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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2007.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nevitably, Korean-Americans have had to suffer an ethnic identity crisis in living between Korean culture and American culture. Sometimes they ask themselves “Who am I? Where do I belong in between Korean society and American society? Am I a Korean or an American?” This is the Korean-American’s trouble and wrestling for ego synthesis in the middle of the American culture. There are bigger gaps between assimilated children and parents who are not readily assimilated into American culture. The author is very concerned about the outlook for the future of the Korean-American family situation, especially in the generation gap problem. As a possible answer to this circumstance, the author researches the missiological importance of Korean-American’s identity education through the use of the Jewish model, who successfully maintains their own identity despite their long periods of Diaspora history. In section 1, the author deals with the nations which have survived and will survive in the future, especially concentrating on Arnold Toynbee’s theory about challenge and response, and the three essences of the collapse of civilization. Another main focus of this section is Jewish education as an important identity keeping tool. In section 2, the author discusses the Jewish and the Korean-American in the viewpoint of assimilation models, especially based on the Gordon, Won-mu Hurh, and Kitano’s analysis about assimilation. In comparison with Piaget’s external assimilation and internal accommodation, Gordon’s social structural assimilation theory is applied to the Jewish model as a good model of the Korean-American’s identity education method, and Gordon’s cultural assimilation theory is applied to the African-American model. Won-mu Hurh’s four models are mentioned in this section. Kitano’s four cells also are dealt with in this section. In section 3, the author deals with Yong-soo Hyun’s vertical culture and horizontal culture as a good answer to the Korean-American's identity question. In section 4, the author handles the role of parents as important teachers of their children. In section 5, the author deals with the role of the Korean immigrant church as an important place of the Korean-American’s identity education. In all sections, the author compares the Jewish model with the Korean-American situation.
        5,700원
        22.
        2006.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도산은 ‘조직의 명수’였다. 대한제국시기 명연설로 근대국가의 꿈을 설파하던 도산은 조국이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자주적 국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늘 노력하였다. 때문에 도산은 국내를 비롯하여 미주․하와이․멕시코․중국․러시아 등 국외 각지에 한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면 지체없이 달려가 민족운동 실천단체를 조직하고 그를 바탕으로 ‘도산의 꽃동산’을 가꾸어 나갔다. 청년학우회․신민회․공립협회․대한인 국민회․흥사단․한국독립당․(수양)동우회 등이 그것이었다. 도산이 전지구적 활동반경을 바탕으로 한평생 민족운동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도산의 꿈을 믿고 따라준 분들이 있기에 가능하였다. 도산을 도와 재미한인사회의 민족운동을 이끌던 인물 중 한 분이 바로 洪焉(1880~1951)이었다. 홍언은 재미한인 민족운동의 구심점이었던 國民會의 지킴이로 평생을 보낸 ‘미스터 國民會’였다. 그러나 한국사학 계에서조차 “40여년간 미주 언론계에 몸담아 독립 고취에 힘쓴” 그의 이름을 아는 이는 흔치 않다. 도산과 홍언의 관계를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1915년 7월 5일 도산의 아내(안혜련)가 딸을 출산하자, 도산은 홍언에게 딸아이의 이름을 생각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도산과 홍언은 각자 새벽 산에 올라 솟아오르는 해를 보고 작명한 뒤, 하산하여 서로 지은 이름을 펴 보였다. 놀랍게도 둘 다 ‘繡山’이란 두 글자를 내밀었고, 두 분은 함께 웃고 말았다 한다. 바로 그가 도산의 첫째 딸 안수산 여사이다. 미주한인사회를 이끌던 국민회를 사실상 조직한 리더가 안창호였다면, 국민회의 여론을 이끌며 도산의 理想을 지지한 오피니언 리더는 홍언이었다. 따라서 미주한인사회의 구심체를 마련한 안창호와 문필가 이자 역사가로서 재미한인사회의 여론과 민족정신 고취에 선봉에 섰던 홍언의 생애와 활동을 살펴보는 것은 도산의 민족운동과 활동을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익히 알려진 도산보다는 비교적 덜 알려진 홍언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5,200원
        23.
        2006.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4,200원
        25.
