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俛宇 郭鍾錫(1846-1919)의 大學 해석 중 특히 ‘明德’에 대한 해석 및 그와 관련해 다른 사람과 논쟁한 것을 중심으로 그 설의 특징과 의미를 논한 것이다. ‘明德’에 대해, 기호학파 洛論은 本然之氣로 보고, 湖論은 心의 光明處 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데, 이는 모두 心卽氣의 입장을 전제로 한 것이다. 반 면 嶺南學派는 朱子가 心統性情으로 해석한 것에 근거하여 心合理氣의 관점에 서 理를 위주로 해석하였다. 19세기 퇴계학파의 정맥을 이은 柳致明은 명덕을 氣淸理徹이라 하였는데, 그 의 문인 朴致馥은 ‘주자 이래 相傳한 嫡訣이라’ 하였다. 유치명의 견해는 명덕을 心合理氣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그런데 李震相의 心卽理를 위주로 하는 학자 들은 氣를 겸하여 논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이런 점에서 郭鍾錫의 설도 마찬가 지이다. 그런데 곽종석은 대학 삼강령․팔조목의 논의구조에 나아가 明德과 心을 엄 격히 다른 것으로 변별함으로써 하늘에서 얻은 心之本體를 가리킬 뿐만 아니 라, 行事를 통해 얻어지는 孝忠恭重 등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 점이 스승 이진상의 설 및 동문들의 설과 변별되는 가장 특징적인 점으로, 동문 들과 논쟁한 핵심 사안이었다. 그는 명덕을 선험적인 본원은 물론 후천적인 경 험을 모두 아우르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丁若鏞이 후천적 경험만을 중시한 것과도 일정 부분 연관성을 갖는다. 대체로 19세기 主理論者들이 主宰性을 강조하기 위해 본체․본원을 강조하고 있는데 비해, 곽종석은 행사를 얻어지는 實得을 모두 명덕에 포함시키고 있어 主宰性과 아울러 實用性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다른 학자들과 변별되는 점이 다. 이런 점에서 그의 체용론은 본체에 치중하지 않고 該體用의 논리를 갖고 있 다 하겠다.
경남 산청군 신등면 법물은 상산 김씨 가문의 세거지이다. 상산 김씨 가문은 이곳에 세거하면서 향촌 사족으로 성장하였으며, 관료들과 학자들을 다수 배출 하였다. 19세기 박치복, 허전, 이진상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섭렵한 학자 인 김진호도 그 중 한사람이다. 그는 법물의 이택당을 중심으로 강우지역 학자 들과 폭넓은 교유관계를 맺었으며, 물천서당 등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후학 양 성에도 힘썼다. 19세기 김진호가 학문 활동을 하던 시기의 고문서 1,709건이 김진호의 후손 댁에 소장되어 있다. 1,709건의 고문서는 간찰․만사․시문․제문․혼서․잡저․기문․서 문․발문․단자․상량문․행적기․고유문 등이다. 이들 1,709건의 고문서 가운데 약 64.2%에 달하는 1,097건이 간찰이다. 1,097건 간찰은 상당 부분 김진호에게 발신된 것이며, 또 성재집의 간행처로 사용되던 은낙재나 강학의 장소인 이 택당에 기거하던 학자들에게 발신된 간찰들도 있다. 그러므로 서로의 안부나 개인적인 용무를 위한 간찰도 있으나, 강우지역 학자들의 학문 활동과 관련된 간찰이 많다. 간찰은 문집에 실리기는 하지만 문집 편집자의 편찬 방향에 따라서 선별되고, 선별된 친필 간찰의 전문을 싣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강우 지역 학자들의 학문 활동을 볼 수 있는 친필 간찰은 사료적 가치가 크다. 