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중국 내몽고 화림격이 벽화고분의 벽화 주제와 구성 방식에 관한 것이다. 화림격이 벽화고분은 1971년에 내몽고 화림격이현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동한대 벽화고분 중 하나로 풍부한 벽화와 방제가 발견된다. 화림격이 벽화고분의 벽화 주제로는 크게 현실 세계와 천상 세계로 나눌 수 있다. 현실 세계를 표현한 주제로는 묘주도, 거마행렬도, 역사고사인물도, 건축도, 악무백희도, 속리도, 푸주 및 농경 등이 있고 천상 세계를 표현한 주제로는 상서도, 사신도, 운문 등이 있다. 묘주의 생활과 관련한 벽화는 전실과 중실, 후실에 모두 주요하게 등장한다. 본 연구는 벽화의 내용뿐만 아니라 묘장 구조에 따른 벽화 위치를 살펴보아 벽화의 전체적인 흐름을 알아보고자 한다. 전실에는 묘주의 정치적 지위를 나타내며, 중실에는 묘주가 한가롭게 지내는 모습과 역사고사 인물도, 거마행렬도 등이 그려져 있다. 후실에는 묘 주의 사적인 생활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나머지 세 개의 측실에는 묘주를 위해 생산 활동하고 있는 시자들의 모습이 주로 묘사되어 있고, 목조의 기둥과 두공, 운문이 그려져 있다. 이처럼 화림격이 벽화고분에는 묘주의 일평생이 담겨 있으며, 정치적 신분과 경제적 부 등을 벽화를 통해 과시하고 있다. 고분 구조에 따라 벽화의 배치를 살펴보면, 전실의 벽화는 중축선을 기준으로 좌우대칭적이다. 중실은 좌에서 우로 향하는 대각선을 기준으로 서벽과 북벽에는 역사고사인물도가 주요하게 그려져 있고, 거마행렬도는 남벽과 동벽에 그려져 있다. 후실의 벽화는 여러 주제가 등장하는 전실과 중실과 다르게 묘실 전체에 묘주의 사적 생활 모습이라는 공통된 주제의 벽화를 보여준다.
본 논문은 먼저 한대 일월도상의 종류를 살피고, 그 가운데 가장 신격화된 도상이라고 할 수 있는 복희․여와형 일월상을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한대 일월상의 유형은 성좌형, 우인형, 복희․여와형이 있으며 이 가운데 성좌형과 복희․여와형 일월상은 하남, 산동․강소성, 섬서성, 사천성 등지에 고루 분포되어 있다. 우인 형은 사천지역에서만 등장하여 지역적 특색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일월신으로서의 복희 여와 도상은 하남성 낙양일대의 서한~동한 전기로 추정되는 채색벽 화무덤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선계의 신인 복희․여와가 일월신으로 출현하게 된 배경에는 서한시대에 유행하였던 황로사상과 음양사상이 자리하고 있다.
동한시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복희․여와형 일월상은 지역별로 상이한 특징을 보여준다. 하남성은 해를 가슴에 품고 있는 복희․여와형 일월 도상이 등장하는데 이는 양조형 일월상과의 연관성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형태는 산동성에서도 등장하고 있어 지리적으로 가까운 두 지역 사이의 밀접했던 문화 교류를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가장 사례가 적은 섬서성 지역의 복희․여와형 일월상은 기본적으로 하남성과 산동성을 중심으로 하는 중원지역의 영향을 받은 특징을 보여준다.
