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역사의 현장에 편재한 모순대립은 예이츠의 마음속에 비극적 서정 성을 잉태하는 씨앗으로 작동했다. 비극적 서정성은 그가 철학적 사색을 거치면서 ‘비극적 황홀’로 귀결되어 재현되었다. 이를 시에 재현하는 것은 그의 큰 관심사였다. 그 가 강조한 ‘비극적 황홀’은 에드먼드 버크가 주장한 ‘안도감이 수반된 두려움’과 같은 맥락으로 숭고의 다른 이름이다. 본 논문의 목적은 버크의 숭고의 관념을 예이츠의 다섯 시편에 적용하여 예이츠 시에 재현된 ‘비극적 황홀’의 의미를 확인하면서, 숭고를 논증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숭고와 숭고의 역개념인 역숭고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탐구하여 음악이론과 대중음악담론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연구이다. 이 연구는 음악적 숭고 개념을 다루는 음악이론과 대중음악담론의 최근 연구를 분석하고, 현재 음악학 담론의 관점에서 칸트의 숭고 개념 과장 파울의 역숭고 개념을 재해석함으로써 음악적 숭고와 역숭고의 이론적, 이념적 성격을 파악 한다. 나아가 음악분석을 숭고와 역숭고의 체험으로 재개념화하여 설명하는 과정을 통해 현재의 음악분석의 문제적 측면에 대해 재고하는 한편, 음악이론과 대중음악담론이 음악 자체라는 문제적 대상을 다루는 방식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두담론의 접점과 차이를 구체화하고자 한다.
숭고는 미학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개념으로서, 대상에 대해 명상할 때 에 우리의 정신과 육체의 정서적 감각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롱자이너스는 숭고 를 고양된 스타일을 재현하는 문학작품에서의 “숭고한 열정의 존재”로 정의하고, 에드 먼드 버크는 거리감을 두고 자연의 파괴적 위력에 연관된 숭고의 경험에서의 고통과 즐거움에 초점을 맞추어 공포와 환희의 균형을 맞춘다. 칸트는 버크의 공포와 환희의 기이한 형태를 결합하고, 라깡은 프로이트와 칸트의 문맥에서 극단과 무한을 추구하여, 칸트의 숭고를 넘어서는 승화의 개념을 구성했다. 본 논문은 라깡의 숭고와 승화의 문맥에서 예이츠의 “비극적 환희”에 재현된 숭고를 예이츠의 시에서 찾아, 예이츠의 숭고의 시학을 살펴본다.
본 논문은 『꿈꾸는 뼈들』과 『이머의 유일한 질투』에서 유령의 시학과 어떻게 유령들이 숭고함의 감각과 관련이 있는지 살펴본다. 주인공들은 갈등의 감정으 로 가득 찬 꿈과 같은 상태로 극의 결말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본 논문은 에드먼드 버크의 고통과 공포의 개념을 활용하여 예이츠 극에서의 숭고함을 설명하고자 한다.
Both religions and literature/the arts have the same purpose--to liberate our mind from the limited ontological domain of the ego and reach infinity, the dimension of genuine love, and thus to attain true wisdom beyond the binary opposition of will, intention, and concepts that cause conflicts and struggle. The goal of religions and literature is to make us to deeply experience the real Self, which is the ultimate reality or universal Truth. This paper first discusses the Buddhist notion of Emptiness and Levinas, whose theory embraces Judaism and Christianity. Then the Kantian sublime is discussed as the most profound aesthetic impetus on the reader’s mind. The last part presents my reading of Stevenson’s Jekyll and Hyde. By showing the disappearance of the polar opposites, Jecyll and Hyde, the novella leads the reader to the sphere of the sublime where the reader experiences the spiritual feeling that detaches her/him from ontological perception and conceptualization.
예이츠와 엘리엇은 동시대 시인이면서도 별개의 시인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유사성이 매우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시의 대상 표현에 있어서 “시적 숭고성”을 얻어내고 있다. 먼저 예이츠는 이를 위하여 고대의 도시 중에 하나인 “비잔티움”을 선택하는 가하면 엘리엇은 “시간”의 이동이라는 개념에 의지하고 있다. ‘숭고성’이라는 롱기누스의 정의에 어울리게 시적 표현의 탁월성과 우수성을 이 두 시인 모두 잘 보여주고 있다.
In the Harry Potter Series, the magical power wizards and witches pursue avails its potential for the everlasting dream of eternal life as we used to see in religion. The dream comes true where magic makes it real as wizards desire to. Voldemort, Dumbledore, and Harry are described once as such. Voldemort tries to use magic to live eternally with the legendary philosopher’s stone as we have long known in alchemy, including ‘seven horcruxes’ into which Voldemort stores part of his soul to incarnate whenever he wants to. Dumbledore has the same dream with the three ‘deathly hallows’ he once possesses on his own; he finally changes his mind after he observes the death of his mother and sister. A prophecy reveals Harry as the Chosen One who defeats Voldemort, freeing the world from prevailing evil power; he rises after he willingly dies at the end of the story, just as Jesus Christ did.Religious significance in magic and the occult, including alchemy, astrology, clairvoyance, numerology, is seen in that Harry Potter puts together a vision of Christianity in the world of magic. In the story, magical power makes the vision possible on material basis, seemingly in religious significance, freeing body and spirit by sublime love in family, friends, and then people in the modern society. In the story, courage, sacrifice, forgiveness, love, friendship, fellowship, and freedom in body and spirit appear to be Christian virtues even in terms of the magical power Harry uses throughout the whole story in which evils are finally defeated and goods are raised.
