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시대 사상가이며 대학자인 남명 조식의 사상에 나타난 개별화 교육의 의미를 분석하여 내러티브 관점에서 바람직한 유아기 개별화 교육의 시사점을 논의하는 데 있다. 연구결과, 남명은 학습자의 마음성찰을 근간으로 개인의 자질을 인정하며 타자와의 관계를 존중하는 개별화 학습을 실천한 것으로 분석 되어졌다. 내러티브 관점에서 남명사상은 자아성찰로서의 내러티브 접근, 잠재능력에 대한 내러티브 접근, 상호작용 관계에 대한 내러티브 접근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본 연구결과가 주는 시사점은 내러티브 관점에서 학습자 개인의 자질을 어떻게 인정하고 지도할 것인지에 대한 유아기 개별화 교육에 큰 함의를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남명사상에 담긴 교육의 의미를 통해 유아기 개별화 교육을 이해하고 그 실천 범위를 확장해나가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본 연구는 남명의 교육사상을 근거로 청소년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 다. 이를 위하여 인성교육에 대한 교육요구를 PRECEDE-PROCEED 모형에 따라 설문문항을 개발하여 중학교 2학년(272명)과 고등학교 2학년(243명)으로 전체 515 명을 대상으로 교육요구를 진단하였다. 조사 결과, 청소년의 인성교육에 필요한 주 요 인성덕목은 존중, 정의/공정성, 책임, 성실, 정직/믿음, 예의, 배려의 7가지 항목 으로 선정되었다. 이러한 덕목을 기초로 하여 남명의 교육사상을 프로그램 구성의 주요내용으로 설정하였다. 프로그램은 전체 10회기로 구성되었으며, 각 덕목을 한 회기에 한 덕목씩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진행방법은 남명이 제자들을 교육한 방법과 협동학습법을 프로그램의 운영에 적용하였다. 인성덕목에 대한 이해 및 실천이 과정평가의 목표가 되며, 이를 통해 다양한 문제 행동을 줄이는 것이 영향평가의 목표가 되었다. 이후 장기 성과평가의 목표는 학생들의 신체적 및 정신적 건강수준 향상과 삶의 만족도를 증가하는 것이었다. 본 연구를 통해 개발된 남명의 교육사상에 근거한 인성교육 프로그램은 추후 한국의 자생적인 교육사상을 근거로 하는 인성교육 프로그램의 확산 및 정착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의 목적은 우리나라 사상가이며 대학자인 남명의 敬義사상에 내포 된 교육적 의미를 추출하여 오늘날 유아인성지도를 위한 교사의 리더십을 탐색하는 데 있다. 연구결과, 敬義사상에 근거한 유아인성지도 교사는 마음 을 다하여 수양하며, 올바른 배움으로 인지적, 정의적, 활동적 리더십을 義 롭게 실천해야하는 것으로 분석되어졌다. 본 연구결과가 유아기 인성지도 교사의 리더십 연구에 주는 시사점은 남명의 敬義사상을 통하여 정체성 있 는 교육자 역할을 정립하고 인성지도를 위한 실천적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는 점이다.
본고는 2012년 7월까지 남명 조식의 철학사상을 연구한 업적들을 회고한 글이다. 다섯 분야로 나누어 논의의 흐름을 살펴보았는데, 실천유학성에 대한 논의, 남명 성리학의 속성에 대한 논의, 탈유학성의 논의, 공부론의 특징에 관한 논의, 이기론적 성향에 대한 논의가 그것이다. 대부분의 논문들은 남명의 유학이 실천유학이자 脫이론적이라는 데 동의하고, 남명학의 특징을 비교라는 방법에 의하여 탐구한다. 비교 대상으로 삼아진 이들은 이황과 주희였다. 비교를 통해 남명만이 가지는 특성이 많이 드러났으나, 지나치게 차이성을 강조하고자 한 경우 상식에서 벗어난 무리한 주장들을 내놓아 남명학 이해를 오히려 저해한다. 이에 필자는 저술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남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차별화와 함께 동일성을 찾는 작업이 중요함을 제안하였다. 아울러 남명학이 동아시아 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기존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생활 속에서의 체험을 통해 공부해야 한다는 남명의 교훈은 여전히 유효함을 주장하였다.
이 논문은 16세기 조선시대의 南冥 曺植(1501-1572)의 정치사상과 17세기 명말 청초의 鏡萬唐甄(1630-1703)의 정치사상을 비교한 논술하였다. 두 사상가는 130 년이란 시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자리에서 같은 주제를 갖고 토론하며 교류한 듯 여러 방면에 걸쳐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특히 부패하고 부조리한 정치현실에 대한 강력한 개혁의식과 실천정신은 그야말로 不謀而合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성리학자들의 성향은 본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현학적 • 이론적 공소함 에 빠지가 쉽다. 막상 그런 현상은 성리학자들 사이에 빈번하였다. 그런 점에서 남 명과 주만은 철저히 이런 성리학자들의 단점을 실천적 · 개혁적 관점에서 보완해 나아갔다. 이로부터 두 사상가는 정치현실에 그 누구보다 민감하였고, 구체적 개혁 정책으로 당대 사회 정치적 부조리의 문제를 해소하려고 노력하였다. 결국 두 사상가는 당대보다는 후대에더 큰 빛을 발하며 사상사에 큰 족적을 남기었다.
