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은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바 그 중 하나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 에 제소하겠다는 일본의 의도인 것이다 특히 일본은 독도를 한 일간 영유권 분쟁도서로 간주하여 이 문제를 국 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하자고 수차례 제의해 온 바 있다 즉 년 월 일 일본 정부는 구상서를 통하여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하자고 하였고 년 한 일 외무부장관 회담에서 국제사법재판소 제소제의를 한바 있 다 또한 일본 외무성의 년 펴낸 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포인트 등에서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제의 등을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본고는 독도문제에 대한 일본의 국제사법재판소 제소제의에 대한 한 국 정부의 반대논리를 제시하여 독도문제가 영유권 분쟁도서가 아닌 한국의 고 유영토임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일본의 국제사법재판소 회부 주장에 대한 반박 논리 및 근거를 제공하여 향후 예상되는 일본의 주장에 대응하기 위한 법적 이론적 및 논리적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이 논문에서는 지리학자들이 울릉도 및 독도 연구, 정착 및 영유권 연구에 주로 사용하는 세 가지 수단에 집중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지리학에서 중요한 세 가지 전환점을 선정해 보았는데, 이 전환점들을 계기로 지리학이 설명적인 학문에서 분 석적인 학문으로 변모되었다. 지리학의 세 가지 전환점은 다음과 같다. 1) 지리학 에서의 탐사(exploration), 2) 지도제작과 크로노미터의 발전, 3) 21세기 영토 문제 에 있어 공간정보 기술의 중요성이다. 사람이 최초로 울릉도와 독도에 도착한 정확한 날짜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고학적 증거 및 기록에 따르면 기원후 6세기에는 한국 선조들이 울릉도에 살고 있었다. 한국 어민들이 독도에 자주 갔지만 정착한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부터였다. 지리학적 연구는 울릉도에서 발견된 고대 유물도 연구 대상으로 한다. 고대 유물을 보면 삼국시대 말과 통일신라 시대에 정기적인 무역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유물이 나중에 발굴되게 되면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이 울릉도에 정착했었음을 드러낼 것이다. 울릉도와 독도 간의 긴밀한 관계가 수세기 동안 이어졌음을 증명하는 수백 개의 지도와 해도가 증거 서류에 포함되었다. 두 섬간의 연관성과 동해에서의 인간 활동은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울릉도와 독도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 증거의 양은 방대하고 이는 영유권 차원에서 독도와 감정적 그리고 문화적 유대가 없는 사람에게 곤란하다.
본 논문에서는 1953년부터 1965년까지 벌어진 양국 정부의 외교문서에 의한 논쟁에 서 역사적인 근거만을 대상으로 무엇이 쟁점인지에 대해 고찰해보고 쟁점의 변용에 대해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한일 양국 정부의 견해는 상세한 자료와 고증을 들어 독도에 대한 자국의 영유권을 주장함과 동시에 상대방의 주장을 부정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양국의 독도 영유권 관련 주장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단편적으로 시사되기는 했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것은 없다. 따라서 양국 주장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1953년부터 1965년까지의 교환공문에 대한 분석을 통해 독도영 유권 관련 주장의 논점과 변용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일본의 독도 영토 편입조치를 한반도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정의 일환에서 이루어진 일로 보고 있으며, 일본은 한국강점과 독도영토 편입을 전혀 별개 의 사안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독도 문제를 보는 기본적인 역사 인식에서부터 한일 간에 는 메꿀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이와 같이 독도 문제와 관련해서 한국과 일본은 서로 다른 시점에 서 있으며, 이러한 아포리아를 해결할 수 있을 단초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적인 구조를 타파하 기 위해서는 우리의 주장이 제3자에게도 합리적인 주장으로 비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 가 있으므로 우리 주장의 문제점에 대한 자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일본 정부는 1900년 칙령 제41호가 말하는 石島가 독도라 할지라도 한국이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했던 사실이 없어 한국의 독도 영유권은 확립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근본은 근대국제법에 있는데 이는 주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법이며 전쟁조차 합법으로 하는 등 약육강식적인 법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한국 등 ‘반미개’(半未開) 나라들에 대해서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여 자국의 권익을 확대시키는 도구로서 근대국제법을 이용했다.
