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한국학 연구를 수행하는 학문집단이 내면적으로 지녀야 할 규범에 대한 검토 작업이다. 그러한 논의 지평은 한국학이 아시아의 연대의식 구축을 위해서 독자적이고 자립적인 ‘자치적 학문공동체’의 모습으로 등장되어야 한다는 것에 설정된다. 이러한 논의 안에서 오리엔탈리즘이나 옥시덴탈리즘의 시각은‘아시아적 연대의식’구축의 저해 요소로 전제된다. 본 논문은 두 시각에 내재한 근본적 문제가 무엇인가를 검토하면서, 그 극복에 대한 단초를 시론적 형태로 제시하는 것에 그 초점을 맞춘다. 그러한 시도는 본 논문 안에서 두 가지의 방법에 의해 제시된다. 첫째는 동서의 기존 가치에 상호 간의 가치 덕목을 보충하는 교차적 상보작업이다. 둘째는 상호 전통문화에 대한 비(非)대응적, 혹은 다(多)대응적인 눈높이를 지니게 하는 일이다. 이러한 작업은 동·서양의 동등한 상호이해를 전제로 옥시덴탈리즘과 오리엔탈리즘에 들어있는 권력관계를 지양하는 것에 들어있다. 이러한 시도는 학문 차원의 미시적 연구가 수행할 의무이자, 그러한 의무 이행은 공동체적 연대에서만 가능하다. 서양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위해서 먼저 아시아에서의 올바른 연대가 필요하며, 이러한 작업은 한국학 탐구의 규범적 태도를 설정하는 기준으로까지 부상되어야 할 것이다.
본 논문은 청나라 문인 서진이 창작한 조선죽지사를 연구대상으로 삼아, 그의 작품 중에 드러난 사실적(寫實的)인 양상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서진은 조선을 대상으로 한 죽지사를 가장 많이 남긴 청나라 문인이다. 지금까지 전해온 그의 조선죽지사 작품은 무려 40수가 되는데 주로 조선의 풍속과 사신 접대 예절을 묘사하였다. 서진의 조선죽지사는 외국을 소재로 하였으며, 전대(前代)의 죽지사보다 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양상을 보여 주었다. 이런 양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시를 비평할 때 쓰이는 풍격을 통해 논의를 전개하였다. 먼저 서진과 그의 조선죽지사 작품을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그 다음으로 시학 비평서인 ��이십사시품��에 있는‘실경’의 풍격을 설명하였다. ‘실경’은 진실한 경지인데, 이는 진실한 풍경과 감정을 포섭하는 개념으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요점이다. 이어 서진의 조선죽지사에 실경의 풍격을 적용해 보았다. 이런 작업을 통해 서진의 작품에 드러내고 있는 사실적인 양상을 밝히고 그런 양상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고찰해 보았다. 그러므로 서진의 조선죽지사 가운데 실경의 풍격을 갖추는 부분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역사소설은 지나간 과거를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작가가 처한 당대의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작가가 처한 사회의 정치문화 콘텍스트, 그리고 작가의 아이덴티티, 역사정보의 장악 정도, 주관적 상상력의 다소 등 주객관적조건의 제약을 받게 마련이다. 본 논문은 우리민족의 이민을 다룬 소설들 중에서 안수길, 리근전, 최홍일이라는 서로 다른 국적과 이념을 가진 창작주체가 각이한 년대에 창작한 <북간도>, <고난의 년대>, <눈물젖은 두만강>을 비교하면서 이들이 어떤 관점에서 역사를 파악하고 그것을 재구성하고 형상화 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작품들은 모두 민족의 정체성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안수길의 <북간도>는 민족주의라는 이념하에서 민족의 국토 회복과 주권회복이라는 어마어마한 주제를 다루고 있고, 리근전의 <고난의 년대>는 계급투쟁이라는 이념하에서 조선이주민의 ‘간도 뿌리내리기’와 ‘중국소수민족으로 되기’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최홍일의 <눈물젖은 두만강>은 이주민의 생활사라는 이념의 세속화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중국 내에는 대규모적인 인구 이동이 나타나 원래 중국 동북 3성에 모여 살던 조선족들은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연해개방 도시로, 해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전국 인구 보편조사의 통계에 의하면 1990년 전국 조선족 인구는 192.3만 명 중 98.2%가 동북3성(東北三省)에 살고 있었으나 2000년 통계에는 동북 3성에 사는 인구가 92.2%로 줄었다. 이는 호적을 기본으로 하는 인구보편조사의 통계로서 호적은 고향에 있으나 실제로 고향을 떠난 인구는 훨씬 많다. 지금도 조선족 인구 이동은 진행 중이며 새로운 지역에서 집거(集居)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본고는 중국의 조선족 집거지구 연변, 산재지구 청도(새로운 집거지구라는 주장도 있으나 연변대상 산재지구로 한정함), 잡거지구 북경, 할빈 3곳을 대상으로 한 조선족 언어 사용 실태에 대한 연구이다. 본고를 위해 3지역 조선족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연변 177명, 회수율 89%, 청도 405명, 회수율 81%,북경, 할빈 89명, 회수율 89%). 3개 지역 조선족들의 언어능력과 언어태도에 대해 알아 본 결과 다음과 같은 점들이 발견되었다. 