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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문화적⸱종교적 체계로서 중국불교는 불교 교리의 이론적 발전과 함께 수 행과 포교의 측면에서 음악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발달시켰다. 본 연구는 음악에 대한 불교 본래의 태도와 종교적⸱문화적 체계로서의 중 국불교가 지닌 음악에 대한 태도를 대조하면서 중국불교가 발전시킨 음 악성을 밝히는 데 목표를 두었다. 특히 중국불교의 풍부한 음악성을 발전 시킨 요인으로 중국철학의 근본이념인 천인합일 사상이 의례와 승원 생 활을 통해 어떻게 중국불교 음악에 확립하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두고 살 펴보았다. 중국 문명은 중국 중원에서 발원하여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 문명과 문 화의 전파에 따라 발전하였고, 남북조시기에 불교 사상이 보편적으로 수 입되면서 점차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불교는 원래 인도에서 기원하였으 나 중국에 유입되면서 불교와 유교, 도교가 융합되는 등 중국 사상에 지 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불교는 중국화된 후 불교의 중요한 분파를 형성하였으며, 교리와 가르침의 뿌리는 인도 불교와 같이하고 있 으며, 중국 문화와 밀접하게 융합되어 있다. 불교 전통이 비록 시대별 지역별로 다르게 발전했다고 해도 사성제·팔정 도·공사상에 기반한 불교 사상과 수행의 기본적인 원리는 동일하다. 그러 나 음악에 있어서 중국의 불교는 다른 문화권의 불교보다 더 독창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중국 전통 음악의 여러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중 국불교 음악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불교 교리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수행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불교 의례를 통해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정립한다. 이 과정에서 음악의 사용은 중국 전통 음악인 범패(梵呗)와의 결합에 기 반을 두고 있고, 음악의 효과를 통해 수행자가 중국 불교 음악의 사상인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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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2.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한국의 사찰에는 전통이 오래되었든 그렇지 않든 경판이나 책자가 전 해지고 있으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책자의 하나가 경중왕(經中王)으로 신앙 되는 『법화경』이라고 할 수 있다. 『법화경』의 ‘수지(受持)ㆍ독송(讀 經)ㆍ송경(誦經)ㆍ해설(解說)ㆍ서사(書寫)의 오종법사(五種法事) 사상은 불 교의 전통 의례 문화를 산출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수지하여 독송하고 송 경하며 해설하고 서사하는 신앙 문화는 한국불교의 법석의례(法席儀禮)로 서 17세기 중엽을 지나면서 영산작법(靈山作法)→영산재(靈山齋)라는 독 특한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무형문화로 발전하였다. 영산재는 망자의 칠칠재(七七齋)를 위해 『법화경』을 독송하고 명부의 시왕(十王)에게 권공하는 의례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혼령을 모시 는 시련(侍輦)의식, 혼령을 맞이하여 법문하는 대령(對靈)의식, 혼령을 목 욕하는 관욕(灌浴)의식, 저승돈을 만드는 조전(造錢)의식, 옹호도량(擁護 道場)를 청하는 신중작법(神衆作法)의식, 괘불탱화를 모시는 괘불이운(掛 佛移運)의식, 영산작법의식, 재승(齋僧)의 식당작법(食堂作法)의식, 명부권 공(冥府勸供)의식, 혼령에게 제사를 올리는 관음시식(觀音施食)을, 끝으로 봉송(奉送)의식 순서로 진행된다. 영산재에는 전통의 소리인 범패와 신업 공양(身業供養)이라는 작법무(作法舞)가 동반된다. 한국의 사찰에 『법화경』이 소장 전승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오종법사 를 봉행하고, 아울러 세계 인류의 無形遺産인 영산재와 같은 전통의 불 교문화를 설행(設行)하기 위해서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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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1.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은 한국불교 법화계 종단의 예경의식과 송주의식의 특징을 살펴본 글이다. 현재 한국불교 법화계 교단은 여러 곳이 있으나 본고에서는 자생적 종단, 외부의 영향 속에 성립된 종단 세 곳, 천태종, 관음종, 영산법화종의 예송의례를 살펴보았다. 천태종의 예송의례의 특징은 중창조사의 예경이 추가되었고, 관음독송정근을 위주로 하고 있고, 거사부전제도를 통해 승속불이를 취하고 있는 점이다. 