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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履齋 宋鎬彦은 한말 경남 삼가군의 학자인데, 그는 南冥 曺植과 退溪 李滉에 대한 인식에 있어 매우 흥미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역적으로는 남명의 고향과 같은 지역에 살았고, 학문적으로는 尹冑夏, 李震相, 郭鍾錫 등에게 배워 퇴계의 학맥에 닿아 있었다. 그의 문집에 보이는 남명과 퇴계의 인식에 있어 이러한 특성이 잘 반영되어 있는 작품들이 있는데, 특히 남명에 대해서는 남명 사상의 핵심이라 할 경의를 상징하는 敬義劍을 읊은 「南冥先生古劍歌」와 퇴계에 대해서는 한주 이진상이 부르짖은 祖雲憲陶가 새겨진 옥사자인을 읊은 「玉獅子印歌」를 들 수 있다. 두 작품 가운데 「남명선생고검가」는 경의검을 통해 남명의 사상을 읊은 것이고, 「옥사자인가」는 옥사자인을 통해 한주 이진상이 퇴계의 학맥을 계승한 것을 읊은 것으로, 바로 남명과 퇴계를 대비시켜 논한 것이 아니라서 두 작품이 긴밀한 연관성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옥사자인가」에서 송호언의 퇴계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는 있다. 이재의 남명에 대한 생각은 남명의 제자들에 대한 시, 특히 삼가군수로 부임한 申斗善이 雷龍亭을 중수하면서 이재에게 명하여 지었던 「雷龍亭詩」에 잘 드러나 있다. 「뇌룡정시」에서 그는 인을 회복하여 乾道를 성실하게 하는 것은 군자가 바라는 것인데, 이를 실행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하며, 남명이 바로 千仞壁 立의 기상을 가지고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의연함이 있다고 칭송하였다. 「남명선생고검가」는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는 장편 고시인데, 그는 첫 번째 단락에서는 역사가 깊은 칼을 남명이 지리산에서 갖고 있는데, 이는 하늘의 뜻 으로 없애고자 해도 없앨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남명이 그의 敬義劍을 가지고 세상의 일들을 처리하였다면, 온 세상이 밝고 정의로운 경과 의가 넘치는 세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세 번째 단락에서는 남명은 결국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지니고 있던 칼이 남아 있으니, 후대 사람들은 경의 뜻을 담은 여덟 자의 내용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재의 퇴계에 대한 인식은 이재가 퇴계의 시에 차운한 3제 4수의 시에 잘 드러나 있다. 雙明軒의 차운시는 퇴계가 한 때 거처하던 장소에서 퇴계를 생각하고 그 서글픈 심회를 노래한 것이고, 四樂亭 차운시는 사락정의 모습과 그곳에 깃들어 있는 퇴계의 자취를 읊었는데, 퇴계를 사모하여 도의 眞諦를 그에게 묻고자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을 노래한 것이다. 특히 「옥사자인가」는 「남명선생고검가」와 마찬가지로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는 장편 고시인데, 그는 첫 번째 단락에서는 주자의 학문이 퇴계로 이어진 것을 寒洲 李震相이 계승하였음을 여러 고사와 비유적인 내용을 통하여 드러내어 주었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사자를 그려 자신의 학문을 전하였기에 사자가 있는 곳이 스승이 있는 곳이 되었지만, 꼭 그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밝혔다. 세 번째 단락에서는 후학들에게 해야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경계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퇴계에 대해서는 남명에 대한 것만큼 현실적 실천의 잣대로 평가하지 않고 다만 후대의 학자가 부르짖는 ‘祖雲憲陶’의 주체로서 주자로부터 조선후기 이진상에게 이르기까지 그 학문의 정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말하였다.
        2.
