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에서 마립간기는 ‘新羅國王’으로 표방되는 지증왕대 이후 신라 사회의 급격한 성 장과 질적 변화를 추동한 시기이다. 특히 마립간기에 본격화된 영역의 확장은 신라 국가 성 장의 중요한 배경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자비·소지마립간 재위기에는 축성 기록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며 이는 당대 신라의 영역 확장 과정을 잘 보여준다. 신라 중앙의 의지와 계획에 따라 축성된 신라성은 신라의 영역을 실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유효한 자료이다. 또한 문헌사료에 기록된 성을 현재 남아 있는 성[城址]과 타당하게 일치시킬 수 있다면 신라의 영 역 확장과 그 운영 방식에 대한 더 구체적인 이해가 가능해진다. 자비·소지마립간기의 축성은 앞선 시기 영남권역을 확보한 신라가 소백산맥 일원까지 영역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축성 지역은 한강 (최)상류와 소백산맥 서북부 일원 에 집중되어 당대 신라 영역의 북서쪽 경계[北邊]를 반영한다. 각 성은 기본적으로 확대된 영 역의 방어를 위한 목적으로 축성되었으며 서로 가깝게 위치한 성은 긴밀한 관계를 이루며 일 정 권역의 방어체계를 형성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몇몇 성은 축성 지역 일원을 신라의 지 방으로 운영하는 거점의 역할[地方據點城]을 병행한 것으로 판단되며, 그러한 축성 목적과 역할에 따라 성의 입지와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간의 구성에서 일정한 차이가 나타난다. 5세기 후엽인 신라 자비·소지마립간기 축성의 가장 큰 특징은 石築山城의 본격화이다. 석재를 이용하여 높게 쌓은 체성벽과 이를 보강한 보축성벽, 현문식 성문, 성벽을 돌출시킨 (곡면)치성, 성벽 통과식 수구와 그 안쪽의 집수시설 등 공통적 구조를 갖춘 석축산성은 이 시기에 典型을 이루고 이후의 축성에서 탄력적으로 變容된다. 한편 신라 축성 사업의 원활 한 전개는 축성 지역의 親新羅化를 전제로 가능하다. 축성 지역의 재지세력은 신라 중앙의 축성 의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기 안전을 보장받고 발전의 동력으로 삼았다. 신라성에 인접한 대단위 고분군의 조영과 중심 고분의 高塚化가 이를 반영한다. 그러나 신라 중앙의 영향력 투사가 점차 심화되면서 지방의 신라 고분군은 각각 특정한 시점에 조영이 중단되며 이는 신라 지방 운영 방식의 질적 변화를 암시한다. 비교적 짧은 시기 동안 여러 지역에서 진행된 축성은 신라의 인적·물적 자원의 관리와 동원 체계가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축성과 같은 국가적 사업 의 수행을 위한 대단위 인력 동원은 신라 사회 구성원의 동질감과 정체성 형성의 주요한 계 기가 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당대 신라 축성의 결과인 보은 삼년산성 등 거대 석축산성은 신 라의 확대된 영역과 내적 역량을 과시하는 표상으로서 역사적 기념물의 의미를 함께 갖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글은 최근(2020~2023) 발굴된 부소산성 추정 서문지 일원 성벽에 대해 검토한 것이 다. 지금까지 부소산성 성벽 연구는 백제 성벽의 판축 구조물에 집중되었고, 백제~고려시 대 전체 성벽의 변천을 검토해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였다. 그러나 부소산에서 가장 중요한 백제 성벽의 구조와 공정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확립되지 못하였다. 이 같은 현황 속에 추정 서문지 일원에서 조사된 포곡식 백제 성벽은 구조와 공정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확보되 었고, 백제 멸망 이후에도 통일신라시대까지 사용된 현황이 새롭게 확인 되었다. 