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트 모차르트는 1719년 독일 아욱스부르크에서 태어나 1789년 잘츠부르크에서 사망한 음악가이다.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이며 작곡가로 잘츠부르크 궁정악단의 궁정음악부감독 (Vice-capellmeister)를 역임하고, 음악이론가이자 음악교육자로서 성공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음악사에서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음악에 대한 전문성과 가치가 심하게 폄하되어 있고, 심지어는 몇몇 미디어와 영화 등의 비전문적 접근으로 인해 그에 대한 인간적인 평가마저 훼손되어 있다. 본 논문은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아욱스부르크에 있는 볼프강 모차르트에게 보낸 편지 BD 346(1777년 10월 9일)과 BD 348(1777년 10월 12/13일)을 분석 연구하였다. 이 편지 속에는 레오폴트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18세기 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정보가 담겨 있다. 모차르트 가족들이 주고받은 편지에는 18세기 음악과 18세기 사회상을 이해하고, 볼프강 모차르트의 성장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정보가 담겨 있어 지속적인 연구와 관심이 촉구된다.
이 글은 도산의 사사로운 개인 생활사에 관한 試論的 小考라 하겠다. 그동안 도산에 관한 연구는 상당하다. 유명한 연설가로, 독립운동가로, 교육자로, 민족의 스승으로 등 여러 분야와 여러 관점에서 조명되었다. 따라서 도산에 관해서는 더 이상 연구주제를 찾기 어려울 만큼 큰 진척을 보았다. 그러나 개인 도산 안창호의 사사로운 개인적 삶을 구명한 연구는 별반 없었다. 이 연구는 이러한 점에 유념하여 도산 삶 가운데 상해에서 활동하던 기간 (1919-1921)으로 한정하여 그의 개인생활의 일단을 살펴보려 한다. 마침 이 시기 상해에서의 개인 삶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일기>와 <편지>가 있어 이를 중심으로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Paik, Kyungsook. 2014. “They make me feel guilty”: An analysis of some pragmatic effects of Korean college students’ e-mail messages in English about their grades. The Sociolinguistic Journal of Korea 22(3). This study investigates some pragmatic effects of Korean college students’ e-mail letters about their grades sent to English speaking professors. The pragmatic effects of 51 naturally occurring e-mail messages were evaluated by 4 native professors of English from the U.S. and New Zealand. The results show that Korean students at their intermediate proficiency level in English were found to be not very successful in writing e-mails inquiring about their grades. Their inappropriate pragmatic behaviors include structural informality of the letters, illegitimate goal of the letters, rude or not specific enough requests, some irrelevant or inefficient supportive moves and casual languages and symbols. Based on the students’ pragmatic failures in their messages, some relevant pragmatic norms of the native English professors were identified first, which were then compared to some Australian students’ linguistic behaviors in the same speech event to elicit the common core of the pragmatic rules of native speakers of English. Some additional interviews with the native evaluators were also carried out to clarify their baseline norms regarding some controversial aspects of the messages and to acquire some ethnographic information about their relationship with the students as well as other off-line interactions and practices in their academic community. This study finally discusses some implications of the results from the perspectives of applied linguistics and intercultural rhetoric.
