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1946년부터 1961년까지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가 시행한 성경학원 정책을 연구한다. 기존 성경학교 정책과 달리 새 정책은 한국교회(노회)가 주도적으로 성경학교를 운영하고 선교사는 보조자 역할을 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각 노회는 지역 선교부와 함께 평신도 전도사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성경학원을 설립하였다. 이 논문은 3가지 형태의 성경학원을 규명했다. 첫째, 표준적인 성경학원의 입학 조건을 채우지 못한 학생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각 선교부의 성경학원, 둘째, 성경교육의 질을 높이고 표준을 제공하는 선교회의 성경학원으로서 호남신학원, 셋째, 당시 경제적으 로 어려운 여성들을 교육시켜 여자전도사를 배출하는 한일여자신학원 이다. 결론으로 한국선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서술하고 두 신학교의 발전과 신학교육적 영향을 분석한다.
1884년 로버트 매클레이 감리교선교사가 고종으로부터 의료와 교육 분야의 개신교 선교를 허락받은 이후, 감리교와 장로교의 본격적 인 한국선교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감리교에 비교해 볼 때 장로교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본 논문은 같은 시기에 선교를 시작했음 에도 장로교의 교회성장이 감리교에 비교해 더 많이 이루어진 이유에 관해 고찰하고 있다. 우선 지금까지 언급되던 ‘감리교는 학교와 병원 중심으로, 장로교는 교회중심으로’와 같은 선교방식의 차이와 네비우 스 선교정책 수용 여부의 차이와 같은 내용이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없음을 다루고 있다. 대신에 초기 한국선교를 주도했던 감리교의 아펜 젤러와 장로교 언더우드의 차이, 즉 언더우드의 세례에 관한 열정적인 입장과 그의 선교사 동원 활동을 통한 미국 남장로교와 캐나다장로교를 포함한 장로교 선교사의 증가가 결국 장로교회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본 논문은 ‘최초의 한인 선교사가 누구인가?’라는 주제를 다루는 연구이다. 흔히 감리교의 홍승하와 장로교의 이기풍을 최초의 한인 선교사라고 언급한다. 하지만 그들이 왜 최초의 선교사인가에 관한 연구는 아직 심도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우선 감리교에서는 1997년 이전까지 국외에 있는 교포들만을 대상으로 사역을 해도 선교사로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1903년 하와이에 파송된 감리교의 홍승하는 최초의 한인 선교사가 맞다. 반면 장로교에서는 1907년에 파송을 받아 1908년에 제주도에 도착한 이기풍을 한동안 해외 선교사로 간주 하다가 1915년 이후부터는 그를 더는 선교사로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장로교는 외국인을 위해 사역을 하는 목회자들만 선교사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제주도는 국외지역이 아니므로 이기풍을 해외 선교사로 간주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본 연구는, 서초구 주민들이 2012. 8. 29.경 서초구청이 대한예수교장로회 사랑의 교회에 대하여 한 서울 서초구 소재 참나리길 일부 지하부분에 관한 도로점용허가처분에 대해 무효확인청구(예비적 청구취지: 취소청구)의 소를 제기함으로서 시작되어 8년여에 걸친 소송이 진행된 후, 최근 대법원의 상고기각 판결에 의해 위 도로점용허가처분 취소 판결이 확정된 사건을 다루었으나, 위 도로점용허가처분 취소 판결에 대한 타당성 여부에 대한 검토나 평석이 아니라 처분청인 서초구청이 위 취소 판결의 기속력에 따라 조치를 취해야 하는 이 사건 도로에 대한 원상회복명령 등 그 후속절차에 관한 것이다. 위 취소 판결로 인한 후속절차로는 원상회복명령, 이행강제금 부과, 행정대집행, 부관인 허가조건의 유효성, 건축허가(일부)취소, 손실보상 등이 문제 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원상회복명령과 행정대집행의 가능 여부로서, 전자와 관련해서는 원상회복의 방법, 원상회복 명령 및 그 이행 가능여부, 원상회복의무 면제시 교회의 대상 시설물 사용 가능여부 등이, 후자와 관련해서는 대집행 요건 중 대체적 작위의무인지 여부, 집행대상의 특정 가능여부, 의무 불이행 방치가 심히 공익을 해하는지 여부 등이 각 주요 쟁점 이 된다. 본 연구로 인하여 취소판결로 인한 후속절차로 어떤 것이 문제가 되는지 파악이 되고, 원상회복명령과 행정대집행의 기준이 다소나마 명확해짐으로 인하여 행정처분의 상대방에게 법적안정성이 부여될 수 있기를 바라고, 위 도로점용허가처분 취소판결 확정으로 인한 대상 교회의 후속절차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기대한다.
