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경상우도에 연고를 둔 조선 후기 노론⋅호론계의 재야 유학자인 함인재 정국채가 선보인 사서경학의 세계를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정국채가 남긴 문집인 『함인재유고(단)』에 수록된 『논어』⋅『맹자』⋅『대학』⋅『중용』 방면의 기록들을 대상으로 한 검토 작업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정국 채의 경우 문자 학습과 병행된 가학적 연원에서 출발한 끝에, 차츰 논맹과 용학으로 이뤄진 사서경학의 세계로 진입하였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런데 정국채가 선보인 사서경학은 정치한 담론들을 결집시킨 경전 해석학의 세계와는 대조를 연출하고 있다. 왜냐하면 정국채가 남긴 사서경학의 경우, 논의 전개가 극히 간략하면서도 일회성 수준에 그친 사례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주자주에 대한 비판적 언술도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본격 적인 경전 해석학과는 분명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함인재유고(단)』에는 『시경』⋅『서경』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무할뿐더러, 여타의 경전들에 대해서도 극히 간략한 기록만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반해 사서경학 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분량의 언술을 남겼는데, 이는 정국채가 추구했 던 학문세계에서 사서가 차지하는 비중을 간접적으로 확인시켜준다. 특히 정국채는 『중용』에 큰 의미를 부여한 특징이 발견되며, 『논어』⋅『맹자』⋅『대학』의 경우는 그가 착지했던 사상적 입각점이 원시유학이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한편 정국채의 사서경학이 다소 단조로웠던 이면에는, 주자의 경전 해석학에 반기를 들기 어려웠던 노론계 학풍과도 무관하지 않았 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과적으로 노론 호론계 유자였던 정국채가 선보인 사서 경학의 세계는 상대적으로 연구 성과가 미미한 향반 계층의 지식인이 이룩한 경학적 수준의 한 실태를 확인시켜주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연구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왜냐하면 기존 한국유학사상사에 대한 일반적인 연구 추이란, 이미 그 존재가 드러나 잘 알려진 중량감 있는 인물들에 국한된 경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경상우도에 연고를 둔 함인재 정국채는 19세기 초반 무렵을 활동기로 삼았던 노론 계열의 재야 유학자다. 과거업을 단념한 채 오롯이 학문 연마에 매진했던 정국채는 정주학과 예학⋅농학 세 범주에 걸쳐서 괄목할만한 학적 성취를 이루었으나, 주요 저서들이 모두 일실된 상태다. 게다가 문집인 『함인재유고』도 지금까지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던 탓에, 정국채를 대상으로 한 연구 성과도 극히 일천한 실정이다. 이에 논자는 이미 진척된 기존의 몇몇 연구를 토대로 하여 정국채가 평생토록 주력했던 정좌 수행에 관한 논의를 개진하게 되었다.
그런데 저서가 일실된 탓에 추적이 불가능한 예학⋅농학의 경우와는 달리, 문집인 함인재유고에는 정국채가 행한 정좌 수행을 서술한 내용들이 비교적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는 상태다. 특히 정국채는 그가 사사(師事)했던 스승인 성담 송환기와 경호 이의조에게 정좌법과 관련하여 교차적인 질의를 던진 사실도 눈길을 끌게 한다. 왜냐하면 이 같은 정황은 19세기 무렵까지 전승되어 온 노론계의 학문 방식을 확인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국채의 경우 정좌의 이론적 전제에 해당하는 주자학적 함양설, 특히 일념이 발동하지 않은 미발시의 심체 상에서의 “정좌시(靜坐時)의 기상(氣像)”을 체인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전개하였다. 정국채는 고인⋅선유들도 이처럼 지난한 공부론적 과정을 경유했던 것으로 확신했고, 그에 따라 정좌야말로 위기지학의 세계로 진입하는 첩경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정좌가 항상 순탄하게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나, 그 관심과 열정의 정도란 주자학적 공부론의 또 다른 한 축인 성찰설에 대한 그것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정국채가 타계하기 직전에 남긴 서신에는 “늘 깨어 있는” 경지가 감지되지 않는 대신에, 계속된 병마와 심히 고단했던 일신상의 처지만이 풍겨 난다. 이는 정국채가 주자학적 거경⋅궁리론 중에서, 후자인 독서에 의한 궁 리가 결실한 학문세계와는 판이한 양상인 것이다. 또한 정국채가 취한 정좌가 과연 유학적 종지에 적법한 방편이었던가? 하는 문제점과 함께, 또한 군자유의 도정에서 분명한 실효성을 담지한 교육적 수단이었는지 하는 의문점도 제기된다. 그런 점에서 서계 박세당과 다산 정약용이 순차적으로 제기한 함양설과 선불교 비판은 제기된 두 사안들에 대해 유의미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서기 500년 왕위에 오른 지증왕은 왕의 칭호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꾸고, 지방 행정구역을 주 · 군 체제로 정비하며, 국호를 ‘덕업일신(德業日新), 망라사방(網羅四方)’의 ‘신라(新羅)’로 정했다. 망라사방이란 신라의 국력을 사방으로 확대해 나간다는 의미이다. 신라는 망라사방의 국가비전을 가지고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특히 동해안으로 진출하면서 우산국과 충돌하였으나, 512년 우산국을 복속함으로서 동해의 제해 권을 확립하게 된다. 그러한 사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왜 관계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이사부(異斯夫)의 우산국 복속 기사를 가지고, ‘한국의 독도영유 권에 대한 역사적 권원(歷史的 權原)’을 주장한다. 역사적 권원이란 역사적으로 권리의 원천이 된다는 의미이다. 즉 이사부가 우산국을 신라의 영토에 편입했다는 것 (fact)이 한국영토라는 권리주장의 시작이며 증거라는 것이다. 우산국 복속에 성공한 이사부는 그 후 병부령이 되어 한강유역과 대가야 정벌을 주도했고, 국사를 편찬하는 등의 과업을 수행하며, 신라가 사방으로 발전하여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지는데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결론적으로 이사부는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는 인물이며, 남해의 이순신, 서해의 장보고와 함께 동해의 이사부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한국의 3대 해양영웅이다.
