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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200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勿川 金鎭祜는 寒洲 李震相으로부터 性理說을 전수받았지만 性齋 許傳의 문 하에서 먼저 수학하였고 학맥의 계보 상으로도 한주보다 오히려 성재 쪽의 近 畿學派에 더 가깝다. 물천은 한주의 제자인 俛宇 郭鍾錫과의 논변을 통하여 한주 성리설의 핵심인 七情理發說을 수용한다. 그러나 여전히 分開看에 의해 理發 · 氣發을 분명히 구 별할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한주의 학설을 대체로 수용하면서 한주의 竪看 · 橫 看 · 倒看 三看과 順推 · 逆推 二推라는 용어만은 끝내 사용하지 않는다. 특히 물 천이 한주의 대표적인 학설인 心卽理說의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는 竪看 대신 퇴 계 이후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져 온 渾淪看을 사용하는 것은 그가 性齋로부터 이 어받은 近畿學派의 학맥을 고수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한주는 主理의 필요성을 극히 강조했으나 물천을 주리를 주장하는 것을 꺼 렸고 주리라는 명목을 따로 세울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는 각자의 학문성향 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며, 또한 학문적 노선에서 寒洲學派와 상반된 주장이다. 물천이 성리설에서 시종 后山 許愈 · 俛宇 郭鍾錫 등 한주의 제자들과 다른 견 해를 보이는인 것은 성리설을 뒷받침하는 논리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후산이 한주의 삼간에 의거하여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는데 물천은 기존 영남학파의 혼 륜간과 분개간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내용이 서로 매우 흡사한 데도 서로의 견해의 차이를 좁히지 못한 것이다.
        42.
        200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許愈(1833~1904)는 朝鮮말기의 嶺南主理學派를 대표할 대학자이다. 字는 退 而, 號는 后山또는 南黎이다. 이름이 唐나라 韓愈와 같고, 한유의 字가 退之, 號가 昌黎인 것이 허유와 비슷한 것에서 한유를 닮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집인 后山集 19권 10책이 간행되었다. 朝鮮王朝말기에 이르러 列强의 세력이 한반도에 손을 대고, 더욱이 日本이 조 선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知識人은 국가와 민족을 멸망에서 구할 길 을 강구하는 것을 急務로 생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許愈의 학문 방법은 아래의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판단을 중시하고 邪說을 물리쳐 儒學의 宗旨를 탐구하는 것을 자신의 임 무로 삼았다. 그는 詩를 통하여, 자신은 道를 걱정하지 가난을 걱정하지 않는 마 음과, 어두움을 물리치고 광명을 찾으며, 힘써 구하는 것은 오직 ‘眞儒’의 本義에 있다는 뜻을 분명하게 나타내었다. 둘째, ‘우리 道는 한 가지 이치로 꿰뚫는다(吾道一以貫之)’는 治學도리를 견지 하였다. 許愈는 李寒洲의 ‘主理’의 학문을 엄수하며, 가장 충실하게 ‘우리 도는 한 가지로 꿰뚫는다’는 학문 도리를 체현하였다. 그의 많은 말과 글을 한 마디로 개괄하면 ‘主理’를 立論과 立身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셋째, 위로 韓愈를 이어 學術上에 있어 斥佛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다. 許愈 가 지은 이름은 바로 韓愈를 본받는다는 원대한 지향을 함축하여 전하고 있다. 許 愈지식의 구조 및 그의 學術경향을 고찰하여 韓愈의 進學解등의 글과 대조 해본다면 許愈는 文風ㆍ도량이 韓愈를 닮았을 뿐만 아니라 儒學의 道統을 수호 하는데 韓愈와 거의 똑같을 것이다. 동아시아 각국이 격렬하게 동요하는 때에, 許 愈는 의연하게 孟子ㆍ韓愈의 횃불을 이어받아 전하였다. 韓愈는 ‘文은 八代의 쇠약함을 일으키고‘, ‘道’와 ‘文’이 결코 상호 대립적 관계 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文學史上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許愈도 또한 글을 짓는데 많은 심혈을 기우렸다. 더욱이 詩를 짓는데 많은 힘을 들여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성취를 이루었다. 許愈는 李退溪를 존숭하는 외에도 고향의 先賢인 南冥曺植선생에 대해 깊이 敬意를 표시하였다. 南冥學派는 儒學觀에 있어 實踐을 중시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南冥先生은 詩의 창작에도 성취가 매우 높은데, 이것은 타고난 性情과 興 趣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학문 수양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詩人으로서 의 許愈는 더욱 南冥선생에게 가깝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데, 詩學에 있어 더 욱 많이 南冥先生및 그 學派의 영향을 받았다. 허유는 ‘主理論’을 견지했기 때문에 그의 詩가운데는 털끝만큼도 쇠미한 기운 을 읽을 수 없고, 기개 있는 君子의 흉금과 시대를 걱정하고 세상을 슬퍼하는 仁 者의 심사를 느끼게 한다.