언어 능력 면에서는 첫째, 집거, 산재지구 순으로 조선족들의 조선말 보존정도가 비교적 높은 반면 잡거지구, 산재지구 순으로 조선족들의 중국어 능력이 비교적 높게 나타났다. 둘째, 구사력과 문장력에서는 조선말이 중국어에 비해 우세하나 독해력 면에서는 중국어도 높게 나타났다. 언어 태도 면에서는 첫째, 3개 지역 조선족들은 대부분 조선말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편이다. 둘째, 세대별로는 학생 세대는 중국어 선호도가 높고 동화현상이 심하며 부모 세대로 갈수록 조선말 선호도가 높았다. 셋째, 본인, 자녀, 배우자에 대한 희망언어 태도에서는 ‘본인’과 ‘자녀’의 희망언어는 중국말이 높고, ‘배우자’의 희망언어는 조선말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넷째, 앞으로 조선족 사회에 많이 사용되길 바라는 언어(기대언어)에 대한 응답에서는 조선말이 가장 많은 반면에 쓰이게 될 것 같은 언어(예측 언어)에서는 산재, 잡거지구에서 서울말이 많이 선택되었다. 위의 결과들은 세대별, 거주지역별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논문에서는 지난 50년 동안 몽골에서 한국어 연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아보고자 먼저 1959년에 몽골에서 발표된 홍기문의 논문을 소개하고, 한국어 연구, 훈민정음과 몽골족 문자들과의 관계 연구, 한국어 교육을 위한 연구로 나누어 그간의 연구 성과를 살폈다. 홍기문은 남북한을 통틀어 최초로 몽골을 방문한 학자로 한국어와 몽골어에 대해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13-14세기에 일어난 한국어와 몽골어의 접촉이 한국인의 언어와 문자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한국어 연구는 계통, 문법, 어휘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계통 문제와 어휘, 특히 한국어 속의 몽골어 차용어에 대해서는 수미야바타르 교수가 연구했고, 몽골어와 한국어의 문법 비교는 젊은 연구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훈민정음과 몽골족 문자들과의 관계는 샥다르수렝 교수가 심도 있게 연구했고, 한국어 교육을 위한 연구는 샌빌렉트 교수가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몽골에서의 한국어 연구는 기존의 알타이어학 연구에서 한국어와 몽골어에 대한 전문지식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점들을 보완하고, 두 언어의 친근 관계를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밝히는데 일조하리라고 기대된다. 몽골족의 문자들과 훈민정음의 관계에 대한 연구도 앞으로의 성과가 기대되며 최근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어와 몽골어의 문법 비교는 몽골학생들을 위한 한국어 교육과 한국어 교재 개발에도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한국어학 자료실 설치와 한국어 연구자들의 연구여건 개선을 위한 지원은 가장 시급한 과제로 남았다.
호주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려는 학생들은 절대적 수치에서 아직 많지 않지만, 최근에는 이전에 비해 증가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호주 연방 정부의 정책적 재정적 지원은 물론, 한국어 교육 유관기관들의 유기적 협력이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호주의 한국어 교육에서 특기할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육과정을 학습자 특성에 따라 외국어과정, 헤리티지과정, 모국어과정으로 세분화함으로써 보다 효율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게 된다. 둘째, NALSSP으로 대표되는 호주 정부의 아시아 언어 진흥책으로 한국어를 아시아 4대 언어에 포함시켜 장려함으로써, 한국어가 초․중등학교에서 활성화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한국어 교육이 이러한 유리한 환경에 있지만, 호주 사회에 아직 안정적으로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현지 한국어 교육 관계자들의 노력이 있어야 하겠지만, 이에 못지않게 한국 정부의 투자와 지원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한국에 대한 이미지 개선 등 장기적인 발전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물론,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조율할 수 있는 기구의 설립이 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 국내적으로는 다양한 지원 기관을 하나의 통합 지원 기관으로 만들 필요가 있으며, 국외적으로는 한국문화원, 한국교육원, 세종학당 등의 기관들을 합치거나, 각각의 성격에 맞는 기능을 부여해 중복되는 일이 없도록 할 필요가 있다. 현지의 한국어 관련 중심 기관을 통하여 호주의 상황에 맞는 전략을 세우고, 이를 국내에 있는 독립 기관이 지원하는 방식으로 한국어 내지 한국학의 보급을 시도할 때 전시성 행사나 중복 지원 같은 폐해를 예방하고 발전된 한국의 위상에 걸맞는 이미지 변화 등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본 연구는 19세기에 그려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가 당대와 현대를 가로지르면서 시대적, 문화적 차이를 통해 수용된 다층성을 밝히고자 한다. 