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의 목적은 은유분석 방법을 활용하여 정치교육과 관련한 학교 교육과정의 교과 및 비교과 학습 과정에서 형성된 학생들의 경험적 인식과 욕구가 어떠하며, 학교에서의 정치교육이 그 목표와 가치를 충 분히 실현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에 있다. 이를 통해 학교 정치교육의 방향을 재고하고, 학생들의 특성 과 눈높이에 맞는 정치교육 교수 설계와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기초자료를 마련하고자 한다. 분석 결과 학교 정치교육에 대한 인식은 ‘일상’, ‘장벽’, ‘겉핥기’, ‘제도’의 네 가지의 범주로 도출되었다. 각 범주는 각각 2개의 주제어를 포함하고 있는데, 먼저 ‘삶’과 ‘상식’은 정치교육을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며 긍정적 인식이 다수 포함되었다. 둘째, ‘장벽’이라는 인식은 관련 교과의 내용적 요소에 대 한 ‘어려움’과 ‘중립’의 문제로 인해 원활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부정적인 인식을 의미한다. 셋째, ‘겉핥기’ 범주는 ‘허울’과 ‘허상’이라는 부정적 의미의 주제를 담고 있는데, 이는 현재 삶에 영향을 줄 만큼 배운 내용이 기억에 남아있지 않아 실속이 없거나 교과서 속의 이상적인 정치와 실제 현실의 정치가 매우 다르다고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제도’로 바라 본 관점은 정치교육을 입시와 학업성취의 수단 적 ‘도구’로 바라보는 관점과 정치교육이 실제적 지혜를 쌓는 접근이라기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개념적 지식 전달에 그치는 암기 위주의 개론 학습이라고 ‘형식’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결과 를 바탕으로 하여 교육적, 정책적 시사점을 제시하였다.
이 연구는 한국어를 학습하는 외국인 학습자들을 위하여 인지언어학적 인 관점으로 접근하여 신체 관련 한국어 감정 관용 표현에 나타나는 은 유와 개념화의 방식을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관용 표현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 의미가 형성된다. 따라서 관용 표현을 생성 한 한국인의 개념화 방식을 알아야 한다. 이에 따라 분노와 불안의 근원 영역을 ‘온도/색깔/명암/전복/분출/경직’으로 분류하였다. 근원 영역이 ‘온도’일 때 개념적 은유는 ‘분노는 뜨거움’과 ‘불안은 차가움’이며 ‘색깔’ 일 때의 개념적 은유는 ‘불안은 죽음’, ‘명암’의 근원 영역에서는 ‘불안은 어두움’이라는 개념화가 일어나고 ‘전복’의 영역에서는 ‘분노는 뒤집함’이 라는 개념적 은유가 일어난다. 또한 ‘분출’은 ‘불안은 땀’이라는 개념적 은유를, ‘경직’은 ‘불안은 정지’라는 개념적 은유를 통해 감정 관용 표현 을 생성하였다. 본고는 신체 관련 한국어의 감정 관용 표현 통해 한국인 의 개념화 방식을 정리하였으며 이 연구가 한국어교육 현장에 기초 자료 로도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본고는 인지의미론적 관점에서 한·중 ‘길다/長’의 존재론적 은유의 개념화 양상을 대조 분석하였다. ‘길다/長’은 [시간을 개체]로 보는 은유를 사용하여 공간 의미가 시 간 영역으로 확장된다는 면에서 대응 양상을 이루었다. 또한, ‘길다/長’은 [분량을 개 체], [안목을 개체]로 보는 은유의 개념화 양상에서는 공통점이 나타나는 동시에 세 밀한 차이점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감정 영역에서 ‘길다/長’은 [고통을 개체], [슬픔을 개체]로 보는 은유를 사용해서 의미가 확장된다는 면에서 대응 양상을 보이 지만 ‘長’은 [그리움을 개체], [기쁨을 개체]로 보는 은유를 사용해서 다른 감정 영역 에까지 투사할 수 있는 면에서 ‘길다’와 비대응 양상을 이루었다. 마지막으로 ‘길다’ 는 [생각을 개체]로 보는 은유를 사용해서 은유 의미가 확장되는 반면에 ‘長’에서는 이에 대응되는 은유를 보이지 않았고 ‘長’은 [입을 그릇]으로 보는 영상 도식 은유를 사용해서 개념화하지만 ‘길다’에서는 이에 대응되는 은유 양상을 보이지 않았다.