        2019.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명학 연구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는 남명학의 대중성과 실천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본고는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남명의 합천 유적을 주목한 것이다. 합천지역의 주요 남명 유적은 12개소이다. 삼가면 5개소, 합천읍 2개소, 쌍책면 2개소, 가야·용주·대병면 각 1개소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삼가면은 남명의 탄생지이자 남명이 뇌룡정과 계부당을 지어놓고 강학을 하였던 곳이니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유적에는 복원된 생가처럼 유적으로 남은 곳도 있고, 이영공유애비처럼 비의 형태로 남아 있는 곳도 있으며, 함벽루처럼 문학경관으로 남아 있는 곳도 있다. 남명 유적은 이처럼 매우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남명의 합천 유적에는 남명학의 주요 부면들이 잘 드러나 있다. 탄생지에서는 위대한 학자의 등장에 대한 예감, 뇌룡정과 함벽루에서의 부동과 역동이라는 남명 자아의 역설구도, 부모 묘비에서의 과장되지 않는 효심, 황강정과 사미정에서의 진정성 있는 우정, 이영공유애비에 나타나는 관료와 백성의 이상적 관계, 「을묘사직소」에서의 비판적 현실인식 등이 그것이다. 합천지역 남명 유적에 대한 활용 방안으로는 뇌룡정에서의 神性 찾기 프로그램 개발, 합천의 내외적 연계망을 활용한 남명학 문화탐방 노선 개발, 함벽루를 중심으로 한 회통 문화의 재구성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로써 합천 공간을 중심으로 남명학의 핵심은 더욱 부각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3.
        2019.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爲己之學이라는 용어는 爲人之學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쓰인다. 위인지학은 출세가 목적인 반면 위기지학은 聖人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남명이 위기지학을 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면 이는 출사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굳혔다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는 그가 강조했던 엄정한 출처관과도 직결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남명이 이처럼 중대한 의미가 있는 위기지학으로 학문의 방향을 전변한 시기가 과연 언제였던가 하는 점을 「書圭菴所贈大學冊衣下」를 중심으로 논증해 보았다. 그 결과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남명이 위기지학으로 학문의 방향을 전환한 것은 처음으로『성리대전』을 읽으면서 허형의 언급을 접하고 크게 자극을 받은 것에 기인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둘째, 다만 이 시기가 25세냐, 26세냐, 31세냐의 문제인데, 이는 요컨대 행장과 연보의 말이 본인의 기록과 어긋날 때 어느 것을 근거로 삼을 것이냐의 문제라는 점에서, 행장을 바탕으로 제기된 25세설과 26세설은 남명이 기록한 「書圭菴所贈大學冊衣下」의 31세설에 대해 설득력을 잃는다. 셋째, 「書圭菴所贈大學冊衣下」의 ‘已三十餘矣’라는 말이 科擧에 여러 번 낙방하고 난 뒤라는 곳에만 연결되고, 그 뒤 『성리대전』을 본 것과는 연결시켜 볼 수 없다는 견해는, 「書圭菴所贈大學冊衣下」라는 글을 남명이 기록으로 남긴 이유와 관련시켜 이해하면, 당연히 그 뒤에 『성리대전』을 가져다 읽었다고 함이 순리라는 점에서 역시 설득력을 잃는다. 이 문제와 관련한 논의를 통해서 원전비평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었고, 특히 2차 자료에 근거한 기록이 아무리 오래 되었다고 하더라도 1차 자료의 기록과 어긋날 경우에는 1차 자료에 따라 마땅히 수정되어야 함을 확인하 였다. 더구나 남명의 위기지학으로의 전변 시기에 대해서 필자의 견해를 참조 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 중국의 熊禮滙 교수도 필자와 같은 결론을 낸 것에서도 31세설의 정당함이 충분히 드러났다고 할 만하다.
        4.
        2015.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의 목적은 우리나라 사상가이며 대학자인 남명의 敬義사상에 내포 된 교육적 의미를 추출하여 오늘날 유아인성지도를 위한 교사의 리더십을 탐색하는 데 있다. 연구결과, 敬義사상에 근거한 유아인성지도 교사는 마음 을 다하여 수양하며, 올바른 배움으로 인지적, 정의적, 활동적 리더십을 義 롭게 실천해야하는 것으로 분석되어졌다. 본 연구결과가 유아기 인성지도 교사의 리더십 연구에 주는 시사점은 남명의 敬義사상을 통하여 정체성 있 는 교육자 역할을 정립하고 인성지도를 위한 실천적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는 점이다.
