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다양한 역사문화 자원이 공존하고 있는 서울 호암산성의 역사적 가치를 살리 고 더욱 많은 시민이 찾을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향후 정비 방향과 활용 방 안을 모색해 본 것이다. 우선, 정비 방향으로는 우선 성곽에 대한 정밀지표조사를 통한 현황 자료 확보와 성벽과 문지에 대한 학술발굴조사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리고 호암산성 역사문화길 조성 및 정비에 관한 의견과 함께 QR코드를 넣은 안내판 설치를 통해 현장에서도 유적에 대한 정 보를 쉽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또한 호암산성 아래로 지나가는 현재의 서울 둘레길 외에 호암산성을 지나갈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둘레길 코스 개발이 필요함을 언급 하였다. 그리고 현재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제2우물지 및 주변 건물지에 대한 정비 복 원이 필요함을 주장하였다. 또한 녹조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한우물에 대해서도 재정비가 필요하며, 호암산성에 상징적인 사인물을 설치함으로써 포토 스팟을 조성하는 방안을 제안 하였다. 그리고 활용 방안으로는 산성의 접근성 강화를 위한 주차장 마련, 산성의 역사적 가치와 발굴조사 성과 등을 알리고 탐방객의 편의를 위한 방문자센터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또한 청사초롱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외부 연결통로의 환경 개선과 함께 호암산성을 알릴 수 있는 공간으로 꾸밀 것을 제안하였다. 이 밖에도 금천구 교육나눔협동조합에서 시행하였거 나 시행하고 있는 우리고장 국가유산 활용사업 활성화 및 지역문화유산교육 활성화 사업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호암산성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 에 호암산성과 관련된 여러 스토리텔링 개발이 필요하며, 홍보 및 탐방객 만족도 향상을 위 한 문화유산 전문해설사 제도를 적극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음을 제시하였다.
그동안 통일신라시기의 산성은 성벽이나 문지, 집수시설 등을 중심으로 발굴조사 되었 다. 그 결과 성벽의 축조기법이나 조성 시기, 구조 등에 대해선 비교적 많은 자료가 축적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산성의 주체인 인간의 숙식 등과 관련된 건물지의 조사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편이다. 통일신라시기의 산성 내 건물지는 대체로 기단석을 갖추고 있으나 동 시기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가구식기단은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그리고 이 시기의 주요 난방 시설인 쪽구들 의 경우도 초석 건물지에서 발견된 사례가 거의 없다. 단적으로 전면 발굴조사가 진행된 광 양 마로산성의 경우 성주나 하급 관리, 병사들이 머물 수 있는 난방시설이 턱 없이 부족함을 살필 수 있다. 아울러 전술한 기단석의 위계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당시 광양 마로산성은 치소성이나 거점성으로 인식될 정도로 중요한 산성이었다. 그러나 성주나 관리, 병사들이 상주하기 위한 온돌 건물지와 성주가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 물지의 기단석 등은 쉽게 구별할 수 없다. 이는 결과적으로 산성 내 건물지가 일상생활을 영 위하기 어려운 구조였음을 알게 한다. 그런 점에서 향후 산성 외부의 건물지 조사에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현재 철근콘크리트 분야에서 부재의 철근을 FRP 보강재로 대체하기 위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CFRP(Carbon Fiber Reinforced Polymer)는 특히 내화학성이 우수하여 보수 및 보강재로 큰 장점을 가지 며, RC 구조물의 보강재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CFRP 그리드의 경우 수지를 이용하여 섬유를 결합한 형 태를 가진다. 이러한 형태는 외부의 영향에 의해 수지 혹은 섬유의 손상으로 강도 저하가 발생할 수 있다. CFRP 그리드의 산성에 대한 저항성을 침지기간에 따른 인장강도 변화량 및 SEM과 무게 변화를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따라서 Ph 농도 1~3의 강산성에 CFRP 그리드를 침지시키는 방식을 통해 내 화학 실험을 진행한다. 황산()을 이용하여 산성 용액을 제작한 후 실험을 진행하였다. 실험은 항온장치에서 60℃의 온도로 침지기간은 30, 60, 90, 180일로 한다. 그리드의 인장강도 변화를 확인하기 위하여 기간 별 시편의 수는 5개로 하며 침지시키지 않은 그리 드를 포함하여 총 25개의 시편을 실험한다. 인장실험을 통해 변형률 및 인장강도 변화를 확인한다. 그 리드의 섬유 및 수지의 변화 확인을 위해 실험진행 전 그리드의 무게를 측정 및 SEM(전자주사현미 경) 데이터 확보 후 실험을 진행한다. 기간별 침지된 그리드와 비교를 통해 기간별 섬유 및 수지의 영 향 정도를 확인한다. 본 연구에서는 산성이 CFRP 그리드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기 위해 인장강도, SEM, 무게 변화를 통해 연구하였으며, 이를 통해 산성의 영향을 받는 CFRP 그리드 부재의 안정성을 평가하고자 한다.
