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애도의 글쓰기가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가족 서사를 보장한다면 고대 문 인들의 가족에 대한 인식 내지 변화된 감정구조를 어느 정도 추론해낼 수 있을 것이 라는 가정하에 기획되었다. 이는 일차적으로 애도 문학 변천의 한 단면을 탐색하는 작업이면서 당시 공동체가 소유했던 가족에 대한 감정구조의 실태 및 변화의 흐름을 구축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연구 결과 고대 중국인들의 가족 서사는 탈관습의 성질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애도 시문은 죽음이 전제되는 면에서 그 고유의 특수성이 고려되어야 하지만, 글쓰기 활 동을 통해 가족에 대한 언급을 공식화한 시도는 가족 구성원의 존재를 감추지 않고 나름의 방식을 통해 공개하려던 당시 문인들의 진전된 감정 구조가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구양수의 애도 시문은 작가 개인이 견지한 문학 이론을 적극 이입함으로써 애도 주제의 서술 범위 확장과 더불어 애도의 새로운 방향성 모색을 가능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에 따라 구양수는 역사가로서의 태도를 견지하며 사실에 근거한 시문 창작 을 부각시키는 한편, 쉬운 언어와 짧은 편폭 속에 비애의 반응과 작가 개인의 견해 를 적절히 배합시킴으로써 관습주의에 매몰된 기존 애도 시문과의 차별성을 분명히 나타낸다. 이는 거시적으로 북송 문인들이 애도 시문을 대하는 관점의 변화를 나타 내는 징후이자 구양수 애도 시문의 독창성을 담보한다. 구양수가 보여준 애도 시문 의 새로운 작문법의 실천은 애도문학사 변천의 중요한 의미를 규정해준다.
염장(鹽醬)은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기저 음식으로 밥, 국, 반찬으로 구성된 한국 식사구조에서 빠질 수 없는 음식물이다. 본고는 삼국 시대에서 조선 시대에 이르는 불교사찰과 일반사회의 식재료로서의 염장의 내용을 개괄하고 고려 시대 원감국사 충지(圓鑑國師 冲止)의 시문을 통해 불교 수행자로서 산중 음식 생활에서의 염장의 모습과 선어(禪語)로서 염장이 선불교의 수행과 깨달음에서 어떠한 상징과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고찰하였다. 이 연구에서 통일신라 시대 불교사원의 장독대인 장고(醬庫), 고려 시대 태안 마도선의 동식물, 음식유물은 해당 시기 음식문화를 밝히는 핵심자료로 기능하였으며 각 시기 문헌 자료와 더불어 상호보완적으로 당시의 음식실태에 객관성을 부여하는 기능을 하였다. 산중사찰 수행자의 염장 생활과 선어(禪語)와 선지(禪旨)로서의 염장고찰은 원감국사의 시문을 통해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와 화두로 정착하는 모습을 고찰하였다.
전근대기 중국과 한국의 회화세계 속에는 드러나거나 내재된 문학 적 내용이 많은데, 이러한 회화작품들은 다시 문학의 창작과 감상에 영향을 주게 된다. 시문이 조형이미지로 표현되는 거대한 흐름 속에 서 시문-회화-시문-회화 순으로 넘나드는 수용(受容)의 역사가 일어 났고 이가 지속되는 가운데, 회화로 그려진 조형이미지가 영향력을 발휘하여 시문의 이미지를 변화시키고 시문의 감상을 지배하게 되었 던 경우를 말한다. 이 글은 시(詩)·화(畵) 제작의 상호영향에 있어서 회화의 조형이미 지가 시문의 우위에서 작동했던 대표적인 예로 당나라 왕유(王維, 701-761)의 ‘망천(輞川)’ 별장에 관련된 시문과 그림의 수용사를 살폈 다. 왕유가 망천장을 시와 그림으로 표현하였고, 왕유의 시화작업은 시·화 상통의 가장 대표적 예로 송대부터 추앙되었다. 조선시대에도 망천은 끊임없는 시·화의 주제였다. ‘망천’은 실재하는 특정한 곳이고, 왕유의 시문은 글자가 바뀌지 않고 전달되었지만 이를 그린 회화의 조형이미지에서 역사적 혹은 지역적 변화가 발생하면서, 망천의 이미 지 자체에 변화가 일게 된다. 특히 중국 명대의 부화해지는 문화 속 에서 망천 조형이미지는 지나치게 소박하게 변화한다. 달라진 조형이 미지는 망천의 상상이미지를 지배하고 시의 제작의 실제 내용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망천을 그린 조선의 회화작품에는 조선의 풍경이 삽입되어 변화했 고, 이러한 변화된 이미지는 조선의 문인들에게 상상된 망천의 이미 지를 알려준다. 현전하는 조선후기 이방운의 망천도 몇 점은 좋은 예 이다. 조선시대 회화로 구현된 망천의 이미지는 왕유의 망천을 표방 하면서 그 시절 은거산수의 이상을 보여주는 보편적 이미지로 작동 하였다.