먼저, 포곡식 성벽 조사 결과 백제~통일신라 성벽의 축조 공정과 변화가 확인되었다. “1.포곡식 성벽 백제(1~2단계): 1)기반층 정지–2)기저부 조성층–3)성벽(판축·내외 보 강층)–4)성벽 내외시설(1단계 완료)–5)증축시설(2단계)” → “2.포곡식 성벽 통일신라(3~4 단계): 1)1차증축(3단계)-2)2차증축(4단계)” → “3.포곡식 성벽 페성(5단계)”순이다. 그리고, 백제 성벽의 세부 축조 공정은 “1)기반층(원지반) 정지-2)기저부 조성층–3)성벽 조성(①목주용 내·외 구 굴착 및 목주 등 판축 구조물 설치+②내외부 보강층→③체성 판 축→④판축 구조물 해체 및 설치+내외부 보강층+체성 판축 등 2~3회 반복)→4)성벽 내외 시설(내부 석축 배수로, 외부 구상유구)” 순으로 파악된다. 이를 통해 볼 때 백제 성벽 구조 는 “기저부[1)~2)]–체성부[3)]–성벽 내외시설[4)]” 등으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곡부구간의 2구역 성벽에서 1·2차 기저부층 중간에 ‘목주용 구와 할석 부 석, 석축암거 및 주변 석축, 체성 하부 다짐 및 외벽 일부 석축’ 등을 시설하여 유수 및 침투 수로부터 붕괴를 막기 위한 수준 높은 작업 공정과 기술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3구역 판축 성벽 내외벽면에서 점토+기와로 미장(피복) 처리한 현황이 확인되었고, 이를 통해 백제 토 축 성벽의 내외 벽면 마감 방식에 대한 새로운 기법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막성은 운봉고원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성의 평면 형태는 방형이며 둘레는 635.8m에 이른다. 성벽은 편마암 성돌을 장방형으로 가공한 후 바른층쌓기 방식으로 축조되었으며 협축식 축조기법과 보축성벽, 장방형 집수시설이 확 인되었다. 또한, 현문식 성문과 장방형의 치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유물은 6세기 중엽 이후의 신라 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아막성의 축성 방식은 같은 시기의 가야성과 백제성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가야성 은 주로 할석으로 쌓았으며 정교하게 가공된 장방형 성돌을 사용한 사례는 확인되지 않는 다. 백제성 또한 할석으로 축조된 체성벽과 개거식 성문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백제식 축성 법은 아막성 인근의 임실 성미산성과 순창 대모산성에서도 확인된다. 신라의 석축산성은 5세기 후반부터 등장하며 높은 체성벽과 세장방형 성돌, 협축성벽, 현문, 보축성벽, 곡면 치성 등이 특징이다. 이후 축성기법이 변화하면서 성벽의 높이가 점차 낮아졌으며 성돌의 형태는 장방형으로 변하였다. 7세기 중반에는 편축성벽, 지대석, 가공성 돌, 퇴물림쌓기 방식 등의 축성법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아막성은 6세기 중 엽에 축조된 신라의 산성으로 판단된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대가야 멸망 이후 빠르게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여 아막성을 축조하였다. 입지와 축조 시점을 고려할 때, 현재의 성리산성이 곧 아막성일 가능성이 크다. 이후 아막성은 신라의 행정체계에 편입되어 운봉현의 치소성으로 기능하였으며 운봉성, 또 는 모산성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아막성과 함께 소타성, 외석성, 천산성, 옹잠성 등 네 개의 성을 축조하였다. 운봉 고원 일대의 산성 중 가산리산성, 장교리산성, 양지산성, 할미성에서도 아막성과 유사한 신 라의 축성법이 확인되므로 이들 성이 아막성 전투에서 언급된 4성일 가능성이 있다.