거제 옥산성은 문헌 기록에는 조선 말 거제부의 산성으로 축조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발 굴조사 결과 신라 때 이미 축조되어 대체로 고려 시대까지 활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발굴조 사에서 나타난 산성의 하부 구조는 전형적인 신라 산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다음 과 같은 중요성을 갖는다. 1) 옥산성은 7세기에 신라가 거제도를 직접 지배하고 또 이를 통 해 거제도 서쪽 방면에서 백제와 왜의 연결을 방지하기 위해 축조한 산성이다. 2) 문무왕 때 거제도에 군을 설치하면서 이 성은 상군 매진이현(경덕왕 때 거제군 명진현으로 개명)으로 편제되었다. 옥산성은 통일 신라 시대를 지나 고려 중기까지도 명진현의 성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3) 조선 후기 거제현의 치소가 마침내 옛 명진현 인근에 정해지게 되었는데, 여기에 는 읍성을 축조하지 않았고, 조선 말 인근 고성을 수축하여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전통 시대 산성을 축조한 거의 마지막 사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앞으로 거제도의 다른 신 라 유적과 함께 체계적인 조사와 관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 초기 왕도(王都)인 졸본의 오녀산성은 평지에 있는 중국의 도성(방어성이자 도읍 성)과는 달리 산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 고구려는 산성을 방어성이자 치소성으로 삼아서 중 국의 침략에 대항하며 그 효율성을 증명하며 국세를 펼쳐 나갔다. 고구려 왕도 연구는 일본 인 학자들이 20세기 초에 주로 많이 하였는데 그들의 연구는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14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그의 논문에서 고구려 도성은 평상시 거주하는 평지성과 비상시 들어가 농성하는 산성의 세트로 이루어졌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이 설은 한국과 일본과 중국 학자들 사이에서 100여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통설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근 래에 여러 한국의 신진 학자들에 의하여 세키노 다다시의 고구려 왕성의 평지성-산성 세트 론에 대한 의문과 비판이 여러 번 나왔다. 양시은(2021)은 이러한 도식화된 이론의 시작과 정착과정 및 어떻게 일본, 중국, 한국의 학자들이 이 이론을 수용하게 되었는지를 체계적으 로 토의한 뒤, 산성과 평지성의 세트이론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일반 시민을 위한 한국사 서술이나 다른 학술 논문에서는 이 산성과 평지성의 세트 이론이 보편화 되어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이 논문은 고구려의 왕도는 산성과 평지성의 세트가 아니고, 산 성에서부터 시작하였고, 산성을 위주로 하여 외부 침략을 방어하고 나라를 경영하였다는 것 을 다음 다섯가지 고구려 왕도의 특징을 들어 검토하고자 하였다.(1)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산성이 주로 제1차적인 왕도이었다.(2) 고구려에서 왕도로서의 산성은 토속신앙 적 성지聖地이자 성전聖殿이었다.(3) 뉴질랜드 마오리 문화의 목책성(木柵城)과 비교해 보 면 한 부족이 대체로 목책으로 요새화된 성 하나를 방어성이자 거주성으로 하고 나머지 인구 는 목책성 주위에 방어벽이 없는 마을에 흩어져 살다가 위험시(외부 침략이 있을 때) 목책 요 새지에 들어가 함께 농성하였다.(4) 고구려의 외국침략자에 대한 방어 전술이 청야입보淸野 入保-게릴라전술이었는데 이러한 전술에는 산성이 평지성보다 더 큰 이점이 있었다.(5) 근 래 많은 고고학적 산성의 발굴 결과는 고구려의 산성-평지성 세트 방위체제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졸본에는 아예 평지 왕성이 없었고, 그 다음 고구려의 수도 두 곳(집안, 평양) 모두 왕 도가 산성에 위치해 있다가 힘이 축적되고 필요를 느꼈을 때 평지성을 쌓아 왕도의 역할을 분담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산성이 곧 방어성이자 치소성(도성)의 역할을 하였다.