예이츠(W. B. Yeats)는 평생 프랑스, 파리를 10여 차례나 방문하여, 길게는 46일간 체류하면서, 많은 문인들과 신비주의자들과 교류하고, 공연을 보고, 작품을 쓰거나 구상하며, 대마초 -당시는 불법이 아니었지만- 를 피우기도 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가 장기간 머물고 있던 때는, 자신의 평생의 연인인 모드 곤이 파리에, 혹은 노르망디에 거주하고 있었다. 물론, 최초로 파리에 머물 때는 메이더스의 집에 머물었고, 그 다음에는 호텔 꼬르네이유라는 문인들이 모이는 곳에서 작품을 쓴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모드 곤과의 첫 키스가 있은 직후는, 파리의 그녀의 집에서, 또 마지막 청혼을 할 때는 노르망디의 그녀의 집에서 머문다. 그리고, 예이츠가 조지와 결혼한 후에는 9년간 파리를 방문하지 않는다. 훨씬 후 병이 나자 치료하려 프랑스 남쪽을 찾고, 나중에는 그곳에서 사망하고 묻힌다. 그러나, 모드 곤에 이끌려, 파리를 방문하지만, 예이츠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얻어간다. 파리에 머물면서 쓴 그의 편지는, 당시의 그의 심경, 상황, 문학관, 예술관, 등등 많은 것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 논문은 이미 많이 다루어진 인물 보다는, 덜 다루어진 사람들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편지의 소개에 중점을 둔다.
에밀리 헤일은 T. S 엘리엇에게 애인이자 친구 그리고 뮤즈였다. 이 점은 2020년 1월 2일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개봉된, 1930년도부터 1936년도의 엘리엇의 편지에서 확인되었다. 엘리엇은 헤일을 버리고 38년이나 어린 비서였던 발레리와 결혼한다. 부모와 조상의 종교였던 유니테 리언니즘으로부터 앵글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엘리엇은 가톨릭의 교리와 신앙을 반영한 단테의 『신곡』에 나타난 가장 큰 죄인 배신을 발레리와 헤일에게 느꼈다. 엘리엇의 죄의식은 1930년도부터 1936년도 사이의 개봉된 편지에서 잘 드러나 있으며 후기 시극인 『칵테일 파티』에도 드러나 있다. 『칵테일 파티』에는 엘리엇과 비비안 그리고 헤일의 관계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헤일로 추정되는 실리아는 비비안으로 추정 되는 라비니아에게 죄의식을 가지며, 죄를 지었다는 것은 악을 행한 것이며, 악을 행한 것은 자존심을 지키는 것과 연결된다. 자존심을 지키려 한 것은 악을 행한 것이며 어쩌면 개성을 지킨 것이기도 하다. 엘리엇 은 『칵테일 파티』에서 자신의 죄의식을 실리아를 통하여 반영했다. 실리아는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하여 아프리카로 선교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살해당한다. 라일리는 실리아의 이런 행동을 정화와 구원의 길이라고 해명한다. 엘리엇은 앵글로 가톨릭의 신앙을 가졌으며 비비안과 헤일에게 깊은 죄의식을 느꼈으며 이런 죄는 기억에서 유메니데스로 그를 따라다녔다. 엘리엇은 기억으로 유전되는 죄를 끊으려 했고 자신의 죄를 정화하는 고백성사를 수행했다. 그의 의식과 기억을 끊임없이 지배 했던 헤일과 비비안에 대한 죄의식은 앵글로 가톨릭의 신앙과 믿음에서 나온 것이며, 죄의식을 극복하는 것은 『칵테일 파티』의 궁극적 주제이며 헤일에 대한 속죄였다.
한국선교 역사에 있어서 1886년부터 1887년에 걸친 두 해는 알렌과 헤론 선교사의 갈등으로 한국의 장로교 선교를 거의 파산지경에까지 몰아넣은 시기였다. 그런데 이 갈등은 한국교회에 장래 선교 전략 수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 논쟁의 결과로 병원과 학교와 같은 기독교 기관들의 성격이 결정되었다. 따라서 본 논문은 한국교회 선교 초기에 있었던 알렌과 헤론의 갈등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그래서 본 논문은 첫째로 1886년부터 1887년까지 있었던 알렌과 헤론의 갈등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 인지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 논문은 알렌과 헤론, 그리고 언더우드와 선교본부의 총무인 엘린우드의 일기와 편지, 그리고 보고서를 분석하여 갈등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둘째로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 신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특히 기존의 연구들을 재 고찰하고, 갈등의 내용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 이외의 원인들은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고 이를 정리하고자 한다.