        5.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俛宇 郭鍾錫이 지은 「南冥墓誌銘」은, 南冥을 두고 지은 傳記文字 가 운데서 가장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서술이라 할 수 있다. 남명 전기문자 의 최후결정판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남명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빠짐 없이 수록해 놓았다. 묘지명으로서는 매우 긴 작품으로 일반적인 묘지명의 틀과 다른 점이 많다. 면우는 이 묘지명을 지으면서 자료를 최대한 널리 수집하여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고, 다 완성된 뒤에도 당시 慶尙道 지역에서 문장으로 손꼽히는 제자 深齋 曺兢燮과 晦峯 河謙鎭에게 문제점을 지적하여 같 이 수정하고 보완하여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원래의 請文者 弦齋 曺庸相을 통하여 深齋가 사소한 문제로 지나치게 장기간 문제를 지적하고 나오자, 마침내 자기가 지은 「南冥墓誌銘」은 폐기하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 9년 뒤인 1926년에 간행된 俛宇集 속에 실린 俛宇의 시문 가운 데 南冥을 낮게 평가했다는 혐의를 받을 글이 발견되어, 남명 후손들은 출판하여 보내 온 俛宇集을 거절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俛宇 측과 관계가 멀어져 「남명묘지명」은 실제로 남명 묘소에 묻히지 못 했다. 「南冥墓誌銘」에서 俛宇는, 南冥의 偉大性을 부각시키고, 敬義가 南冥思想의 핵심임을 밝히고, 南冥의 治學方法을 체계화하고, 南冥의 憂國憐民사상을 부각시키고, 南冥의 學德의 특징을 宋朝 諸賢에 비교하 였고, 南冥의 雅號의 의미를 밝히고, 文廟從祀 疏請 등 남명 推崇事業을 소개하는 등, 내용이 가장 다양하면서 풍부하다. 단언컨대, 「南冥墓誌銘」은 남명에 관한 傳記文字 가운데서 가장 종 합적이고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자료라 할 수 있다. 남명이 직접 지은 詩文에는, 남명의 언행과 생활상을 이해할 자료가 거의 없는데, 제자나 친구 後學들이 지은 이런 다양한 종류의 傳記文字 가 존재함으로 해서 남명을 연구하는 자료로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높은 것이다.
        6.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의 목적은 우리나라 대표적 사상가이며 대학자인 남명의 신명사도에 근거하여 오늘날 유아기 인성교육에 적합한 수업모형을 탐색하는 데 있다. 신명사도에 근거한 본 수업모형은 남명의 실천사상을 통해 개인의 감정 존중과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자기실천화를 고양시켜 조화로운 인성발달로 연결하는 전인교육의 함의를 제시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역사적 인물을 통한 정체성있는 인성교육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유아기 전인발달을 도우는 인성교육의 현장연구로 연결될 것이라 기대한다.
        7.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神道碑銘은 일종의 墓道文字이다. 묘도문자는 한 인물의 學問, 言行, 德性, 業績, 家系 등을 기록하여 돌에 새겨 神道에 세우는 것인데, 남명의 경우처럼 우여곡절을 겪으며 5종이나 남아 전하는 경우는 사례가 없다. 이 5종의 묘도문자의 撰者는 모두 자신의 입장에 충실한 修辭를 보였다. 대곡 성운은 평생의 벗을 여읜 슬픔과 그리움을 담아 곡진한 修辭로 표현하려는 입장이었고, 내암 정인홍은 무한한 존경심으로 스승을 높이려는 의도였으며, 미수 허목은 퇴계의 남명 비판 이후 견지되어온 남인학파의 견해와 자신의 평소 견해에 입각하여 남명을 高士로 기리는 입장이었고, 우암 송시열은 상대 당파이기에 오히려 자유로운 존숭을 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용주 조경은 미수와 동일한 입장과 견해에서 학자라기보다는 高士로 남명을 기리고 있으며, 사실의 기록과 闡揚의 수사 사이에서 사실의 기록에 치중하는 입장이었다. 龍洲는 南冥을 氣節이 높았던 高士로 평가했고, 그것을 修辭로써 잘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구사하였다. 이러한 修辭는 直敍와 尊崇의 사이에서 긴장하며 행간에 드러나고 있었다. 또 용주는 남명의 출처에 대해서 때를 만나지 못한 不遇와 高潔自守의 경우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修辭의 방식이 남명을 존숭하고 그 행적의 사실을 드러낸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대곡이나 내암 혹은 우암이 찬한 신도비명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直敍와 簡略함에 더 치중했음을 보았다. 따라서 용주의 修辭는 尊崇 내지 闡揚의 修辭와 事實의 直敍 사이를 오가는 긴장 속에 만들어진 것이며, 용주의 修辭는 오히려 史論의 褒貶에 가깝고 묘도문자의 목적인 揚善隱惡에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었다.