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의 평상시 거주하는 평지성과 비상시 들어가 농성하는 산성이란 세트이론은 받아 드릴 수 없 다. 여기에 뉴질랜드 마오리 문화의 목책방어성과 고구려 산성의 비교연구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In this study, the biogeochemistry management (BGC-MAN) model was applied to North and South Korea pine and oak forest stands to evaluate the Net Primary Productivity (NPP), an indicator of forest ecosystem productivity. For meteorological information, historical records and East Asian climate scenario data of Shared Socioeconomic Pathways (SSPs) were used. For vegetation information, pine (Pinus densiflora) and oak (Quercus spp.) forest stands were selected at the Gwangneung and Seolmacheon in South Korea and Sariwon, Sohung, Haeju, Jongju, and Wonsan, which are known to have tree nurseries in North Korea. Among the biophysical information, we used the elevation model for topographic data such as longitude, altitude, and slope direction, and the global soil database for soil data. For management factors, we considered the destruction of forests in North and South Korea due to the Korean War in 1950 and the subsequent reforestation process. The overall mean value of simulated NPP from 1991 to 2100 was 5.17 Mg C ha-1, with a range of 3.30-8.19 Mg C ha-1. In addition, increased variability in climate scenarios resulted in variations in forest productivity, with a notable decline in the growth of pine forests. The applicability of the BGC-MAN model to the Korean Peninsula was examined at a time when the ecosystem process-based models were becoming increasingly important due to climate change. In this study, the data on the effects of climate change disturbances on forest ecosystems that was analyzed was limited; therefore, future modeling methods should be improved to simulate more precise ecosystem changes across the Korean Peninsula through processbased models.
미술이 형성되고 발전하는 과정은 다양한 작용하는데, 특히 ‘사상’은 미술 전개에 중요한 이에 본 연구에서는 선종사상이 반영된 동아시아 하였다. 선종은 언어와 문자를 초월해 좌선과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직관과 기존의 불교는 경전과 의례의 형식 등을 다양한 분야에서 불교미술이 발전하였다. 하지만 과 의례의 형식을 거부하고 특정 승려나 깨달음의 는 정도에 머무는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이나 한산(寒山), 습득(拾得) 등 선승들을 그린 동자와 소를 통해 깨달음의 과정을 그린 심우도( 있다.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미술이 여러 사상으로부터 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를 상이 반영된 동아시아 회화를 확인할 수 있을
