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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2004.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분명 페터스의 지도는 새로운 지도가 아니며, 그가 주장하는 10가지 신지도학 기준 역시 정적성과 장방형 경위성망을 만족할 경우 대부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고, 나머지 역시 모호하고 주관적인 기준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페터스는 메르카토르 도법이 지닌 약점을 집요하게 과대 선전하면서 자신의 지도가 지닌 평등성을 메르카토르 지도의 유럽중심 식민제국성과 극적으로 대비시켰다. 단지 선전에 탁월한 페터스의 개인적 능력이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만으로 페터스 도법의 대유행을 설명할 수 없다. 어쩌면 페터스는 지도가 지니는 상징성을 훌륭하게 간파하여 이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전파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결국 페터스 논쟁은 정확성이라는 기술적 관점이 아니라 지도의 상대적 가치에 근거해 지도학의 본질에 대한 논쟁을 유발시켰다는 점에서 지도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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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2003.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m 18. Jahrhundert stritt man um allgemeingültige Kriterien für die Kunstkritik, welche ebenda aufzblühen begann. Im Zent ru, dieser Auseinandersetzung die uns als "Laokoon-streit" bekannt ist, befanden sich Johann Winckelmann einerse its und ein französischet Bildhauet Etienne-Maurice Falconet(1716-1791) andererseits. Die beiden waren von gamz unterschied lichen Kunstideen überzeugt. Obwohl sie niemals zusammentraf, fielen sie in eine hegtige schriftliche Diskussion. Wie bekannt, vertrat Winckelmann den aufkommenden Klassizismus. Er setzte die griechische Kunst auf die höchste Rangstufe auf und bezeichnet sie als Träger der sogenannten "edlen Einfalt und stillen Größe, doe sonst in der Natur verborgen bleibe. Nach Winckelmann sollte der Künstler die griechischen Vorbilder wie Apollo von Belvedere und Laokoon nachahmen, um das wrsentlich Schöne zu erlernen. Falconet übte eine scharfe Kritik gegen die Meinung Winckelmanns und die Diletantismus in der Kunstkritik aus. Selbst als Theoretiker warf er vor, dass die Klassizisten um ihr dogmatisch struktuiertes Lehrgebäude willen alle andere Eigenschagten der Kunst sowie Kunstwerke übersahen und ihre Apotheose der klassischen Kunst auf die Entwicklung der Kunst eher als Hindernis wirkte. Im besonderen Hinblick auf den Aus druck der menschlichen Leidenschaft distanzierte Falconet sich von der Lehrmeinung des Klassizismus, nämlich Zurüakhaltung derselben Leidenschaft wegen der idealen Schönheit. Vor dem Laokoon teilten Falconet und die Klassizisten ihre Meinung unüberbrückbat coneinander. Für diese war der Laokoon die Repräsenta- tion des erhabenen Menschen, der leidet, ohne seinen Affekt zu en- thüllen. Im Gegensatz sah Falconet in demselben Werk einen erlungenen Ausdruck des menschlichen Gefühls. Sein Debütwerk <Milon von Croton> ist also die Visualisierung seiner Kunstauffassung. Unter Einfluss Pierre Pugets sowie seines Lehrers Jean-Baptiste Lemoyne bemüht er sich darum, den Ausdruck der menschlichen Leidenschaft durch kunsttechnische Lestung und wissensch aftliche Forschung zu erstarken. Daraus ergab sich die expressive Ausdrucksform des Affekts. In diesem Fall verband sich Falconet mit der Tradition des barocken Kunstwollens, aber er ging einen Schritt weiter, indem er die Ausdrucksweise noch realistischer und lebendiger zu machen vermag. Faconet war vielleicht der einzige Künstler, der Vorteile der barocken Kunst ausnut zen konnte, ohne dabei die klassische und realistische Formensprache zu verlieren. Dutch sein Werk und seine theoret ischen Schriften eröffnete er neue Prinzipien sowohl für die Kunstpraxis als auch für die Kunstkritik, deren wesentliche Sinn jedoch erst in der Romantil anerkannt wur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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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2002.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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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2002.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7,000원
        45.