이 논문은 대한장로교회 신경의 변천과정과 장로교회 각 교단의 헌법에 수록되어 있는 현황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서 한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에 대한 인식을 연구한 것이다. 1907년에 제정된 대한장로교회 신경은 1922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신경, 1934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신조로 이름이 변경되고, 1934년 수정과정에서 문구의 수정 및 단어의 추가나 삭제 등의 부분적인 변화가 있었다. 해방 후 장로교회 각 교단은 대부분 1934년의 조선 예수교장로회 신조를 저본으로 해서 현대철자법에 맞게 수정한 후 헌법에 수록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만 예장 고신 교단은 2011년 개정, 공포된 헌법에서 대한장로교회 신경을 삭제했으며, 예장 통합 교단은 1971년 헌법 개정 과정에서 서언을 축소하고, 승인식을 삭제했으며, 제12조의 내용 중 불신자가 최후 심판 때에 형벌을 받는다는 문구를 삭제했다. 현재 대한장로교회 신경은 역사적인 기원과 개정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이 헌법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한 설명을 첨부하여 이해를 돕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신앙고백을 제정한 후에는 그것을 보편적으로 사용 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한국기독공보」는 1946년 1월 17일에 발간되어 74년 동안 출판된 한국 에서 가장 오래된 주간지이며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기관지이다. 최근 에 「공보」는 4만 페이지 이상의 자료를 디지털 아카이브로 만들어서 누구 든지 쉽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이 논문은 디지털아카이브를 사용해서 얻 은 1차 자료를 통해 「공보」의 초기 역사(1946-1979)를 구성한 것이다. 특 히 「공보」가 혼란기를 거쳐 에큐메니칼적 정체성을 확립하고(1960년대), 재정자립을 구축하고(1970년대), 대정부와 사회를 향해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는 신문으로 발전하는 역사를 추적했다. 이 역사작업은 한국 기독교 언론의 가치와 의미를 보여준다.
이 논문은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의 제정 과정과 내용적인 특징을 연구한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은 190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에서 채택한 것으로 당시 같이 채택한 대한장로교회 신경과 함께 한국장로교회 최초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의 제정 과정에서 노회를 위한 규칙과 부칙위원회는 웨스트민스터 정치모범을 제시했다. 그러나 연합공의회의 회원들은 곧 설립하게 될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가 감당하기에는 어렵다는 이유로 좀 더 간단한 형태의 규칙을 채택했다. 이렇게 제정된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에 나타나는 장로교 정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항존직을 장로와 집사 두 종류로 구분하고, 다시 장로를 목사와 치리장로로 구분했다. 둘째, 당회, 노회, 총회 등 치리회를 매우 수직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셋째, 교회직원을 항존직 중심으로 규정하고 당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영수, 조사, 전도부인, 전도사, 권서 등에 대한 규정은 미비했다. 넷째, 별도의 예배모범 없이 간결한 주일 예배 형식만 제시하고 있다. 다섯째, 시찰위원회와 같이 현장에 필요한 독자적인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은 장로교회의 기본적인 정치체제를 따르면서 1907년 당시 한국장로교회의 상황을 고려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이 논문은 1930년 이전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이 개혁신학이 아니라 복음주의신학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다. 이 논문에서 복음주의의 특징을 세 가지로 핵심요소로 규정한다. 그것은 성서, 회심체험, 영적인 생활의 변화이다. 1930년 이전으로 시대를 한정한 이유는 1930년 이후 신학이 분화되기 때문이다.