지방색이 강하며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는 복희․여와형 일월상은 사천지역에서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이 지역은 일월신인 복희․여와가 다양한 지물을 들고 등장하는데 이는 하남지 역에서 유행하였던 선인형 복희․여와 도상이 사천성의 복희․여와도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는 사례이다. 또한 복잡하고 다양한 교미형태는 산동성과의 영향관계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이들 도상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복희․여와의 다양한 역할과 의미를 살펴 보았다. 복희․여와는 창조신, 시조신, 일월신, 신선 등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황로사상과 음양설이 발전하는 서한시대에는 음양을 대표하는 신으로 해와 달을 상징하고 천상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선인이었으나, 동한 중기 이후 서왕모 중심의 선계가 개편되면서 서왕모보다 신분이 낮은 선계의 보조신으로 그 지위가 하락했다. 이에 따라 복희, 여와 도상에도 변화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한대 고분미술의 다양성을 이루는 핵심적 요소로 작용했다.
고구려 벽화고분은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속적인 발굴 조사와 학술 연구를 통해 현재까지 역사, 고고, 복식, 문화사, 미술사 등의 방면에서 적지 않은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가 처음 발견된 1907년부터 1980년대까지 벽화고분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일제강점기 발굴을 처음 시작한 일본과 벽화고분이 위치한 북한과 중국에 의해 주도됐다. 한국 학계는 정치 이념과 지리적 문제로 인해 원천자료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했고, 척박 한 연구 환경으로 인해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가 활성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일본을 통해 북한과 중국의 벽화관련 출판물들이 다량 유입되면서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들이 서서히 갖춰지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대 초반 중국이 문호를 개방하고 2000 년대 초에 남북 간의 화해무드로 인해 학술교류가 활성화되면서 벽화에 대한 실견과 원천자료에 대한 접근이 한 층 수월해졌으며 미술사 연구를 위한 토대도 전보다 탄탄해져 갔다.
1990년대 이전까지 미술사 분야의 연구는 벽화고분이 갖는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학계의 주목을 받기 어려웠으나, 이후 전문 연구자들이 배출되고 미술사의 양식론에 입각한 거시적, 미시적 관점의 다양한 논문들이 생산되었다. 게다가 회화이외에 공예나 불교조각를 전공하는 미술사학자들도 고구려 벽화 연구에 동참하여 전공 연구자가 아니면 다룰 수 없는 세부적인 주제들을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는데 기여했다.
100여년에 걸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는 그동안 다양한 주제에서 적지 않은 성과물들을 생산해냈지만 전공인력의 부족과 벽화 원천자료의 불완전한 공개 같은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 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무엇보다도 아직까지 많은 고분의 벽화 자료가 제대로 정리, 발표되지 않아 벽화연구의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남북교류를 통한 원천자료의 정리와 출판이 시급하며 벽화를 전공하는 미술사 방면 연구자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배출되어 다양한 방면에 걸친 활발한 연구가 필요하다. 또한 양식론에 입각한 연구결과물들이 보다 많이 쌓여 고구려 벽화고분의 편년을 해결하는 데 유용한 기준안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근대 민법의 대원칙인 소유권절대의 원칙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문화가 복잡다단해지면서 강고한 소유권의 개념이 점점 그 자리를 다양한 권리에게 내어주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저작권법상의 동일성유 지권이 될 것이다. 소유권과 동일성유지권은 저작물의 소유권자와 저작권자가 분리되는 상황에서 상호 충돌하는 긴장관계에 놓이게 되고, 이에 관한 규범적 판단이 요구된다. 이와 관련하여 대상 판결(하급심에서 관련 쟁점 판단)은 비록 모든 문제점을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동일성유지권과 소유권의 경계를 설정하여 양 권리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동일성유지권은 저작물 내용의 왜곡을 방지할 수 있는 저작권자의 권리이므로 그 왜곡이 폐기에 이르렀다면 이는 왜곡될 저작물의 내용 자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어 동일성유지권 침해를 구성할 수 없 고, 다만 저작물의 존속에 관한 문제가 되어 소유권자의 정당한 권리행사에 해당할 뿐이라는 입장이다. 이에 학계의 입장은 미묘하게 대립하나, 대체로 대상판결의 결론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동일성유지권을 소유권절대의 원칙의 범위 내에서 제한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본고는 큰 틀에서 대상판결과 학계 다수의 입장에 동의하나, 특정 경우 저작물의 폐기가 동일 성유지권의 침해를 구성할 여지는 없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로, 소유권자가 자신의 권리를 남용하는 경우 저작권자의 권리를 동일성유지권으로 보호할 수 있는지 검토한다. 현행 판례의 권리 남용금지 법리를 적용하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으나, 해당 판례법리를 직접 저작권법상의 동일성유지권으로 구성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본고는 스위스 연방저작권법의 동일성유지권 규정을 참고하여 특정 경우 일정한 절차를 거쳐야만 소유권자의 처분행위가 적법성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하는 입법이 가능함을 검토한다. 둘째로, 소유권자가 폐기하려는 저작물이 사회문화적으로 보호가치가 있는 경우, 이를 저작권자의 동일성유지권으로 보호할 수 있는지 검토한다. 언뜻 사회문화적 보호가치를 개인의 권리인 동일성유지권으로 보 호하는 것이 어색할 수 있으나, 미국연방법 (VARA) 및 미국 최신판례 등과 비교법적으로 검토하여 그 정당성을 보인다.
