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삼척을 가로지르는 오십천 하구의 남쪽 곶(산)에 입지한 오화리산성의 신라사적 의미를 찾아본 것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고고자료와 문헌자료를 분석하여 오화리산성이 신라성임을 밝히는 작업을 하였다. 고고자료로는 산성에서 수습된 신라토기를 분석하고, 할석 이 피복된 토루 성벽 축조 방식을 찾아 오화리산성을 5~6세기의 신라성으로 추 정하였다. 문헌자료로는 오화리산성 주변에 신라계 지명과 채록 자료를 찾아 분석하여 오화리산성이 신라성임을 논증하였다. 이와 같이 오화리산성이 신라성으로 추정되므로, 이 성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실직(주)성[悉直(州)城]으로 볼 수 있으며, 「울진봉평신라비」의 실지도사(悉支道使), 실지군주(悉支軍主)가 주둔하였던 성일 수도 있다고 판단하였다. 나아가 이 성의 신라사적 의미는 강 하구의 바닷가 곶(산)에 입지한 점에서 최 근 발견조사된 강릉 경포호 옆 강문동 신라토성과 통하고 있어 신라의 동해안 연 안항해(沿岸航海)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결국 오화리산성 일대는 신라가 동해안을 따라 고구려와 신라 간의 교섭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연안항해를 위한 중간 기항지(중간거점)로 기능하다가, 이후 신라와 고구려가 대립하면서 신라의 방어 거점 기능을 하였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역사적 기능이 중시되어 통일신라시대 때 오화리산성 일대를 북해(北海) 중사(中 祀) 비례산(非禮山)의 무대로 정하였다고 판단된다.
이 글은 4〜6세기 신라의 동해안 방면 진출 과정을 검토하면서, 특히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았다. 이에 2세기 초 悉直谷國과 音汁伐國의 ‘爭疆’ 기사는 삼척의 悉直國과는 무관한 기록으로 판단하였다. 이는 실직곡국의 명칭에 ‘谷’이 들어가 있음에 비해, 삼척 실직국 관련 기사는 들판을 의미하는 ‘原’ 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것에 주목한 결과이다. 따라서 신라의 동해안 방면 진출은 4세기 신라 토기가 출토하는 포항·영덕·울진 일원에 대한 고고 자료와, 4세기 후반으로 보이는 강릉 일원의 신라 토기 출토 상황을 주목하였다.
특히 4세기 말 동해안 방면 何瑟羅(강릉)의 가뭄과 메뚜기 피해로 인하여, 신라가 그 지역에 1년 간 租調를 면제하여 주었다는 기록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이 기록은 신라가 강릉 일원에서 토지에 기반하여 수취하는 세금인 租와 지방 특산 물에 해당하는 調를 거두어 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이 시기 삼척·강릉 지 역이 신라의 완전한 행정적 직접 지배 아래 놓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이러한 상황은 근래 강릉 안현동 고분군과 하시동 고분군의 편년 문제와도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사안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신라로 하여금 5세기 중반 삼척·강릉 일원을 둘러싼 고구려와의 각축을 무난히 극복하고, 6세기 중반 황초령·마운령 지역까지 진출이 가능하게 하였다. 진흥왕은 568년에 황초령과 마운령을 순수하였다. 그 해에 比列忽 州(안변)가 達忽州(고성)로 移置됨으로써 신라의 북방 영토가 위축된 것으로 이해 하여 왔다. 그러나 황초령과 마운령의 순수비는 진흥왕의 巡狩 몇 년 이후에 건립한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달홀주로의 州治 이동을 영토의 위축으로 파악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異斯夫의 于山國 정벌이 이루어졌다. 실직주와 하슬라주 軍主 를 역임한 이사부는 512년에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4세기 후반 신라가 삼척·강릉 지역으로 진출한 이후, 신라는 우월적 지위에서 우산국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이사부의 정벌은 우산국의 驕慢에 대한 ‘治罪’의 의미로 이루어진 군사적 무력 시위로 이해한다. 이를 통해 신라는 우산국 특산물인 水牛[물 개]를 공납으로 징수할 수 있었으며, 이는 후일 唐과의 교류에서 신라에게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본고는 삼척과 울릉도지역 고분 자료를 분석하고 문헌자료와의 비교·검토를 통해 당시 신라의 삼척과 울릉도지역 진출 시기와 과정, 그리고 복속 후 지역 정 치체의 성격과 동향, 신라의 지역 지배방식의 변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삼척지역에 있었던 小國인 悉直國은 신라의 전신인 斯盧國에 의해 늦어도 4세 기 초반에는 복속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신라는 5세기 중엽 경 지방 간접지배의 일환으로 중심세력인 갈야산 집단과 중·소 세력인 추암동·구호동 집단에게 위세품을 차등 지급함으로써 갈등관계를 조장하여 지방 세력의 발전을 저지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에 따른 폐단으로 울진 봉평비에 보이는 남미지촌의 중앙에 대한 반란과 삼국사기 기록에 보이는 고구려 변장의 살해 사건 등이 나타났다. 신라는 6세기 초에 세력 이탈의 조짐이 가장 강했던 삼척지역에 최초로 悉直州를 설치하여 地方官을 파견하였다. 이에 신라는 지방 중심세력과 갈등관계에 있던 추암 동 집단을 이용함으로써 서서히 직접지배 권역을 넓혀 나갔으며 6세기 초엽은 물론 중엽까지 추암동에만 위세품이 나타남은 그러한 연유이다. 이와 더불어 불안정한 대외적 여건으로 인해 동해안지역은 6세기 중엽까지도 완전한 직접지배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6세기 후엽이 되면 동해안 방면은 완전히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게 된다. 이에 고고자료 상으로도 더 이상 간접지배의 위세품은 나타나지 않으며 중심 세력은 추암동 집단으로 일축된다. 7세기대는 지방 최하위 촌락에까지 중앙의 지방관이 파견되어 직접지배가 이루어지게 된다.