마리 당티에르는 16세기 종교개혁이라는 대격변의 시기에 자신이 옳다 고 믿는 진리를 온몸으로 외치며 살았던 평신도 여성 개혁자였다. 마리는 한편으로는 오직 성서의 원리에 근거하여 로마가톨릭교회의 잘못된 신학과 실천을 비판하고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대안으로 제시한 종교개혁자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만인제사장 원리에 기초하여 남성중심적인 기존 질 서에 대항한 여성 권리의 옹호론자로 아마도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가 아닐까 싶다. 이와 같이 마리는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여성 권리를 옹호하는 “이중의 개혁”을 주창하였다.
필자는 먼저 마리 당티에르가 활동했던 16세기 제네바의 역사적 상황을 개관할 것이다. 당시의 제네바의 역사적 맥락을 아는 것은 마리의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그런 다음 필자는 마리의 대표적 저술인 『편지』에 주목할 것이다. 『편지』의 배경, 내용, 중심사상 등을 살펴보면서 마리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인 동시에 페미니스트였음을 논증할 것이다. 또한 제네바의 대표적 개혁자였던 칼뱅과 마리의 관계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마리 당티에르라는 여성의 목소리를 복원함으로써 그동안 묻혀 있던 16세기 여성 개혁자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종교 개혁을 보다 온전하고 균형 있게 해석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This article is composed to give some clues for researching Corpus Ignatianum continuing since 1960s through interpreting the letter to Romans. It contains some unique and special points, namely martyrdom as the main theme, not monepiscopacy. About the martyrdom of Ignatius only one letter says, that is Polycarp’s letter to Philippians. But in this letter Ignatius appears not only as dead(9, 1) but as living.(13, 1) It could make so interpret, that the unknown person Ignatius has somehow found the Polycarp’s letter and disguised himself as Ignatius. That means the Corpus Ignatianum. is pseudonymous. It’s terminus post quem must lie later than Polycarp’ letter. And seeing the praising Polycarp so many times in almost every letter we could believe, that the Corpus Ignatianum had to be composed after the dead of Polycarp as martyr, namely A.D. 165. Then the insist of some experts ‘the Corpus Ignatianum appears during the reign of the emperor Marcus Aurelius’ could be acceptable. So, the end of the letter to Romans, in which the pseudo-Ignatius who might have not died did hope so eagerly to die for God as demanding the Romans not to prevent his martyrdom, is not to hope a martyrdom, but to confirm the authority of the author of the Corpus Ignatianum. Ignatius wrote the letter to Romans in order to realize the idea of the Corpus Ignatianum, that is, monepiscopacy. Then man must accept the idea the seven letters couldn’t be sent to the addressees in every letter, but to one. For example in the letter to Polycarp he talks in the beginning to Polycarp, but from chapter 6 to the Church Smyrna. More than this, in the letter to Smyrna the name of the renowned bishop Polycarp is astonishingly not mentioned. In this researching situation the church in Rome has been called the addressee(Schmithals), because of no mentioning the names of bishop and the members. But this fact couldn’t be the master key into the solving the problem, because it is of nature, that the person coming to Rome for the first time does not know their names. On the contrary, the letter to Smyrna deliver in the thank and farewell address several names clearly, but first in a name of some Philon of Cilicia and then in his own name. It says, that Ignatius knows the milieu and persons in the church Smyrna very well. Every letter has some relation with the name Smyrna. Moreover regarding no mentioning Polycarp in the letter man could so speculate, that the Corpus Ignatianum is composed to subside the accurately unknown problems in the Smyrna after the martyrdom of Polycarp. Though the monepiscopacy against some heresies, especially the docetism of gnosticism, is persuaded unanimously in every letter, the chief concern of the Corpus Ignatianum is to earn the stability of the church Smyrna.
