 접근이 가능했다. 스텔라는 브루클린 다리를 본 순간, 다리의 본질적 기능인 통로를 떠올림과 동시에 과거의 대성당이 그 시대의 상징물이었던 것처럼 현대 기계시대의 상징물로 보았다. 그는 브루클린 다리를 배경 속의 부수적인 역할로 등장시킨 당대 예술가들과 달리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통로로 사용하여 감상자를 신성의 면전에 세울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종교미술에 내포된 신성함과 경건함 등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러한 스텔라의 노력은 전형적인 현대 도시, 뉴욕 자체를 묘사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스텔라는 거대한 크기의 <해석된 뉴욕 도시의 음성>에서 종교 제단화 구조의 서사적 구성으로 맨해튼을 상징하는 장소들을 가시화하고 유랑하는 듯이 정신적 체험을 유도할 수 있었다. 1910-1920년대 스텔라의 대표작 속에서 종교성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가톨릭 문화권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스텔라에게 내재되어 있는 가톨릭 유산이 나타난 것이자 점진적으로 정신적 통합을 고취시킨 것이다. 스텔라는 기계문명을 찬미하는 세속적 주제와 종교성을 결합하여 캔버스를 정신적 감동으로 승화시켰고, 이것은 모더니즘 양식에 기초하면서도 정신적 가치를 시각적으로 구현하여 표현하는데 적합하게 작용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스텔라의 1910-1920년대 뉴욕 이미지를 통해 종교성이 내포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 연구는 스텔라의 작품에 대한 기존 연구가 미흡한 것을 고려할 때 대표 작품을 종교성이라는 주제에서 재조명하고 스텔라 연구의 영역을 확장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6,600원
        10.
        2019.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상하이는 국제도시로 세계의 다양한 지식과 정보가 모이는 곳이었기 때문에 중국 그 어느 도시보다 지식인들이 집결하는 도시로 성장하였다. 상하이의 진보적 지식인은 국제정세 속에 서 중국이 처한 상황을 깨닫게 되었고,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자연스럽게 상무정 신을 고취하였다. 많은 지식인은 중국 역사와 민간의 전통 속에서 협객을 발굴하였으며 그들 의 상무정신을 찬양하였다. 한편, 상하이는 노동 이주민의 도시였다. 세계대전 후 서구의 자 본이 상하이에 몰리게 되면서 국제도시 상하이는 중국 최대의 상공업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이에 상하이에는 다양한 국가, 인종, 지역민이 모여들었다. 이주민들은 그들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업종별, 출신 지역별로 다양한 조직을 결성하였고, 이들 조직은 조직의 결속을 위해 민 간의 협의정신을 적극 수용하였다. 결론적으로 근대시기 상하이에는 위로는 상류층 지식인의 엘리트문화에서 아래로는 하층 노동자들의 하위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협의정신을 찬양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는 근대시기 상하이가 지식과 지식인, 자본과 노동자를 끌어들이는 동북아해역의 인문네트워크 중심도시로 성장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1920-30년대 상하이에 협의서사가 흥성하게 된 주요배경이 되었다.
        5,200원
        13.
        2019.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慧菴性觀(1920~2001)선사는 조계종의 제 10대 宗正이며 大禪師이다. 먼저 그의 경전인용의 특징을 살피면, 圭峰宗密(780~841)이나 永 明延壽(904~975)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종밀이나 연수는 모두 禪 敎兼修를 주장한 인물들로서 조선시대 이래 많은 승려들이 인용해왔다. 하지만 혜암선사는 종밀과 연수에 대해서 거의 인용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혜암이 頓悟頓修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또 혜암은 唐代의 선어록을 주로 인용하고 宋代선사들의 어록은 별로 인용하고 있지 않다. 특히 大慧宗杲(1089~1163)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은 다른 승려 들과 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혜암이 唐代禪을 모범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혜암 선사상의 특징으로는 먼저 淨土往生을 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다. 조선시대의 승려들은 대부분 西方淨土를 인정하였고, 죽고나서 정 토에 왕생할 것을 희구하였다. 하지만 혜암은 오직 唯心淨土만을 주장 할 뿐이며, 靈駕法門에서도 정토왕생을 설한 적은 없었다. 이러한 점은 혜암이 선승의 본분에 충실했다는 증거이다. 또 혜암은 寤寐一如를 얻 은 뒤에야 비로소 究竟覺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오매일여의 개념은 楞嚴經과 깊은 관계에 있다. 楞嚴經은 고려시대 이후 많은 승려들이 영향을 받았는데 선승들이 능엄경을 통해서 무엇을 얻으려 했는지, 특히 해인사에서는 능엄경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연구할 필요가 있다.
        7,800원
        14.