울릉도에서 확인된 신라고분 연대의 상한은 향토사료관 소장품을 참조하면 6세기 초·중엽으로 신라의 울릉도 정복 시점과 대체로 일치하며, 존속시기는 고분출토 인화문 토기 등을 참고하면 대략 10세기까지이다. 신라는 당시 주변국과의 교 섭 및 견제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를 마련하기 위해 울릉도를 정복하였고, 그 후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지배를 실시하였다. 이에 지역민의 반발과 반신라적인 정서를 차단하기 위해 지방관 아래에 각 촌락마다 촌주를 두었을 것이며, 섬 내 분포하는 적석봉토의 횡구식석실묘를 비롯하여 신라 토기 및 각종의 위세품들이 이 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분이 파괴되거나 도굴되어 당시 지역정치체의 존재 양태 등에 대한 세밀한 분석은 한계가 있었다.
삼국 통일 후 신라에서 설치한 국가 祭場 중 삼척에 설치된 것은 북쪽 태백산에서 中祀를 지내기 위해 설치한 祭場, 四海 중 悉直郡 영역 내에 위치한 非禮山 에 설치된 北海 祭場이 있었다. 수도를 제외한 지방에 중사를 지낸 제장이 2곳 있었다는 것은 당시 이 지역이 신라 입장에서 정치ㆍ군사ㆍ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태백산에 中祀를 설치한 이유는 신라 입장에서 본다면 태백산에서 발원한 물이 낙동강 발원지가 되어 경상남북도 지역의 농경지를 형성하고 사람이 살 수 있는 물을 끊임없이 제공하기에 그 덕이 매우 커서 설치하였다고 볼 수 있다.
四海 祭場의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제사지에 北海 비례산은 오늘날 삼척 시인 실직군에 소재한다고 소개하였다. 현재 신라시대 북해의 제장인 비례산은 삼척의 어디인지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더구나 동해, 서해, 남해의 제장은 海邊인데 반해, 북해 비례산만 산인 까닭에 더욱 혼란스럽다. 그리하여 북해 비례산의 위치 를 추정하는 다양한 논의가 있었는데, 일단 다른 해안지역의 제장과는 달리 山이 라는 점과 삼척에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덧붙여 제사를 지낸 산이라면 신령이 좌정할 만한 공간적 특징을 지니면서, 용왕제를 지낼 수 있는 여건 또한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삼척 비례산에서 행한 제사는 용왕을 위하여 바다에서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고, 이에 비례산 이 어디인가를 추정함에 있어 이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Looking for the identity of Korean Calligraphy is quite important but not easy work also hard to define what it is in a sentence. However, it is needed to find out what is identity of it. The reason why it is hard to find out is that Korean have basic identity but the identity of Calligraphy has been different by centuries. It can be largely divided into three reasons. Firstly, the period from three Kingdoms to the beginning of Goryeo, Secondly, the period between the end of Goryeo and the middle of Joseon, this is the time when the doctrines of Chu-tzu was dominated to the society. Thirdly, the end of Josen is the period when scholars of the Realist School of Confucianism were appeared. In this periods, Buddhism was flourished but Buddhist insisted the intercommunication of three religions named Confucianism, Buddhism and Immortal Taoism. The ancient tasteful ideas was called Geupbaek(皀帛) scholar in Koguryo, Hwarang(花郞) scholar in Shilla and Taoist in Goryeo that could be unique. This intercommunication of three religions was expressed as scholar or Taoist by the people named Choi Chiwon, Lim Chun, Lee Gyubo and etc. They could have different the period of their lifetime or ages, but have the similarity of the selection of words through their articles. Thus, it could be known that the identity of calligrapy was considered by the articles about calligraphy or poems of these three people mentioned formerly. From this research, the identity of calligraphy from late Shilla to early Goryeo was influenced by the intercommunication of three religions based on tasteful ideas followed by Hwarang sprit and the scholar thought. And, it is summarized that the identity of calligraphy is Taoist ideology because this scholar thought could be concluded to Taoist ideology through the directivity of great writing and conduct.