장로교와 감리교는 선교초기부터 예배공동체, 성경번역, 순회전도를 함께 했는데, 이런 연합사역이 가능했던 것은 복음주의신학이라는 공유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성서를 통한 사경회를 기초로, 기도를 통한 체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은혜 받은 자의 새로운 생활을 통한 도덕성이라는 복음주의신학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런 성서, 회심체험, 영적인 생활의 변화는 한국교회신학을 복음주의 전통으로 견고하게 뿌리 내리게 한다.
1907년 한국장로교회는 4개 선교부가 하나의 장로교 치리회인 독노회를 조직한다. 이때 채택한 대한장로교회신경은 장로교회와 감리교의 연합정신과 복음주의신학의 산물임을 통해서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이 개혁신학이 아니라 복음주의신학임을 다시 한 번 규명하게 된다.
한국장로교회 신학이 개혁신학이라면 신학교와 학계에서 칼뱅에 대한 교과과정이나 연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과과정과 칼뱅연구를 보면 교과과정은 성경중심이며, 칼뱅연구사에서 1930년 이전까지는 이에 대한 깊은 연구는 없음을 알 수 있다. 한국장로교회의 복음주의 영성은 개인구원과 체험을 강조한다. 즉 부흥적 특성으로 인간의 감정을 강조한다. 그러나 개혁신학은 그렇지 않다. 복음주의는 개인구원, 개인윤리, 사회관심으로 자연스럽게 발전되어간다.
이 논문은 한국장로교회 동사목사의 기원과 제도적 확립 및 확장과정, 폐지에 이르는 역사적인 과정을 연구한 것이다.
동사목사라는 직제는 미국장로교회의 영향으로 190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회 노회에서 8명의 한국인 목사를 선교사와 함께 일하는 동사목사로 임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이 직제는 제도적 확립과 확장 과정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확대 시행되어 1914년 제3회 총회에서 목사를 위임목사, 임시목사, 위임동사목사, 임시동사목사로 구분했으며, 1917년 제6회 총회에서는 목사를 칭호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하고, 1929년 제18회 총회에서 헌법 중 정치 제4장 4조에 목사칭호 조항을 추가함으로서 동사목사의 제도적 확립을 완결했다. 목회 현장에서는 선교사와 한국인 동사목사 뿐만 아니라 1920년대를 전후해서는 한국인 위임목사와 한국인 동사목사가 함께 목회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이후에는 한국인 위임목사와 위임동사목사, 한국인 위임목사와 임시동사목사가 목회하는 형태로 세분화 되었다.
동사목사 직제는 한국장로교회 안에서 공동목회를 통한 협동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했는데, 이와 같은 직제가 해방 이후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지속된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영락교회에서 한경직과 강신명이 위임목사와 동사목사로 공동목회를 한 경우다.
그러나 동사목사 직제는 195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0회 총회에서 부목사 직제를 신설하면서 폐지되었다. 이런 결정은 동사목사 직제의 역사적 공헌을 간과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결국 동사목사의 폐지와 부목사의 신설은 공동목회를 통한 협동적 지도력 대신에 위임목사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로의 변화를 가속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 논문은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의 교육선교를 이끌어 나간 인돈(William A. Linton)의 교육선교를 연구하고, 인돈을 중심으로 남장로교 교육선교의 특징을 역사적으로 조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인돈은 1912년에 한국에 입국하여 1960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미국으로 돌아가 사망할 때까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당하였던 기간(1940-1946)을 제외하고, 오랜 기간 한국의 전라·충청지역에서 줄곧 교육사역에 헌신하였다. 입국 후 선교초기에는 군산 영명학교에서 성경과 영어교사로 시작하여 곧이어 교장이 되었고, 이후 일제 식민주의 교육정책과 제도 속에서 남장로교가 선교학교의 생존과 교육선교의 맥을 이어가기 위하여 지정학교로 인가를 추진할 때 주력학교인 전주 신흥학교로 이임하여 교장으로 일하며 지정학교 인가의 책임을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며 남장로교가 자진폐교를 결정할 때, 전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선교회 모든 학교들의 폐교를 진두지휘하였다.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지만, 해방 이후 복귀하여 새롭게 설립되는 대전선교지부의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남장로교가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과 고등교육을 통한 한국사회의 기여를 위해 대전에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였을 때, 대학설립위원장과 초대 학장으로서 대학의 설립과 교육과 운영의 책임을 감당하였다. 이로써 인돈은 중등교육에서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남장로교 교육선교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며 발전에 기여하였다.
