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가 되고 종교 간의 더욱 활발해진 상호 작용으로 금세기가 “종교의 세기”로 불리고 있으나 이러한 상호 작용은 대부분 종교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증가시키는 역할만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인식을 가지고 본 논문은 7세기 이후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갈등 관계를 이루고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을 중심으로 이것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시대에 한국 교회는 어떠한 선교적 태도와 교훈을 가져야 하는지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 목적을 위하여 세계 도처에 서 종교를 빌미로 한 무력을 행사하는 글로벌 지하디스트 무브먼트 (Global Jihadist Movement)의 동기가 되는 지하드의 신학적 개념이 시대에 따라 그 의미와 적용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설명한다. 이러한 일부 무슬림들의 호전성에 대한 상호 작용으로서 유럽의 기독교 인들이 만들어 낸 이슬라모포비아(Islamophobia)의 국내적 사례를 예멘 난민과 대구 모스크 건립을 둘러싼 논란을 중심으로 검토하고 이러한 충돌과 폭력을 넘어서는 환대를 통하여 두 종교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인류 공통의 과제인 평화와 진정한 복음 증거의 구현으로서의 기독교 선교가 지향되어야함을 제시하고자 한다.
Fen(分°) is the proportional dimension unit of the standard timber section on Yingzaofashi(營造法式), and there is a phrase that not only structural members but the whole structural design of a building also use Fen as the dimension unit on the book. But in fact only the section dimensions of structural members are recorded by Fen, but the design dimensions are recorded by Chi(尺) on the book. Other historical records also described the building size by Chi. So there has been long-standing debate on the phase in Chinese architectural history society, including the recent confrontation on the analysis of survey figures of the east great hall of Foguangsi temple(佛光寺東大殿). This paper analyzes all the records about the size of structural members and section planning on the book to make various calculation and evaluation. And it makes a survey of Cai(材) as the dimension and design unit between Chi and Fen through geometric analysis. Cai might be a rough unit of measurement in terms of structural and proportional scheming on Yingzaofashi, and the full size Cai(足材) had been a building scheming module before the Song dynasty.
광주광역시에 분포하는 보호수는 9분류군 68개체다. 환경백서에 기록된 보호수 가운데 광산구 운남동 신가마을의 떡갈나무는 갈참나무로, 서구 벽진동 벽진마을의 양버들은 왕버들로, 남구 석정동의 소나무는 반송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IPCC는 21세기말에 평균기온은 최고 6.4℃ 및 해수면은 59 cm 상승하므로 북극빙하는 완전히 녹아 없어지고 지구상의 생물종 95%가 멸종위기에 빠질 것으로 경고하고 있다. 광주광역시의 보호수를 통해 기후변화
제품을 로트(lot)단위로 구분하고 로트에서 취한 샘플을 검사하여 얻은 품질 특성의 값을 이용해서 로트의 합격여부를 판정하는 것을 샘플링검사(sampling inspection)라 하고, 검사하는 품질특성이 제품의 수명 특성치인 경우에 이를 신뢰성 샘플링 검사(reliability sampling inspection)라 한다. 그 중 벌크재료에 대한 샘플링 검사방식을 알아 보도록한다.