이 글은 석성에서 토성으로 개축 시 양상을 설명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며, 행주산성을 대 상으로 하였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에 테뫼식 석축산성-석성 1-으로 축조된 이후 다양한 부 속시설이 설치되었다. 고려시대에는 토성-토성 1-으로 개축되었으며, 이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석성-석성 3-으로 개축되었음이 밝혀졌다. 행주산성의 석성 1은 덕양산과 서쪽 사면의 8~9부 능선을 두르는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축성되었다. 외벽에는 1~2차례의 수축이 이루어졌으나 적극적인 생활면의 변화는 확인되 지 않는다. 이후 북서벽에 치 1이 가축되었다. 서벽 북쪽의 트렌치 토층을 분석하면 석성 1 외부를 단상으로 굴착한 부분과 외황이 매몰되고 일정 부분 대지가 조성되었다. 보축성벽과 치 2가 가축되면서 북동쪽 성우과 서벽 외부에는 비교적 넓은 평탄지가 조성 된다. 성 내부는 구지표를 절개한 후 1열의 내벽이 축조되었다. 이와 연동하여 생활면은 2차 례 정도 높아졌고, 각각의 상면에는 기와와 점토를 혼합하여 다졌다. 이후 남서벽에 석성 2 와 치 3이 축조되었으나 성 내부의 생활면 변화는 알 수 없다. 석성이 폐기된 이후 서쪽과 남쪽으로 확장된 포곡식의 토성이 축조되었다. 북동쪽 성우 의 성벽은 석성 1의 붕괴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마감된다. 이 부분의 남쪽은 토성벽이 보이지 않다가 동벽에서 토성 1이 확인되는데, 토성으로 개축된 이후에도 석성을 활용하였 음을 알 수 있다.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북동쪽 성우와 남동벽에 치가 가축된다. 기저부의 양 상으로 보아 토성 1과 공정상의 차이로 보기 어렵고, 당연히 생활면의 변화가 감지된다. 토 성 2가 축조되는 시점에는 생활면이 상당히 높아졌으며, 성 외부의 지형은 굴곡을 이루고 있었다. 이후에는 토성이 폐기된 이후 퇴적층 상부에 석성 3이 축조됨으로써 생활면의 변화 를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행주산성은 테뫼식 석성으로 축조된 이후 포곡식 토성, 마지막으로 석성으로 개 축되었다. 이에 연동하여 생활면은 지속해서 높아짐을 알 수 있다. 한편, 토성에 대한 기왕의 연구는 성벽을 축조한 이후 유지가 어려우므로 내ㆍ외피 토루 를 설치해야만 붕괴를 방지할 수 있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토성 1의 성벽은 초축 당시 최 소 300㎝ 이상이었다. 내ㆍ외피 토루 없이 유지되었음이 밝혀졌으므로 토성에 대한 개념을 재검토해야 하는 자료를 확보하였다. 이 글의 대상인 행주산성 성벽의 구조와 구지표의 변 화는 다른 성곽 조사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성곽에 대한 조사를 진행할 경 우 성벽의 구조와 더불어 경관의 변천(성벽의 수·개축과 구지표의 변화 등)을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부산 배산성 북쪽 성벽구간 발굴 결과, 삼국시대 초축 성벽과 통일신라시대 개축 성벽이 함께 조사되었다. 삼국시대 초축 성벽은 수직식성벽으로 하부에 기단석축과 기단보축이 함 께 설치된 구조이다. 수직식성벽은 내부에서 발생하는 측력으로 인해 붕괴 위험이 높다. 이 를 보완하기 위하여 계단식내벽을 쌓아 측력을 일부 흡수하기도 하나 장기간에 걸쳐 누적된 압력으로 인해 결국 수직식성벽은 붕괴되고 만다. 수직식성벽은 적들이 등성하기 어렵다는 장점은 있으나 붕괴 위험이 높아 통일신라시대에는 층단식성벽 축조기법이 등장한다. 외벽 의 성돌 크기는 더욱 커지고 가공 수법은 판상형 할석에서 장방형 또는 방형 할석으로 바뀐 다. 바른층쌓기 수법은 더욱 정교하게 적용되고 기단보축은 소멸한다. 두 가지 축조수법이 확인된 배산성 초축 시기는 6세기 중엽경, 개축 시기는 8세기 중엽경으로 약 2세기의 시간 차가 있다. 신라 경덕왕 16년(757) 12월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거칠산군을 동래군으로 고쳤다는 기 록이 있는데, 배산성 개축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 그 동안 동래군 치소성(행정 읍치)으로 동 래고읍성을 지목하여 왔으나 고읍성 축성은 배산성 개축 시점보다 후행하는 것으로 판단된 다. 따라서 배산성은 고대 부산의 행정 치소로 오랫동안 기능하여 왔으며, 고읍성이 축성된 이후에는 행정 기능은 자연히 이양되지만, 배산성은 여전히 방어적 배후산성으로 활용되었 던 것으로 여겨진다.