선교초기부터 끝까지 인돈의 교육선교에서 이어지는 강조점은 교육의 목적이 한국교회를 이끌어 나갈 지도자 양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그것은 불신자에게는 전도하고 신자에게는 교육해야 한다는 남장로교 교육선교의 핵심을 반영하였다. 기독교인 자녀들을 기독교적 교육 환경에서 어릴 때부터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가르쳐서 한국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가 되게 하고 각자 놓인 자리에서 이웃을 돌보고 사회에 봉사하는 책임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 교육선교의 사명이었다. 교회지도자 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남장로교와 북장로교를 비롯한 보수적인 장로교 선교회들의 교육선교의 목적이 대동소이하였지만, 북장로교가 복음전도자 양성에 보다 집중하였다면, 남장로교는 교회와 사회에 기여하는 기독교 지도자 양성이라는 점에서 통전적, 실용적 성격이 강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인돈 자신도 공학도였던 만큼 과학교육을 강조하고, 또한 모든 학생들에게 직업교육을 강조한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대전대학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문학과 과학과 신학의 조화와 융합, 신앙과 학문과 실용적 삶의 연결은 독특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적 교육환경을 위해, 모든 교사가 진실한 기독교인이어야 하고, 학생들의 다수가 기독교인이어야 하고, 교육의 내용과 삶이 기독교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은 인돈의 교육선교의 마지막까지 강조되었다. 교육선교의 목적과 정체성에 대한 신념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여 자진폐교를 결정하고 교육선교에서 물러난 것에서도 잘 드러났다. 이 원칙은, 작지만 기독교적 정체성과 목적이 유지되는 순수한 대학을 만들고자 하였던 모습에서도 나타났다.
This is a study on the curriculum of church history of the Korean Presbyterian Seminary from 1901 to 1935. The Korean Presbyterian Seminary was established in 1901. The seminary was built for the spread of the gospel not for the research of theology. W. L. Swallen was one of the founders of the seminary and he wrote the first textbook of church history in the Korean language in 1913. The book was entitled Kyohoisaki (敎會史記) : the Book of Church History. The editorial system of the Kyohoisaki was a dictionary of history. The theological foundation of the book was evangelical.
A new text of church history of Presbyterian Seminary was published in the 1930’s. The new text’s theological foundation was evangelical, the same as Swallen’s text. But the level of study of church history was developed further. The new text included the advanced objectivity of historical description, methodology of history and the system of editing. The Presbyterian seminary could offer the academical curriculum of the church history in the 1930’s.
American women missionaries in Korea had specific works for Korean women in the mission field. Traditionally, Korean women had less opportunity to be educated, to participate in social activity and self-achievement. Women mission changed the life of the Korean Christian women. The women religious education is the most important element to lead the women’s life.
This is the study on the manual of weekly Prayer meeting by women missionaries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South. These documents were published in 1936, 1938 and 1939. The authors of each book were Meta L. Biggar, Talmage Eliza and Josephine Hounshell. These books show everyday piety and spirituality of Korean Christian women in the 1930’s. The most important goal of prayer was to improve Christian faith and to encourage discipleship of Jesus Christ. When they taught prayer, they had to read and study the Bible. They studied the bible to learn the life and teaching of Jesus Christ. In the prayers, they wished to participate in the way of Jesus Christ. These regulations of the prayer meetings displayed the pious heritage of evangelical protestant tradition. The modern Korean church has to develop the noble tradition rather than accept contemporary secular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