불입종과 2기 관음종의 예송의례의 특징은‘삼귀의례’와 ‘칠불거양’을 시설한 것, 범음 명칭 ‘나모 삳달마 푼다리까 수드라’의 주력, 『법화경』 여래수량품을 염송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무상도에 들게 하고 속히 불신을 성취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산법화종의 예송의례의 특징은 예불문이 편제되어 있지 않고 삼보례로만 행해지고 있으며, 법보인 달마야중을 『묘법연화경』으로 대체하여 법화계 종단답게 법보를 구체화하고, 송주의식의 현행 개경게의 ‘아금문견득수지’가 ‘아금견문득수지’로 나타나는 점이다. 법화계 종단임에도 각각의 종지와 종풍에 따라 예송의례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종지, 종풍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현행 종단들의 예송의례에서 느낄 수 없는 자신들 만의 교리를 확연히 나타냄으로써, 어쩌면 법화계 종단의 예송의례는 그 자신들의 정체성을 여타의 종단들보다는 잘 드러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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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21.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법화경』을 중심으로 한 신앙은 조선시대에도 그 명맥을 계승하였다. 조선시대는 출가가 제한되고 사원경제가 크게 위축되는 상황이었지만, 왕실과 지배층의 추모 의례에서는 『법화경』독송과 같은 신앙 행위는 빼놓을 수 없었다. 국가이념으로 표방했던 성리학은 현세 중심의 사상이어서 망자를 위로하고 산 자의 공덕을 비는 내세주의에는 불교를 능가할 수 없었다.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그 사상과 신앙을 초토화시키고자 했지만, 성리학의 허약성만을 드러낼 뿐이었다. 법화신앙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는 그 종교적 기능이 더욱 강화 되었다. 근본적으로 청허 휴정을 비롯한 그 제자들이 주도했던 승가의 수행과 교육체계가 새롭게 확립되면서 그 가치가 부활하였다. 그러나 왜란과 호란의 과정에서 발생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다양한 고통을 위로하는 재의(齋儀)는 법화신앙이 실제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법화경』 연찬은 조선후기 불교계의 교학 계보를 형성할 정도로 가치있었고, 선 수행에도 중요한 지남이었다. 『법화경』은 뿐만 아니라 당대 불 교계에서 망자 추선(追善)과 사찰의 낙성식(落成式)을 비롯한 다양한 의식에서 영산회상이었고 극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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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9.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인도 불교의례의 기원과 요소, 불교의례의 변용과 연구대상에 대해 다룬다. 불교의례는 초기불교에 나타난 경배, 귀속, 공양, 수행, 유행, 붓다장례, 합송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붓다에 대한 경배와 호칭, 붓다와 성자의 귀속문제 그리고 수계식, 의식주와 각종 필수물의 공양 이외에 꽃, 향 등의 공양, 수행과정에서의 의례와 유행 동안에서의 의례, 붓다의 사후의례와 장례문화, 경전의 합송과정에서 암송절차 등은 의례집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불교의례의 요소는 시간적ㆍ공간적ㆍ대상적ㆍ내용적ㆍ구조적으로 구분지을 수 있다. 간략히 설명하면, 시간적으로 공양ㆍ포살ㆍ법회, 생전과 사후의 의례로 구분되며 작법절차도 시간에 관련된다. 공간적 요소로는 승가를 위한 공간, 재가를 위한 공간, 절 안과 절 밖, 수계단, 열반 이후 사리탑과 불국토 등이 주요의례 요소가 된다. 내용별로는 승가생활의례ㆍ삼귀의 ㆍ예경ㆍ수계 등의 자행의례(自行儀禮)와 앙굴리말라의 순산기도 등의 타행의례(他行儀禮) 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예경대상과 선행공덕에 의한 생천 구조를 불교의례에서 지속하고 있다. 한편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대 흐름에 따라 불교의례와 관련한 의례도구, 의식법, 내용과 주체자도 점차 변천해 왔다. 그런 맥락에서 살펴보면, 불교의례는 물리적 불교의례용구의 연구와 시기별 구분에 의한 연구, 설행단(設行壇), 불국토, 신중 거주처, 공간배치, 장엄공간 등과 관련한 연구들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아울러 내용을 중심으로 각종 재와 각청, 참석대중과 절차 등에 관해서도 연구 되어야 한다. 특히 연구 폭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기원과 변용, 번역과 사전작업, 의례비교연구가 절실히 요구된다. 왜냐하면 현재 불교의례는 초기불교, 대승불교의 다양한 의례기원과 요소를 포함하고 변용되어 왔기에 경전을 통해 인도의 불교의례를 이해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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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8.