한편, 한·일 양국 간에는 영토 문제에 관해 17세기에 국제적인 약속, 즉 ‘광의의 국제법’이 존재했다. 이는 ‘울릉도 쟁계’ 당시 양국이 교환한 외교문서들에서 구성된다. 양국은 외교 교섭에 의해 울릉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하고, 아울러 낙도(落島)의 귀속 판단 기준을 확인했다. 이 기준은 ① 어느 정부가 낙도에 영유 의사를 가지고 있는가? ② 낙도는 어느 나라에 가까운가? 라는 두 가지이며, 실제로 어느 쪽이 낙도를 지배했는지는 영유 결정의 요인이 아니었다.
그 후 일본에서 울릉도와 독도의 귀속이 몇 번이나 문제됐지만 1877년 태정관 지령 등에 볼 수 있듯이 그때마다 위의 기준이 잘 지켜져 두 섬은 한국 영토로 판단되었다. 위의 기준은 양국 사이에서 관습으로 되고, 독도는 광의의 국제법상 한국 영토였다. 그런데 일본은 청일전쟁 전후부터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등 제국주의 국가의 본성을 드러내는 가운데 광의의 국제법이나 영토에 관한 관습을 무시하게 되었다. 1905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해군 수송선에 큰 피해를 입은 일본은 독도에 망루를 비밀리에 세우는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 때문에 일본은 무주지선점론을 구실로 삼아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할 것을 내각 회의에서 결정했다. 하지만 이 구실로 삼은 어민 나카이의 독도 점령은 성립되고 있지 않았다. 또한 독도는 무주지가 아니었으며 광의의 국제법상 한국 영토였다. 따라서 일본의 근대국제법에 의한 무주지 선점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며 일본의 독도 편입은 무효다.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태정관지령의 관련성을 간단히 논하면 다음과 같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2조 a항은 ① 독도에 대한 미국의 제한된 정보와 ② 1905년 이전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간주된 적이 없다는 두 가지의 점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하다. ① 울릉도 쟁계에서 일본이 독도와 울릉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을 인정했고, 태정관 지령이 이를 승계한 것이므로 적어도 1699년 이후 일본에 의해 독도는 한국의 영토 로 인정되어왔다. ② 아무리 양보를 해도, 적어도 1905년 일본이 독도 편입 조치를 취하기 이전에 까지 태정관지령은 계속 효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일본에 의해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이 인정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독도에 대한 한국의 관할권을 인정할 만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더라도, 일본에 의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이 인정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독도에 대한 한국의 관할권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③ 앞의 ①과 ②가 사실인 이상, 미국의 제한된 정보라는 것은 결국 1905년 일본의 독도편입조치 이후의 정보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1905년의 일본의 독도편입을 사실로서 전제를 하고 작성된 샌프란시스 코조약 제2조 a항에 대한 해석은 변경을 요할 수밖에 없다. 즉 제2조a항에 독도가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일본이 포기해야 할 섬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샌프란시스코조약 제2조 a항은 미국의 잘못된 정보에 의해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일본의 자기부정에 해당한다. 태정관 지령의 현재적 의미는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국제법상 독도의 영유권은 한국에 귀속된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간의 독도의 영토 분쟁 이 불행하게도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 간의 합의 없이 일본 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국제사 법재판소에 제소되게 되면, 한국 정부는 다음의 두 단계의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제1단계의 조치로, 한국 정부는 “응소 또는 응소거부의 정책 결정”을 하여야 한다. 패소 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응소거부의 정책 결정을 하는 것이 요구된다. 제2단계의 조치로, 한국 정부는 제1단계 조치에 뒤이어 “응소거부의 정책 결정을 시행하 는 조치”를 시행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응소거부의 명시적 의사 표시를 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며, 부작위 그 자체가 응소거부의 효과가 있으나 Forum Prorogatum의 성립을 기피하는 것이 요구된다. Forum Prorogatum은 일방 당사자의 국제사법재판소에의 제소 에 대해 타방 당사자의 명시적 또는 묵시적 동의에 의해 성립되는 재판소의 사후적 관할권을 말한다. 한일간의 독도 분쟁에 대한 국제사법재판소의 Forum Prorogatum의 성립의 법적 효과 를 기피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치가 요구된다. i)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의 제소에 대해 국제사법재판소의 관할권 성립을 배제하기 위해 국제연합 사무총장에 대하여, 국제사법재판소에 대하여, 그리고 일본정부에 대하여 동의의 선언을 기피하여야 한다. iii) 한국정부는 국제사법재판소의 관할권을 배제하기 위해, 소송절차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 간의 행위로부터 추론되는 묵시적 동의를 기피하여야 한다. 요컨대, 일본정부의 일방적 제소에 대해 한국정부는 “응소거부의 명시적 의사 표시”를 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며, “부작위” 그 자체가 응소거부로 인정된다. 다만, Forum Prorogatum의 성립을 기피하여야 한다. ii) 한국정부는 국제사법재판소의 관할권을 배제하기 위해, 소송절차 기간 동안 연속적인 행위를 통해 표시되는 한국정부와 일본정부 간의 합의를 기피하여야 한다.