경상우도에 연고를 둔 함인재 정국채는 19세기 전반을 전후로 한 시기를 주요 활동기로 삼았던 노론 계열의 재야 유학자다. 남명학파의 본산 지역에서 자신의 학적⋅이념적 소속을 노론계로 정위시킨 사실도 독특하지만, 정국채의 경우 정주학과 농학 및 예학 등과 같이 제 범주를 아우르는 학문세계를 개척한 정황 또한 매우 이채롭게 여겨진다. 그러나 정국채가 남긴 문집인 『함인 재유고』가 학계의 공적 담론의 장에 접속되지 않은 채 사실상 미공개의 상태를 유지해 왔던 까닭에, 그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전무한 실정이다. 이에 금번 논의에서는 정국채가 향유한 생애의 연대기적 추이를 추적해서 개괄해 보임과 동시에, 특히 그의 학문세계 형성에 관여하였던 두 스승인 성담 송환기와 경호 이의조 간에 교차된 학문적 영향력의 문제를 논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간 축적된 가학의 토대 하에, 42세에 대면한 송환기의 문하에서 정국채는 정주학 전반에 걸쳐서 질적으로 도약하는 심화 학습의 계기를 맞이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송환기의 5대조인 송시열이 수립한 우암학의 계승자로 자처하는 국면으로 이행했던 사실도 주목된다. 한편 이의조와의 대면을 통해서 정국채는 그의 학자적 정체성을 예학자로 정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물론 정국채는 지리한 『가례증해』의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사례촬요』를 저술하기도 했으나, 이의조에게 전한 서신들은 예학이 형성된 연원의 일단을 시사해 주고 있다. 한편 송환기가 매개가 되어 우암학의 계승자로 나선 정국채는 『송자대전』과 송시열의 「연보」를 숙독하는 한편, 주변의 동문들에게 우암의 저술을 필독 할 것을 적극 권유하는 열의를 발휘하기도 했다. 송시열 이상으로 『주자대전』을 예찬하곤 했던 정국채는 성주에 건립된 노강서원의 사액 문제에도 큰 관심을 표했는데, 이 또한 우암학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과 노론계의 도통 계보를 중시한 결과였다. 송환기 사후에 스승을 노강서원에 추배하기 위해 노력하고, 문집 간행을 위해 주도적인 희생을 기울였던 정황 또한 우암학을 적극 계승하려는 의지와 필적할 만한 성질의 것이었다.
To aid in the development of a food nutrient database that provides the dietary fiber composition of eat-out Korean foods, we determined the total dietary fiber (TDF) content in the eat-out Korean foods Muchim, Bokkeum, and Guk (Tang) using a dietary fiber autoanalysis instrument. A total of 59 samples were collected from Gangwon-do, Gyeonggi-do, Gyeongsangdo, Seoul, Jeonla-do, and Chungcheong-do. First, among 14 samples of Muchim, the TDF content of Kkaennip namul, Goguma-julgi-namul, and Dallae-namul (4.33~6.24, 3.16~5.07 and 3.70~4.99 g/100 g, respectively) was higher than the other types of Muchim. There was no significant difference in TDF content of Muchim (p>0.05) among locations. Among 13 samples of Bokkeum, the TDF content of Pyogo-beoseot-Bokkeum (4.77~6.66 g/100 g) and Miyeok-julgi-Bokkeum (4.16~7.47 g/100 g) was higher than the other types of Bokkeum. The TDF content of Pyogo-beoseot-Bokkeum in Gyeongsang-do was the lowest and the TDF content of Miyeok-julgi-Bokkeum in Gangwon-do was the highest (p<0.05). The TDF content of spinach soybean paste soup (1.34~2.21 g/100 g), Dakgogi-yukgaejang (1.61~2.45 g/100 g), duck stew (1.25~2.80 g/100 g) and spicy yellow croacker stew (1.70~2.27 g/100 g) were higher than the other types of Guk (Tang). There was no significant difference in TDF content of Guk (Tang) among locations (p>0.05).
