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시인은 사회와 문명에 대한 풍자를 지향했던 초기 시에서 출 발하여 중기 시 이후 ‘못’의 상징에 천착하며 가톨릭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신의 시세계를 갱신해온 ‘못의 시인’이자 ‘못의 사제’로 평가받고 있다. 본 논문은 그러한 김종철의 시세계에서도 특별한 위상을 차지 하고 있는 ‘등신불 시편’에 주목함으로써 김종철의 시세계를 삶과 죽음의 문제를 사유하는 보편적인 ‘종교 시편’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김종철 시인은 2000년대에 접어들어, 초기 시에서 부터 추구해온 ‘성모’적 표상이 아닌 ‘등신불’이라는 성상화된 상징을 통해 자기구원과 인간의 영원한 번뇌인 죽음의 문제를 노래했다. ‘등신 불 시편’들은 시인이 암으로 투병하던 시기에 지장신앙의 성지인 구화산을 여행하면서 썼던 기행시편들로서, 죽음의 번민으로부터의 해방과 진정한 존재의 각성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다. 비록 김종철의 전작을 통해 보면 다소 예외적이고 분량상으로도 적어 보이지만, ‘등신 불’ 시편들은 이러한 불교적 ‘각성’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죽음의 문제와 존재론적 화두를 추구해온 그의 시세계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청담선사의 발자취는 한국 근·현대 불교의 역사이다. 청담선사의 삶은 修行의 연속이었고, 行은 계율의 실천이었다. 願力은 한국불교 의 청정성의 회복이었으며, 가르침은‘마음’을 찾는 길을 제시하였 다. 청담선사의 행적, 업적, 영향은 다양하고 모든 분야에 걸쳐 지대 하다. 본 연구는 그중에서 청담선사의 계율관을 요약 정리하여 어떻 게 마음사상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한국불교도가 이를 어 떻게 인식하고 계승하여야 하는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청담선사는 戒律이 교단의 토대이자 본질적인 요소의 핵심임을 밝 히고 있다. 또한 청정한 戒律을 바탕으로‘마음자리’찾는 修行을 하 여야 한다고 설한다. 청담선사의 戒律觀은 한국불교의 전통성을 확 립하고 불조의 정법을 수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마음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계율관은 당시 한국불교가 처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었고 그 근저에는 철저한 수행을 통해 얻어진 청 담스님의 마음사상이 바탕하고 있다. 청담선사가 주창했던 불교정화운동은 비록 완성을 하지는 못하였 지만 한국불교의 청정성회복과 수행종단으로서의 면모, 看話禪을 중 심으로 하는 禪사상과 마음사상은 철저한 청담선사의 持戒사상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마음’은 청담선사에게 있어서 출가의 동기이자 깨침의 원천이며 교화와 자비행의 원동력이었다. 마음을 찾고 정화 하기 위해서는 持戒를 통한 參禪으로 무명을 타파하고 반야를 실현 하는 見性이 최종목표였다.
본 논문은 청담스님의 시문학 세계에 대한 연구논문이다. 대한불교 조계종의 거목이자, 해동의 큰 별이셨던 청담스님은 1902년 경남 진 주에서 태어났다. 진주산업대학교 재학 중 박포명 스님을 만나 불교 에 관심을 갖고, 스물다섯 살에 경남 고성 옥천사에서 박영호 선사를 은사로 출가했다. 박한영 선사와 만공선사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33세에 깨달음을 얻었다. 해방 이후 한국불교의 현대화 운동을 주도 하는 등 조계종의 초석을 다지는데 선구적 역할을 다 하였다. 흔히“시는 짧고 단순한 언어와 문장으로 복잡한 감성을 표현한다” 라고 말한다. 불교문학 즉 불교선시는 불교의 진리를 가장 효과적이 고 함축적인 표현법으로 드러낸 일체의 언설과 문장이라 하겠다. 그 러나 필자는 직접 스님이 발표한 시를 인용해 분석하는 방법과 더불 어 스님과 교류했던 당대를 대표하는 문학인들과의 교류 속에 나타 난 문학세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보조적으로 스님 의 시를 필요한 만큼 인용해 소개했다. 불교적 세계와 사상을 시적으 로 표현한 것을 분석하는 일은 유의미한 만큼, 그동안 발표된 많은 연구 논문과 중복될 우려도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하고 직접 저작한 시와 함께 간접적으로 교유했던 문학인들도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 다. 이것이 많은 연구자들과의 중복을 피할 수 있는 연구방법이자 스 님의 연구 영역을 넓히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It seems that macro-history has no relationship with family history at first glance. A close look at macro-history reveals that people in the micro-history are helplessly governed by macro-history regardless of their willingness. John Montague, a contemporary Northern Irish poet, has sought to investigate his tragic, painful familial history resulting from the macro-history of Northern Ireland which also turns out to be in predicament in political, religious, and educational terms. He was born in Brooklyn, New York, where his father had to be in exile because of his involvement in political activities in Ulster, Norther Ireland. Yet when Montague was quite