Architecture had played a significant role model in philosophy because the construction of building represented doing philosophy. ‘Architecture as metaphor’ made it possible that doing philosophy was a kind of construction of thinking and western philosopher considered himself as an architect of idea. As a system of system, architectural analogy gave philosophy a chance to insist himself as a theory of theory. So architecture had always been a privileged model of discourse system and also a fundamental metaphor in philosophy. Because of its original meaning, Architecture as techne could be considered as poiesis, that was the special building(making) in western culture. The archi(arche) - structure(techne) was a ideal model and mechanism of philosophy because with this analogy doing philosophy became a kind of building act to make a logical system of idea. This kind of tradition in philosophy, especially metaphysics, made the characteristics of western philosophy ‘architectonic’ that implied the meaning of the rational, stable, hierarchical and holistic. But this kind of tradition exposed the problem of philosophy that focused on Identity and excluded the others. The logocentrism of western philosophy was also the limitation of architectonic thinking and its reductionism became a grand monologue which only allowed systematic, rational discourse. Its ideological position Inevitably caused the anti-architectural thinking in modern age as a diverse form of new trend of thinking as like postmodernism or deconstruction. Even Deconstructivism, or ‘informe’, non-representation in architecture depends upon anti-architectural thinking. Relationship between architecture as metaphor and the building of philosophy is problematique issue.
우리가 살아가는 작금의 시대에 기독교 교회와 기독교 선교에서의 심각한 문제는 단연코 생태계의 문제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생태계의 문제가 선교의 위기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선교 신학적으로 그 대안을 찾기 위해서 샐리 맥페이그의 은유 신학(Metaphorical Theology)을 연구하고자 한다. 은유 신학은 생태계 문제의 원인을 서구 전통주의 신학의 이원론적이고 이분법적인 하나님의 신 이해와 인식에서 찾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인간-세계’에 대한 서구 전통 기독교 중심 사상은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낳게 되었고 오늘날 생태계 파괴를 가속화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하고 포스트모 던 시대에 기독교 교회와 선교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서구 전통주의를 대표하는 ‘아버지 하나님’ 은유가 아닌, ‘어머니·연인·친구’ 하나님 은유를 사용하여 ‘하나님-세계-인간’에 대한 새로운 ‘하나님의 이해’와 ‘하나님 인식’을 통해서 생태적 위기 속에 있는 기독교 교회와 선교에 새로운 신학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깊은 강 』은 엔도의 평생을 사로잡고 있던 문학적 테마인 일본인의 심성에 적합한 모성적 신을 탐구한 역작이다. 마음의 상처와 죄의식을 치유받기 위해 인도여행을 떠난 다섯 명의 등장인물은 힌두적 환경과 갠지스 강을 통하여 개별적인 종교 체험을 하고 구원을 얻는다. 인간의 고통을 무화시키는 갠지스 강은 기독교의 부활과 불교의 전생까지도 함께 포용해 흐르는 신적 실재로 나타난다. 어머니로서의 강은 영혼을 정화하며 초월을 지향하는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 엔도는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서양의 하나님을 체화하지 못하고 종교다원주의 관점에서 예수를 이해하려고 했다. 그 결과 예수는 가쿠레 기리시탄의 고통을 위무하고 사랑으로 감싸 안는 상징이 되었다. 예수는 인간의 모범을 보여준 성자였고 죽임을 당함으로써 인간의 종교성을 고양시키는 신화를 탄생시켰다. 예수의 부활은 이러한 관점에서 은유적 성육신에 해당하고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성육신은 반복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남긴다. 예수를 본받은 오쓰의 성육신은 일본인의 심성에 적합한 모성적 신의 원형으로 떠오를 수 있다.