파주 덕진산성은 임진강 북안에 위치하는 산성이다. 현재까지 6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성벽 및 시설의 축조양상을 파악하여 경관의 변화과 정에 대해 살펴보고, 수축에 대한 특징들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덕진1기는 고구려가 처음 덕진산성을 점유한 시기로 북상하는 신라군을 방어하기 위해 임진강유역의 성곽들과 함께 축조하였다. 덕진2기는 고구려 멸망 신라가 덕진산성을 확보 하고, 나·당전쟁 중 전쟁에 이용하기 위해 성벽과 부대시설 등에 대한 대대적인 개·보수 를 실시하였다. 덕진3기는 신라가 북쪽의 방어선을 강화하고, 지방행정을 정비하면서 덕진 산성을 지방행정에도 이용하기 위해 성벽과 시설물을 정비하였다. 덕진4기는 조선시대에 다시 고쳐 쌓아 이용하였다. 덕진산성은 고구려-신라-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성곽이 이용되는 과정이 명확하게 확인되고 있어, 다른 성곽과 비교를 통해 성곽의 축성법과 운영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유용 한 자료이다. 분석 결과, 수축을 통해 확인된 특징점들은 ①성벽을 덧대어 그대로 이용하였 다. ②좁은 성 내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려고 한 노력들이 확인된다. ③성의 운영목적에 따른 구조적 변화가 확인되었다. 시기별로 목적에 따른 변화가 확인되고, 조선시대에는 외 성의 축조를 통해 삼국시대와는 다른 공간활용이 주목되었다. 덕진산성의 시간변화를 구체적으로 파악함으로써 덕진산성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 지 지속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성곽의 운영에 대한 기초자료가 확보되어 다른 성곽과의 비교·검토에 앞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 글에서는 소백산맥 서록에 축성한 신라 산성에서 관찰되는 수축 부분을 통해 신라 축 성 기술의 변화 양상을 살피고자 하였다. 이 지역 산성의 수축은 주로 성벽 구조에서 확인되 며 가장 큰 특징은 입면을 구성하는 성석의 변화로 파악된다. 초축 성벽에는 주로 할석가공 석이 사용되는데 반해 수축 성벽에서는 화강암 계열의 석재를 방형~장방형으로 다듬은 절 석가공석의 비중이 높아진다. 그리고 절석가공석으로 수축한 성벽 구조에는 들여쌓기 기법 이 다수 적용된다. 성벽과 더불어 치성, 성문, 성내 집수시설 등에서도 수축 부분이 관찰된다. 해당 부분에서 도 축조재료로 다듬은 절석가공석을 사용한 양상이 다수 확인된다. 성벽을 비롯하여 산성을 구성하는 각 부분이 유사한 기법으로 수축되는 현상은 해당 산성이 초축 이후 오랜 시기 동 안 중요하게 기능하였음을 시사한다. 신라의 축성에서 절석가공석의 등장과 들여쌓기의 보편화는 경주 남산신성의 증축 성벽 을 표지로 하여 7세기 후반경으로 파악하였다. 이 같은 새로운 축성 기법의 도입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고구려 축성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 였다. 더불어 신라는 왕도인 경주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축성 사업을 전개하면서 전국 각지 에서 인력을 동원하였다. 이때 동원된 지방인들의 축성 경험이 각 지방 성의 축조에도 적용 되어 신라의 축성이 일정한 보편성을 갖게 된 것으로 파악된다.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축성 기술의 적용과 확산에는 신라군에 소속된 축성 기술자들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문경 고모산성은 이른 시기 신라 석축 산성의 대표적 사례로서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중요성을 갖는다. 1) 고모산성은 5세기 말 신라가 변경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에 축조한 산 성이다. 2) 이 성은 호측현(虎側縣, 경덕왕 때 虎溪縣으로 개명)이라는 군현(郡縣)으로 발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성 내부와 아래의 공간이 모두 활용되었을 것이다. 통일 신라 시대까지 성 내부의 공간이 중요하게 관리되었으며, 다만 성 아래의 읍치(邑治)는 공간이 협소하여 점 차 견탄(犬灘) 남쪽으로 이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호계현은 결국 주현(主縣)이 되지 못하고 문경현(聞慶縣)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그렇지만 호계현에 있었던 유곡역(幽谷驛)은 찰방 역(察訪驛)으로서 주변 교통로를 관할하는 역할을 하였다. 3) 고모산성은 조선 전기에 하나 의 고성(古城)으로 남게 되었지만, 임진왜란 때 그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되어 그 후 2차례 이상 수축(修築)되었고 조선 말에 이르러 실제 진수(鎭守)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또 의병 (義兵)들이 성을 지키고 실제로 전투를 치른 사례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은 옥천 이성산성의 고고학적 조사 성과에 기초하여 그 축성과 운영의 특징을 간략 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성산성은 삼국시대 신라의 굴현 지역인 옥천군 청산면과 청 성면 일대를 아울러 관리하기에 매우 유리한 위치에 축성하였다. 