        2001.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Differences in dietary intake of Korean Americans (KA) by the length of residence in the U.S. were studied in relation to health and disease patterns in Michigan. Of 1860 questionnaires mailed, 637 (34.3%) responded with demographics, anthropometrics, self-reported disease patterns, lifestyle, and dietary patterns (93-item FFQ developed for KA). Complete responses were available for 498 people (263 men,253 women, aged 30-87 yr), who were then divided into three groups based on the number of years lived in the U.S.: 15y, 16-25y, 26y. Age-adjusted weight, height, BMI, and waist to hip ratio were within the normal ranges and did not differ among the three groups. Chronic diseases frequently reported in men and women (age-adjusted) included hypertension (14.4%, 14.1%), digestive diseases (5.4%, 8.5%), diabetes (3.6%,4.9%), and arthritis(3.3%, 12.5%), respectively. The length of residence in the U.S. was inversely associated with the age-adjusted prevalence of digestive diseases (12.4%, 6.5%, 0.4% in men, 13.0%, 11.7%, 0% in women). The length of residence was positively associated with health consciousness, receiving regular health care, taking supplements regularly, and exercising, while inversely related to smoking. The majority favored American foods for breakfast and Korean foods for dinner. Foods frequently consumed included cooked rice (w/other grains). kimchi, coffee (w/cream and sugar),bread (white and dark), citrus juice, milk (low fat and skim), lettuce and cucumber, apple, seaweed, and soda. Intake frequency of the Korean starch food group was inversely associated with the length of residence for both men and women (p<0.001), but not with the American starch food group. Fat intake did not differ by the length of residence in the U.S. The dietary changes were associated with the length of residence and chronic disease patterns for the first generation of KA, which should be further examined 'for the subsequent generation of KA.
        4,000원
        26.
        1998.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6,100원
        27.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사탕수수 농장주들을 비롯한 미국 기업가들이 주도하고 미군이 협조하여 일어난 하와이왕국의 전복은 서부지역을 넘어 아시아로 진출하던 미국의 서구식민화과정으로 규정될 수 있다. 1800년대에 설탕산업은 하와이의 주요 산업으로 자리잡았다. 초기에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하와이 원주민, 빈곤한 유럽인, 그리고 남아메리카인들을 농장의 노동력으로 활용하였으나 그들은 열악한 노동조건 등의 이유로 농장에서 이탈하였다. 1800년대 후반에 농장주들은 동아시아로 눈을 돌려 중국인과 일본인을 끌어들였지만, 그들 역시 노동조건에 만족하지 못하고 심지어 파업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895년에 이르러 자조적 일환으로 ‘하와이농장주협회’(HSPA)를 구성한 농장주들은 마침내 한국과 필리핀으로부터 노동력을 수입하여 중국인과 일본인의 부족을 채우거나 그들의 세력을 희석시키기를 희망하였다. 그들의 호소는 재한 미국공사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과 미국감리교 선교사 조지 히버 존스(George Heber Jones, 조원시) 등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1902년에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서 하와이농장주협회 임원들과 만났던 알렌은 그 첫 작업을 주도하였다. 조선에서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 및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노력하던 그는 조선 국왕 고종을 설득하여 유민원을 설치하고, 윌리엄 데쉴러(William Deshler)를 모집책으로 선정하여 하와이농장주협회의 부름에 응답하였던 것이다. 존스는 자신의 교구에 있는 신자들로 하여금 하와이로 이주하여 노동하도록 설득하였고 그 결과 1902년 말에 출항한 첫 이민 선박의 절반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을 하와이로 송출하는데 기여하였다. 하와이농장주협회의 순종적 노동력에 대한 요구는 무엇보다도 미국감리교회의 하와이선교부를 이끌어갔던 초기 감리사들, 와드맨(John W. Wadman)과 헨리 프라이(Henry Fry)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응답되었다. 재정이 부족하였던 감리사들은 하와이농장주협회와 농장 주들에게 선교부를 위한 기부금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고, 기부금에 대한 보답으로서, 한인 신자들로 하여금 농장에 협조하도록 격려하거나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에게 농장을 이미 떠난 그들의 동료들이 돌아오도록 종용하기도 하였다. 1905년에 와드맨을 돕기 위하여 하와이를 방문한 재한 감리교 선교사 아더 노블(W. Arthur Noble)은 한인 신자들이 하와이 농장의 지속적 번영을 담보하도록 ‘모범적 소수민족’(Model Minority) 담론을 펼치기도 하였다. 결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감리교 선교부와 한인교회들은 번성하였던 반면에 한인 노동자 자신들은 선교부로부터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도움을 받지 못했고, 낮은 임금, 인종 및 국적별 업종의 차별, 잔인한 대우 등으로 인하여 빈곤과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미국이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고립주의를 버리고 서부를 넘어 태평양과 동아시아로 진출하여 소위 ‘백인의 짐’ (the White Man’s Burden)을 짊어지 기를 자처할 때에, 하와이선교부는 주한 미국 공사와 선교사들의 강하고 지속적인 도움과 더불어 하와이농장주협회의 요청에 적극 응답하였으며, 이것은 결국 서구식민주의에 봉사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28.