김정희는 조선후기의 뛰어나 서화가(書畵家)이자 금석학자(金石學者)이자 실학자(實學者)이다. 그는 1844년, 그의 나이 58세 때에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때 김정희를 기억해준 유일한 제자, 역관 ‘李尙迪’을 기리는 마음으로 <세한도>를 그렸다. 이 <세한도>는 네 종류의 글로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 그 첫 번째는 김정희가 이상적을 기리기 위한 발문이다. 두 번째는 이상적이 김정희의 의사와 무관하게 정치적인 이유로 청나라 명사 16인에게 보여주고 받은 찬문찬시이다. 세 번째는 광복 후 김석준, 오세창, 이시영이 더한 찬문찬시이다. 네 번째는 황지우를 비롯한 여러 시인이 남긴 현대시이다. 롤랑 바르트가 제기한 것처럼, 하나의 기호는 2차 의미체계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해낸다. 그런 측면에서 바라볼 때,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오늘날 황지우의 <유리끼운 세한도>에 영향을 미쳤다. 추사 김정희가 <세한도>를 통해 자신에게 의리를 지킨 이상적을 기억하며 19세기의 ‘의’를 밝혔다면, 황지우는 추사 <세한도>를 20세기에 불러내어 현 시대의 문제와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 즉 거대담론이 사라진 것처럼 인식된 현실세계에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다시금 불러 세워, 아직은 사회적 문제, 거대담론의 문제로 행동해야할 때임을 드러냈던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당대 개별적 작품성뿐만 아니라 시대를 넘나드는 시대사적 의의를 지닌다. 이를 드러낸 현대 시인이 바로 황지우이다.
본 논문은 그동안 주류를 이루던 성서의 역사비평이 텍스트 안에서 머무는 한계성을 깨닫게 되어 최종적인 본문에 중심을 두는 성서의 문학적-서사비평의 연구의 목적에 있다. 그 중에서 요한복음의 서사읽기는 다른 성서들보다 더 풍부한 저자와 독자 간의 상호 경험을 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는 상징, 은유, 아이러니 등 많은 문학적인 요소가 있다. 요한의 저자는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를 통하여 요한복음 전체주제가 되는 예수의 정체성 즉, 기독론을 말해주고자 한다. 표적만 보고 믿는 유대인의 대표가 되는 니고데모의 인물 설정은 요한 저자의 의도이다. 니고데모의 이해하지 못한 질문과 예수의 대답을 통하여 예수의 정체성을 독자들에게 ‘위로부터’, ‘하늘로 부터’의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짐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 ‘거듭남’은 물과 성령으로 이루어짐을 말하지만 여전이 니고데모는 ‘거듭남’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니고데모는 요한복음 내러티브에서 등장하지만 유대인의 대표성을 지닌 인물로 본문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인물이다.
이현필은 호남의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요 성자로 알려진 이세종, 최흥종, 강순명의 영향을 입고 ‘예수를 잘 믿기 위한 순수 신앙 운동’을 위해 수도원 공동체를 한국에 최초로 설립한 그리스도교 수도원운동의 선구자이다. 그가 설립한 동광원은 ‘예수를 닮아 예수처럼 살아보자’는 순수 신앙운동을 하는 공동체로서 어느 교파에도 소속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제자들이 자신을 우상화 하면서 고기와 약을 먹지 않는 자신의 행위를 동광원의 계율로 만들어 율법이 되어버린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예수보다 자신이 높아진 역적이라고 선언하면서 스스로 생선국물을 마시고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음으로 예수의 보혈만이 구원을 가져온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면서 율법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해 준 지도자였다. 이렇게 살았던 이현필을 당시 한국교회는 이단이라고 정죄하였는데, 그 근거는 그의 강론을 들은 교인들이 교회를 이탈하므로 교세가 약해지자 목회자들이 퍼트린 유언비어에 기인한다. 즉 성서적인 문제가 아닌 기득권 세력의 횡포, 당시 교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신비주의 영성과 철저한 금욕주의적인 삶, 호남 신비주의 선구자인 이세종의 제자라는 이유 때문에 비주류 세력으로 보는 오해 때문이었다. 끝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현필의 순수 신앙운동은 한국교회사 특히 호남교회사에서 소홀히 다룰 수 없는 중요한 운동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개혁과 갱신의 방향을 이현필의 교회관, 순수 신앙운동의 정신, 더 나아가 그의 신비주의 영성에서 찾아야 초대교회와 같은 순수성을 회복 할 수 있다고 제언하고 싶다. 특히 이현필의 순수 신앙운동의 정신인 ‘예수를 닮아 예수처럼 살자’는 주장은 한국교회에 ‘제자도’를 소개한 옥한흠의 제자훈련 모토와 맥을 같이한다고 보면서 이 부분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