그러 므로 간찰을 바탕으로 김진호를 중심한 강우 학자들의 교유관계, 학문 활동의 양상, 사회 현실의 인식과 대처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김진호는 혼맥에 의한 교유와 학문 활동에 의한 교유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 히 박치복, 허전, 이진상의 문인이었던 그는 강우 지역 학자들과 폭 넓은 교제 를 가졌는데, 허유․곽종석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상산 김씨 가문은 남인적 성향 을 가졌으나, 혼맥이나 학문 교유 관계에서는 노론과의 교유도 보인다. 학문 활 동은 각종 문집 간행과 강회를 통한 토론 등으로 대별된다. 김진호는 특히 허전 의 저서를 간행․중간하는데 관심을 많이 기울였는데, 그것은 특히 예론에 관심 을 갖고 실천하고자 한 김진호의 성향을 드러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강우 지역 학자들은 19세기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였으나, 강우지역의 공론이 형성되지 않 아 현실 참여에는 적극적이지 못한 측면이 있다. 서구 사상에 대해서는 성리학 을 통해서 전통을 고수하고자 하는 경향과 적극적으로 서학을 탐구하고자 하는 경향 등 학자들의 다양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물천 김진호는 19세기 말 영남 강우지역에 활동하였던 저명한 학자로서, 그 의 학문은 성재 허전의 예학과 한주 이진상의 이학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 다. 본고에서는 예학의 관점에서 그의 예설을 개괄하고, 그가 제안한 독특한 예 설의 내용과 그 성격을 검토하였다. 이를 통하여 본다면 김진호는 허성재 예설 의 충실한 계승자로서 그의 예설은 대부분 허성재가 편찬한 사의에 근거를 두면서 성재의 예설을 옹호 계승하는데 할애되었다. 이런 점은 그가 사의의 교 정과 중간을 주도하였다는 사실과, 또 그가 독특하게 제안한 「正服不變說」에도 잘 나타난다. 따라서 물천은 허성재의 예학을 충실하게 계승 전파하는데 기여 한 예학자라 할 수 있다.
勿川 金鎭祜는 寒洲 李震相으로부터 性理說을 전수받았지만 性齋 許傳의 문 하에서 먼저 수학하였고 학맥의 계보 상으로도 한주보다 오히려 성재 쪽의 近 畿學派에 더 가깝다. 물천은 한주의 제자인 俛宇 郭鍾錫과의 논변을 통하여 한주 성리설의 핵심인 七情理發說을 수용한다. 그러나 여전히 分開看에 의해 理發 · 氣發을 분명히 구 별할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한주의 학설을 대체로 수용하면서 한주의 竪看 · 橫 看 · 倒看 三看과 順推 · 逆推 二推라는 용어만은 끝내 사용하지 않는다. 특히 물 천이 한주의 대표적인 학설인 心卽理說의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는 竪看 대신 퇴 계 이후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져 온 渾淪看을 사용하는 것은 그가 性齋로부터 이 어받은 近畿學派의 학맥을 고수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한주는 主理의 필요성을 극히 강조했으나 물천을 주리를 주장하는 것을 꺼 렸고 주리라는 명목을 따로 세울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는 각자의 학문성향 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며, 또한 학문적 노선에서 寒洲學派와 상반된 주장이다. 물천이 성리설에서 시종 后山 許愈 · 俛宇 郭鍾錫 등 한주의 제자들과 다른 견 해를 보이는인 것은 성리설을 뒷받침하는 논리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후산이 한주의 삼간에 의거하여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는데 물천은 기존 영남학파의 혼 륜간과 분개간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내용이 서로 매우 흡사한 데도 서로의 견해의 차이를 좁히지 못한 것이다.