In diesem Aufsatz geht es um die Untersuchung der Gnadenlehre des Pelagius und des Augustinus anhand ihrer Briefe an Demetrias. Demetrias, eine Dame des römischen Hochadels, entschloß sich um 408, ein geistliches Leben zu führen und auf eine Heirat zu verzichten. Aus diesem Anlass schrieben ihr alle ber?hmten Theologen, darunter Pelagius und Augustinus, Briefe. In diesen Briefen lassen sich die theologischen Konzepte, insbesondere die Gnadenlehre und die Anthropologie des Augustinus und des Pelagius, treffend veranschaulichen. Pelagius, der als Asket und Mönch der mönchischen Tradition gemäß die menschliche Natur hochschätzte, behauptet in seinem Brief drei folgende Gedanken: der Mensch als Bild Gottes; Sünde als Nachahmung Adams; Gesetz als Gnade und Christi Gnade (Gnade als Lehre und Weisung, Beispiel, Botschaft der Hoffnung). Das Wesentliche der Gedanken des Pelagius besteht im Optimismus, dass der Mensch die sittlichen Fähigkeiten aufgrund der schon gegebenen Gnade behält und er zum Guten fähig ist. Indem er die Demetrias vom Können (Vermögen) des Menschen überzeugt, gibt er ethischmoralische Hinweise. Augustinus ist durch den Brief des Pelagius alarmiert, denn er sieht die Notwendigkeit und das Wirken der göttlichen Gnade durch dessen Brief gefährdet. Augustinus schreibt daher sofort der Demetrias, um sie vor der irrtümlichen Lehre des Pelagius zu schützen. Augustinische entscheidende Kritik an Pelagius fußt darauf, dass die Lehre des Pelagius Undankbarkeit gegenüber Gott impliziere, da nach Pelagius der Mensch die geistlichen Reichtümer, die er sich erworben hat, für sein eigenes Verdienst halten kann. Augustinus zufolge vermag der Mensch nicht allein aus sich selbst gerecht zu handeln, sondern er benötigt dazu die in sein Inneres eingreifende Gnadenhilfe Gottes (Augustinus faßt Gnade nur als Hilfe Gottes auf). Der entscheidende Unterschied ist, dass Augustinus und Pelagius unterschiedliche Wege der Rettung behaupten. Für Pelagius reicht das exemplum, das Gott selbst den Menschen vor Augen gehalten hat. Weil aber für Augustinus das exemplum als Weg der Erlösung allein nicht ausreicht, ergänzt er dazu die Hilfe Gottes (adiutorium): exemplum et sacramentum. Die einzig angemesse Haltung, mit welcher der Christ Gott begegnen soll, ist Dankbarkeit, denn alles Gute beruht auf Gott und seiner Hilfe.
This paper analyzes the theological relationship between penitence and God's love in Luther's letter to Johannes von Staupitz (Reverendo et Vere Patri Suo Iohanni Stupitio, S. T. professori, Augustinianae familiae Vicario. F. Martinus Luther discipulus saltutem et seipsum, 1518). Luther was terrified by the word, "poenitentia," but Staupitz taught that true penitence does not come from human efforts but from God's love. The paper presents 10 theses about the contents of the letter. First, penitence begins with God's love. Second, the entire Bible teaches penitence from God's love. Third, penitence is "transformation of mind (transformatio mentis)." Fourth, the transformation of mind is testified by the whole Bible. Fifth, the medieval church made serious mistake both in defining and in translating "poenitentia." Sixth, the sales of the Indulgences degrade the true character of penitence. Seventh, Luther never attacked the papal authority in 1518. Eighth, Luther believes that he is a person like coarse weeds (corchorus), but God can use him as an effective servant. Ninth, Luther hoped that God control the mouth of the Pope. Tenth, Luther proclaims that he will praise God no matter what consequences emerge. In 1518, Luther was fatigued by threats and persecutions from his theological enemies, but he quietly awaits Pope's reply and God's providence. The paper demonstrates that Staupitz plays the critical role in Luther's discovery of the new meaning of penit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