그리고 가까이는 신라 삼 년산군인 보은 지역, 나아가 영남 중북부 지역과의 교통이 용이한 지점에 위치한다. 이성산성의 초축 성벽은 판축기법을 적용하여 토축성벽으로 축조하였으며, 후대에 지속 적으로 수개축되었다. 특히 초축성벽인 토축성벽 외측에 부가하여 석축으로 성벽의 입면을 이루도록 개축한 부분은 매우 특징적인 모습이다. 성 내부에 대한 조사는 남서쪽 지역 일대 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확인된 목곽고, 원형수혈군, 석축 집수시설 등은 성 내부 에 각각의 용도와 기능에 따른 다양한 시설물이 조성되었음을 보여준다. 각 유구에서는 주 로 6~7세기의 신라 토기와 기와 등이 출토되어, 축성 주체가 삼국시대 신라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특히 저장시설로 추정되는 목곽고와 원형수혈군의 존재는 이성산성이 수행한 역할과 관련하여 의미있는 자료로 여겨진다. 이성산성의 축성 위치와 성 내부에서 확인된 유구의 성격을 통해 성은 신라가 5세 기 후반 소백산맥을 넘어 금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삼년산군 아래 굴현 지역 을 관할하는 중심 거점으로 역할하기 위해 축성한 성으로 보았다.
산성은 외침을 막고, 백성을 지키는 관방유적이다. 하지만 고대산성의 축성 목적은 일정 지역에 대한 장악(확보)를 우선하였다. 일정지역에 대한 장악은 무력을 기반한 통치, 관리, 방어 등의 개념이 포함된다. 따라서 산성 내에는 전투 가능한 방벽(성벽)이 축성되고, 안에 는 군사의 생존과 해당지역 관리위한 시설(각종 건물지, 용수시설 등)이 조성된다. 그리고, 축성주체(국가)는 이 같은 시설을 구비하고, 운영할 수 있는 일정 수준의 기술력과 제도를 갖추고 산성을 중심 무대로 다양한 행적(역사)을 남기었다. 따라서 산성의 실체와 그 역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오랜 조사와 고찰, 다양한 연구방법 의 적용과 검증이 필요하다. 국내 고고학에서 고분, 생활유적 등 다른 유구보다 연구 성장이 느린점은 城에 내포된 종합적이고 거대한 역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관념에서 “산성 내 공 간활용”연구는 성벽과 성벽시설(문지, 치 등)에만 집중되던 기존연구 성향에서 벗어난 다양 한 방식의 연구 접근을 위해 시도한 것이다. 본 연구는 백제 치성(縣급)으로 밝혀진 예산산성을 대상으로 하였다. 하나의 산성이지만 조사된 내부시설이 양호하고, 유구별 구조와 배치 등 공간 활용상태 파악이 가능하였다. 그리 고, 이를 토대로 유사등급(郡縣) 산성사례를 비교하여 백제 산성 내 공간 양상을 살펴보았다. 연구결과 산성 내부는 A.(정상부), B.(경사 중~상단부), C.(경사 하단부)로 구분되어 필요 시설이 배치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A.정상부 공간에는 다각형건물(종교/제의), 석벽건물(대 형창고), 저장수혈, 저수조(물탱크) 등 저장시설이 밀집된다. 특히, 잔여대지(넓은 공간)를 필 수적으로 확보하여 사열(지휘)/제의(종교)/창고(물품)관리 등 공식적인 대규모 군사 활동이 가능케 하였다. B.경사 중~상단부 공간은 비탈진 경사에 협소한 평탄면을 조성하여 중소규모(6m이내) 시설을 배치하였다. 유구는 고래, 아궁이 등 난방 건물이 중심을 이룬다. 소규모로 분리된 병사 숙소/취사 및 기타 물품 제작소 등이 기능한 것으로 추정된다. C.경사 하단부 공간은 저지대로 유수처리의 집수지가 배치된다. 그리고 곡부 주변은 축 대를 시설하여 곳곳에 평탄지를 조성하고, 규모 있는 건물지를 조성한다. 정리하면, 산성 정상부 일원은 공식적인 대규모 군사활동(지휘/사열/제의/창고관리)을, 경사면 중~상부에는 병사 숙소/취사/생산 및 기타 소규모 활동을, 경사면 하부(곡부)에는 집 수지와 축대 등 배수 및 관련시설을 구비하는 등 계획적인 공간 구획과 활용이 이루어진 것 을 알 수 있다.
불암산성은 관련 문헌자료가 전무한 상태에서 그간 단편적인 지표조사를 바탕으로 산성 의 축조시기에 대해 단편적인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축조주체에 대해 삼국시대 신라, 백제, 고구려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어 불암산성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혼란을 주고 있는 실정이다. 본 고에서는 최근까지 조사된 불암산성의 축조수법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산성의 성격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불암산성의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축조는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편축기법으로 쌓았으며, 방형․장방형의 화강암석재를 치석하여 바른층쌓기로 축조하였다. 