young, he was sent to Garvaghey, Northern Ireland, his father's hometown. He was brought up there under the tutelage of his aunt. His early experience of separation from his parents has become the central theme of his poetry along with the political turmoil in Belfast. Thus, a number of his poems address his familial distress as well as his own. This essay seeks to examine how the poet recreates in his poems his painful experience involved in his family members, the victims of Northern Ireland's history. Many poems in Rough Field and Dead Kingdom are evaluated to be successful in terms of maintaining his temper even if they deal with painful matters of his family. As Montague himself reveals in his proses and interviews, his poetry seems to place its focus not only on praise but on liberation from his burdensome family history. To Montague, writing poetry is an inevitable means to overcome harsh realities given to his own family, himself and Northern Irish history. Particularly in his later poems, Montague arrives at reconciliation with the two corresponding histories he had to face.
李資玄이 활동하던 12세기는 벼슬하여 가문을 번창시키는 것을 중요시하는 家門意識과 現實主義的인 世界觀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러한 풍토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던 그는 당시와는 상반된 삶을 살았으며 시세계에도 그의 특성이 나타나고 있다. 이자현 시세계의 특성을 고찰하기 위해 먼저, 그가 젊은 시절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게 되는 이유 즉 상처, 타락한 현실에 대한 염증, 병, 사상적 경향 등을 살펴보았다. 그 중 그의 사상체계는 儒學으로 출발하여 道敎와 佛敎가 융합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벼슬을 버린 후에는 禪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12세기에는 자연에 은둔하거나, 그러한 지향을 보여준 인물들이 적지 않게 출현했다. 흔히 이자현을 정지상․곽여 등과 같은 시세계를 지닌 것으로 파악을 하고 있지만 변별점을 찾을 수 있다. 정지상은 결국 현실로 회귀하고, 곽여는 자연으로 귀의를 꿈꾸지만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자현만 자연에 귀의를 실천하여 자연과 합일을 도모함으로써 그만의 특징적인 면모를 갖게 되었다. 이자현의 시에서 자연은 현실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다. 자연은 현실세계의 탐욕과 고통에서 벗어난 순수하고 청정한 사물들이고, 이자현의 天性을 보존시켜주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그의 현실적 가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결국 동시대에 고통스런 현실을 비판하거나 가슴아파하는 시가 다수 창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시를 창작하지 못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The language of architecture is a kind of tool which helps people to experience the environment not as the thing itself but as a meaningful one. It, gathered by place, constitutes 'genius loci', as the existential structures. It, in other words, gives a thing 'cognitive quality', and serve people to 'dwell' because 'a place is a gathering thing with concrete presence.' Our environment, only when it possesses the language, presents itself as a namable thing or an understood world. Such a meaningful identification is dwelling. The modern world is a complex melting-pot. It is 'complexities' and 'contradiction'. The language of architecture is never created, rather it is selected by needs of the time and the place. In this sense, architectural design means discovery and interpretation of the poetic order of architypal form and style, and the poetic order is a way for people to dwell in the humanistic sense. These reminds me of Martin Heidegger's statement : 'Architecture belongs to poetry, and its purpose is to help man to dwell.'