Cho Sik was a great scholar in Chosun Dynasty. He was a contemporary scholar with Lee Hwang. We can see some statements of Cho Sik in the books written by Lee Ie(Yoolgog).
It is obvious that his thoughts affected many scholars later. In addition to this, he taught many disciples some of whom became public officials, and some became civil leaders in the War named Imjinwoeran(the invasion of the Japan, 1592). His administrative thoughts are revealed in the Letters to the King(Sangso) more clearly. And so the author analyzed the Letters and classified his administrative thoughts. The findings were like these.
His administrative thoughts could be summed 4 suggestions : leadership, personnel administration, administrative ideologies(the administration for the people and Minbon/民本 thoughts), the listening of public opinion, and the timing and Hersil(虛實, formal/substantial) as criteria for policy-making.
His administrative thoughts belong to the style of Moral-training - oriented mentioned in the paper. Generally speaking, we can see that Cho-Sik emphasizes most the Moral-training of the leader and the recruitment based on that. The administration for the people and Minbon thoughts also are the ideologies for the leader. The listening of the public opinion and the criteria for policy-making wholly rely on the will of the leader. It follows that we can see that he suggested Moral-training and will of leader for the solution of the bureaucratic problems, and he rarely discussed practical systemic and institutional reforms. This seems to reflect his absence of practical experience as a public service in bureaucratic system.
Nevertheless, his thoughts affected many practitioners and scholars later. And so we need to study the relationships with them and effects on them more clearly.
This paper is a research on the thinking basis and aspect of adapting reality represented by Nan-myeong(南冥) and Gal-cheon(葛川). I found next tendencies in each of their thinking basis by looking into the gener of 'bu(賦)' written by them, provisionally.
1. Nam-myeong regarded a fundamental problem as important; Gal-cheon considered a practical use in reality as important.
2. Nam-myeong pursued internal perfection of morality ; Gal-cheon pursued external enlightenment of morality.
3. Nam-myeong made an effort to cultivate his mind through practicing the virtue of self-development ; 'jon-yang(存養)', 'seong-chal(省察)', 'geuk-gi(克己)' ; Gal-cheon wished to make 'the reign of peace(太平聖代)' entering to the world with his frugal virtue.
4. Nam-myeong placed more importance on 'su-gi(修己)' than 'chi-in(治人)' ; Gal-cheon placed more importance on 'chi-in(治人)' than 'su-gi(修己)'.
And I deduced next characters in the aspect of the adaption in reality considering their 'memorial to the Throne(上疏文)'.
About the time when 'eul-myo-sa-jik-so(乙卯辭職宵)' was offered by Nam-myeong in 1555, he criticized severely the tumultuous national situation, and suggested its essential relief measures to King Myeong-jong(明宗). On the other hand, at that time, Gal-cheon pursued 'the contentment with poverty and delight in the Way(安貧樂道)' after retiring from the official position of 'cham-bong(參奉)', and did not show any criticism for political or social condition in particular.
When the government engaged both of them as a Nester at the throne changing era between Myeong-jong(明宗) and Seon-jo(宣祖) about 10 years later from 1555, Gal-cheon served in the government with 'hyeon-gam(縣監)' and 'mok-sa(牧使)'(names of county governor) responding to the recommendation, but Nam-myeong never entered into the official position after all. However, they cried for the reform of politic sphere each other. Nam-myeong pointed out the fundamental problems & principles with memorial to the Throne demanding sovereign must practice 'the rule of virtue(王道)' showing his own initiative, but Gal-cheon emphasized the relief measure concerning public welfare indicating the realistic problems.
In addition, the Nam-myeong and Gal-cheon's principles on official position showed different aspect. Nam-myeong was eager to the actualization of 'the rule of virtue' regarding himself as an executer for 'King Yao and Shun's Tao(堯舜之道)', and did not want to get the position by departing from his principle at not proper time. Thus, he made himself as a man of virtue keeping the dominant principle. Differ from Nam-myeong, however, Gal-cheon pursued the life of 'the contentment with poverty and delight in the Way' after retiring from the official position of 'cham-bong' in 1555, and it was derived from his avoid-make-trouble tendency with peripheral environments. Although it was a fact, Gal-cheon never gave up the will of 'administrating the state to relieve the people's suffering(經世濟民)', so he entered into the official position consequently. This is the Gal-cheon's right view of 'haeng-youg-sa-jung「用行舍藏 : If recommended, practicing Tao with taking up position. And if discarded, possessing his own Tao loneli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