흔히 512년 이후에 울릉도와 독도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고 한다. ‘우산국이 귀복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우산국은 신라의 영토에 편입된 것은 아니다. 만약 신라의 땅이 되었다면 『삼국사기』 지리지에 신라의 땅으로 울릉도나 독도, 아니면 우산국의 기록이 나와야만 한다. 도리어 울릉도가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땅이 분명한 이상 우산국 성립부터 한국사의 영역 속에 포함시켜 설명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을 갖고 있다. 탐라국․우산국․가야 등의 역 사를 포괄하는 고대사를 그려내야 할 시점이다. 우산국이 강성해지자 신라에 조공을 바치는 대신 우산국이 아슬라주와 실직주 등이 침범함으로써 신라지역이 큰 피해를 입음으로써 512년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라의 지증왕으로서는 동해안 제해권을 확보하지 않는 한 삼척, 강릉 등의 지역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며, 이로 인해 결국 우산국의 정벌에 나서게 되었을 것이다. 지증왕대의 우산국 정벌은 이후 법흥왕과 진흥왕대에 이르러 함경도지역까지 진출하는 교두보의 확보라는 면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를 통해 동해안 지역의 경제력 확보, 제해권의 확보를 통해 고구려에 대한 서해안과 동해안의 양동작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신라에 귀복하여 신라와 연합 동맹을 구축하면서 공물을 바치는 복속국가로 존재하면서 보다 높은 신라의 문화를 받아들인 우산국체제는 후삼국을 거쳐서 고려 시대까지 이어졌다. 11세기 초반의 동여진 해적들이 동해안을 통해 고려를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동여진 해적의 내침을 막는 것이 심각한 현안으로 인식하고, 이를 막기 위한 군사 정책을 수립하며 동해안 방면 축성과 수군, 함대 배치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현종 3년 이후 고려 침공에 어려움을 겪은 동여진 해적들은 이후 공격 목표를 현종 9년~13년까지 우산국, 일본으로 돌려 많은 피해를 입힌다. 동여진의 침략으로 인해 우산국은 더 이상 자립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그 주민의 대다수가 고려에 망명하여 고려 군현에 편적될 정도였고, 농기구의 지원의 명목이지만 고려의 관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과정에서‘우산국’이란 명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삼척군은 본래 실직국(悉直國)이었는데, 신라 파사왕(婆娑王)23년(102)에 신라에 항복하였다. 그 후 지증왕(智證王) 6년(505)에 실직 군주(軍主)를 설치하고 김이사 부(金異斯夫)를 군주로 삼았다. 경덕왕(景德王)16년(757)에 삼척군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成宗)이 척주 단련사(陟州團練使)로 고쳤고, 현종(顯宗)이 현령으로 강등시켰으며, 우왕3년(177)에는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다. 조선 태조 2년(1398)에는 목조(穆祖)의 외가 고을이었으므로 삼척부로 승격하였고, 태종 13년(1413)에 삼척 도호부로 고쳤다. 독도가 우리나라의 영토가 된 것은 신라 지증왕 13년(512)에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을 병합한 1500년 전부터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지증왕 13 년(512) 여름 6월에 우산국(于山國))이 귀순 복종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했다. 우산국은 명주(溟州)(현재 강릉)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라고도 한다. 그 섬의 크기는 1백 리인데, 땅이 험준하여 그곳 사람들이 이를 믿고 신라에 복종하지 않았다. 지증왕은 이찬 이사부를 하슬라주의 군주로 삼아 우산국 사람들을 꾀로써 굴복시키도록 하였다. 이사부는 왕명을 받고 나무 사자를 많이 만들어서 배에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러 거짓으로,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놓아서 너희들을 밟아 죽이겠다.’고 하니 우산국 사람들이 무서워서 곧 항복하였다. 독도는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많은 지도를 통하여 살펴 본 것처럼 512년에 신라의 영토로 편입한 이래 우산도(于山島)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온 한국의 영토였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양의 포경선들이 출몰하여 독도를 마치 무주지인 것처럼 오인하고 리앙쿠르 암이나 호넷트 섬 등으로 명명하여 혼란을 가져왔다. 일본은 오랫동안 울릉도를 죽도, 독도를 송도라고 부르며 한국의 영토로 인정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울릉도를 송도라고 부르고 독도는 리앙코島라고 불렀다. 1905년에는 독도를 불법적으로 그들의 영토로 편입하고는 독도를 죽도(竹島)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많은 지도들이 증명하는 것처럼 독도는 엄연한 한국 땅이다. 일본에서 간행된 공식지도에도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인정하였으며, 19세기 들어와 제작된 80여종의 일본지도에서도 독도는 한국 땅으로 인정하였다. 일본이 제국주의 정책을 쓰면서부터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도 억지를 부르고 있다. 그 외에도 서양에서 제작된 많은 지도에서도 독도는 한국 땅으로 인정하고 있다. 6세기부터 우산도라고 불러 온 독도는 그 명칭이 어떠하던 간에 변함없는 우리의 영토이다.