        2002.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6,100원
        46.
        2000.05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5,400원
        47.
        1997.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8,900원
        50.
        1992.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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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2023.05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A Study on the Discussion for the Indefendent Charater and the No-cause Character of the Real Rights Behavior The most controversial topic in the Korean civil law academic circle so far is the theory of Real Rights Behavior, which has centered on the the Indefendent Charater and the No-cause Character of Real Rrights Behavior. The core of the controversy over the No-cause Character of Real Rights Behavior is the legal interest of securing transaction safety, and the theoretical basis necessary to argue whether the No-cause Character of Real Rights Behavior is the recognition of the identity of Real Rights Behavior. In the end, the fierce debate, which has been held for the practical legal interest of securing transaction safety, is believed to be due to the lack of a realistic legal system and its regulations, and the unreasonable application of uncritical foreign theories. In other words, the Auflassung system to supplement the formalism examination system of registration in Germany secured transaction safety by strengthening the function of strengthening the credibility of registration. However, in the absence of such systems and related laws, the Korean civil law community borrowed German theories and applied them excessively, and constant debate reproduced them. In order to protect the realistic legal interests of transaction safety and to establish a consistent theoretical system in academia, it is necessary to supplement related systems through legislation
        52.
        2022.06 KCI 등재후보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혼합형 학습 환경에서 하브루타를 활용한 한국어 수업 모형을 제시하고 이를 적용한 교수 학습 방안을 모색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하브루타 이론을 토대로 학문 목적 유학생을 위한 ‘논쟁 중심 하브루 타 수업’을 모형을 설계하고 온라인-오프라인 학습 환경에서 수업을 적용 하였다. 학습자의 인터뷰를 통해 ’의사소통 말하기 능력 향상‘, ’사고력 확 장‘, ’자기 주도적 학습‘, ’활발한 상호작용‘ 효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학문 목적 한국어 학습자를 위한 하브루타 수업 모형을 제시하여 혼합형 학습 환경에서 활발한 상호작용을 유도할 수 있는 수업 모형을 제시했다는 점에 서 의의가 있다.
        53.
        202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먼저 국가 안보 위기와 급변하는 정치 상황에서 교회가 평화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한국전쟁 발발의 국제적 영향과 냉전체제 내에서 전쟁의 위협에 대응하여 서독의 외교정책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살펴본다. 또한 서독 총리 아데나워가 추진한 서독 재무장 정책이 서독 사회와 독일 개신교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추적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독일인들은 독일에서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까 두려워했다. 이러한 이유로 서독 수상 아데나워는 서독의 재무장을 추진했다. 재무장 정책에 대한 서독의 의견은 엇갈렸다. 독일 개신교회 내부에서도 서독의 재무장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마틴 니묄러와 그의 그룹은 아데나워의 재무장 정책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다른 그룹은 먼저 서독이 재무장하고 유럽 안보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독일 개신교회의 논쟁 속에서 이 연구는 교회가 평화를 위해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를 연구한다.
        54.