강원도 영동지방 최남단의 삼척지역은 남쪽으로는 경북 울진군, 봉화군과 접하고 있어 경북 북부와 강원도를 연결하는 중간 연결지점의 문화전파 경로로서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으며, 석조미술 역시 이와 관련하여 형성·발전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가운데 신라석탑은 동해 삼화사 삼층석탑, 태백 본적사지 삼층석탑, 삼척 흥전리사지 삼층석탑, 삼척 대평리사지 석탑 등 4기가 확인되는데, 비교적 적은 수량만 남아 있지만 9세기 신라석탑의 결구구조와 양식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삼화사 삼층석탑의 별석 탑신받침, 흥전리사지 석탑의 삼중기단, 표면 장엄공 등은 신라석탑의 일반적인 양식 흐름 속에서도 매우 주목되는 특징으로 삼척지역이 9세기 신라석탑이 다양하게 전개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흥전리사지가 위치한 도계 읍은 경북 북부와 강원지역을 연결해주는 곳으로 당시 중요 교통로의 거점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다양한 석조미술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 지역 불교문 화 발달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석탑을 통해 본 삼척지역의 불교문화는 경북 북부와 강원지역을 연결해주는 중간적 위치이지만, 불교문화의 발전 양상은 강원 남부지역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본 논문에서는 신라가 우산국을 정벌한 이유와 우산국이 신라에 歸服한 이후 신라의 우산국 통치에 대해 살펴보았다. 신라는 독자적으로 발전해 온 정치체인 우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오랜 기간 준비하였다. 이와 같이 신라가 우산국을 정벌한 이유는 지증왕이 그 전 시기와는 다른 지배체제 정비를 통해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산국이 지니고 있는 경제적인 측면 역시 정벌 이유의 하나였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가지어피≒해표피=반어피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신라의 우산국 정벌은 신라의 실직․하슬라 지역에 대한 진출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산국이 신라에 귀복한 이후 이 지역에 대한 신라의 통치 역시 실직․하슬라 지역 지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신라는 일찍부터 실직․하슬라 지역을 지배하였고 통일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실직․하슬라, 명주 지역은 신라 하대 김주원과 그 후손에 의해 일정 정도 지배되었다. 우산국은 신라에 귀복된 이후 자치권을 행사하면서 신라에 토산물을 바쳤다. 이것은 신라와 탐라와의 관계에서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산국은 신라 멸망 전에 고려에 귀복하였는데, 이것은 명주 지역의 정세 변동과 연동한 것이었다. 따라서 신라 하대 어느 시기부터 우산국은 명주지역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고 신라의 통치력은 우산국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 글에서는 이사부의 신라영토확장과 우산국을 중심으로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기반으로 몇 가지 사항을 중점적으로 검토해 보았다. 우선, 이사부 관련자료를 그 생애와 활동을 중심으로 보다 치밀하게 검토한 바, 그 출생년대는 이를 전하는 기사가 찾아지지 않으므로 추정하기 어렵지만, 그 사망년대에 대해서는 관련자료를 적극 검토하여, 이사부는 562년 가야 정벌과 관련된 기사 이후 그 추적이 어려우며, 당시의 나이(대략 77세)를 고려할 때 자연사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 추정해 보았다. 다음으로, 『國史』의 편찬과 연관하여 그 편찬 목적과 의의에 대하여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국가와 왕실의 위엄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뿐만 아니라, 그 자 체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건설의 문화적 기념탑이라는 논의에 동의하면서, 더 나아가 지증왕․법흥왕․진흥왕대의 국가발전과 관련하여 중국문화의 수용과 그 변화 내용을 담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관련자료를 통하여 검토해 보았다. 그 증좌로 지증왕대 이후 중국과 밀접한 정치․사회적 변화가 『國史』의 편찬과 연관이 있었으며, 그 결과가 『三國史記』에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고 추론해 보았다. 그 다음으로, 신라의 영토확장과정과 우산국에서는 기왕에 신라에서 소국을 어떻게 편제하였으며, 특히, 실직과 우산국의 편제 방식이 다른 점을 중심으로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실직은 소국으로서 신라사회와 다양한 접촉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에 반해 하슬라는 실직을 거점으로 편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에 반해 우산국은 朝貢을 통한 편제 방식이 보이고 있으므로 그러한 사례를 분석하여 이에 의미를 부여해 보았다. 끝으로, 우산국 정복 관련자료를 재검토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바, 지금까지 『三 國史記』관련자료만을 신뢰하여 그에 근거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으나, 『三國遺事』에 보이는 기사를 중심으로 다른 의미를 부여해보았다. 그 결과 『三國史記』에 보이는 우산국 기사는 導論的 성격이 강한 의미로 해석하여, 『三國遺事』의 우산국 정복 결과 하슬라주 군주로 임명되었을 가능성을 검토하여 새로운 의견으로 제시해 보았다.