        2019.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외국 교회의 지원에 의해 개척된 최초의 재일 한인교회 미카 와시마(三河島)교회의 역사를 재구성하되 특히 동 교회의 설립과 발전, 교회적 특성, 타교단 한인교회들과의 협력과 교류에 주목하였다. 미카와시마 교회는 미국 그리스도의교회와 연계된 재일 요츠야선교회 소속 제5교회의 한국인 교인에 의해 1926년 개척되어 한국인 전문사역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성장하였다. 동 교회는 1940년대 초반 ‘일본기독교단’ 산하에 편입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탈퇴하고 종전의 미카와시마교회로 재건 되었다. 동 교회는 1960년대 초 요츠야선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자치, 자립 하는 지역교회가 되었다. 미카와시마교회는 개척 후 3년만인 1929년부터 교인 100명 이상이 출석하는 한인교회로 성장하였고, 한국교회와 미국 그리스도의교회(유악기)의 특징을 부분적으로 공유하였다. 동 교회는 한국인 사역자(목사 혹은 전도사 혹은 장로) 혹은 친 한국적 일본인 사역자(오다)의 치리로 한국교회의 특징인 ‘전도(부흥)집회’ ‘새벽기도회’를 정착시켰다. 반면 요츠야선교회와 재정과 인적 유대를 유지하며 그리스도의교회의 특징인 개교회의 자치권 을 계승받아 교단체제에 반대하고, 재일 한인교단교회들의 연합체인 ‘재일 본조선기독교’나 ‘재일본조선기독교연합회’에 가입하지 않았다. 또 성경을 신앙과 실천의 기준으로 중시하는 교회가 되었다. 동 교회는 재일한인교회 연합기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복음사역을 위해 타교단 한인교회(특히 연합공의회계 한인교회)와 복음사역에 협력하고 교류하였다.
        29.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목적: 본 연구는 삶의 질의 하위개념인 신체활동과 전반적 삶의 질 관계에서 다중 매개효과를 검증하고 참여자의 연령이 신체적 삶의 질과 일상생활활동능력의 다중 매개효과를 조절하는지를 검증하는데 목적이 있다. 방법: 이를 위하여 미국 동남부 두 개의 주에 거주하는 미주 성인 한인 201명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통해 자료를 수집한 뒤 조절된 다중 매개 효과를 분석하였다. 결과: 신체활동은 신체적 삶의 질, 일상생활활동능력에 정적인 영향을 보였으며, 신체적 삶의 질, 일상생활활동능력은 전반전 삶의 질에 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신체활동은 신체적 삶의 질과 일상생활활동능력을 통제했을 때 전반적 삶의 질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또한, 높은 신체활동 수준은 신체적 삶의 질과 일상생활활동능력을 통해서 전반적 삶의 질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만, 연령이 높을수록 신체활동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론: 따라서 미주 한인들의 신체활동이 신체적 삶의 질과 일상생활활동능력을 통해서 전반적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력은 연령에 의해 조절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는 신체활동을 통한 개인의 긍정적 라이프스타일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단순 개인의 특성만을 강조하는 것보다 문화환경적 요소를 고려해야 필요성을 보여준다.
        30.
        2016.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결혼이주여성과 그 자녀의 언어 사용 양상 및 정체성 형성 과정을 탐색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이루어진 질적 사례 연구를 통해, 연구 참여자들의 사용 언어(한국어, 영어)에 대한 인식, 시간의 흐 름에 따른 인식의 변화, 그 과정에서 형성되고 변화된 정체성의 양상에 관심을 두고 연구 를 수행하였다. 연구 결과, 언어와 정체성 간에는 긴밀하고도 유기적인 관계가 있음이 확인 되었으며, 이는 연구 참여자들의 사례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또한 언어 사용과 정체성 형성은 유동적이고 가변적이어서, 시간과 환경에 따라 복잡한 양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마지막으로 언어 사용과 정체성 형성에 있어 결혼이주여성과 자녀는 상호 간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나, 이들의 언어 사용-정체성 형성은 동일한 양상으로 전개되 지 않음이 발견되었다. 이상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이 글은 한국 다문화교육을 위한 시사 점을 제시하였다.