        43.
        200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明末淸初의 사상과 日本儒學에 대하여’라는 문제 설정은 江戶사상사 연구의 문맥 안에서 11세기 이전 일본 사회의 ‘주자학적 사유의 존재’라는 丸山眞男의 주장에 대한 비판 · 수정의 흐름 속에 자리 매김할 수 있다. 그러나 17세가 일본에서 수용된 명말청초의 사상을 무익하게 주자학과 떨어진 곳에서 파악하려는 것도 橋狂過正의 폐해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근년 중국 근세 사상 연구에서는 양명학은 주자학적 문제의식을 계승 · 발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는 주장이 점차로 힘을 얻어가고 있다. 이러한 연구 동향으로부터 이 논문에서는 中江藤樹의 사상을 ‘주자학’적 전개의 가능성 안에서 재구성해 보려 하였다. 그려고 이에 있어 藤樹의 사상에 대해 종래처럼 일부러 세세하게 시가를 구분하는 방법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한 시가 구분은 藤樹사상의 ‘ 日新’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진 『藤樹先生年諸』의 기술에 의해 도출된 것으로, 오히려 이 논문에서는 초기에서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藤樹學특질의 추출을 기도하 였다. 그 특질은 藤樹의 사상에 합리성 • 질서성에 대한 합리적 신비 事象에 대한 신념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래에 이 문제는 藤樹가 주자 학에서처럼 ‘理’의 자기관철을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이해되어왔지만, 이 에서는 오히려 藤樹가 ‘理’블 인간의 可知• 不可知에 미치는 모든 영역에 있어서 관철시켜왔기 때문에 표면상에서 그와 같은 모순이 나타남을 논하였다. 이와 같이 불가지의 영역을 신비적 인것으로 보류하지 않은 태도는 주자의 ‘象 數易’에 대한 태도와 공통된다. 또한 이것은 서구 17세기의 과학자들과도 유사한 점이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藤樹의 사상을 ‘주자학’ 안에서 이해하려는 것은, 藤樹사상의 해명에 기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사상사 전개의 재조명에도 이바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44.