「삼국사기」권4의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이사부장군이 512년에 동해 중간에 위치하고 무릉도(울릉도)와 우산도(독도)로 구성된 우산국을 목사자를 실은 전함의 해군력에 의해 정복했다. 그 결과 신라의 독도의 영토주권이 수립되었다. 즉 신라는 독도의 영토주권에 대한 역사적 권원을 취득했다. 따라서 512년에 지증왕 시기에 우산국이 신라에 귀속되었다는 사실에 관해 어떠한 의문도 제기될 수 없다. 그러나 오늘 역사적 권원은 현대 국제법상 타당한 권원으로 대체될 것이 요구된다. 역사적 권원은 대체 당시에 타당한 권원으로 대체되지 아니하면 법적 효력이 없다. 그러나 역사적 권원과 그에 유사한 개념은 그 후의 역사적 발전에 의해 대체된 후에는 법적으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권원의 대체 이론은 많은 학자와 국제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일반적으로 수락되고 승인되어 있다. 대한제국은 독도의 관할권에 관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1900년에 선포하였다. 동 칙령의 선포에 의해 512년에 취득된 독도의 역사적 권원은 현대 국제법상 유효한 새로운 권원으로 대체되었다. 따라서 독도의 역사적 권원은 오늘 현대 국제법상 법적 효력이 없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 권원은 대체되기 이전에는 독도 영유권의 권원으로 법적 효력이 있는 것이다. 대체된 이후에도 역사적 권원이 귀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적 사실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권원의 대체에 따라 역사적 권원에 기초한 주장은 현대국제법상으로는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이사부 장군은 512년에 전선에 목사자를 실은 무력의 행사 수단에 의해 울릉도 뿐만 아니라 독도로 구성된 우산국을 정복했다. 동 정복의 결과로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토주권, 즉 독도에 대한 한국의 역사적 권원이 512년에 확립되게 되었다. 고대법상 정복은 영토취득의 수단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고대법이 국가에게 정복에 의한 영토취득을 허용하고 그 시기에 국가에게 전쟁권 수행에 관해 제한을 두지 아니었냐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국가에 의한 무력의 행사를 금지한 현대 국제법상으로 정복은 침략행위를 구성하고 위법하며 영토취득을 위한 타당한 권원을 보장할 수 없다. “국제연합 현장”제2조 제4항의 규정에 따라 국가의 전쟁수행권과 영토의 취득을 위한 정복권이 제한된다. 영토취득을 규율하는 국제법의 규칙은 수세기 동안 변천되어 왔다. 한편으로, 분쟁에 있어서 문제의 주장과 사태는 그것이 오늘 존재하는 조건과 규칙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취득된 때에 존재하는 조건과 규칙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국제법은 소급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승인되어 있다. 상기 결과에 따라 독도의 영토주권에 관해 우리 정부당국에 의해 기획되는 기본정책과 역사학자에 의해 수집되는 기본연구는 512년의 역사적 권원을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적 권원을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와 같은 현대국제 법상 타당한 권원으로 대체하는 것이 요구된다.