        31.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은 소련시대의 한국어 교육 및 사용 금지 정책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한국어 습득의 기회를 박탈당해 왔다. 민족정체성 회복과 한민족 전통, 문화, 언어 교육의 필요성이 논의되면서, 1988년부터 한국어 교육이 이루어져 왔지만 결과는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본 연구는 사할린 한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준 역사적 배경과 현재 사할린 교육제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어 교육을 살펴보고, 앞으로 사할린에서 한국어 교육이 나아가야 할 교육 방향과 과제를 제안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사할린 지역의 정규, 비정규 교육기관들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교육과정을 조사하고, 각종 프로그램 등 한국과 이루어지고 있는 교류 및 지원 현황과 한국어 교육 관련 행사를 소개하였다. 그 결과 사할린 한인들의 정체성 형성을 위해서 가장 우선해야 할 일로 한국어 교육 및 민족교육을 제안하였다. 세계화 추세에 맞추어 세계 한민족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한국과의 지속적인 협력이 필요하며, 한민족 이라는 인식을 더욱 강화시켜야 한다.
        32.
        2005.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Practically, it is very hard to investigate the rural villages in North Korea. The Korean rural village in Yanbian is proximate from North Korea and most of inhabitants of the village have been emigrated from Hamgyeong-Do and Pyeongan-Do. In this sense, it can be meaningful to study Korean villages in Yanbian is an alternative approach toward researches of North Korean rural villages. In this study, spatial characteristics of the Ryongsan village, Ryongjeong city was studied as a representative korean rural village in Yanbian. The Ryongsan village has been formed based on the traditional culture and custom of North Korea. The case of planning and design is provided through drawings of components for planning of rural villages based on the results of spatial characteristics analysis.
        33.
        2001.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한인진에 대한 항산화 효과와 항균 효과를 알아보기 위하여 추출용매별 고형분 함량을 측정하여 본 결과 물 추출물에서 18. 1%로 가장 많은 고형분을 얻을 수 있었으며 메탄올, 에탄을 추출물에서는 12. 8%, 12. 6%로 별 차이가 없었다. 항산화 효과를 알아보는 방법 중 DPPH 소거효과를 이용하여 측정하여 메탄올 추출물이 36.2μg/ml로 가장 효과 좋았지만, 대두유에 대한 한한인진 추출물의 항산화 효과를 60℃로 20일간 저장하면서 과산화물가(POV)를 측정하여 대두유를 기질로 한 저장시험 에서 1,000ppm 농도의 물추출물과 메탄올 추출물이 저장 기간이 20일 되었을 때 46.8(meq/kg, 50.8(meq/kg)의 과산화물가를 나타내 대조구의 과산화물가 79.1 (meq/kg)에 비해 낮았다. 식품의 부패균이나 식중독의 원인균으로 알려진 세균 4종을 대상으로한 항균실험에서는 추출 용매에 따른 항균력은 에탄올 추출물이 가장 좋았으며 세균에 대한 항균력으로는 Vibrio parahaemolyticus에 대해 가장 좋았다. 한인진의 간보호 효과 시험에서는 한인진 추출물을 경구투여한 V, IV군의 간무게, 체중에 대한 간무게의 비율이 생리 식염수만을 투여한 III군보다는 낮았으나 시료 채취전후로 한인진 추출물을 경구투여한 V군과 IV군사이에는 별다른 차이점이 없었다. 예방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10일간 실험을 실시한 결과 한인진 물추출물만을 단독 투여한 VI군의 체중은 계속 증가하였으나 한인진 물추출물을 계속 투여한 다음 시료 채취전에 사염화탄소를 투여한 VIII군의 간무게, 체중에 대한 간비율이 대조군 VII보다 다소 감소하였다. 병리학적인 소견으로 한인진추출물을 투여 한 군에서는 사염화탄소만 투여한 군보다 간세포의 괴사와 지방적의 축적이 감소하여 사염화탄소에 의한 간독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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