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길림성 집안시의 장천1호분 예불도는 5세기 후반 고구려의 예불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다. 단순히 불상 앞에서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에 그치지 않고, 불교에서의 절하는 방법은 이마를 땅에 닿게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묘사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이 논문에서는 인도에서조차 잘 표현되지 않았던 이러한 예불방식이 고구려 벽화에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이 절하는 모티프는 간다라미술에 자주 표현된 연등불수기본생도에서 수메다가 헌신적으로 진흙바닥에 머리카락을 펼치며 몸을 눕혔던 것을 묘사한 장면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해 보았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특정한 설화 속의 장면을 넘어 보편적인 예불의 행위로 간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절하는 방법에 익숙했던 동아시아인들은 자연스럽게 미술 속의 수메다의 행위를 부처에 대한 배례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아가 장천1호분 예불도의 불상 좌우측에 배치된 예불자들의 움직임을 통해서는 우요의 방식으로 예불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자 의도했던 것으로 해석해 보았다. 이 시기 예불방식에서 우요가 중요했을 것임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것을 실증할만한 자료는 많지 않다. 그런 가운데 이 예불도는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지 100여 년 안에 이러한 예불방식이 정착했음을 보여준다. 끝으로 장천1호분 예불도는 정황상 실내가 아닌 실외에서 일어나는 장면으로 추정된다. 이는 단순히 실내ㆍ외의 문제가 아니라 화면상에 등장하는 부처가 단순한 불상인지, 아니면 석가모니의 현현한 모습의 묘사인지의 차이이기도 하다. 실내, 즉 법당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러한 구별을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야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설법 장면이라면 조각상이 아니라 실제 석가모니를 묘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배경에 등장하는 하얀 연꽃 봉오리는 󰡔법화경󰡕에 등장하는 백련의 꽃비를 연상시킨다. 물론 예불도가 그려진 공간이 무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아미타불, 그리고 극락세계에서의 연화화생 등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내세에 미륵삼회설법에 참여하게 된 것을 상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법화경󰡕에서 석가모니의 ‘무량삼매’에 의해 부처가 타방세계에 출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석가모니가 고구려에 현현한 것을 묘사한 것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음을 제시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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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8.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기장오구굿은 2박 3일간 이루어지며, 절차는 크게 청신ㆍ오신ㆍ송신의 세 부분이다. 청신은 부정굿ㆍ골매기 서낭굿ㆍ입문경ㆍ문굿, 오신은 초망자굿ㆍ방오구굿ㆍ하직굿ㆍ수리굿ㆍ시왕탄일굿ㆍ영산맞이, 송신은 꽃노래ㆍ뱃노래ㆍ초롱등노래ㆍ탑등노래ㆍ허개등ㆍ정정밟기ㆍ꽃사름ㆍ시석까지이다. 이중 불교적 요소가 매우 짙게 나타나는 절차는, 청신의 부정굿ㆍ문굿, 오신의 시왕탄일굿ㆍ영산맞이, 그리고 송신의 절차 대부분이다. 기장오구굿에서 절차명과 용어는 무속적인 은어 사용이 빈번하다. 이는 무속인들만의 언어라는 측면에서 불교의 것과는 차별성을 두려고 하는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발음을 사용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새로운 단어를 생성하기도 하고 불교의 용어로 착각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다. 이는 불교의례와는 차별되는 무의례만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굿당을 장식한 장엄물 역시 대부분 불교의례의 것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그러면서도 그 유래나 내력은 무속적으로 새롭게 해석을 더하고 있어서 불교의례와의 차별성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드러난다. 본래 무속의 내세관은 모호하다. 