‘백수의 왕’으로 알려진 사자는 아프리카 유럽 서아시아 인도 등지의 열대 초원지대에 서식하는 무서운 동물이다. 사자는 각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자주 등장하여 그 신성함과 절대적인 힘, 그리고 위엄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사자는 서식하지 않으나 역사기록을 통해 삼국시대부터 사자의 존재를 이미 인식하고 있었으며 사자는 불법(佛法)을 지키기 위한 수호 신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통일신라 이후는 사자가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나타나며, 탑의 장식품이나 불교공예품, 그리고 기와 및 생활용품 등으로 폭넓게 수용되어 사자의 장엄함과 다양함을 볼 수 있다. 특히 단단한 화강암을 소재로 한 석사 자상이 석탑과 석등 등에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다른 나라에는 독특한 예이다. 이사부는 나무인형 사자를 많이 만들어 배에 싣고 가 우산국 사람들을 나무인형 사자로 위협해서 복속시켰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이사부가 그 당시에 일반인들에게는 처음 알려졌거나 거의 알려지지 않는 무섭고 기이한 사자를 이용했다. 이사부는 이미 한번 마희로서 가야를 정복한 군사전략가이며 지략가였고, 역사가였다. 진정한 싸움에 승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이사부는 나무인형 사자를 통해 싸우지 않고 우산국을 복속시킨 것이다. 이사부의 식견과 능력으로 그는 이미 그 당시에 사자에 대한 형상과 성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새롭게 등장한 존재로 엄청난 힘과 무서운 외형을 가진 백수의 왕이자 불교의 호법신인 사자를 전장에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우산국 복속 때 군사전략으로 이용했다. 그렇다면 이사부가 만든 나무인형 사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첫 번째 사자를 만든 재료가 나무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두 번째 나무인형 사자의 크기는 얼마였을까? 나무인형 사자를 여러 마리 만들어 배에 나누어 싣고 갔다는 기록으로 보아 트로이 목마처럼 그렇게 큰 나무인형 사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사부가 나무인형 사자를 만든 지 122년 후 가장 가까운 시기에 만들어진 분황사 모전석탑 석사자(石獅子)에 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사자상과 비교하여 비슷했거나 위협하기 위해 좀더 과장되게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 세 번째 나무인형 사자의 외형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무인형 사자의 외형적 모습도 석사자들의 외형적 모습과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본 뱀은 못 그려도 안 본 용을 그린다“는 우리 속담처럼 그 당시 실제 살아있는 사자를 보지 못했지만 오히려 사자는 일정한 틀을 지닌 모습으로 정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사부의 나무인형 사자는 아마 그 이후에 만들어지는 신라 사자상의 전범(典範) 또는 전형(典型)이 되었을 것이다. 현존하는 한국 동물상의 대부분은 앞다리를 세우고 뒷다리는 구부린 반좌(半座)의 형태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ogize the appearance of Korean Ancient Architecture in view of the Stone Remains from 3 Kingdom Period to Unificated Shilla Period. But in these period, there is no building remains but some stupas and fine arts. Especially, there are many architectural appearance and revealing signature in these Historical Stone remains. Architectural elements which are analogized by stone remains what has value as historical materials by preservation of original form from 3 Kingdom Preiod to Unificated Shilla Period are as follows : 1) Platform, the representative characteristic of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was frame structure and accumulate structure. And circular or square footing stood a same shape column on it is put on the platform. 2) In the case of column, there used entasis column and inclined column and circular chamfer technique was applied on the top side of it. Upper side of column, capital and head pentrating tie that small bearing block was put on the center of it was joined. And longitu야nal rest(長舌) supported a cross beam. Capital and small bearing block had no bottom heel, and heel side was curved and straight. Centered bracket structure was often used, and multi bracket structure is not used yet. Inward incline technique was used. 3) Inward opening pair door which had lintel, threshold, doorjamb was usually used, Fixing stone was used for structural safety, and circular handle and lock was used for decoration. Handrail was used on the edge of wooden floor for decorative effect and safety. 4) Square rafter and circular rafter were used in the same period and so did flying rafter. Double eaves and single eave were used in the same period but, single eave was usually used. In this period, square rafter was usually used. This would be studied more by comparing with Japanese wooden architecture. 5) Hipped roof was used and half-hipped roof was not used yet. In front of th hip, there are small sculpture called Jap-Sang(雜像), and windbell was hang on the end of the hip rafter. Concave roof tile, convex roof tile, round eaver tile, decorative tile at end of roof ridge were used. Lotus style was well used on the face of roof tile for decoration. From the results of this study, wooden architecture of Unificated Shilla period was simple compare to Koryo dynasty and Chosun dynasty but, it had some brilliant character. It was hard work that analogized the form of non-existent wood architecture of Ancient Korean period by restricted stone remains. But, in addition to the results of this study and research of old documentations, more study should be go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