The present study examined the import routes of distilled rice liquor soju and how soju developed among the royal family and the upper classes using celadon inscribed with poetry related to alcohol beverages in the 12th century, Maebyeong style vases inscribed with government office name in charge of alcohol beverages of the royal family in the 14th century during the Koryo Dynasty. Distilled rice liquor was imported from the southwestern region to Koryo by Arabian merchants through direct and indirect routes in the Yuen Dynasty during the age of King Chungsuk and King Chunghye in around the 14th century. As soju was added to existing takju and cheongju, the three major types of alcohol beverages were completed during the late Koryo Dynasty. Celadon pitcher inscribed with poetry shows the delicate sentimentalism, aristocratic prosperity, and poetic sentiment. In particular, it is valuable in that it reflects Koryo people's mind, view of nature, and attitude toward alcohol beverages, and their inner world was also described with celadon patterns. Maebyeong style vases Yangonseo, Saonseo, Deokcheongo, Euiseonggo and Saseonseo, which are real celadon antiques inscribed with government office name, were used for rice liquor preservation. In particular, Maebyeong style vase 〈Euljimyeong Saonseo, 1345〉 has the exact year of creation, so it is a historically important celadon in research not only on alcohol food culture but also on art history. This shows that alcohol beverages were important foods that there were controlled and stored in celadon by the government offices for the royal family's related alcohol ceremonies. Through celadon inscribed with poetry and government office name displaying Koryo people's unique imagination and cultural consciousness, we can read their mind and lifestyle based on historical and social alcohol food culture in the Koryo Dynasty.
오연 김면운은 19세기 경상 우도의 유림 사회에서 중임을 맡으며 활발히 활동한 인물로서, 총 88제 147수의 한시를 문집에 남겼다. 그 중 주위의 인물들 과 교유하며 짓거나 선유들의 작품에 소회를 붙인 화운시, 증별시, 만시가 대부 분을 차지한다. 오연의 시문학은 진심을 전하며 서로를 격려하였던 19세기 강우 지역 유림들의 문학적 특징과 삶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이는 시의 실용적 역할 을 중시하였던 남명 시관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고찰될 필요가 있다.
오연은 특히 만년에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잇달아 겪고, 궁핍한 현실과 질병 으로 운신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울적한 소회를 시문학에 적극적으 로 담아냈다. 또한 자신의 작품을 주위에 보이고 조언을 구하며 文才를 연마하 고자 하였다. 제석시 등 성찰적 작품은 오연 시문학의 또 다른 특징을 보여주었는데, 대체로 정적인 풍경 안에 詩意를 간결한 언어로 표현하여, 沖澹閑雅한 풍격을 만들어냈다. 이는 자연스러운 성정의 발현을 중시하는 시관, 은일적 시세계를 지향한 작자의식 등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안빈낙도의 주제의식은 처사 문학적 특징을 보여주는데, 이는 자신의 현실적 어려움을 작품 안에서 초극하면서, 세속적 가치의 초월을 지향한 남명학파의 시문학 전통을 계승하는 단서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孤臺 鄭慶雲의 시문학에 대한 연구이다. 고대는 孤臺日錄이라 는 비교적 많은 양의 일기를 남기고 있으나, 정작 그의 시문을 수록한 문집 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남긴 시문으로 전하는 것이 거의 없다. 그에 대한 연구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시문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까닭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고대일록과 그의 주변의 인물들, 특히 사우관계에 있 던 사람들의 문집을 살펴보면, 그의 시문학에 대한 정보를 제법 얻을 수 있 다. 우선 고대일록을 보면 그가 생활 속에서 시문을 일상화하였던 자취를 엿볼 수 있으며, 일부 시를 볼 수 있고, 특히 많은 문장을 접할 수 있다. 그리 고 시는 그의 스승인 鄭仁弘의 문집에 여러 작품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대의 시는 스승의 학덕과 행실을 읊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 가운데에 는 벗과 주고 받은 시, 벗을 만나 그 감회를 읊은 시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특 히 스승을 읊은 시는 현실(소인), 스승, 국왕이라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시의 구조에는 그의 시의 지향이 담겨 있다. 고대는 이러한 시들을 통하여 그가 추구하는 정치적 이상을 표출하였다. 산문은 알려진 것으로 感樹齋 朴汝樑에 대한 제문 1편에 지나지 않았으나, 고대일록에는 완전한 산문으로 전하는 것만도 11편이 있고, 산문으로 볼 수 있는 글들이 여러 편 남아 있다. 그는 산문을 지음에 후대에 남기려고 하 는 저술의식을 뚜렷이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산문 가운데에서는 시에서 보다도 더 강력하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특히 절개를 지키는 일에 중점을 두어 의도적으로 글을 지었는데, 바 로 「牡丹側柏說」과 「硯子說」이 그것이다. 모란 측백은 모란과 측백을 의인 화하여 대화체를 통하여 모란의 화려함보다는 측백의 절조가 중시되어야 함 을 이야기하였고, 「연자설」은 벼루에 새겨진 소무의 일을 통하여 절조를 강 조하고 조정에 이런 사람이 등용되어야 한다는 소망을 피력하였다.