        2020.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중등교사의 논쟁학습 실천 지향성에 따른 논쟁학습 실천 장애 인식이 어떠한지를 탐구하여 논쟁학습 중심 민주시민교육을 현장에 적용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보이텔스 바흐 합의’의 내용이 논쟁학습의 실천 원리와 정합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서울특별시교육청교육연 구정보원과 서울교육정책연구소(2017)에서 위탁받아 시행된 「보이텔스바흐 합의 정신에 기반한 학교 시민교육 현장 적용 방안 연구」에서 수집된 자료를 이차분석(secondary analysis)하였다.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핵심 내용에 대한 지지 정도에 기반한 논쟁학습 실천 지향성을 분류하여, 조사 대상자는 ‘적극적/보통/소극적’ 논쟁학습 실천 지향성 집단으로 범주화되었다. 일원분산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소극적 실천 지향성 집단일수록 논쟁학습 내용이 교육과정과 교재 내용과의 부합성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며 논쟁학습의 실천을 교사의 정치적 중립 의무 위배 가능성으로 인식하는 경향성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둘째, 적극적 실천 지향성 집단일수록 논쟁학습 실행에 대한 제도적 제한뿐만 아니라 교사 신변의 불안정성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는데, 이는 외적 장애에 민감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적극적 실천 지향성 집단이 논쟁학습에 대하여 부분적인 교수효 능감을 인식하였다. 본 연구는 조사대상이 서울시 중등 교사에 한정되어 있으나 논쟁학습의 실행 지향성 수준에 따른 논쟁학습 장애에 대한 교사의 인식 양태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므로 향후 민주 시민교육 실천 확대를 위한 방안도 이에 따라 서로 차별화될 필요가 있다.
        55.
        2018.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1521-22년 비텐베르크에서 일어난 칼슈타트와 루터의 논쟁을 분석하고, 이러한 갈등을 어떤 관점에서 해석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 논쟁의 근본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고찰하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먼저 1521-22년 비텐베르크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한 후, 칼슈타트의 「성상의 제거에 관하여」(1522년 1월)와 루터의 「사순절 설교」(1522년 3월)를 중심으로 두 사람의 논쟁의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또 다시 이어진 칼슈타트의「개혁을 천천히 진행해야 하는가?」(1524년 11월)에 나타난 루터에 대한 비판과 루터의 「천상의 예언자들 에 반대하여」(1525년)에 드러난 칼슈타트에 대한 논박을 검토하였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루터가 이 논쟁에서 보수적인 입장으로 선회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개연성 있는 대답들을 제안하였다. 지금까지 두 사람의 갈등의 핵심적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었다. 개혁의 속도와 방법을 둘러싼 전략적 차이였다는 주장, 칭의를 강조하는 루터와 중생을 강조하는 칼슈타트의 신학적 차이였다는 주장, 그리스도인의 영성형성의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 등이 두 사람의 불일치의 원인으로 제시되었다. 그렇지만 필자는 그런 여러 가지 차이점도 중요하지만 더 기본적으로는 종교개혁의 대의를 지키기 위해 작센 선제후의 입장에 맞추려는 루터의 보수적 입장으로의 변화가 두 사람의 논쟁의 밑바닥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칼슈타트가 이상주의자였다면, 루터는 현실주의자였다. 칼슈타트가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면, 루터는 정치적 판단을 내리고자 하였다. 종교개혁 초기 루터와 칼슈타트의 논쟁은 오늘의 교회개혁을 위한 통찰력을 제시해 줄뿐만 아니라 개혁을 위한 논리의 근거와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해 줄 것이다.
        56.
        2018.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1980년대 이후 음악학 분야의 가장 뜨거운 논쟁으로 급부상한 ‘프로그램음악’의 개념 규정에 관한 대표적인 주장들을 조망하고 있다. 그중에서 특히 1) 창작에 영향을 준작곡가의 음악외적인 ‘내적 정서’를 작품의 프로그램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2) 그리고 이 ‘내적 정서’가 반드시 서면으로 작성되고 대외적으로 ‘공개’되어야만 프로그램으로 간주되는가?, 3) 그리고 작품의 프로그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곡가가 당시의 주변상황 때문에 그것을 ‘공개적으로 제시’하지 않거나, 4) 혹은 작곡가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침묵’한 음악외적 요소(즉 프로그램)를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 등을 비판적으로 논의하였다.
        57.