17세기 해금 정책으로 인해 무인도로 된 울릉도·독도에 일본 어민들이 침입해 어업을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의 연구를 바탕으로 에도막부(江戶幕府)가 다케시마(竹島)=울릉도 도해면허처럼 마쓰시마(松島)=독도 도해면허도 발행하고 마쓰시마 를 경영했기 때문에 일본은 마쓰시마에 대한 영유권을 17세기에 확립했다고 주장했다. 이 처럼 17세기 일본인의 마쓰시마 어업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이를 본격적으로 검증한 논문은 거의 볼 수 없다. 본고는 이런 일본인의 마쓰시마 어업이나 도해면허를 분석 하고 독도 영유권 문제를 생각한다.
마쓰시마에서 어업이 시작된 것은 다케시마(竹島)=울릉도에서의 어업이 시작된 지 약 30년 후다. 이렇게 뒤늦게 마쓰시마 어업이 시작된 것은 많은 장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마쓰시마에는 80석짜리 정도의 작은 배로 갈 필요가 있었다. 다음에 마쓰시마에는 장작이나 식수가 거의 없으니 생활하기가 어려운데다가 강치에서 기름을 만드는 작업도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케시마에서의 강치 기름의 수확이 급감했기 때문에 어민들은 부득이 1650년대에 마쓰시마에서 강치 잡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강치 사냥은 악조건 때문에 “조금씩”밖에 못했다. 따라서 다케시마 도해가 없으면 마쓰시마 어업은 경제적으로 도 성립되지 않다.
가와카미 겐조는 어민들은 다케시마로 도해하는 도중에 먼저 마쓰시마에 들러서 어업을 했다고 주장했으나, 도해 기록을 분석하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다케시마로 왕복하는 도중에서의 마쓰시마 어업은 없었다. 마쓰시마 어업은 다케시마를 기지로 삼아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때문에 마쓰시마는 “다케시마 근처의 작은 섬” 등 다케시마의 속도로 인식됐다.
종래 다케시마로의 도해는 200석짜리의 큰 배 2척으로 갔는데, 마쓰시마에서 어업을 하려면 배 2척 중 1척을 80석짜리 정도의 작은 배로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가져올 수 있는 어획물의 적재량이 감소한다. 이 때문에 당초 오야(大谷)는 마쓰시마에서의 어업을 제의한 무라카와(村川)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라카와만이 마쓰시마 어업을 시작한다 면 손해를 보기 때문에 무라카와는 오야·무라카와 양가를 돌보던 아베 시로고로(阿倍四郎五郎)를 움직여 오야를 설득했다. 드디어 오야도 수입의 감소를 각오해 마쓰시마에서의 어업을 시작하게 됐다. 이런 사정을 아베는 그때까지 전복을 헌상하고 있었던 로쥬(老中)에 알리고 양해를 얻었다. 이것이 “로쥬의 내의(內意)”인데,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는 이를 바탕으로 마쓰시마 도해면허가 발급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케우치 사토시(池內敏)가 주장하듯이 “로쥬의 내의”는 결코 도해면허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민들 사이의 사업을 조정하는 것이며, 마쓰시마 도해면허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오야·무라카와 양가의 어업은 조선인도 울릉도에 출어하게 되자 전기를 맞았다. 다케시 마(울릉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조·일 간에 울릉도쟁계(다케시마 일건)가 시작됐다. 논쟁이 평행선이 됐다는 쓰시마번의 보고를 받자 에도막부는 다케시마·마쓰시마의 조사를 시작했 다. 그 결과 다케시마는 조선 영토이며, 다케시마 근처에 있는 마쓰시마는 돗토리번에도 일본 어느 나라에도 소속되지 않다는 사실을 에도막부는 알게 됐다. 따라서 1696년에 에도 막부가 다케시마 도해금지령을 내렸을 때에 일본 땅이 아닌 마쓰시마도 도해가 금지됐던 것이다. 그 후는 약 200년 동안 마쓰시마에서의 일본인 어업은 기록에 없으며 마쓰시마에 상륙했다는 기록도 없다. 따라서 17세기에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립했다는 주장 은 성립될 수 없다.