        200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동아시아가 근세사회로 진입하면, 주자학이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게 된 다. 그러나 한중얼 삼국에서 주자학에 대한 견해는 동일하지 않다. 본고는 야 점 을, 王夫之(중국), 이또진사이(일본), 정약용{한국)의 『중용』해석을 비교함으로써 그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밝히 고자 한다. w중용』가운데에서도 처1]1장에 나오는 천 성 도에 대한 주석을 그 분석 대상으로 한다. (1) 왕부지는 ‘천이 리이다.’라는 명제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기의 리가 된 뒤에 천야 리라는 뭇이 성립된다. 라고 하여 기를 강조한다. 같은 맥락에서 ‘성즉리‘를 긍정하연서도 이 라는 ‘거의 리’라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에서 천과 연성 은 동일한 기반을 갖는다. 이 점은 인성을 ‘연간에게 내재한 천도’라고 하는 명제 에서 확인된다. 자연의 음양 · 오행과 언간의 인의 · 오상이라는 덕목을 대응시키는 것도 같은 논리이다. 천도와 안도는 연속된다. 연성/울성, 인도/물도의 관계 에 있어, 왕부지는 철저하게 분리의 입장을 취한다. 인성=선, 물성=불선으로 규정한다. 도의 문제에 있어서도 物道를 인간이 물을 이용하는 인도로 본다. (2) 진사이는 ‘천이 리’라는 명제를 부정하고 주자학의 ‘이선기후’적 관점을 강하 게 비판한다. 그는 천을 원기로 보고 리는 그 조리로 한정시킨다. 그리고 천 혹은 천도를 유행/주재의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전자를 탈 도덕적 존재, 후자를 도덕적 존재로 본다. 전자는 인도와 구별되며, 후자는 인도가 도출되는 근거가 된다. 여기 에서 천도와 인도는 단절과 연속의 이중성을 갖는다. 진사이는 ‘성즉리’를 부정하고 기질의 레벨에서 접근하여 구체적인 정강의 선지향성을 성선이라고 주장한다. 이성은 인간만이 갖고 있으며 사물은 탈 도덕적인 닫힌 존재이다. 그려나 동물이나 식물에게도 인륜적인 규범을 인정함으로서 인간과 사물의 연속성이 확보된다. 천-인관계와 동일하게 인-물도 단절/연속의 이중성을 갖는다. (3) 다산은 천=리, 성=리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천을 인격적 존재로 성을 선 지향적언 기호로 규정한다. 그리고 천의 영명성을 인간이 부여받아 영명무형한 본성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함으로서 천-인은 근원적 동일성을 갖는다. 이 점은 천명이 인간의 도심에 내재하며 도심의 경고가 곧 천의 명령이라고 말한 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다산은 인간에게만 도덕성과 자율성을 인정하고 사물은 자연성만을 갖는 닫힌 존재로 보아 인/물을 철저하게 분리시킨다. 지금까지 정리한 바와 같이, 세 명의 유학자들이 천-인, 인-물의 관계를 연속/단절로 보는 시각은 각각 다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근대지향성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강한 도덕성을 지향한다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왕부지가 중용의 성과 도를 인간에게 한정시킨 것은 ‘계신공구’라는 도덕적 수양을 전제로 한 것이며, 진사이가 천의 주재성 및 도의 연륜성을 강조한 것과 다산이 천의 인격성을 강조하고 성을 기호로 보며 언간에게만 도덕성과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이유는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한가지, 동아시아 사회가 근세에 접어들면서 기존의 주자학의 형이상학적 이론체계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들이 제기되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이 문제들을 타개하기 위한 이론적 장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천 • 성 • 도라는 유교 본체론의 핵심 개념 틀이 리에서부터 이탈하여, 기 • 정감 • 인륜 등 보다 구체적언 레벨에서 규정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개념의 변용이 일어난다. 이것은 사회에 대한 도덕적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유교이론을 재구축하는 작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45.
        200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필자는 이 글에서 막스 베버의 유교론을 아래와 같은 관점에서 재구성하고 있다. 첫째, 베버는 서구에서 자본주의적 근대사회가 발흥하는 데는 개신교가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자신의 명제를 입증하기 위해 방대한 비교 종교사회학적 연구를 수행 하였으며, 이 연구의 일환이 그의 유교론이다. 둘째,그의 비교 종교사회학적 연구 프로그램은 크게 ‘기독교적’ 세계상과 ‘동양 종교적’ 세계상이라는 두 가지 이념형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이 두 가지 세계상을 분석하는 틀은 (1) 세계상의 담지자층이 가진 ‘이해관계’ (interest)의 차원과 (2) 세계상 내재적인 ‘이념’ (idea) 논리 차원간의 상호작용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셋째, 베버는 유교를 ‘실천적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대표적인 세계상의 하나로 규정하며 이것을 유교의 담지 자층인 사대부 집단과 중국의 가산제적 국가구조와 연계시켜 설명하고 있다. 넷째, 베버 유교론은 중국 문화에 대한 일련의 날카로운 사회과학적 통찰을 닫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적지 않은 편견과 잘못된 해석을 내포하고 있다.