이 논문은 조선후기 경상도 지역에서 학문활동을 하였던 물천 김진호 (1845-1908)의 문학사상을 살펴보려는 목적에서 쓴 것이다. 아직 이런 주제로 그에 대한 논문이 없기 때문에 이 글은 우선 문학사상사의 흐름위에서 그가 어 떠한 자리에 자리잡고 있는가를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1. 전통적이고 관념적인 도학파였는가. 그는 문학에서 덕성과 의리를 중시하고 실천적 태도를 중시하였다. 그러나 도 학파들의 주장에서 시를 짓는 작자들이 선험적인 도리를 전달하는 매개자 역할 에 머무르고 있는데, 비하여 그는 인간마다 가지고 있는 ‘良知’를 강조하였다. 그는 단순히 전통적 이념을 계승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2. 모방을 거부한 현실주의자였는가. 그는 대가의 학자들이 의고적 입장에서 唐詩를 모방의 대상으로 삼는 태도를 비판하였다. 당시의 형식적인 운율을 모방하는 것으로 현실의 의미를 담지 못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시를 칭찬하면서 ‘그대의 시는 세상에 드 문 옛음율’이라고 칭찬하였는데, 이는 그가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과거를 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3. 古文으로 어떻게 현실을 담을 것인가. 그는 전통적인 형식을 고집하지 않고 현실을 표현하는 것이 문학의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문학은 형식적 논리보다는 실천적 행위가 기본이 되어야 하고, 보 편적 진실을 가지면서도 현실에 적합한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 이 바로 고문이라고 생각하였다. 4. 언어를 실천하면 살 수 있는가. 그는 자기만의 깨달음을 실천해야하고, 언어와 행동은 일치해야한다고 생각 하였다.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어려웠던 시절의 이름 없는 사람들을 주인공 으로 하는 글을 많이 남기고 있다. 언어는 행동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언어관, 문학관은 보수적이면서도 급진적인 양면성을 지니 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고문을 고집하면서 과거회고적일 수도 없고, 그렇 다고 현실적인 처지만을 강조하는 반의고적 주장을 할 수도 없는 모순된 시대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의 문학적 입장은 그가 일본 등 외국의 침략을 눈앞에 두고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시대 말기에 살았다는 시대적 배경을 안고 있다.
勿川 金鎭祜(1845-1908)선생은 寒洲 李震相(1818-1886)을 통해 退溪 理學 의 정통을 이으면서 性齋 許傳(1797-1886)을 통해 星湖에서 비롯한 近畿南人 의 학맥을 잇고, 고장의 선현인 南冥선생을 사숙하여 스스로의 학문세계를 성 립시킨 학자요, 勿川書堂과 麗澤堂 등에서 講學으로 다수의 올바른 제자를 길 러낸 큰 스승이었다. 晩醒 朴致馥을 통해서는 문학 방면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재야에 은거했던 山林處士였다. 물천은 전문적인 문사로서 시인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그가 남긴 문집의 시 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勿川의 시는 生活漢詩로 규정할 수 있을 듯 하다. 즉 학 자와 교육자로서의 생활을 영위해 나가면서 同門의 선후배 학자들과 弟子, 鄕 中人士, 姻婭戚黨과의 교유에 한시를 적극 활용하였다. 많은 양의 次(和)韻詩와 輓詩를 창작한 것이 바로 그 증거가 된다. 또 생활 주변에서 시의 소재를 찾아 작시하기도 하였고, 자신의 심회를 시 속에 녹이기도 하였다. 이 두 범주의 시 를 통해 자신의 수양과 학문적 성찰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각별하다. 민족이 위 기에 처한 상황에서 물천도 그러한 시대에 비교적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憫時 憂國의 시편을 창작하였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투철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 은 아니었으므로 뚜렷한 현실주의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 다. 마지막으로 비록 물천이 남명의 학통을 이은 것은 아니지만 동향의 선배로 서 남명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 바 몇 편의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남명을 百世師로 숭앙한 것에서 뚜렷이 확인된다.