나아가 본고는 대상판결에서 문제가 되었으나 중점적으로 다뤄지지 않은 ‘장소특정적 미술 (site-specific art)’이 현행 저작권법상 보호대상이 되는지를 검토한다. 우선 장소특정적 미술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고, 대상판결이 장소특정적 미술을 인정하지 않는 근거를 분석한 뒤, 미국 연방 항소법원의 다양한 판례를 비교법적으로 검토하여 한국에서도 현행법 체계 하에서 충분히 보호 받을 수 있음을 논증한다.
길림성 집안시의 장천1호분 예불도는 5세기 후반 고구려의 예불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다. 단순히 불상 앞에서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에 그치지 않고, 불교에서의 절하는 방법은 이마를 땅에 닿게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묘사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이 논문에서는 인도에서조차 잘 표현되지 않았던 이러한 예불방식이 고구려 벽화에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이 절하는 모티프는 간다라미술에 자주 표현된 연등불수기본생도에서 수메다가 헌신적으로 진흙바닥에 머리카락을 펼치며 몸을 눕혔던 것을 묘사한 장면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해 보았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특정한 설화 속의 장면을 넘어 보편적인 예불의 행위로 간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절하는 방법에 익숙했던 동아시아인들은 자연스럽게 미술 속의 수메다의 행위를 부처에 대한 배례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아가 장천1호분 예불도의 불상 좌우측에 배치된 예불자들의 움직임을 통해서는 우요의 방식으로 예불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자 의도했던 것으로 해석해 보았다. 이 시기 예불방식에서 우요가 중요했을 것임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것을 실증할만한 자료는 많지 않다. 그런 가운데 이 예불도는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지 100여 년 안에 이러한 예불방식이 정착했음을 보여준다.