일부 구간에서 기단보축이 축조되었으며, 현문식으로 축조된 남문지가 확인되었다. 이런 축조수법은 서울․ 경기 지역에 분포하는 삼국시대 산성에서 다수 확인된다. 특히 불암산성이 위치한 불암산은 양주․포천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교통로상에 위치하고 있어 이를 통해 방어체계를 형성하였 음을 알 수 있다. 다만 230m의 내외의 소규모 산성으로, 집수지 등의 성내 수원이 없으며, 해발고도는 낮으나 험지에 축조되어진 점 등을 종합할 때 소규모의 병력이 주변지역을 관측 하고, 상황 발생 시 남과 북의 상황을 전달하는 통신(봉수)의 역할적의 침입시 배후를 공략 할 수 있는 전략적 기지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더불어 산성내 정상부 목 곽고와 수혈 내부에서 향로 뚜껑과 훼기가 이루어진 편병 등이 수습되고 있어 군사적인 목 적의 산성으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산성의 기능에 일부 제의기능이 추가된 것 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해양은 대기로 배출된 이산화탄소의 30% 가량을 흡수하여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감소시키는 역할을 하였 으나, 이 때문에 해양의 pH와 탄산염 이온(CO3 2− )이 감소하는 해양산성화 현상을 겪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황해 연안 역의 신규 관측자료를 타 해역에서 획득된 기존 연구자료와 합쳐서 우리나라 주변 해역의 해양산성화 현황을 파악하고 자 하였다. 우리나라 주변의 황해, 동해, 동중국해(남해 포함)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있으나, 외해 대부분의 해역에서 해양산성화의 지표인 아라고나이트 포화도가 1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남해 동부 연안역에서는 담수 공급으 로 인한 희석과 성층 형성, 생물에 의한 유기물 생성과 분해가 표층과 저층의 계절적 해양산성화 변동에 큰 영향을 끼 쳤다. 진해만은 빈산소화 현상, 광양만은 담수로 인한 희석으로 여름철 광범위한 해역에서 아라고나이트 포화도가 1 미 만으로 감소하여, 탄산칼슘 패각(CaCO3 shell)을 가진 생물들에게 잠재적 위협이 될 것으로 보고되었다. 하지만 담수 유입이 많은 황해 연안역에서는 진해만과 광양만과 같이 뚜렷하고 광범위한 산성화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연안역 에서는 각 해역별 특성에 따라 해양산성화의 양상을 진단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나라 동해 남서부 해역의 계절적 용승 현상 역시 해양산성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계절적 요인과 더불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및 산성물질이 해양으로 계속 유입되면서, 우리나라 바다의 아라고나이트 포화도가 지속적으로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해양 산성화로부터 수산자원과 해양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향후 체계적인 해양산성화 모니터링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Curcumin is not soluble in water. Therefore, curcumin emulsion that can dissolve well in water were prepared using multi-emulsification technology, and the antioxidant activities and physical properties of emulsion were measured. Although curcumin was not dissolved in water, it was confirmed to be well dispersed in water when prepared in an aqueous dispersion curcumin emulsion. After dissolving curcumin using water and ethanol as solvents, respectively, the DPPH and ABTS radical scavenging abilities of the filtrate and the curcumin emulsion were measured. Because it was not dissolved in water, activities were not shown. However, when curcumin was dissolved in ethanol, the activities increased as the concentration of curcumin increased. On the other hand, when the curcumin emulsion was dissolved in water, it was found to have abilities. The curcumin emulsion