        8.
        2013.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 시대 사상가이며 대학자인 남명의 인간관계를 분석하여 유아기 대인관계교육의 내용 및 방법을 고찰하는 데 있다. 연구 결과 남명의 인간관계는 역할과 도리를 다하는 인간관계, 상대방을 존중하는 인간관계, 마음과 행동을 중시하는 인간관계를 실천한 것으로 분석되어졌다. 남명의 인간관계 실천이 유아기 대인관계교육에 주는 시사점은 덕의 함양과 근본을 갖춘 지식, 그리고 사회ᆞ교육적 가치의 강조이며, 이를 생활에서 실천화하는 방법을 강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9.
        2012.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명의 생애와 발자취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오래 되었다. 어찌 보면 남명 당대에도 이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남명이 돌아간 직후 이에 대한 정리가 본격화되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남명의 생애 가운데 예민한 부분이 있기도 하고, 제자 정인홍의 정치적 부침에 따른 후유증으로 생애에 관한 자료도 여러 차례 여러 사람에 의해 중복하여 지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남명에 대한 생애자료는 그 누구보다도 많이 남게 되었다. 근대에 들어 남명의 생애를 정리하여 소개하는 일에 그리 적극적이지 못하였다. 근대의 인명사서 등에 남명에 대한 내용은 비슷한 시기의 인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략한 감이 있다. 1990년대 초에 남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남명의 생애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본격적인 연구와 번역, 교정 등은 이루어지 않았다. 다만 최근 들어 다행스럽게 남명에 관한 생애자료가 다시 전반적으로 검토되고 정리되고 있다. 남명의 생애에 관한 정리와 소개, 교정과 연구는 논문, 저서, 소설, 사전, 교과서 및 개설서 등 여러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소설로 지어지고 교과서 및 개설서에 소개되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으나, 논문, 저서 등의 형태로 점점 깊이 있게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인터넷 온라인상에 사전적 설명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남명의 생애에 대한 철저한 실증을 바탕으로 생애가 정확하게 소개되어야 할 것이다. 남명의 발자취에 관한 정리와 소개는 주로 책으로 몇 권 나와 있는데, 개설적으로 간략히 설명한 것에서부터 특정한 분야 예컨대 한시 등과 관련하여 발자취를 탐방하는 형식으로 된 것도 있다. 그리고 그의 생애의 발자취와 학문적 궤적을 관련지어 연구한 것도 있다. 이들 발자취에 대한 정리와 탐구는 이전의 유적지에 대해 소략하게 소개한 책자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였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발굴하거나 정리가 되지 않은 발자취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10.
        200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에서 서원제도는 周世朋의 白雲洞書院 설립으로 출현하였지만, 이후 서원을 조선사회에 보급․정착시키고 그 성격을 규정하여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것을 退溪 李滉이다. 그러나 南冥 曺植은 여러 가지 여건에서 강우지역의 서원설립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자료에는 서원 건립이나 보급․ 정착 등에 관여한 사실이 나타나 있지 않다. 南冥 在世時 강우지역에 최초로 건립된 서원은 咸陽의 灆溪書院이다. 남계서원은 남명의 문인인 介庵 姜翼 등의 함양 인근의 사림과 지방관의 협조에 의하여 설립된다. 그런데, 남명 재세시 남명과 남명학파의 핵심적인 인물들은 남계서원의 건립과 운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고 있다. 남명 사후 강우지역에 최초로 건립된 서원은 德川書院이다. 덕천서원은 남명의 문인인 守愚堂 崔永慶 등의 진주 인근의 사림과 지방관의 협조에 의해 건립된다. 덕천서원 창건 당시는 전 강우지역의 남명학파에게는 서원건립은 이슈가 되지 못한 것 같다. 남계서원과 덕천서원은 丁酉再亂으로 소실되고 그후 중건된다. 중건도 창건과 마찬가지로 인근의 사림과 지방관의 협조로 이루어진다. 강우지역에 있어서 남계서원과 덕천서원은 광해군 대에서 인조반정 이전까지는 북인계열에 속하는 남명학파의 총본산으로서 그들의 향촌사회 내 거점으로 정치․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북인세력이 제거되면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던 서원도 조락하고 만다. 숙종․영조 연간을 거치면서 남계서원은 친노론계 서원으로, 덕천서원은 친남인계 서원으로 변모하게 된다.