그동안 통일신라시기의 산성은 성벽이나 문지, 집수시설 등을 중심으로 발굴조사 되었 다. 그 결과 성벽의 축조기법이나 조성 시기, 구조 등에 대해선 비교적 많은 자료가 축적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산성의 주체인 인간의 숙식 등과 관련된 건물지의 조사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편이다. 통일신라시기의 산성 내 건물지는 대체로 기단석을 갖추고 있으나 동 시기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가구식기단은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그리고 이 시기의 주요 난방 시설인 쪽구들 의 경우도 초석 건물지에서 발견된 사례가 거의 없다. 단적으로 전면 발굴조사가 진행된 광 양 마로산성의 경우 성주나 하급 관리, 병사들이 머물 수 있는 난방시설이 턱 없이 부족함을 살필 수 있다. 아울러 전술한 기단석의 위계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당시 광양 마로산성은 치소성이나 거점성으로 인식될 정도로 중요한 산성이었다. 그러나 성주나 관리, 병사들이 상주하기 위한 온돌 건물지와 성주가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 물지의 기단석 등은 쉽게 구별할 수 없다. 이는 결과적으로 산성 내 건물지가 일상생활을 영 위하기 어려운 구조였음을 알게 한다. 그런 점에서 향후 산성 외부의 건물지 조사에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전 시기에 걸친 축성 기록을 검토한 결과 고려의 축성 사업은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었는데 1기는 북방개척으로 시작된 청천강과 압록강 유역 진출과 거란과 여진과의 전쟁 과정에서 축성이 이루어졌고 윤관이 개척한 9진을 여진에게 반환하기까지 약 200년의 기 간이 포함된다. 이 시기는 먼저 왕건의 북진 정책에 따라 서경을 서도로 정하여 축성하고 서 경의 주변으로 진성이나 주현성을 배치하는 과정과 3차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과정에서 축 성, 그리고 동여진을 제압하기 위한 천리장성의 축조와 동해연안의 축성, 그리고 9진 개척 으로 요약되는 시기이다. 이것은 태조가 북방개척을 위하여 변경 지역의 요해처에 진성[鎭城]을 설치한 후에 주성 [州城]을 설치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후 993년부터 1018년까지 3차의 전 쟁을 치르게 되면서 축조된 성곽들은 대부분 흥화도(영삭진성, 태주성, 신도성, 가주성)·흥 교도(용강현성, 함종현성, 진국성, 안북부성, 진국성, 안정진성, 영청진성, 박주성) ·운중도 (운남현성, 성주성, 연주성, 운주성, 안수진성, 흥덕진성, 위화진) 등의 역로를 따라 위치하고 있어 거란이 개경으로 진출하려는 노선을 차단하고자 하는 것에 목표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성보조에 남은 성곽 축조 기사 중 동일한 성곽을 축조한 기사가 겹치는 것은 지역 의 사정에 따라 주성, 진성 등을 축성하였고 단순히 하나의 성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이 것은 조선 전기 지리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성곽이 축조된 위치에 따른 다면 평지성이나 산성으로 나누어 볼 소지도 다분하다고 하겠다. 2기는 금과 100년 간의 평화 시기 다음에 이어진 대몽항쟁기에 축조된 성곽이 축조된 시 기이다. 대몽항쟁은 해도입보와 산성입보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해도에 축성한 강화중성과 외성, 진도 용장성, 장도토성 등은 고려의 토성 축조 전통이 강하게 드러난 것으로 생각된 다. 아울러 몽골의 침입은 대규모 병력으로 장기간 이어지면서 대몽항쟁은 주현성을 중심으 로 치러졌고 이것은 횟수를 거듭하면서 몽골 기병의 장점을 무력화시키는 방안으로 대산험 지에 위치한 산성[주현성]으로 옮겨 대응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대몽항쟁이 주현 성에서 산성으로 옮겨갔다고 보는 것은 적절한 관점이 아닌 것은 주현성과 산성이라는 구분 이 일률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고려 북계와 동계의 방어군성은 대부분 산에 위치하므로 몽 골과의 전장은 처음부터 산성이었던 것이다. 또한 몽골의 침입을 맞아 산성이 대형화되었다 는 것도 고려 주현성의 둘레는 조선 읍성보다는 훨씬 컸던 것이 사실이고 군관민이 함께 입 보하여 항쟁하려 한 전략적 결정에 따라 산성의 둘레도 따라서 커졌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 다고 생각된다. 3기는 고려말 왜구의 침입을 맞아 연해주군의 군현성을 수축하거나 산성을 축조하여 방 어한 시기에 해당되며 대몽항쟁기 이래 전통적인 청야입보책을 시행한 결과이기도 하다. 