was nano-homogenized and the size and distribution of the emulsified spheres were measured. It was confirmed to be nano-sized as it appeared as 9.083 nm/100%. In the results of the DPPH radical and ABTS radical scavenging abilities of curcumin nano-emulsion, it was confirmed that there was no change in the antioxidant abilities. In conclusion, water-dispersible curcumin prepared using multi-emulsification technology, and it was confirmed to exhibit antioxidant activity and emulsion stability.
본 연구의 목적은 율피 색소로 1제형 산성 염모제를 제조하여 1제형 산성 염모제의 단점인 색상의 발색력을 높이고 오랜 지속력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분광측색계를 이용하여 염색력을 측정하고, 모발의 퇴색 정도를 살펴보기 위해 광학밀도(O.D.) 값을 측정하였으며, 모발의 탄력성은 인장강도를 측정하여 분석하였다. 각 레벨의 모발 시료에 대해 다른 방치 시간과 처리 방법을 적용한 결과를 비교한 결과, 20분간 열처리한 실험군이 가장 높은 염색력을 나타내었다. 이어 자연방치 40분, 열처리 10분, 자연 방치 20분 순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10레벨까지 올라갈수록 색상 표현이 높아지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10레벨에서는 3일 후에도 약간의 수분 손실이 발생하고 인장강도도 낮은 것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앞으로 뷰티 업계가 다양한 천연염색 성분이 함유된 1제형 산성 염모제를 대중화하여 현대인의 웰빙과 건강한 심신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을 시사한다.
This study was conducted to assess the effect of acidification of pig slurry on nitrogen (N) mineralization and its environmental impacts during pig slurry fermentation. Different inorganic and organic acids were used to acidify pig slurry. Four treatments including non-acidified pig slurry (control), pig slurry acidified with sulfuric acid, lactic acid, and citric acid were allocated with three replications. The total N content in the acidified pig slurry was higher than non-acidified pig slurry after fermentation. Acidification tended to increase total N content in pig slurry. Ammonium N (NH4 +-N) released from pig slurry was obviously increased at 7 days after incubation, representing 61.4%, 36.8%, and 37.4% increase in the acidified pig slurry with sulfuric acid, lactic acid, and citric acid, respectively. Nitrate N (NO3 --N) in the acidified pig slurry with sulfuric acid was the highest throughout the experiment period, but non-significant effect of organic acid. A large portion of ammonia (NH3) emission occurred within 10 days, corresponding to more than 55% of total NH3 emission. Total cumulative NH3 emission during the experimental period was lower 91% (2.9 mg N kg-1), 78% (7.3 mg N kg-1), and 81% (6.2 mg N kg-1) in the acidified pig slurry with sulfuric acid, lactic acid, and citric acid, respectively, than non-acidified pig slurry (32.7 mg N kg-1). These results suggest that acidification of pig slurry (particularly with sulfuric acid) can be faced as a good strategy to reduce NH3 emission without depressing the mineralization proc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