이런 무속이 불교의 내세관을 받아들여 시왕탄일굿에서는 극락정토왕생을 발원한다. ‘극락이라는 좋은 곳이 있다는데 보내줄 수 없느냐’는 민중의 바람에 호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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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7.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조선조의 불교의례는 어렵고 힘든 시기를 견디어야 했던 불교계의 현실과 조선의 치국이념인 유교에서 얻지 못하는 내세관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형성된 불교의례는 현세 구복적이며 주술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개항 이후 불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한국불교의 모순을 타파하고 새 로운 이념을 제시한 개혁가들은 이런 의례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비 판과 함께 근대 불교의례의 방향으로 대중들이 쉽게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한글화와 대중화가 제시되었다. 이와 같은 한국불교의 자체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병합한 일제 는 사법을 제정하여 한국불교 의례를 크게 변질시키면서 통제정책에 활용 하였다. 그런 분위기를 인식한 한국불교인들은 1910년대 한국불교 의례 회복을 논의하였지만 실행되기 어려웠고, 1930년대 이르러 일제강점에 의해 훼손된 불교의례를 재정립하기 위한 노력이 대두되었다. 뜻있는 선지식들은 지난날 비판하고 버려두었던 불교의례 속에서 우리의 전통을 찾으려 하였다. 그런 배경에서 1931년 발간된 불자필람과 1935년 대중들을 위해 약본으로 발 간한 석문의범이다. 그런 의식에서 형성된 전통의례의 출판은 한국 불교 인의 많은 관심과 활용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일제는 전시 체제에 맞도록 한국 1,500여 사찰에서 대동아전쟁의 연전연승을 위한 기도법회를 열어 절대적인 친일과 동원을 강요하면서 변질 된 의례를 지속시켰다. 이렇게 변질된 한국불교 의례는 광복 후에 회복될 수 있었다. 새로운 집 행부가 설립된 후 모범총림을 시설하여 옛날부터 전해지는 한국불교 범음전 통을 회복하였고, 성철과 청담의 주도하에 설립된 봉암사 결사운동에서 비 불교적인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현대 불교의례의 방향성이 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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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6.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에서는 오분향게 칠정례 천수경의 한글 율조를 한문 율조와 비교하여 앞으로 진행될 한글의례를 위한 발전적 방향을 찾아보았다. 한문과 한글 율 조의 전반적 양상을 보면, 한문은 대개 두 자 단위 패턴인 데 비하여, 한글 은 3자 패턴이 많았다. 이는 의례문 낭송에도 영향을 미쳐 말붙임의 강세와 목탁의 타법에 주의가 필요했다. 그 중에 오분향게와 칠정례는 느린 율조이 므로 어절에 맞는 장음 처리와 된소리의 자음을 유연하게 발성해야 하는 것 외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이에 비해 천수경 율조는 다소 차이가 컸다. 한문천수경은 4박자의 주된 패턴 사이로 진언과 게송의 제목들이 자유리듬으로 섞여 있어 일관성과 변 화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반면 한글 천수경은 대개 7박자 패턴을 이루고 있어 리듬절주의 경쾌함이나 신명이 다소 부족하였다. 한글 천수경 에서 진일보한 면은 다라니의 범어 발음과 띄어 읽기이다. 이러한 시도는 변 화와 개선의 촉매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한글의례문의 전반적인 면모를 보면, 기존의 한문 율조와 발성을 따른 것 이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영어와 번안 가사 등 다방면의 성악곡에서 보았듯 이 언어가 다르면 율조와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피하므로 앞으로 진행 될 한글 율조의 확산과 실행을 위해서는 우리말 음보와 리듬에 대한 혁신적 인 변화가 필요하다. 21세기 대중문화의 시대를 생각해볼 때, 기존의 한문을 잘 번역하여 한글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김소월의 시와 같은 순 우리말 의 례문 창제를 과감하게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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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6.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조선시대 신앙활동에 있어서 불교의식의 비중은 매우 증가하여, 건축, 불 상, 공예 등 불교미술 전반에서 의식문화의 영향이 광범위하게 확인된다. 본 고에서는 불교의례의 성행이 가져온 변화를 불교회화의 측면에서 살펴보았 다. 