고 려말 산성의 축조는 왜구가 해로를 장악하여 조운선도 약탈하는 지경에 몽골 침입 때와는 달리 해도입보라는 대책은 무용하게 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대몽항쟁기에 둘레 1,000보 이상의 대형 석축 산성이 아니라 500보 내외의 석축성으로 축조되는 경우가 많았 다. 이것은 대규모로 장기간 고려를 침공하였던 몽골군과는 달리 소규모로 자주 침공하였던 왜구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하여 선택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왜구의 침공이 시작된 경인년(1350)으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우왕3년(1377) 에 지방 산성 보수기사가 보이는 것은 그 동안 성곽을 수축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평지 에 위치한 군현성을 수축하여 왜구의 침공에 대비하였으나 우왕3년경부터는 산성을 수축하 여 입보하는 것으로 정책을 수정하였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평지축성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은 왜구의 침략이 시작된 경인년 이후 수축이 이루어진 군현성은 대부분 평지성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이때 수축된 군현성은 조선시대 들어 읍성으 로 편입되면서 읍성의 축조가 고려말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하여 상당한 수의 산성을 축조하여 운용하였던 것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된 산석성인데 석축을 강조한 것은 고려시대 토축 산성의 약점을 보완하여 석축성으로 축조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산성에 물이 부족하거나 물이 없다고 한 사례가 적지 않은 것은 장기적인 사용을 목적으로 축조된 것이 아니라 왜구의 침 입을 피하기 위하여 급히 축조하였거나 일시적인 입보를 위하여 수축하였다가 조선전기까 지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실린 읍석성 중에는 조선시대 들어 축조한 읍성과 고려말에 석축으 로 개축한 이후 읍성으로 사용한 경우도 있지만 고려의 군현성으로 축조된 것을 조선시대 들어 읍성 정책을 추진하면서 사정에 따라 편입한 것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고 여기에는 고려때 축조된 읍토성과 고려말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여 축조한 산성도 포함되어 있다. 이 러한 상황은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읍성이 있는 것으로 기록된 군현에 신증동국여지승 람에는 읍성이 보이지 않거나 산성 또는 고적으로 남게 되는 경우가 있어 고려말의 성곽 수축과 조선 개국 이후의 읍성 축조 정책을 반영한 결과로 생각된다.
백제 한성기 왕성으로 비정되고 있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성벽 축조기법에 대하여 살 펴보았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서로 다른 지형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성벽 축조기법에서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지면 지정과 기초성토에 의한 기저부 조성방식 등에서는 축조기 법의 공통점도 확인된다. 江岸 평지에 축조된 풍납토성은 자연제방의 구지표면을 정지하고 기초성토를 한 후 그 위에 판축틀(거푸집)을 설치하여 版塊를 축조하는 방식인 판축기법으로 축조하였다. 성벽의 구조는 중심토루와 중심토루의 내·외벽면에 덧붙여진 토루로 이루어졌으며, 판괴를 순차 적으로 덧붙여가며 축조하는 分段法에 의해 성벽이 완성되었다. 반면, 구릉과 평지가 복합 된 지형에 축조된 몽촌토성은 지형에 따라 축조기법의 차이가 엿보인다. 성벽 축조구간이 평지인 경우는 풍납토성과 같은 판축기법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구릉 지 역의 경우는 구릉의 자연 경사면을 2~3단의 계단상으로 깎아내고 그 위에 성벽을 축조하 였는데, 구간에 따라 다소 축조기법의 차이가 확인된다. 즉, 북서벽 구간은 판축틀을 설치 하여 축조한 양상이 확인되었고, 동벽 구간의 경우는 성토기법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판단 된다. 이렇듯 성의 입지에 따른 두 성의 축조기법상의 차이가 있지만, 축조기법상의 공통점도 확인된다. 즉, 지면과 성벽의 유동성을 억제하기 위해 성벽 기초부의 내측 혹은 외측에 해당 하는 부분의 지면을 얕게 굴착하여 끝부분이 돌출되게 지면을 지정하는 기법, 성벽 기초부 에 뻘 혹은 점질토를 이용하여 기초성토를 하는 방식, 기저부 보강 방법의 일환으로 토제를 시설한 것 등은 두 성에서 모두 확인되는 축조기법이다.
