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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9.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공주 금성동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지석묘 5기, 백제시대 주거지 2기·수혈군 1개소, 통일신라시대의 주거지 1기·석렬유구 3기·수혈 2기, 조선시대 수혈 1기, 일제강점기 이후 우물 1기 등 여러 시기에 걸쳐 다양한 성격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공주 금성동 유적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지석묘는 묘역이라고 특정지을 만한 매장주체부 주위 구획석들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점에서 기존의 묘역 지석묘와 차이를 보이며, 묘역을 표시한다기 보다는 매장주체부 주위와 개석 상부에까지 흡사 봉토분의 분(墳)과 같이 적석을 높게 쌓아 묘를 축조하는 점에서 가장 큰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이 기존의 청동기시대 제 묘제와 어떠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판단된다. 금번 조사에서 확인된 지석묘들은 단독으로 조성된 예도 있지만, 3기 이상의 묘가 서로 연접된 형태를 취한 예도 확인되어서 당시의 묘제 발달과 사회 구조의 변화를 추적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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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1.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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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9.04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5,200원
        7.
        2017.10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금성산의 관속식물상을 밝히고 주요 식물들의 분 포를 조사하였다. 2015년 7월부터 2016년 6월까지 총 30회에 걸쳐 수행되었으며, 그 결과 관속식물은 112과 358속 417종 8아종 48변종 8품종 2교잡종으로 총 483분류군이 확인되었다. 본 조사에서 발견된 483분류군 중에서 국립생물자원관 지정 적색목 록식물이 3분류군, 국립수목원 지정 희귀식물이 8분류군, 한반 도 고유종이 4분류군으로 조사되었다. 또한 식물구계학적 특정 식물은 29분류군, 귀화식물은 42분류군, 귀화율은 8.6%이었다. 관속식물의 유용도는 식용이 190분류군(39.3%), 목초용이 162분류군(33.5%), 약용이 154분류군(31.8%), 관상용이 58분 류군(12.0%), 목재용이 14분류군(2.8%), 공업용이 2분류군(0.4%) 그리고 섬유용이 5분류군(1.0%)으로 나타났다.
        8.
        2014.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김성일이 임진왜란 당시 어떤 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초유사 또는 경상우감사로서의 직무를 수행했고, 그것이 임진왜란의 극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가늠하는데 주안점이 있다. 김성일은 전형적인 퇴계학파 계열의 학자·관료였지만 인간적 성향 및 기 질에 있어 조식 및 남명학파와의 친연성이 컸고, 최영경의 신원운동을 주도 하는 과정에서는 강우 남명학파권 인사들로부터 상당한 신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런 바탕 위에서 그는 김면·곽재우·정인홍 등 남명문인이 중심이 된 의병조직을 원만하게 지휘·조율하며 전란에 대응했고, 그 결과로서 호남 을 수호하는 바탕을 마련했다. 또한 김성일은 수십년 관료 생활의 과정에서 형성되어 있었던 조정 관료 들과의 인적 연계망을 최대한 활용하며 직무를 수행해 나갔다. 류성룡·김우 옹·유근·김응남 등 주로 동인계 중진 관료에 집중되어 있었던 관료적 네트워 크는 군량의 조달 및 확충에 크게 보탬이 되었다. 결국 김성일은 남명학파와 의 사적(私的) 네트워크와 재조 관료들과의 공적 네트워크를 효율적으로 작동시키며 공인으로서의 책무를 충실히 수행했던 것이다. 그가 통신사행에 따른 실보(失報)에도 불구하고 영남재조론(嶺南再造論)의 측면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9.
        2014.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慶尙右道 義兵 봉기의 배경, 金誠一이 작성한 招諭文의 역사적 특징, 招諭 활동의 정치적 함의와 기여를 중앙과 지방의 갈등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재고찰한 연구이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임진왜란 初戰의 무력한 패배를 초래하는 데 일조한 경상도 지역 민 심 이반의 근본적 원인은 수령들의 무능과 비겁 때문이라기보다는 전쟁 이 전 적극적 군비 확충을 시도한 중앙 朝廷에 대한 지역민의 반발 때문이었다. 초반 전황이 극도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 조정은 탄탄한 지역 기반을 가진 재 지 사족층(在地士族層)에게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었다. 역설적이었던 것 은, 조정이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한 경상도 재지 사족층의 잠재력에는 그 들이 불법으로 탈점한 토지, 노비로 위장하여 거느린 농민, 마땅히 수행해야 할 軍役을 회피하는 데 성공한 사족 일부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 한 것들은 임진왜란 敗因의 하나로 흔히 언급되는 軍政 문란을 포함한 失政 의 결과물이었다. 둘째, 김성일의 초유문은 지역민을 결집하고 의병 활동을 장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따라서 초유의 대상인 경상도 지역의 士와 民을 가장 적절하게 설득하기 위한 논리와 내용으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에는 階序的 신분 구조와 華夷觀과 같은 당대인들의 특징적인 心性이 반영되어 있었다. 초유문은 크게 보아 義理와 利害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지역민을 설득하고 자 하였다. 셋째, 중앙 조정은 안동 출신의 명망 있는 前職 高官이자 南冥學派와 긴밀 한 유대가 있는 김성일에게 招諭使의 職名을 제수하여 경상우도에 파견하였 다. 김성일은 의병의 봉기를 장려·보장함으로써 武裝 起義할 경우 반란 세력 으로 오인 받을 수 있다는 재지 사족의 우려를 拂拭시켰고, 도주·관망 상태 에 있던 지방관과 지역민을 결집하여 저항의 장으로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하 였다. 나아가, 그는 전쟁 발발 이전부터 누적된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던 관 군과 의병의 충돌을 적절히 타협·조정하였다. 경상우도 의병의 봉기는 지역 의 방어뿐만 아니라, 이반된 민심을 돌이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일본군의 宣撫 공작과 원활한 현지 조달을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 를 갖는다
        10.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A major history textbook for high schools, A Modern History of Korea for High School (Seoul: Kumsung Publishing House, 2007) described that Protestantism in Korea supported Japanese invasion to Korea. The text book has been used for many years by more than 50% high schools in South Korea. The argument of this book is very important because it might influence over high school students who think that the text book should always be correct. However, Protestantism in Korea was not the supporter of the Japan Empire in the turn-of-twentieth century Asia. In reality, Korea Protestantism had been appeared by Korean people as defender of Korean people against Japanese power. At that time Korea protestantism had been closely related to America which send their missionaries to Korea and helped its modernization. When Japan tried to put Korea in her power, King KoJong sent his envoy to the president Roosevelt of USA for help to maintain his independence. In reality, Japan government had considered Korean Protestantism as big obstacle for its rule over Korea. Japan had always be afraid of Korean Christianity and spied over it. Japanese army in 1911 arrested 105 important Christian leaders to destroy Korean churches. Also, in the last years of Japan imperialism, Japan governor-general of Korea expelled American missionaries from Korean peninsular to disconnect Korean Christian relationship with America. Finally, missionaries tried to maintain the principle of separation between church and state in Korea. They did not involve in political matter either on Korean nationalism or Japanese imperialism. This attitude of missionaries could not be satisfied with Japanese as well as Korean. However, they thought that their original mission in Korea is evangelization, but not independent movement of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