이 글은 大笑軒 趙宗道의 문학에 대한 생각과 문학작품 특히 시세계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대소헌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 安奇道察訪에 천거되었고, 그곳에 있으면서 退溪 李滉의 제자인 柳成)·金誠一·權好文 등과 교유하였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의병활동을 하였고, 정유재란 때 黃石山城에서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는 호에 드러난 바와 같이 매우 호방하였으며, 성품과 행실이 고상하고 우뚝하였다. 그래서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친척들에게 어질게 대하고, 벗들에게는 진심으로 대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성품과 행실은 문학에 그대로 나타났는데, 문학에 대하여는 매우 실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學校」라는 일종의 策文에서, 학교는 문학을 詞章을 외워 科擧에 합격하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선현의 덕을 함양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 문학보다는 학문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문학은 매우 뛰어났으며 여러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대소헌의 문학작품이 갖는 가치는 우선 문학작품은 그 사람의 인물됨됨이를 반영한다는 매우 오래된 생각을 바탕으로 발현이 되고 있다. 이는 공자와 맹자에게서 비롯된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말을 한다.[有德者 ,必有言]’이나 ‘그 시를 외우고, 그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모르면 되겠는가?[誦其詩, 讀其文, 不知其人, 可乎?]’라는 말을 기초로 하여, 사람됨됨이[爲人]와 시를 짓는 것[爲詩] 혹은 글을 짓는 것[爲文]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사람됨됨이와 시를 짓는 한 것은 한 가지’라는 ‘爲人爲詩一道論’에 근거하여 선현들은 대소헌의 시가 그 인물과 마찬가지로 매우 훌륭하였음을 말하였다.
대소헌의 문학작품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가를 알 수 있는 오래된 논점의 하나는 ‘고기 한 점만 맛보면 솥 전체의 맛을 알 수 있다’는 ‘一臠全鼎可知論’이다. 이는 한 점의 저민 고기로 한 솥의 국맛을 알 수 있다는 것인데, 한 국자의 맛으로 전체 솥의 맛을 알 수 있다는 말과 같이 쓰이고 있다. 大笑軒 趙宗道가 남긴 얼마 되지 않는 작품을 보면 그의 작품이 진실로 ‘일련전정가지론’에 부합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岳堅山城에서 지은 시와 玄蘇에게 주는 시는 그 대표적인 예이며, 그 밖의 작품들도 여러 선인들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性情과 氣格을 드러내는 뛰어난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산문 몇 편만 알려졌던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의 시문집이 발견되었다.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는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된 뒤에 자주 시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번에 소개하는 『여유당집(與猶堂集)』은 두 형제가 이 시기에 지은 글들을 수집하여 필사한 책인데, 여기에 실린 글 가운데 「송정사의(松政私議)」를 제외한 정약전의 글들은 지금까지 소개된 적이 없었다.
『여유당집』의 첫 부분 「여유당집」에는 정약용이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上仲兄書)가 9편 실렸다. 그 뒤에 실린 「잡설(雜說)」은 정약용이 강진 유배생활에 대한 보고서를 정약전에게 보내자, 정약전이 그에 화답하여 지은 것인데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실리지 않은 글도 있다. 두 번째 부분인 「여유당시집(與猶堂詩集)」에는 정약용이 강진에서 지어 정약전에게 보냈던 시 22제(題) 37수(首)가 실려 있다. ‘이하 손관(以下 巽舘, 가칭 정약전시문집)’에는 정약전이 지은 시 32제 40수가 실려 있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보면, 「여유당집」과 「여유당시집」· ‘이하 손관(가칭 정약전시문집)’을 함께 필사한 편집자는 강진의 정약용이 흑산도의 정약전에게 보낸 시문과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지은 글들을 함께 편집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정약용과 달리 정약전은 섬의 어부나 나무꾼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지냈다. 또 이들과 시를 주고받기도 했다. 정약용은 그곳 주민들을 ‘오랑캐 같은 섬사람’이라 표현했지만, 정약전은 나무꾼 고기잡이들과 기쁘게 친구가 되었다. 왕조실록에 나오는 흑산도는 대부분 유배지였는데, 유배 온 문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섬의 자연을 노래하였을 뿐, 그 섬의 사람들과 어울려 시를 짓지는 않았다. 자신과 섬을 별개로 여기고, 자신은 잠시 있다가 떠날 존재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정약전은 흑산도와 하나가 되어, 흑산도를 문학의 현장으로 승화시켰다. 『玆山魚譜』가 어부들과 함께 쓴 물고기 생태학 보고서이고, 「송정사의(松政私議)」가 나무꾼들을 위해서 제출한 정책건의문이라면, 정약전 시문집은 어부나 나무꾼들과 친구가 되어 주고받은 흑산도 16년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