        46.
        200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일본 유학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논어가 백제로부터 전래되었을 때를 기점으로 한다. 중세에는 고잔(五山) 승려에 의해 접해졌고, 근세 에도시대에 들어와서는 본격적인 수용을 거듭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본의 유학에 대해 근세 유학연구의 선봉적인 역할을 한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씨는 주자학이 근세 일본의 幕藩制 유지의 사상적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주자학의 자연법적인 사상이 근세 봉건사회에 부합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마루야마씨의 주자학 이데올로기론은 여러 관점으로부터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 유력한 비판자의 한 사람인 비토 마사히데(尾藤正英)씨는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의 주자학과 근세일본사회와의 부적합성을 들어 유교가 일본사회에 지식으로 수용된 것 일뿐 생활차원에서의 수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 와타나베 히로시(渡邊浩)씨는 에도시대(1603-1867)전기의 일본사회에 있어서 주자학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는 주자학은 당시 일본 국내의 有利한 사정을 바탕으로 점차 확대되었지만 동시에 여러 측면에서 違和感을 주는 외래사상이었다고 하고 있다. 이상, 전후 한때 통설로 되어왔던 마루야마씨의 주자학의 일본 근세사회의 부합설이 현재에 이르러서는 주자학 부적응설로 일반화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자학의 부적응설에도 불구하고 일본 유학은 고대에서부터 중세를 거쳐 근세에 본격적인 수용을 거듭하면서 현대에까지 그 맥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근세에는 다양한 층의 학자들에 의해 수용되어 일본적 사상으로 정착하게 되는데 이하 본 논문에서 필자는 주자학의 일본수용설의 관점에서 그 영향관계를 주자학에서 古學陽明學國學水戶學 등과 관련지어 고찰하고자 한다. 또 한국과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하고자한다.
        47.
        200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이황과 조식의 문도들에 의하여 그 학문이 계승 발전되면서 한국적 성리 철학의 틀이 잡혀가고 있던 17세기로부터 성리학이 그 역사적 기능을 종료하던 19세기까지에 걸쳐 강우지역에 나타난 유학의 흐름과 쟁점에 대한 간략한 정리이다. 17세기 초반 강우학파는 鄭仁弘을 중심으로 정치적·학문적 극성기를 누렸으나, 정인홍이 조선성리학의 정통으로 간주된 이황을 비판하고 패륜적 정치사건에 휘말린 일을 계기로 하여 급격히 몰락하게 되었다. 그 후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시기 동안 강우 유학은 그 餘震의 치유에 매달려야 했으며, 심각한 학문적 침체기를 맞게 된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동안 강우지역은 학계의 소외지역으로 남아 있었으며, 몇몇의 학자들에 의하여 간신히 명맥이 유지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퇴계학과 畿湖의 주기학이 강우를 점령하고, 당파적으로는 남인과 서인이 됨으로써 강우가 본래 가지고 있던 학문적·정치적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긴 어두움이 지나고 19세기에 이르자 강우 유학은 다시 크게 떨치고 일어나는데, 그 주력은 退溪學과 호남의 蘆沙學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그 특징은 理를 중시하는 학풍이 다른 어떤 곳보다 강했다는 것이며, 이는 성리학적 신념을 고수하는 유학자들이 서세동점의 시기에 대응하는 가장 완고하면서도 근본주의적인 방법이었다. 이를 통해 절의론의 신념을 강화한 강우의 유학자들은 비록 시대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한계는 있지만, 보수적인 유학자들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으로 국권상실의 시대에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해 갈 수 있었다. 그것은 유학의 기능이 종언을 고하는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불꽃과 같은 것이었다.
        49.