향전은 英祖대 이전부터 기존 사족간의 당파적 대립에서 시작된다. 이런 갈등으로 인해 사족층의 지배질서가 균열을 보이자, 그 틈새를 비집고 신흥세력들이 鄕權에 참여하면서, 향전이 점차 신․구세력간의 갈등의 모습까지 덧씌워진다. 영남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사족층의 지배질서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지만, 고을에 따라 사족층의 지배질서의 강약이 달랐다. 지배질서가 약한 고을에서는 일찍부터 새로운 세력이 新鄕으로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컸다. 또 영남을 좌․우도로 나누어 볼 때, 좌도보다는 우도가 향전이 더 심했다.영남지역 중 우도, 특히 경남 서부지역을 근거지로 하고 있던 南冥學派는 원래 大北의 입장을 취하다가 仁祖反正 이후 침체하면서 대거 南人화해 갔다. 게다가 南冥集판본 훼손사건 등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발생한 소외그룹이 西人化하면서, 남명학파 내부에 서인(老論)․남인의 당파적 대립양상이 점차 확산되었다. 이런 갈등은 진주 인근의 고을에도 영향을 미쳤고, 좌도의 여러 고을에서도 당파적 갈등으로 인한 향전이 전개되었다. 18세기 중반 이후 영남에서도 新鄕․舊鄕의 대립으로 인한 향전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때의 신향은 鄕案에 새로 진입하려는 같은 사족층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후 영남에서는 수적으로 열세에 있던 신향들이 중앙의 老論세력의 지원 하에 자기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다른 계층의 세력을 끌어들이면서 서얼층이나 다른 계층의 진입도 점차 확산된다.17세기 말 18세기 중엽 향안을 둘러싼 대립과 파치 현상은 이전부터 향촌사회 내의 재지사족간의 당파적 대립이 격화되면서 일어난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같은 사족반열에 있으면서도 향안에 입록되지 못한 인물들은 점차 중앙의 서인․노론세력의 지원에 힘입어 향안에 들어오게 되고, 이에 따른 분란이 신․구향의 향전으로 발전한 것이다.영남에서의 교원을 둘러싼 갈등도 일찍부터 기존 사족간의 당파적 대립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지만, 영조대부터는 신․구향간의 대립이 점차 부각되기 시작한다. 신향도 향교․서원에 대해서도 똑같은 참여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通淸운동을 전개하던 서얼들도 교원에 참여하게 되면서 영남 각 고을에서도 기존 사족과 서얼간의 갈등이 격화된다.향임을 둘러싼 향전에서도 처음에는 기존 사족간의 당파적 대립으로 향전이 일어났다. 그러나 후대로 가면서 영남에서도 향임을 둘러싼 신․구향간의 향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런 향전은 19세기 말에는 사족층뿐만 아니라 향리층까지도 노골적으로 파벌을 형성하여 향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인다.
흔히들 일본의 독도점취는 러일전쟁의 전략적 차원에서 이루어 진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일본과 러시아의 경우 그 이전부터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야욕을 갖고 있었음을 지금까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문제의식 하에서 본고의 경우 일본 의 독도 점취는 러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일본 정부의 조치였다 는 시각에서 벗어나 1850년대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개척한 뒤 남 하의 향방을 동아시아로 정하면서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싼 러시아 와 일본의 각축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부동항의 확보에 관심을 가진 러시아는 1854년 조선 동해안을 샅샅이 탐사하였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러시아 해군이 1857년에 ‘朝鮮東海岸圖’를 처음 발행하였다. 여기에 울릉도와 독도가 한 국영토로 파악되었고, 이 지도는 1862년, 1868년, 1882년에 증보 간행되었다. 일본 해군은 1868년 러시아의‘조선동해안도’를 입 수하였고, 태정관과 외무성 은 일본 관리를 파 해 조선의 사정을 내탐하였다. 이때의 문서인‘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에는 러시아 의 조선 경략론과 함께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부속으로 된 시말 을 조사하라는 것이 포함되었다. 이것은 러시아가 울릉도와 독도 를 부동항으로 주목하게 될 상황을 염려하여 조사항목에 포함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와의 교역이 증대하자 일본은 조선을 개국시키면서 원산을 개항장에 포함시켰다. 그에 따라 울 릉도와 독도에 관심이 고조되어 개척논의를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불법적으로 울릉도에 들어와 벌목과 어로활동을 하였다. 러시아는 고종의 아관파천 때 울릉도 삼림채벌권을 획득한 뒤(1896.8.28.), 1899년 일본의 울릉도에 대한 삼림채벌 등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러시아 군함이 몇 차례 울릉도에 기항하여 병력을 주둔시키기도 하였다. 결국 이로 인해 대한제국은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키고 독도를 관할하게 하는 칙령 제41호를 발표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 태를 경험한 일본은 러일전쟁의 전략상 목적에서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1905년의 무주지 선점론 역시 그 과정에서 다듬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