        2017.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성화상 논쟁에 대하여 역사(historiography)와 사상(philosophy and methodology)이라는 두 개의 주제를 동시에 다룬 연구이다. 이러한 점 에서 성화상 논쟁에 대한 기존의 연구와 차별되는 독특성을 띠고 있다. 본 연구는 ‘이미지 이데올로기(image ideology)’ 측면에서 8세기 비잔틴 시대의 성화상 논쟁의 발단 원인을 규명하는 데 목적을 두고 진행하였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성화상 논쟁에 관한 연구는 논쟁 발단의 외면적 요인을 중점적으로 다룬 반면, 본 논문은 그 내면적 요인을 밝히는데 초점을 맞췄다. 연구의 내실을 기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이미지 이데올로기’라는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여 해석의 툴(tool)로 사용하였다. ‘이미지 이데올로기’는 이 미지의 속성으로서의 이데올로기(ideology as an attribute of image)와 ‘이 미지의 이미지’의 속성으로서의 이데올로기(ideology as an attribute of image of image)를 동시에 지닌 해석체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이미지가 본 래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이미지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성화상 논쟁의 발단 원인을 조명해 본 결 과, 8세기 비잔틴 시대의 성화상 논쟁은 성화상 파괴를 주도하였던 황제 레오 3세(Leo Ⅲ, 717-41 재위)와 성화상 숭배를 옹호하였던 교황 그레고 리우스 2세(Gregorius Ⅱ, 715-31 재위)간의 이미지 이데올로기 충돌로 인해 발생한 사건임이 드러났다. 레오 3세는 ‘황제-교황주의’를, 그레고리우스 2세 는 ‘교황-황제주의’ 라는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성화상(icon)이라는 이미지를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8세기 비잔틴 시대의 성화상 논쟁을 기점으로 시작된 그리스도교의 이 미지 담론은 오늘날에 이르러 단순히 신학적 담론에 머물지 않고 정치, 경 제, 사회, 문화, 예술, 사상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이데올로기와 연결되어 거 대담론이 되고 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가 이미지의 속성이라는 본 연구의 관점에서 볼 때,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 황에서 본 논문이 이론적으로는 성화상 논쟁 연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틀을 제시하고, 정책적으로는 한국교회를 향하여 이미지 이데올로기에 대 한 경각심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58.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프랭클린 올링거(Franklin Ohlinger,중국명:武林吉)는 미북감리교 (Methodist Episcopal Mission, 여기서 M.E.M의 중국식 표현으로 미이미회 (美以美會)라 지칭했다.) 소속 선교사로서 한국선교의 초기 북감리교 선교 정책에 영향을 미칠 뿐 만 아니라 문서선교로도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의 짧은 한국선교(1887-1893), 5년8개월의 시기에 비추어 그의 사역을 평가하 는 면도 있겠지만 그의 생애 대부분을 차지했던 중국선교(1870-1887, 1895-1911)에 대한 연구는 한국기독교사연구에 올링거를 통전적으로 이해 하는 기초라고 볼 수 있다. 이에 필자는 그가 한국선교를 시작하기 전 18 년동안 중국 복주(福州,Fuzhou)에서 활동한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그를 다 시 평가하고자 한다. 북감리교의 복주선교를 통해 직접적인 선교뿐만 아니 라 출판과 교육에 중점을 두고자 한 선교정책을 이해해 보며, 올링거와 뗄 수 없는 영화서원의 성립 등을 통해 그의 교육선교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 를 풀어가고자 한다. 특히, 영화서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중∙영문 이중언 어교육 논쟁을 통해 당시 선교와 교육의 문제에 대한 북감리교 선교사들의 목소리를 경청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선교사들은 전문적인 영어교육이 중국신도의 자존감을 고양시킬 뿐만 아니라 현지기독교인과 함께 만들어 가는 선교이양의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반면 이와 다르게 영어교육이 선교의 세속화를 촉진할 뿐만 아니라 물질주 의적인 취향이 농후한 중국신도가 신앙문제보다 영어를 통한 직업적 성공 에 더 몰두할 수 있다고 여겨 영어교육을 선교의 장애물로 보고 염려했다. 