끝으로 장천1호분 예불도는 정황상 실내가 아닌 실외에서 일어나는 장면으로 추정된다. 이는 단순히 실내ㆍ외의 문제가 아니라 화면상에 등장하는 부처가 단순한 불상인지, 아니면 석가모니의 현현한 모습의 묘사인지의 차이이기도 하다. 실내, 즉 법당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러한 구별을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야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설법 장면이라면 조각상이 아니라 실제 석가모니를 묘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배경에 등장하는 하얀 연꽃 봉오리는 법화경에 등장하는 백련의 꽃비를 연상시킨다. 물론 예불도가 그려진 공간이 무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아미타불, 그리고 극락세계에서의 연화화생 등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내세에 미륵삼회설법에 참여하게 된 것을 상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법화경에서 석가모니의 ‘무량삼매’에 의해 부처가 타방세계에 출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석가모니가 고구려에 현현한 것을 묘사한 것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음을 제시해 보았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구려인의 생활상과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자료이다. 특히 5세기 평양지역 고분벽화는 4세기 이래로 지속된 漢系와 낙랑 고분의 영향에서 점차 벗어나면서 평양천도 이후에는 고구려 고유의 문화가 반영된 벽화가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본 논문에서 옥도리 벽화고분에 주목한 이유는 바로 5세기 전 반~중반 평양지역에서 이루어진 집안지역 문화의 수용과 융합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옥도리 벽화고분이 조성된 5세기 고구려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 427년에 단행된 평양천도에 주목하였다. 수도 천도로 인해 평양은 이제 고구려의 새로운 정치적․문화 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이후 기존 국내성의 집안 문화가 새로운 수도 평양으로 유입되며 평양에서 汎고구려적인 새로운 문화가 꽃피게 되었다. 5세기의 고분 문화에서도 평양천도를 전후로 하여 두 지역의 고분문화가 교류․융합되는 과정을 거쳐 汎고구려의 문화가 성립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옥도리 벽화고분은 구조상 감실이 달린 二室墓의 구조로 평양지역 벽화고분 고유의 특징을 보여준다. 고분의 구조나 생활풍속·사신의 벽화 주제와 구성은 평양과 집안 지역의 고분들과 친연성을 보여 그 제작시기를 5세기 전반∼중반까지 내려다 볼 수 있다.
옥도리 벽화고분은 감이 달린 이실묘의 독특한 구조와 생활풍속·사신·장식문 등 다채로운 벽화 내용과 구성으로 주목받아 왔다. 또한 옥도리 벽화고분에 나타나는 집안과 평양지역 고분문화의 특징들은 고구려의 평양지역 지배 및 평양천도를 전후로 하여 두 지역에서 이루어졌을 문화적 교류를 보여준다. 그러나 옥도리 벽화고분은 두 지역의 고분문화가 공존할 뿐 아직 서로 융합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지는 못한 양상으로 두 지역 의 문화교류 초기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옥도리 벽화고분을 통해 5세기 전반~중 반에 이루어졌을 두 지역 간의 교류를 통한 고분문화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으며, 옥도리 벽화고분은 5세기 후반 고구려 고분벽화와 汎고구려 문화의 탄생을 이해하는데 중요 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The present study addresses the tea utensils and tea drinking methods seen in tomb mural paintings of Song, Liao, Jin, and Yuan, which were Koryo’s foreign exchange countries. The paintings illustrate the pointing tea method, which was popular during dynasty times. Tea utensils observed in the paintings include a tea mill, mill stone, and tea pestle necessary for making cake tea into powder. The tea stove and boiling bottle are depicted as being required to boil water. Some mural works vividly depict how a tea drinker pours hot water from a boiling bottle into a cup with a stand, mixes it with a tea spoon, and whisks tea powder for foaming with a tea whisk. The tea drinking method of the Southern race Han is also similarly described in the tomb mural paintings of Liao, Jin, and Yuan from Northern nomads. The distribution of tea culture had an enormous influence on the development of tea utensil manufacturing methods. The significance of this study is that these findings can be used as basic data to provide food culture insights into Koryo celadon tea utensils.
This study is on the alcohol beverage utensils represented on the Chinese tomb mural paintings of Song, Liao, Jin, and Yuan those countries had foreign exchange with Koryo Dynasty. These mural paintings are distributed in the areas such as Hebei, Henan, Inner mongolia, Shanxi, Shaanxi, Peijing. etc. The Alcohol beverage vessels were classified mainly into storage vessel, pouring vessel, drinking vessel and ladles according to the purpose. The storage vessels of Song, Liao and Jin were called Jiuping, Jingping, Jiuzun as well as Meiping. Pouring vessels are basically one set of Zhuzi, Wenwan and Jiuzhu, or Zhuhu and Zhuwan. On the mural paintings of Yuan Dynasty, Meiping as storage vessels disappear, and a variety of shapes of pouring vessels such as Mayu and Yuhuchunping appear. This trend indirectly indicates the new arrival of distilled liquor, which seems to have affected transition of the alcohol beverage utensils.