본 논문은 서양의 문학과 예술의 비평역사에서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중심적 문제로 다루어져 온 숭고미를 동양의 종교인 불교의 철학, 특히 선(챈, 젠)불교와 접목시켜 더욱 발전시키는 데에 그 목적을 둔다. 문학과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에 경험하게 되는 향유(enjoyment; jouissance)가 가장 고조되는 순간이 숭고미의 순간이라 함이 맞는 말일 것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보면 독자의 생각을 형성하는 이분법의 양변이 없어지고 중도를 통해 공에 접근하는 경험이다. 유뿐 아니라 무의 개념도 초월하여 개념이 성립하지 못하는 영역을 잠시나마 접하는 경험이다. 이러한 목적과 취지로, 본 논문은 우선 데리다, 라캉, 들뢰즈 등의 이론을 조명함으로써 왜 레비나스의 윤리학이 자아의 바깥인 타자를 가장 근본적으로 접근하고 동양철학과 가장 근접해있는 이론인가를 살펴본다. 그 다음은 불교철학에서의 개념들을 유대교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받은 철학자인 레비나스의 생각과 접목시켜서 서양의 문학비평이론에 위치시키는 작업이 뒤따른다. 서양의 절대 신과 불교의 공의 개념의 개념을 비교하며, 그 툴이 생각과 언어가 미치지 못하는 가장 깊은 차원에서는 하나의 뜻을 지녔음을 설명한다. 이러한 점에서 본 논문은 생각과 체제의 차원에서는 엄격히 다른 종교들이 결국 추구하는 바는 같고 그것이 문학의 목표이기도 함을 논의하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순수자아"는 불교의 "진아" 또는 "참나"와 같으며, 그것은 가장 깊은 내면에서 자아가 자기해체를 하며 절대적으로 자신의 외계(단순히 무시 받는 남으로서의 타자가 아닌)인 타자를 직면하는 자아이다. 문학서적을 읽음으로써 독자가 생각의 이분법을 넘어 자신의 외계를 일견하는 것은 이러한 종교적 의미보다는 작은 개념으로서, 텍스트가 마치 선불교의 "공안"과 같은 구조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텍스트의 총체성을 해체시키는 읽기는 마치 이성의 힘, 생각의 차원 이상을 목표로 하는 선문답과 같은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이다. 독자는 문학텍스트를 읽음으로써 향유와 숭고미를 경험할 때 그 의식이 텍스트와 하나가 되며, 텍스트의 총체성 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규정하는 자아의 틀까지 해체하게 됨으로, 이것은 곧 (언어와 행동의 틀을 가지고 있는 "도덕"이 아닌) 절대윤리를 대변하는 것이 된다. 화엄경 등에 나오는 공과 무한에 대한 말들이 어떻게 현재의 포스트모던 윤리학과 그것을 이용한 문학비평 형성의 발전에 공헌될 수 있는가가 논의된다. 결국 독자의 문학택스트 읽기의 최종점은 부처의 마음과 지혜에 도달하는 것인데, 큰 규모가 아니라 단지 섬광과 같이 그 무한한 공의 상태를 숭고미를 통해 맛보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필자의 생각인 "숭고주체"가 설명된다.
This article examines Yeats’s laughter which operates as an overtone, undercurrent, or a keynote throughout all his work. We discover that his comic aspects betray various meanings or nuances. First, the comic elements in Yeats are explosive in that they function as a means of disorienting and transgressing social regulations, and social categories like class, gender, race within a social system. Moreover, laughing escapes from and discards the established system at a burst as the disproportionate laughter of King Goll in “The Madness of King Goll.” Furthermore, Tom’s laugh in “Tom O’Roughley” concentrates itself on the aimless joy as Derrida says that laughing laughs at itself like a sovereign operation. Secondly, the laughing in Yeats is conveyed in the degradation of the dignified or exalted objects. Freud says that the increased expenditure of the solemn restraint discharges vacantly when it does not satisfy its higher purpose. Sometimes the lightest thing can acquire superiority over the weightiest by pulling down or aerification which makes the solemnity unable to retain its dignity. In “Crazy Jane Reproved,” Jane challenges the omnipotent God with such lighthearted refrain as fol de rol. The technique of pulling down applies to the depreciation of national monument or eternal art. Yeats knows well that Maud Gonne will be slighted by the coming generations and that the great Irish patriots, O’Donell, Emmet, and Parnell can also be mocked severely. Likewise the eternal art as the marble of Callimachus cannot avoid damages from weightless wind. Yet, for Yeats laughing is not always easy to express; he cannot release any laughter encountering with the same situation as effortless laughing was possible once. In “The Apparitions,” Yeats confesses that he required all his energies to disperse the fright of an apparition which he could easily have laughed at last time. On the other hand, there is an occasion in which the childish and vulgar comic changes to utter solemnity like a revolution. Yeats examines the transformation of the middle class carefully from indulging in silly talks to generating terrible beauty in “Easter 1916.” The trivial levity turns into the sublime inconceivably without intention. Lastly Yeats proposes a peculiar and paradoxical laughter which is difficult to vocalize as in “A Dialogue of Self and Soul.” This sort of laugh cannot surpass the burden of secular life, but great sweetness like Nietzsche’s tragic joy can break out even if the afflictions of human life make it distor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