본고는 澹軒 河禹善(1894~1975)의 생애와 시세계를 고찰할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담헌은 19세기 말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와 근대화의 시대를 거쳐 20세기 후반에 세상을 마쳤다. 한문학이 막을 내린 이후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樂窩 河弘達 이후 남명학을 계승해온 하동군 옥종면 안계마을이 그의 고향이다. 담헌은 젊은 시절 일제의 단발령에 저항하며 경남의 각지를 떠돌아다녔으며, 이후로도 혼란한 시대에 ‘敬義’로 표상되는 남명정신을 근간으로 선비의 본분을 잃지 않으려 평생 노력하였다. 때문에 그의 시에는 심성 수양, 남명에 대한 존숭과 유교지식으로서의 처세, 강점기 시대의 세태에 대한 개탄 등이 들어있으며, 근대화 시기의 서울 풍경도 담겨있다. 요컨대 담헌의 삶과 문학에서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마지막 남명학 계승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은 無何堂 洪柱元 한시의 내용과 형식의 특질, 그리고 표현방식의 특징적 면모에 대해 살펴보려는 것이다.
무하당 한시의 내용적인 특질로서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輓詩가 다른 사람의 경우에 비해 훨씬 많다는 것과 내용과는 상관없이 형식상 특이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서는 대작이 많이 보이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만시는 다른 사람들의 문집에도 흔히 보이는 것이지만, 무하당의 경우 양적으로 많을 뿐만 아니라, 특히 국왕이나 왕비, 공주 등 왕실의 인물들에 대한 만시, 더 나아가서는 왕실과 관련이 깊은 여러 인물들에 대한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사람이 죽었을 때 지은 것 이외에 묘를 옮길 때 지은 遷葬輓詩도 제법 있음을 볼 수 있다.
대작은 고관대작을 위하여 지은 것도 있지만, 일반사대부나 혹은 아녀자들을 위하여 지은 것도 있다. 그리고 고관대작을 대신하여 지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지만, 자신의 아우나 매형 등을 대신하여 지은 것도 있다. 누구의 대작인 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특히 자신의 매형인 李時述을 위하여 지은 것처럼 이름이 드러난 경우도 있다.
무하당 한시의 표현방식으로서의 특징으로는 첫째 대립적인 뜻으로 형성된 단어의 사용이 눈에 많이 띄며, 둘째는 한 인물을 용사하여 이끌어다가 씀에 있어 반복적일 뿐만 아니라 복합적으로 다양하게 사용하였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대립적인 개념어의 사용은 存亡, 存沒, 生死, 幽顯, 去住, 昇沈, 憂寧 등 특히 죽음과 이별에 당면하여 지은 시에 특히 많이 보인다. 이러한 표현방식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개념을 병렬하여 드러냄으로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더욱 강하게 나타내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용사의 복합적인 사용은 晉나라 때의 문인 潘岳에 대한 용사에서 두드러진다. 반악은 한시에서 지방관을 하며 어머니를 板輿에 모시고 명승을 구경시킨 효자, 미모와 함께 32살에 일찍 센머리가 나 더욱 드러나는 老病, 河陽의 도리화로 대표되는 善政, 아내가 죽었을 때 지은 「悼亡詩」에 드러난 슬픔, 「秋興賦」에 드러난 가을의 서글픈 서정 등 여러 가지 면모로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文益成은 1526년에 태어나 1584년 肅川都護府使로 재직 중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인물이다. 그의 문집인 옥동집은 전란으로 잃어버리고 남은 詩文 들을 모은 것으로 그 분량이 매우 적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본고는 특히 관직 생활과 연관된 시를 중심으로, 그 삶의 과정들을 살펴본 것이다. 먼저 승문원과 사섬시에 근무할 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 「禁中題立春」과 「題 司贍寺契軸贈同僚」에서는 관직 생활의 희망, 임금을 송축하는 마음이 작품의 주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洪原縣樓贈別朴公鳴渭」 「次端川上房韻」에서는 향수와 함께 약간 울적한 심사를 내비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澤稚」라는 작품을 들고, 그것이 울산군수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즈음에 지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보았다. 매우 위험한 추정이지만, 관련 자료가 소략한 상황에서 조금 과감한 상상을 해 본 것이다. 마지막으로 숙천도호부사 시절에 지은 「聞雁 有感」은 아마 문익성이 남긴 마직막 시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는 벼슬에서 완전 히 물러나 여생을 마무리할 뜻을 굳힌 상태에서, 다시 고향을 떠나 평안도 숙천 에 부임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삶을 마쳤다. 이 시에서는 나 라를 걱정하는 마음과 함께 인생의 종착점을 목전에 둔 비장함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