중국의 제6세대 감독 중에서 왕차오는 노동자와 사회 주변인의 삶을 다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영화에서 이들의 결말은 비극으로 귀결된다. 프랑스의 영화평론계에서는 그의 세 편의 영화, <안양의 고아>, <낮과 밤>, <럭셔리 카>를 ‘비극 삼부곡’이라 칭한다. 이는 영화에서 나타나는 비극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인물이나 내용, 주제에서 뚜렷한 유사성과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 명명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글은 단순하게 영화에 서 나타나는 주인공 혹은 주인공과 관련 있는 인물의 비극적인 삶이나 죽음을 재차 ‘비극적’ 이라고 언급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영화는 비록 비극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지 만 희망을 염원한다는 것을 밝혀내기 위한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비극 삼부곡’ 에서 나타나는 서사적 은유를 분석하고자 한다. ‘갓난아기’와 ‘강’, ‘江城’ 등의 은유적 장치 분석을 통하여 왕차오 영화에서 나타나는 주제와 특징, 즉 생존과 가족, 윤리와 속죄, 욕망과 귀향 등의 서사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종극적으로는 현대 중국에 대한 왕차오 감독의 온기어린 시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존 던의 시 「질병 속에서 하나님, 나의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 에 나오는 음악적 은유를 분석하여 이 은유가 작품 속에서 가지고 있는 역 할과 의미를 찾아내는데 있다. 시의 첫 연에서 던은 자신의 몸을 악기로 비유하면서, 천국에 가면 성자들의 찬양대와 함께 영원한 음악이 되기 위하여 자신을 조율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 은유는 다음 시행으로 더 이상 연결되지 않고 시의 논리적 전개에서 사라진다. 이것은 던의 다른 작품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스타일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죽음의 침상에서 자신을 조율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던은 왜 이 음악적 메타포를 더 이상 발전시키지 않은 것일까? 이 연구는 음악적 비유가 비록 겉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시 전체를 주도하는 중요한 배경임을 발견한다. 시 전체는 악기를 조율하여 천국의 음악이 되고자하는 처음 은유가 구현된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질병 속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던의 시는 자신을 향한 설교가 되고 기도가 되고 그리고 찬송이 된다. 그러므로 찬송 시는 자신의 영혼을 하늘의 코드에 조율하는 신앙적 고백이란 점에서 처음의 음악적 은유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시 전체를 이끈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결론 맺을 수 있다.
아일랜드의 모더니스트 시인 W.B. 예이츠와 트리니다드 출신의 영국흑인 시인 안소니 조세프와의 비교는 예외적일 수 있다. 예이츠는 핵심적 하이 모더니스 트 시인들 중 하나이며, 조세프는 당대 “영국 흑인” 문학의 아방가르드적 변두리의 혼합장르 작가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특정 기법의 사용, 주제, 신화와 과학적 은유와 결부된 목표 등을 비교하면, 의외의 공통점이 나타난다. 이런 공통 점은 모더니스트와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서정시의 가능성을 확장시켜 전통적 장르의 구분을 뛰어넘게 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demonstrate that the acquisition of figurative language contributes to the development of communicative competence. In addition, this educational proposal aims to enhance the metaphorical awareness of the E/LE students and develop the strategies to the understanding of the Spanish phraseological units (PUs). Therefore, I selected quite a number of Spanish PUs of emotions of joy, sadness and anger from the latest dictionaries and analyzed these PUs on the basis of the Cognitive Metaphor Theory. With the cognitive models like ANGER IS FIRE, JOY IS LIGHT, SADNESS IS DOWN that underlie these PUs, I demonstrated the didactic possibilities to explain the idiomaticity of PUs, which becomes an additional resource that guarantees the enhancement of lexical capacity. Finally, I made some didactic proposals about how to deal with PUs in Spanish as a foreign language classroom. El objetivo de esta comunicación es mostrar que la adquisición del lenguaje figurado contribuye al desarrollo de la competencia comunicativa de forma integral. Se trata de una propuesta didáctica que tiene como meta desarrollar en los alumnos de la E/LE conciencia metafórica y estrategias para comprender unidades fraseológicas españolas (UFs). Asimismo, seleccionamos bastantes UFs de las emociones como alegría, tristeza e ira en los más recientes diccionarios y las analizamos a base de la teoría de la metáfora cognitiva. Con los modelos cognitivos como LA IRA ES FUEGO, LA ALEGRÍA ES LUZ, LA TRISTEZA ES ABAJO que subyacen a estas UFs demostramos las posibilidades didácticas de explicar la idiomaticidad de estas UFs, que se convierte en un recurso adicional con capacidad potenciadora del léxico. Por último, ofrecemos algunas propuestas didácticas para abordar UFs en la clase de ELE.