        11.
        2002.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o speak most broadly about the two representative Neo-Confucians of the mid-sixteenth century Choson, Toegye(Yi Hwang, 1501-1570) focused on the theories of nature and principle and self-cultivation, whereas Nammyung(Cho Shik, 1501-1572) focused on those of self-cultivation and righteousness. One may explain such difference by their opposite personalities: the one had a mild temper with sympathy and tolerance, while the other a strong temper with strictness and critical power. Basically, however, these two had a common ground in the system of Neo-Confucianism(Tohak), and their difference occurred in the course of searching for a more rational and efficient way of achieving the same goal. Therefore, the difference is significant in that it presented the complementary models of Neo-Confucian learning as could be realized in that period, and that it diversified, thereby, the mode of understanding and responding to the times as well as the method of learning. So in comparing Toegye and Nammyung's traditions of learning, I aim at drawing attention to the diversifying and complementary meaning of the difference rather than to the contradictory and rivalrous meaning of it. The difference between Toegye and Nammyung in their traditions of learning can be summarized in three points. Firstly, by carrying the question fo attentiveness(jing) through his methodology of learning, Toegye established a tradition centering around the self-cultivation theory. Nammyung, in his part, emphasized the coherence of attentiveness and righteousness(yi) and thereby established a tradition which, though based on the self-cultivation theory, took the righteousness theory seriously to confirm the standard of value necessary for the social practices of self-cultivation. Secondly, Toegye's program proceeds from intellectual activities of deliberation and distinction to self-cultivation, whereas Nammyung's starts from self-cultivation and ends at the social practice of the rule of right(wang-dao). Thirdly, it was a progressive way of reformation aiming at preparing the foundation for the peaceful future that Toegye endeavored to educate the young intellectuals with an intense focus on the self-cultivation theory. On the other hand, it was a radical way toleration no injustice that Nammyung demanded the government a drastic reformation criticizing its contradictory operations directly. Such points of difference provide us the background for understanding the facts that Toegye, having resigned from his official position, exerted himself on learning and self-cultivation and that Nammyung, though never acception an official position, kept raising social issues in a vigorous and strong voice. Different academic traditions of Toegye and Nammyung were closely connected with different attitudes toward the social realities of the times: endeavoring at self-cultivation vs. trying to save the world; providing education for the future vs. trying to realize the ideals in the present. Although the mild and moderate attitude and the strong and radical one are contrary, neither of them are subject to judgement of right and wrong. Rather, both are necessary, for well-balanced solutions can derived only from the harmony and compromise between the two most typical ways of response. By providing the universal truths to their times, the traditions of Toegye and Nammyung could establish themselves as the two main axes of the Neo-Confucian tradition of Choson and exercise extensive influence throughout the late Choson Choson dynasty. Their wisdom needs be re-appreciated as one of the most fundamental insights in our times: the wisdom of understanding the essence of the human hature, devising methods of cultivating human virtues, and seeing that the social order is possible only when founded on the human morality and managing a society only when those in ruling position are moral.
        12.
        2002.0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Nammyung(南冥) Cho Sik(曺植 : 1501∼1572), one of the most practical Confucian scholars in Chosun dynasty, was known to the general pubilc as a poet who loved Chirisan(智異山). Appreciating hi1ls and waters around beautiful Chirisan, he never regarded Chirisan as a simple target of elegant pursuit. While wandering around hills and waters, he did not wirte poems full of only taste and elegance. On the contrary. his pursuit on the reflection of life, the origin of life and contentment with poverty and delight in the Way was well expressed in his poems. The meanings of hills and waters that he described can be classified into four categories. First, he and natural scenery became as one body and show an enterprising spirit. Nammyung loved Doorusan(頭流山) and the grandeur of waterway in it and he expresses a valiant spirt using the magnificence of Chirisan. Second, Nammyung did not see hills and waters as only the target of appreciation but he saw the meaning of hills and waters as mirrors that reflect his feelings and society. Not only the beauty of hills and waters he searched his soul through them and turned natural scenery into reflection and self-examination that take people in adversity into account. Third. Nammyung shows his uneasy situation as a wander between conflict of his present situation and longing for hills and waters. Though he was always attracted by hills and waters, he never took himself away from the reality. Here comes discrepancy and conflict. Due to his emphasis on safety and honor, he aspired after nature and harbored himself. He, however, cared about how people lived and tried to take care of them according to Confucian teachings. Fourth, he was expressed as a poet who peacefully wandered aroud and devoted himself into the world of purity and no concern. Though Nammyung lived in poverty. what he pursued was to seek after truth without any public criticism. Hills and waters became pure and ideal space to realize such a life. The hills and waters of Chirisan which laid open to Nammyung was the space where he wanted to live and he materialized his desire in his poems.