        2019.04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The aphid genus Stomaphis Walker, 1870 (Hemiptera: Aphididae: Lachninae) is Palaearctic origin group with 30 valid species. It is associated with variable woody host plants, having very long rostrum, which enables them to feed crevices in thick bark of trees. In this study, Stomaphis (stomaphis) pini pini is newly recorded in the Korean Peninsula on Pinus densiflora (Pinaceae). We described morphological features of alate viviparous females, apterous males and oviparous females, respectively. Furthermore, little known forms, sexual morphs of giant oviparous females and dwarfish apterous males are observed.
        15.
        2018.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determine changes in neighborhoods due to the development of residential districts around Jangchungdan(獎忠壇) altar in Seoul from the 1920s to the 1930s. In the Joseon Dynasty, this area was a protected and sacred area to honor the spirit. The reputation of the area, however, turned into the place to play and take a rest and neighborhoods around Jangchungdan altar were developed as high-grade residential districts with the impression of suburb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Residential districts were formed with the destruction of the Hanyang City Wall and the privatization of nation-owned forest, which were physical and symbolic boundaries of Seoul in the Joseon Dynasty.
        4,600원
        18.
        2015.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compared and analyzed the consumption and amount of red pepper used in Baechu Kimchi (cabbage Kimchi) especially the amounts used in Kimchi recipes with respect to the passage of time from the 1930s to the 2010s. In this analysis, 78 recipes for cabbage Kimchi were taken from books, daily newspapers and magazines from 1930 to 2014 and collected for comparison. The result of the study showed that the consumption and inclusion of dried red pepper powder in cabbage Kimchi increased. The average consumption of red pepper in the 1930s was 5.75 g, and the number went up to 8.83 g in the 1940s, to 13.8 g in the 1950s, and to 20.25 g in the 1960s. The amount dramatically increased from 1970 to 1980 (53.37 g) and kept rising until 2010 (71.26 g). The average consumption of red pepper in cabbage Kimchi in the 2010s is about 12 times that of the 1930s.
        4,200원
        19.
        2014.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A new type of women started to appear in Germany during 1920-1930s and unlike his previous work, Klee began to create works, which related to this new type of modern woman. This paper is a study of Klee’s image of New women in the 1920-1930s, and reflects on Klee’s professional achievements and his perception of these times, based on their social background, which was reflected on the shapes of the ‘New women’ that he portrayed. The labor power shortage that resulted in the aftermath of the First World War provided women with employment opportunities and they were therefore able to actively contribute to the economy. Klee recognized the fact that the female gender role that had been limited to being a wife and mother at home, changed drastically as women participated more in politics and social activities. This was illustrated by the diverse images and activities of contemporary women in the performing arts, and portrayed in magazines, newspapers, and film. The liberation of bodies was expressed through dance or gymnastics and the social atmosphere of the time promoted the performances of modern female dancers. Consequently, there was a significant increase in the number of new women who enjoyed dancing and this led to the production of a large number of dance studios and professional dancers. Klee’s images of dancing women shown in his works at the beginning of the 1920s were formed using mysterious and erotic shapes and vibrant lines. However, towards the end of the decade, expressionistic and dark black lines were more prevalent in his dance related works. Clearly repeating straight lines and curves produced geometric and pictorial structures, which expressed perfectly the dynamic motions of dancing women. The 1920s in particular can be said to have been an innovative period of expressionistic dances, and dancers expressed the inner world of human emotions through free movements. The leaping dancers produced by Klee could also be connected to the gymnastics performed at the Bauhaus. At that time, gymnastics was seen as a link between pop culture and the practice of high class art. Overwhelmingly, many participants in gymnastics were women who embraced pop culture and saw themselves as being popular modern women. During the late 1920s, Klee focused on jumping and shifting shapes while concentrating on the creation of geometric abstraction, which meant that the geometrically simplified shapes lost their concreteness and comprised of crosses of planes. Therefore, the gymnastic rhythms that appeared in Klee’s works emphasized movements based on the geometric body shapes, which were connected to an observance of the participants in physical activities.
        5,800원
        20.
        2014.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Naejeon area at Chandeokgung Palace means the areas of Huijeongdang and Daejojeon area. Huijeongdang or Hall of Brilliant Rule is made for the king, and Daejojeon or Hall of Great Creation is made for the queen. These areas were located nearly and repeatedly burned down and rebuilt several times together, but their forms were largely unchanged. However in 1920, they rebuilt in a very different way.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estimate construction plans, progress and completion of Naejeon area’s rebuilding. They were reconstructed into eclectic structures as the exteriors were built using basic materials from Gyeongbokgung Palace. So they have traditional-looking appearances, but the interiors consisted of modern equipments and were built by applying foreign style construction techniques. The main floored room of Daejojeon and the area of Huijeongdang were built in standing style by installing radiators and French furnitures. Also, the porch, corridor, storage space and veranda were constructed under the influence of Japanese construction. After the reconstruction, there were changes in the usage of some spaces. Huijeongdang functioned only for Alhyeonso or audience chamber rather than Pyeonjeon or state hall. New organizations created by the Japanese such as Chansi or secretaries office and the Chief secretary’s office were included in Naejeon area.
        4,3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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