時間은 일정한 速度로 변함없이 흘러간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 과 사연에 따라 시간의 長短과 遲速을 느낀다. 시인들은 시간의 장단과 지속으로 인한 인생사의 애상과 情恨과, 그리고 시간의 流速을 조절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 등을 노래하면서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시간들을 混淆해서 美麗하게 풍자했다. 당나라 白居易는 「長恨歌」와 「琵琶行」에서, 시간과 인간사를 연계시켜 애환 과 정한과 인생무상 등 풍자와 은유로 美麗하게 형상화했다. 「장한가」는 玄宗과 楊貴妃의 사랑, 양귀비의 비극적인 죽음, 현종이 죽은 양귀비를 그리워하는 情恨, 그리고 시아버지와 子婦의 不倫을 시간의 추이에 따라 다양하게 풍자했다. 首句 에서 ‘重色’ = ‘傾國’임을 풍자했고, 末句에서 ‘此恨’ = ‘無絶期’는 불륜이 영원히 세상 전해질 것을 풍자한 것이다. 그리고 양귀비의 출세로 당시 부모들이 ‘不重生男’하고 ‘重生女’했다고 하여 男兒 선호사상에서 女兒 선호사상으로 바뀐 것 등을 풍자했다. 「장한가」에서 시간과 관련된 대표적인 名句는, ‘天旋地轉迴龍馭’, ‘春風桃李花開日’, ‘秋雨梧桐落葉時’, ‘悠悠生死別經年’과 ‘昭陽殿裏恩愛絶’, ‘蓬萊宮中日月長’과 ‘天長地久有時盡’, ‘此恨緜緜無絶期’ 등이다. 「비파행」은 백거이 자신의 45년간의 不遇落拓한 삶과, 長安 제일의 琵琶 名人 이었던 退妓의 기구한 일생을 시간의 흐름과 연계하여 다정다감하게 형상화했다. 「비파행」의 末句에서 눈물을 가장 많이 흘린 이가 ‘江州司馬’ 자신이라고 한 것 은, 시인 자신은 원대한 포부와 높은 학문을 가지고도 不遇落拓했음을 은유한 것 이다. 그리고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비파행」을 썼다. 「비파행」에서 시간과 관련된 대표적인 名句는, ‘千呼萬喚始出來’, ‘今年歡笑復明年’, ‘秋月春風等閑度’, ‘暮去朝來顔色故’, ‘門前冷落鞍馬稀’, ‘老大嫁作商人婦’, ‘終歲不聞絲竹聲’, ‘春江花朝秋月夜’ 등 이다. 그리고 시인 자신의 不遇落拓함을 은유한 句는 ‘同是天涯淪落人’, ‘謫居臥病尋陽城’, ‘江州司馬靑衫濕’ 등 이다. 문학과 시간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문학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난 기쁨과 슬픔을 문자로 교직하여 표현한 것이다. 시어에는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시간들이 混淆되어 있다. 이 混淆된 時制와 시간의 長短과 遲速의 의미와 함께 풍자와 은 유의 세계를 이해해야, 한시 교육을 바르게 할 수 있다. 본고는 「장한가」와 「비파행」에 내재된 時制와 시간의 장단과 지속과 풍자와 은유의 세계를 분석했다. 본고가 한시 교육과 지도에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Brian Friel, who was born and raised in Northern Ireland, is called the best living Irish dramatist dealing with subjects focused on Ireland and its people in his plays.