The perspective representation and its effect that appeared in the tombs and mural paintings of koguryo ar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The inside structure of the tombs is likely to show the deepness effect, placing each function in the front and both sides centering around the mane pillars and creating the boundaries and the spaces that have various visibility between the inside and outside spaces of the structure just like a traditional Korean house shows. In addition, The deepness effect is emphasized by suggesting that the spaces are countinued with a storage attached behind the main house or by forming the level and deployment in a narrow space like the scene that a large array is looked out from the main house. Second, The deepness effect is expressed by making the form of ceiling turn to a vertical space of an ascending image, constructing it just as the lotus lamp ceiling of a wooden architecture or drawing it just like the imaginary heavenly world with the sun the moon and mythical fairies and animals spread in it. Thried, The perspective effect is disclosed by drawing the mural pictures in an equally set bird's-eye view without regard to the disfance proportion according to the conceptual visualization which is not a visual penetration, adopting the multiple view points and moving view points that are moving around as an important manner of seeing. Fourth, The deepness effect is emphasized through the scene of changing spaces when they are looked out far or looked into depending on a viewpoint of the daily life by forming the fromes of paintings that we made up with actual pillars, Du Gong, crossbeams or that are painted in most tombs. Fifth, The rich spatial senses are reflected by originating the characters of the three directions, level, deployment and ascending. An example which can support the conclusion of this study can be given here. that is, the construction ground plan of a dwelling house of a nobleman at the end of Koguryo as a remain which was excavated at Dongdae Ja in Jip An.
본고는 공공벽화의 문제점으로 거주민들의 참여와 소통, 그리고 그들의 희망이 적절하게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선행연구에서 도출된 F모델(Flexible 3D Model)을 활용해 커뮤니티 아트 지향의 공공벽화 디자인패턴 개발과정을 체계화한 다음, 그 유용성을 검토한 것이다. 연구는 커뮤니티 아트와 공공벽화에 대한 이론적 고찰, F모델을 응용해 주민들의 디자인 참여와 소통을 활성화할 수 있는 디자인패턴 개발 프로세스로의 형식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디자인워크숍과 설문조사 등의 방법을 통해 이루어졌다. 워크숍 결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디자인패턴 개발과정 자체를 재미있어한다는 점과 참가자들 간에 대화와 소통을 촉진시키면서 상호 이해와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한다는 점 그리고 다양하고 흥미로운 결과물이 만들어짐으로써 사람들에게 만족감을 제공한다는 점 등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하면 커뮤니티 아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 참여, 과정, 공유의 예술로써의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때문에 커뮤니티 아트 지향의 공공벽화 제작을 위한 디자인수법으로 유용할 것으로 사료된다. 이상의 결과를 토대로 공공벽화 디자인과정, 특히 아이디어 스케치 단계에서 주민들의 의사와 정서를 적절히 반영할 수 있는 수법으로 디자인템플릿을 활용한 디자인패턴 개발 프로세스를 제안하고자 한다. 향후, 도시의 문화적 재생과 관련해 실제 적용대상을 발굴, 실체화하는 후속연구를 통해 실용적 방법론으로 발전시켜 가고자 한다.