불화와 의례공간의 관련성은 주불전 내부의 의식과 야외 의식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조망할 수 있다. 예배 공간으로 인식되던 주불전(主佛殿)은 다양한 법회(法會)와 의례가 개 최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고, 전각 내부에는 의식 수요에 부응하는 불화가 봉 안되었다. 불보살을 도량[道場]에 청해 공양을 권하는 권공(勸供)과 육도의 중 생을 청하여 음식을 베푸는 시식(施食) 의례는 특정 의식에 한정되지 않고 불 교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수륙재의 성행은 특히 삼단의례(三壇儀禮)라 는 형식을 통해 저변화되었다. 그 결과 주불전 안에 상단(上壇), 중단(中壇), 하단(下壇)의 삼단이 갖추어지고, 각 단을 상징하는 불화가 하나의 기본 조합 을 이루게 된다. 한편 야외 의식용 대형 불화인 괘불(掛佛)이 전국적으로 조성되는 현상은 전각 외부로까지 확장된 의식에서 불화의 쓰임과 기능 확대를 보여준다. 불 화는 의식단의 가설에 따른 수요로 혹은 전각 내부에서 외부로 의식단이 옮 겨짐으로써 이동하였다. 불화를 거는 절차의 핵심은 의식이 진행되는 곳으로 불보살의 강림(降臨)을 청하는 것이다. 불보살의 강림은 도량에 초청하고자 하는 불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거불(擧佛) 절차를 통해 상징되었다. 또한 거불 의 대상이 의식용 불화의 주제로 그려짐으로써 구체적으로 시각화되었다. 의 식을 위해 불화를 꺼내 이동하고, 의식을 마치면 다시 원래의 자리에 가져다 두는 일련의 절차는 불보살의 현존을‘도량으로의 강림’이라는 극적인 방식 으로 전달하였다. 이들의 강림을 찬탄하고 도량에 내려온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는 절차는 의식의 신이력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조선시대 불교회화는 전각에 봉안되어 불상의 뒤편에 놓여 불전이 상징하 는 불세계를 상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식의 성행이라는 신앙의 흐름에서 역동적으로 기능하였다. 전각 외부로 확장되는 의식과 의식을 전담하는 불 화로의 이행을 대표하는 것이 괘불이라면, 감로도(甘露圖)는 의식에 사용되 던 불화가 전각 내부의 불화로 고정되는 현상을 보여준다. 의식의 성행으로 의식 전용 불화가 생겨나는 동시에 특정한 의식에 사용되던 불화가 상설 불 화로 봉안되었다. 조선시대 불교회화는 의식 수요에 부응하는 과정에서 그 주제와 구성에서 다양한 변용을 보이며 전개되었다. 불화가 봉안된 공간과 그 공간에서 이루어졌던 의식 문화를 통해 조선시대 불화의 다각적인 기능 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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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2016.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의 목적은 의례의 변화에 따른 불교건축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는 것이다. 17세기 이후 불교의례는 대부분 실내화로 변하게 된다. 그 결과 평 면 내 불단 위치 변화, 기둥 구조법의 변화, 바닥 재료의 변화, 창호의 개방 성 증가와 천장 구성방식의 변화를 낳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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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2010.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main functions of a Buddhist temples are as a place for Buddhist services and a place for sermons and each ancient Buddhist temple was equipped with a main and separate building. After Zen Buddhism was first introduced, there was a tendency to change the terms to Buddhist sanctuary and altar, as set forth in the Zen Buddhism code of conduct called 'Cheonggyu(淸規)'. As such, it was thought that the division between Buddhist service space and preaching space were relatively firm until the Goryeo Dynasty. However in the period from the end of the Goryeo to the beginning of the Joseon Dynasty there was an increasing tendency of integration of the two buildings. It can be seen that, in cases where both buildings remained, statues of Buddha were enshrined in these buildings without any distinction. Eventually it is led to the tradition of duo-Buddhist sanctums.
        4,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