국가의 영토는 ‘고유영토’(inherent territory)와 ‘취득영토’(acquired territory)로 구분된다. 전자는 국가가 국가로써 성립할 당시에 그 국가의 성립의 기초인 영토를 말하며, 후자는 국가가 국가로써 성립한 이후에 선점 할량-시효 정복 등에 의해 취득한 영토를 말한다. 국제판례는 본원적 권원(original title), 고전적 권원(ancient title), 봉건적 권원 (fend이 title) 등에 기초한 영토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고유영토’라는 용어는 사용하고 있지 아니한다. 한국정부와 일본정부도 각기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고유영토’라는 표현은 외교 문서상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독도는 한국의 고유영토인가? 아니면 독도는 한국의 취득영토인가? 한국의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독도는 신라 지증왕 13년(512년)에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복하여 취득한 고유영토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명백히 자기모순적 표현이다. 이 자기모순적 표현은 한국이사부학회가 정리 해결하여야 할 과제 이다. 한국이사부학회는 이 첫째의 과제 이외에 이사부의 우산국 정복이 합법적이냐의 둘째 과제, 우산국 정복에 의한 역사적 권원은 언제 현대국제법상 권원으로 대체되었느냐의 셋째 과제, 그리고 역사적 권원이 대체된 이후 역사적 권원은 무의미한 것으로 되었느냐의 넷째 과제를 해결하여야 할 역사적 의무를 지니고 있다. 이 과제를 한국이사부학회가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정부 당국의 적극적 지원이 요청된다.
This study examined the ingredients and cooking methods of side dishes in "Chosunmusangsinsikyorijebub" during the year of 1924, approximately. In the recipe for Tang (Guk), there was much use of various parts of beef, fish, shellfish, vegetables, and mushrooms, and soybean paste, hot pepper paste, and soy sauce were used as seasonings. For Chootang and Byulchootang, cinnamon powder was added at the end of cooking. In foods such as Tang (Guk), Gigimi, Chigye, Chim, and steamed dishes, which were made of beef, pork, chicken, various fish, Chinese cabbage, and over ripened cucumbers, and thickened by adding buckwheat powder or wheat powder, the taste of the food was changed by controlling the gravy content. In the recipe for Gorim-Cho, ingredients such as beef, pork, chicken, and various fish were used, which were cooked in boiling water and soy sauce. Boiling or steaming were employed as the cooking methods for Baeksuk, where beef rib Baeksuk was seasoned with salt and fermented shrimp and then boiled. For porgy and herring Baeksuk, the internal organs of the fish were first removed, and then they were steamed with pine needles. Hoei incorporated the flesh of various meats, various beef organs, pork skin, and fish as ingredients, and different dipping sauces and pine nut powder were also used.
芳洲 文國鉉은 둔암-성재-순암-성호-퇴계로 이어지는 학통에서 발견되는 보수적이고 반외세적인 영향으로 일찍부터 서구세력의 동점을 경계했다. 외세에 의한 침탈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가 제시한 것은 자기 수양과 함께 유학의 부흥과 후진의 양성이었다.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조선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과 국권의 상실의 역사적 상황은 그로 하여금 그의 이념의 적극 적인 실천 보다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와 은둔을 선택하게 하였다. 은둔자로 자처하던 방주는 개방적이기 보다는 보수로 삶의 방향을 결정하여 유가의 전통적인 이념을 묵수하면서 혼란한 시대에서도 本性의 유지와 심성의 함양을 통한 인간 도리의 실천 그리고 유가의 전통적인 학문 공부를 통해 미래 사회에서의 재기를 꿈꾸었다. 이 시기의 방주의 학문경향이나 문예관은 조선 500여년을 면면히 이어온 유 가적 학문・문예관을 충실히 계승하기는 하였다. 그렇지만 근대로 들어서는 시 대 상황을 고려하여 평가할 때는 역사의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는 또는 동참하 지 않으려는 보수적인 유학자로서의 문예관을 고수한 인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