이점은 분명 올링거의 영화서원 이중언어교육에서 발단이 된 것으로 올링 거 이해의 중요한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9.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중국기독교 역사 속에서 정통과 이단의 문제를 성경 God의 중문번역명에서 발생한 논쟁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문제는 명말청초의 천주교에서도 조상숭배와 공자숭배와 더불어 “전례논쟁(礼仪之争)”의 한 축으로 당시 천주교선교사들의 중국선교 현장에서 문화적응적 입장 또는 중국문화를 이교문화로 규정하고 이를 배척 또는 개화하려는 입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본문은 이 논쟁의 연장선에서 특히 개신교 중국선교 중 많은 서방선교사들이 참여한 영문저널 The Chinese Recorder 를 중심으로 이 논쟁을 전개했다. 이 속에서 우리는 선교사들의 서방전통 또는 성서전통으로 구분되는 의식의 차이와 중국문화 특히 ‘상제’, ‘신’ 이 단어들이 갖는 의미의 차이, 그리고 중국종교 등에 대한 관점차이와 선교대상인 중국신도에 대한 이해, 서로 다른 선교지역 이해 등의 원인 때문에 좀처럼 종식되지 않는 논쟁을 전개했음을 고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충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이 논쟁을 통해 얻어진 경험과 중문번역명의 직접적 사용자인 중국신도들의 성장을 주목하면서 전대와는 다른 새로운 입장을 찾아나가며 이를 통해 상호 이해와 일치의 길로 나아가려고 노력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분명 용어문제(Term Question)는 단순한 명사논쟁이 아니라 사상간의 실제적인 교류를 의미하는 논쟁이다. 이 때문에 각각의 역명(용어) 안에 내재되어 있는 다양한 함의들을 파악하고 중국언어가 가지고 있는 복잡성과 지역적 차이성 그리고 역사적 변천 등을 심도 있게 연구한다면 충돌처럼 보일 수 있는 논쟁의 현장에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으며 더욱 자신의 관점을 수정할 수 있는 넓은 시야를 얻을 것이다. 우리가 The Chinese Recorder 를 통해 얻은 관점은 바로 이를 실천하는 첫걸음일 것이다. 자신의 입장을 고집해 성서의 God을 전달할 방법이 한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에 의해 전달할 수 있음을 즉 번역 속에 수많은 타협과 다원성이 공존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60.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은 성리학의 왕도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세워진 나라였다. 건국 초기부터 고려의 불교식 사회사상을 비판하면서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되었고, 고려의 기반이 되었던 불교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이단으로 지목되었으며, 불교 이단성의 비판은 건국초기부터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는 근거가 되었다. 16세기 성리학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학문이 유입되었고, 당시 명나라에서 성행하던 양명학도 매우 이른 시기에 조선에 전래되었다. 그런데 이 양명학 역시 주자학의 선명성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이단성이 지적되었는데, 주된 비판의 내용은 불교와의 유사성이었다. 명나라로 사행을 간 조선인은 명나라 학자와의 논쟁을 통해 양명학의 공부 방식이 참선의 방식과 유사함을 지적하였으며, 양명학은 선학(禪學)이라는 명제는 조선 학자들 사이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17세기 일본의 유학이 아직 맹아 상태일 때, 경전을 논하는 이들은 주로 승려 계층이었기 때문에, 조선인에게 이들의 이단성을 비판하는 것은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그 후 일본의 유학이 성장하여 고학 등이 등장하였을 때 조선인은 양명학의 연장선상에서 이러한 경향을 이해하였다. 결과적으로 명나라 사행에서의 양명학 논쟁 경험이 일본 유학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방해하였던 것이다. 1764년 일본에 번성하는 고문사학의 경향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고서야 일본 유학의 실체를 깨닫게 되었고 비판의 논점이 불교 유사성에서 경전 이해의 오류로 옮겨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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