주지하다시피 南冥 曺植(1501-1572)의 학문은 그의 사후 문인들에 의해 계 승 ․ 발전되어 來庵 鄭仁弘(1536-1623)과 寒岡 鄭逑(1543-1620) 등의 문인 집단에 의해 크게 현창됨으로써 학파를 형성하였으나, 인조반정 이후 내암의 敗退와 더불어 급격한 침체를 맞이하다가 1728년의 戊申事態 이후 존립 자체 가 거의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다가 18세기 말엽에 正祖가 南冥에 대한 賜祭文을 친히 지어서 내려준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서부 경남 지역에 서서히 학문 이 흥기하여 중엽 이후에는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미 退溪學派 化 또는 畿湖學派化한 상황에서의 興隆이었던 것이다. 勿川 金鎭祜 또한 이런 시대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인물이다. 물천은 학 문적 사승관계에 의해 주로 퇴계학파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지니면서도, 자신이 처한 지리적 배경에 의해 자연스럽게 남명학을 접할 수밖에 없었다. 물천의 남 명학파로서의 면모를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남명의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드러난 남명 정신을 숭앙하는 태도이다. 秋霜烈日 같은 粹然한 정신 경계와, 直內方外를 내용으로 하는 敬義之學을 남 명 학문의 핵심으로 파악하고, 이를 후학들이 마땅히 추구하여야 할 準的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남명의 학문이 廉頑立懦의 효과가 있다고 하여 남명을 ‘百 世師’로 인식하였다. 둘째, 남명의 구체적 저술에 대한 물천의 생각이 얼마나 깊은지에 대한 자료 는 흔하지 않다. 신명사도에 대한 한두 가지 견해만 보일 뿐이고, 이 또한 남명 의 학문을 자기화한 것으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셋째, 남명집 ․ 학기 ․ 연보 등의 중간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 면서, 기회가 되기만 하면 적극적으로 이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尊衛라는 이름 으로 남명의 진면목을 사라지게 하는 것에 대하여는 반대하였다. 이들의 중간 을 주관하던 復菴 曺垣淳에게 기회가 닿는 대로 자신의 견해를 주었으나, 물천 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일이 완성되지 않은 채 복암이 별세하였고 그 얼마 뒤에 물천 자신도 별세하였다. 요컨대 물천은 조선이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기 직전까지 살았던 인물로, 조 선 말기 이후 일제 강점 시기를 살았던 서부 경남 지역의 학자들에게 퇴계학과 함께 남명학에 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 던 인물이라 이를 수 있다.
金鎭祜는 경상도 단성의 商山金氏 가문에서 1845년에 태어나 1908년까지 활동한 학자였다. 단성의 상산김씨는 조선 중기에 이미 ‘八文章家’가 배출되어 영남의 名家로 알려졌다. 19세기 중반에 상산김씨 문중 書齋인 仁智齋는 김씨 문중의 家學의 산실이자 강우학계의 학술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김진호는 인지재에 소장된 수많은 책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교육환경에서 자 랐다. 김진호는 17세부터 박치복의 문하에서 詩文을 배웠고, 이어 허전의 문하에서 禮學을 익혔다. 우선 그는 스승 박치복이 운영하던 百鍊齋에서 70여명의 강우 학자들과 함께 공부하였다. 그 뒤 그는 麗澤堂을 지어 박치복과 함께 講學활동 을 하였고, 박치복이 작고한 이후에는 그가 이택당을 맡아 후진을 양성하였다. 또한 그는 허전의 문하에서 禮學을 배웠는데 禮를 해석함에 있어 人情의 측면 보다는 義理의 측면을 더 강조하는 경향을 띠었다. 19세기에 강우학계의 학자들은 조선이 처한 위기를 理學을 새롭게 해석하여 극복하려고 하였다. 김진호는 理氣說에 있어 스승 이진상의 학설을 계승하여 七情도 理가 發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김진호는 明德을 心으로 이해하 여 명덕은 理이지 氣를 겸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러한 김진호의 다 양한 주장은 19세기 당시 조선이 처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禮學이나 理學을 義理중심으로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