안용복 피랍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겐로쿠 다케시마 일건 (元禄竹島一件)’의 결과, 에도 막부(江戶幕府)는 ‘다케시마(울릉도) 도해 금지령’을 내렸다. 이 금지령에 마쓰시마(松島, 독도)의 이름은 없었지만 금지령을 내린 경위를 생각하면 “다케시마 근처의 마쓰시마”도 도해가 금지된 것이다. 게다가 다케시마 · 마쓰시마가 조선영토임은 1724 (교호 享保9)년 에 돗도리번으로부터 에도막부에 제출된 「다케시마노 가키쓰케(竹島之書付) 3통」에 부속 된 그림지도 「다케시마 도(竹島圖)」에서 확인된다. 이 그림지도는 분명히 다케시마 · 마쓰 시마의 한 쌍을 조선영토로 그렸다. 그후 에도막부는 ‘덴포 다케시마 일건(天保竹島一件)’때에 사건 기록 『조선 다케시마 도항 시말기(朝鮮竹島渡航始末記)』를 작성했는데 이에 부속된 그림지도에서 다케시마 · 마쓰시마를 조선영토로 그렸다. 이는 ‘겐로쿠 다케시마 일건’의 인식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 인식은 에도시대 말기까지 계속됐으며, 에도막부는 쵸슈번(長州藩)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郎) 등으로부터 제출된 마쓰시마를 포함한 다케시마 개척 청원서에 대해 다케시마는 덴포기 에 조선영토임을 확인했다는 이유로 각하했다. 이런 다케시마 · 마쓰시마를 조선영토로 보는 인식은 메이지(明治)정부에도 이어졌다. 메 이지 초년에 조선을 내탐하기 위해 부산의 왜관 등으로 파견된 일본외무성 관료들은 ‘겐로 쿠 다케시마 일건’을 충분히 조사해 다케시마 · 마쓰시마가 조선영토임을 확인했다. 한편, 일본내무성에서는 지지과가 관찬지지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겐로쿠 다케시마 일 건’을 조사해, 다케시마 · 마쓰시마가 일본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이 소다케시마 각서(礒竹島覺書)』를 편찬했다. 이 직후 지지과는 태정관으로 옮기고 관찬지지 『일본지지제요(日本地誌提要)』를 편찬했으니 이 책에도 다케시마 · 마쓰시마가 일본영토가 아니라는 인식이 이어졌다. 이처럼 내무성 및 태정관은 다케시마 · 마쓰시마가 일본영토가 아니라는 인식을 가졌으니 시마네현에서 「일본해내 다케시마 외 1도 지적 편찬 질문서(日本海内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가 제출됐을 때 쉽게 다케시마 · 마쓰시마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인식에 근거해 내무성은 다케시마 · 마쓰시마를 일관해 일본영토 밖으로 하는 관찬지도를 작성했다. 특히 지도 책 ꡔ대일본국 전도(大日本国全圖)ꡕ에서는 1871년부터 1883년까 지 일본 각지의 소속의 변천을 지도 12장에 밝혔는데 이 모든 지도에 다케시마 · 마쓰시마 는 없으며 일본영토로 취급되지 않았다. 결국, 일본은 역사상 독도를 조선 · 한국 영토로 판단한 일은 몇 번이나 있으나, 독도를 일본영토로 판단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독도를 일본은 제국주의적 수법으로 1905년 에 일본땅으로 편입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외무성의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