        13.
        200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Gansong is a great scholar in Choson dynasty middleages. He was born in Haman county Kyungsang province depend in Nammyung school. However, He was educaded by three scholars belong to Tygae school from young age. Because his learning and personality was influenced from them strongly. especially from Yuheon. But he cannot help belonging to Nammyung school, for many Nammyung's disciple have resided in his hometown Haman and his wife's hometown moreover Nammyung's hometown Samga. Besides his father-in-law Nopa was the disciple of Nammyung's disciple Junginhong and he had be the chairman of Yongyam memorial hause. Though Gansong became a member of Nammyung school, he never has seceded from Tygae school. He has always play active part as both a member of Nammyung school and a member of Tygae school. Consequently his association span was very wide, and he made the best use of these circumstances. He has strained every nerve to mediate two schools. He was well-balanced scholar, so he has supported neither Nammyung school nor Tygac school. He adopted the good points of two schools and developed himself, became new own personality. Therefore he never have abtained a post in the government keeping his integrity. Though he has lived at seclusion, he has never forgotten nation and people. This point was influenced by Nammyung school. He has wirtten many prosees and poets, this point was influenced by Tygae school. His successors have regarded him as a member of Tygae school in order to uplit him. But this is not true. It is clear that he is both a member of Nammyung school and a member of Tygae school. His poet is very excellent, so deserves minutely study. If so, we can grasp him more crosely.
        14.
        200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 culmination of the culture in the Josun Dynasty was reached in the academic achievement of Sik Jo (pen name, Nammyung : 1501 - 1572). His work marked a moral boundary in academia at that time. When we consider his great fame, it was natural many scholars and his followers make him their scholastic and behavioral model. These followers formed the Nammyung School and they took active parts in politics in and out of government service until King Sunjo and Gwanghaegoon. But the execution of Inhong Jung (pen name, Rae-Am : 1536-1623), leader of the Nammyung School and mentor of Gwanghaegoon, served as a momentum for decentralizing the school at the time of The Enthronement of King Injo subsequent to dethronement of King Gwanghasgoon in 1623. Hongdo Ha (pen name, Gyumjae) then acted on behalf of the school when the school had lost its cohesion. The year 1728 witnessed the Moosin Year Disturbance led by Heeryang Jung, which was one of the loud cries raised by confucian scholars to regain the positions they had held before the Enthronement of King Injo. Moreover the Noron Party. the group of followers of Siyul Soug and also the party in power, forced the Namin Party, another party in this area, to support it, while it prohibited the Namins from taking any state examinations by law after the Moosin Year Disturbance had been subdued. The Noron Party designed to attract the Namin Party to their side by disturbing its cooperation with the Soron Party, the followers of Jung Yoon, a disciple of Siyul Song's. With the Noron Party's intricately planned policies and efforts, most pepole in the Namin Party in this area became part of the Toegye School in the end. This paved the way for combining the right side and the left side of the Nakdong River as a natural result. There were few eminent scholars or government officials in high positions from the right side of the Nakdong River. In the meantime many scholars had come to stand by either the Noron Party or the Toegye Schoo. But the majority of Confucian scholars' respect for Nammyung had not faded away and his books were still being published. King Jungjo finally granted Nammyung a Royal Oration for the Sacrificial Rite in 1796 and conferred government positions on his descendants after over a century of persecution. The royal edict triggered the revival of the scholastic trend in this area and built a promising foundation for thriving academic achievement in the 19th ecntu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