본 연구는 유치원에서의「벽화」프로젝트 활동이 유아의 그리기표상능력과 친사회적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연구대상은 경북 J유치원 만5세 유아 24명을 실험집단으로, H유치원 만5세 유아 24명을 비교집단으로 하였다. 실험집단의 경우 2016년 4월 25일부터 6월 24일까지 9주간 연구자와 교사가 함께 관련문헌과 유아특성 및 상황을 고려하여 계획한「벽화」프로젝트의 각 단계 별 활동을 매주 3-4회를 기준으로, 유아의 흥미와 몰입 정도 및 유치원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운영하였다. 비교 집단의 경우 같은 기간 동안 생활주제 중심 미술활동을 실시하였다. 연구도구는 「그리기표상능력 검사」(지성애, 김희정, 김치곤, 2011)와 「친사회적 행동 검사」(이원영, 박찬옥, 노영희, 1993) 결과 도구를 사용하였다. 연구문제를 검증하기 위해 t검증을 실시한 결과, 유치원에서의「벽화」프로젝트 활동은 유아의 그리기표상능력과 친사회적 행동 증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본 연구에서 적용한「벽화」프로젝트 활동은 유아의 그리기표상능력과 친사회적 행동을 증진시키기 위한 교수․학습 방법으로 적용 가능함을 시사한다.
지난 40여 년간 미국의 공동체 벽화는 마을의 골목길을 이야기 거리, 볼 거리로 채우면서 주민과 함께 했고 그 지역의 정체성을 대변해왔다. 특히 ‘치카노 벽화운동’은 1960년대 후반 민권운동의 예술적 기수 역할을 하였으며, 미술이 어떻게 공동체 구성원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한 국가의 문화적 정체성을 재규정해내는 데 적극 기여할 수 있는 지 보여준 사례였다. 본 연구는 생존하는 가장 대표적인 벽화가로 알려진 주디 바카(Judy Baca)의 프로젝트들을 살펴보면서, 그녀가 어떻게 민족중심적이었던 공동체 벽화를 다문화적 함의를 구현하는 작업으로 전환시켜 갔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어떻게 초국가적인 시선으로 미술의 지평을 확장시켜 왔는지 고찰한다. 한편 학교밖 교육으로서 지역 청소년의 미술과 역사 교육에 획기적인 전례를 만들었던 <거대한 벽>의 작업 진행 방식의 특징과 의의도 짚어본다. 세계 최장(最長) 벽화인 <로스앤젤레스의 거대한 벽>(1976-1984)은 바카의 진두지휘아래 40명의 민속 사학자, 400여 명의 치카노계, 흑인계, 동양계, 백인 청소년 등이 협업하여 캘리포니아의 역사를 다양한 소수민 관점에서 그려낸 작업이다. 이는 치카노, 흑인 중심 등의 분리주의적인 민권예술운동을 종식하고 인종 간, 민족 간의 이해와 협력을 모색함으로써 다문화주의를 최초로 구현했던 기념비적인 벽화였다. 한편 바카는 그룹간 문화적 편견을 없애고 협력하여 작업하는 과정을 중요시 여겼기에, 여러 학교밖 교육적 방식을 고안하여 적용했다. 참여 학생들은 단결하여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려갔고 그 후 그들이 미국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학교 수업이 아니라 <거대한 벽>을 통해서였다고 말할 정도로 이는 획기적이고 성공적이었던 프로젝트였다. 바카가 1987년 경 착수한 <세계의 벽: 공포 없는 미래를 향하여>는 초국가적 시각을 반영하는 벽화이다. 벽화의 내용은 각 국가의 특수한 역사를 재고하면서도 궁극적으로 비폭력적 저항과 인류의 화합과 균형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보다 코즈모폴리터니즘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한편 이 작품은 바카가 그린 패널들이 러시아, 멕시코 등 여러 국가로 이동하면서 그 지역의 작가들이 새로 그린 패널이 부가되는 방식으로 전시되어 오고 있다. 각 지역마다 다른 내용과 작업 방식을 채택하고 있기에, <거대한 벽>만큼 참여 학생들을 위한 구체적인 교육적 방식이 적용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거대한 벽>이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미국적’ 정체성을 재규정하는 다문화주의적 담론을 대변한다면, <세계의 벽>은 미술을 통해 전지구적 차원에서 대화하고 교류함으로써 인종, 민족, 국가 간의 경계에 대해 질문하고 반목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보다 확장적인 시도이며, 초국가주의 시대의 다문화주의가 발전해 가야할 방향을 시사해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