        2002.0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wo books have recently been published to argue for diametrically opposite views. One is『Gongjaga jugeoya naraga sanda(The Nation will prosper once Confucius dies)』, which argues for the negative impact of Confucianism on the nation's culture. The other is 『Gongjaga salaya naraga sanda(The Nation will prosper once Confucius becomes alive)』, which puts emphasis upon constructive elements in Confucianism. I believe that it does not matter whether Confucius is dead or alive but it matters whether every individual in this nation is with him- or herself. The purpose of this essay is to explain how Confucius taught everyone to be with oneself, especially for political leaders. In Confucius view, everyone could be a political leader once he or she learns the way(Do; 道). The methods by which Confucius brought up political leaders were peculiar in many respects. First, the teacher never sought for the learner but the learner sought for the teacher. The teacher never failed to teach those who came with proper manners(Ye; 道). Second, the teacher never taught those who did not put an effort as well as those who did not ask questions. Third. the teacher taught how to live a righteous life. Fourth, the teacher tried to bring out the best out of the learner. Since each individual's merits differ from the others', answers to a question from different individuals varied. Fifth, the teacher took into consideration the level of the learner. An adult could at times be taught by utterances but at other times by silence. In short, the teacher must be with the learner, a prospective political leader so as not to lose oneself, and guard the learner so as to shine from one's within.
        50.
        200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My aim in this paper is to argue that the concept of Kyum(謙) of Ha Hongdo(河弘度, a pen name: Gyunjae(謙齋). 1593 - 1666) played a crucial role in the history of Neo-Confucianism in East Asia. To do this, first, I shall argue that Gyumjae, followed and sticked to, the concept of Gyungyi(敬義) of Chosik(曺稙, a pen name: Nammyung(南冥), 1501-1572), and he, on the basis of this concept, established his unique concept of Gyungyi. This new concept is well shown in his Gyumgoedo(謙卦圖, Diagrams of a Trigram) that is grounded in Chu(the Book of Changes): He had this Gyumgoedo completed at the age of 48, which he had sincerly followed the Chosik's concept, In so doing, I will also argue that Hongdo Ha regarded Gyumgoedo, among other Trigrams, as the most important virtue that Gunja ought to obey: It seems that the reason why he was not engaged in politics naming his pen mane, Gyumjae, is based on this sort of his value. Second, I will strongly argue that from the New-Confucian historical point of view, Hongdo Ha, like Chosik, must be considered as a typical Chu Hsi's student: In this respect, Gyumjae, throughout his life, did the same as his mentor, Chosik, did, such as not engaging in politics, living in retirement from actively liberal life, focusing on cultivation his internal virtues. On the basis of Kyumjae's philosophical thinking that holds that people should suppress their desires and pursue Kyum as quite and internal value, it is possible to say that we are in need of reinterpreting and reevaluation intellectuals of Chosun, who sought silent and internal value. Finally, I will conclude that Kyum that needs to be reevaluated and illuminated is unique in the history of modern thought in East Asia. Although our interest and discussion about Kyunjae's thinking that was covered as simple local study just started this movement to try to restore the intellectual history of Chosun is to provide invaluable information.
        51.
        200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ough the philosophy of Jo Sik was based on 朱子學, making little of the frame of particular sects, he adopted any doctrines useful for his moral self-cultivation. Such an attitude appeared in his practical method of self-cultivation and he tried various methods using many tools such as bells, swords, pictures and leather belts. These miscellaneous characters are found in his work 學記類編. This book does not seem edited with a clear plan outwardly and it seems very difficult to abstract the system of his consistent theories from it. Such miscellaneous characters had a very important meaning in the process of his self-cultivation. It is 敬 that was placed in the center of the method of his self-cultivation. Investing into the parts of this book in which 敬 is treated, we can find the importance of 敬 in his thought and the variety of the concrete methods of practicing 敬. Many works of Sung dynasty and Yu˙˙an dynasty were quoted in this book and any works of Ming dynasty were not. But examining words and phrases quoted in this book one by one, we can find that many of them w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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