In Faith Healer(1979), one of his best plays, Friel dramatizes a faith healer's experiences. The three characters, Frank(faith healer), Grace(Frank's wife), Teddy(Frank's manager) recollect the experiences they shared while travelling to cure the sick in Scotland and Wales. Their monologues detail the same experiences but are very different, according to Friel, because each recalls their memories according to their own desires and needs. Memory is not always accurate and can be a fiction.
Frank has the compulsion to transform all things around him into fiction. This ability is analogous to a writer's creative writing ability. Therefore, Frank is, in a sense, an artist.
Frank performs his faith healing shows in front of the sick with anxiety as he is not sure whether a miracle will occur or not. Like a faith healer, a dramatist as an artist writes dramas with anxiety because he is not sure that he will be able to move his audience with a successful performance. Frank is not sure that he will be able to move his audience. Frank is not sure if he has an ability to cure with miracles or if he is a con man. Like a faith healer, an artist has the sense of being a con man because he is indebted from his predecessors' works. Only through his death can Frank stop the maddening questions such as "Am I a con man? or am I endowed with a unique gift?" Frank is like a metaphor for an artist.
Friel, a dramatist, also has suffered from the agony of an artist and has been troubled by the scarcity of his creative works. Therefore Frank is a foil to Friel's autobiographical image.
윌리스 스티븐스와 윌리암 버틀러 예이츠는 은유의 힘을 빌어 상대적 진리를 암시하려 했으며 특히 실재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미지의 너머의 것들을 미적 활동과 의식활동이라는 관점을 통해 드러내려했다. 하지만 이들의 추구하는 목표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그 시적 비전을 표현하기 위해 의존하는 중요 은유적 요소들을 그 기능과 의미에 있어서 차이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간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드러내기 위해 필자는 먼저 “aesthetic”의 어원을 여러 역사적 배경을 통해 살펴본 후 그 기원이 인간의 감정(human feeling)에 있다는 것을 밝힌다. 다음으로 미적 감정(aesthetic feeling)이 어떻게 기존의 전통, 과학, 종교, 도덕, 가치 등등의 실재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가를 논한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스티븐스와 예이츠가 각각 다루는 미적 감정과 실재사이의 관계에서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 는 지를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스티븐스는 실재(reality)와 상상력(imagination) 사이에서 상호 작용하는 힘들에 집중하여 상상의 인식기능(imagined faculty)을 통한 지고의 픽션(the supreme fiction)를 이룩하려 했다면 예이츠는 네 개의 심리능력 (자아에 대한 의지, 反자아에 대한 마스크, 지성에 대한 창조심, 변화하는 인간육체에 대한 운명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융합을 추구한 점을 필자는 강조하려한다.
이 글은 시적 창조와 재현(representation)의 문제와 관련하여 예이츠 詩에 나타난 죽음과 不在의 문제를 다룬다. 우선 부재와 죽음이 어떻게 시적 상상력의 조건이 될 수 있는 가를 살피고 다음으로 죽음이 경험적이 것이 될 수 없으며 재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논하다. 재현 불가능한 죽음은 언제나 이름이나 은유로만 남아있게 되며 그 의미 또한 결정할 수 없게된다. 죽음의 이런 특성에 착안하여 이 글은 예이츠의 “A Dream of Death,” “Man and the Echo,” “Song of the Wandering Aengus,” “Sorrow of Love”를 다룬다. “A Dream of Death”에서는 시의 화자가 꿈속에서 연인의 죽음을 상상하고 언어적인 것으로 치환하여 그녀의 아름다움을 고정하고 한계 짖고 결정하여 오직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려 의도하는데, 이런 의도가 어떻게 언어 자체가 갖고 있는 비결정성의 특정 때문에 좌절되는 가를 논한다. “Man and Echo”에서는 죽음이라는 것이 재현불가능하며 항상 미래의 가능성으로만 남아있는 점을 분석한다. “Song of the Wandering Aengus”는 사라진 연인을 은유적 치환으로 재현함으로써 생기는 있음과 없음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Sorrow of Love”는 처음에 출판한 시가 나중에 다시 쓴 최종판에서 어떻게 흔적으로 남아 의미의 고정을 방해하는 가를 분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