아차산 능선에서 가장 남단에 위치한 홍련봉 2보루는 평탄지(고대지)와 함몰지 2개의 지 형으로 구분되었으며, 함몰지의 협축성벽은 남한지역의 다른 고구려 보루에서는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은 독특한 구조로 주목된다. 대부분의 고구려 보루들은 산 정상부에 따로 내벽 을 쌓지 않고 한쪽 벽을 쌓는 편축식의 성벽을 갖고 있으나, 홍련봉 2보루의 경우 절반은 편 축, 나머지 절반은 협축식으로 축조하는 독특한 형태이다. 남한지역 고구려 보루의 석축성벽은 규모나 축조된 곳의 지형에 따라 일부 차이는 있으 나, 기본적으로 유사한 형태의 구조를 갖는다. 양주분지와 한강일대 소규모로 축성된 보루 의 성벽은 지형에 맞춰 산 정상부를 원형 또는 타원형으로 두르는 형태인데, 크게 기초부, 토축부, 석축부로 나눌 수 있다. 즉 기저면 조성층에 석축성벽과 함께 사질토를 층층히 쌓아 뒷채움 하여 편축식으로 성벽을 축조를 한다. 하지만 임진강유역의 강안평지성은 협축식 성 벽으로, 소형의 보루들과는 다소 구분되는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하지만 협축으로 조성된 차이만 있을 뿐, 기본적인 구조는 한강유역의 다른 보루들과 같이 기초부, 석축부, 토축부로 구분되어지는 형태를 보인다. 홍련봉 2보루의 평탄지는 다른 보루들과 마찬가지로 토축부를 조성하며 대지를 조성하 고 석축성벽을 편축식으로 조성하는 형태이다. 하지만 함몰지에 축조된 협축성벽은 다른 한 강유역 보루들의 성벽과는 구분되지만, 임진강유역의 강안평지성과 같은 방식으로 협축성 벽이 축조되어졌다. 즉 홍련봉 2보루 함몰지의 협축성벽은 강안평지성과 같은 토축부+내· 외석축벽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협축성벽의 외벽은 영정주를 기준으로 수직에 가깝게 석 축부와 토축부를 같이 올렸다. 특히 내벽은 자연 경사도를 주어 안정적인 각도로 석축을 올 렸으나 외벽은 나무기둥과 석축으로만 마무리한 점, 토축부에서 횡장목은 확인되지만 판재 를 설치하기 위한 종장목은 확인되지 않는 점을 볼 때 토축부는 종장목과 협판 없이 석축이 판재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홍련봉 2보루의 성벽은 다른 보루들과는 다소 구분되지만, 임진강 일대부터 한강 유역까지 조성된 다른 보루나 평지성들과 같이 동일한 형태의 축조방식이 적용된 것이다.
불암산성은 관련 문헌자료가 전무한 상태에서 그간 단편적인 지표조사를 바탕으로 산성 의 축조시기에 대해 단편적인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축조주체에 대해 삼국시대 신라, 백제, 고구려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어 불암산성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혼란을 주고 있는 실정이다. 본 고에서는 최근까지 조사된 불암산성의 축조수법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산성의 성격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불암산성의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축조는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편축기법으로 쌓았으며, 방형․장방형의 화강암석재를 치석하여 바른층쌓기로 축조하였다. 일부 구간에서 기단보축이 축조되었으며, 현문식으로 축조된 남문지가 확인되었다. 이런 축조수법은 서울․ 경기 지역에 분포하는 삼국시대 산성에서 다수 확인된다. 특히 불암산성이 위치한 불암산은 양주․포천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교통로상에 위치하고 있어 이를 통해 방어체계를 형성하였 음을 알 수 있다. 다만 230m의 내외의 소규모 산성으로, 집수지 등의 성내 수원이 없으며, 해발고도는 낮으나 험지에 축조되어진 점 등을 종합할 때 소규모의 병력이 주변지역을 관측 하고, 상황 발생 시 남과 북의 상황을 전달하는 통신(봉수)의 역할적의 침입시 배후를 공략 할 수 있는 전략적 기지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더불어 산성내 정상부 목 곽고와 수혈 내부에서 향로 뚜껑과 훼기가 이루어진 편병 등이 수습되고 있어 군사적인 목 적의 산성으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산성의 기능에 일부 제의기능이 추가된 것 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In Korea, the occurrence frequency of earthquakes has recently increased, compared with the past. So, the various damages for cultural properties due to earthquake can be expected, and especially fortress structure is vulnerable to earthquake. Therefore, the resonable seismic characteristics evaluation is required to secure the safety for fortress structure with the various construction and configuration types. Also, we should consider the various applied load conditions as design variables. To this end, this study classifies fortress structures according to the construction and configuration types, and then applies the discrete element method to model and analyze fortress structures. Finally, the seismic characteristics is evaluated through slip condition due to the analysis results considering the various design variables.
증평 이성산성은 토축산성으로 남성과 북성이 이격하여 축조되어 있어 입지적인 약점을 서로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백제산성의 특징 중에 하나인 모자성에 해당한다고 하겠으나 두 城모두 내성과 외성을 갖추고 있는 특이한 유형에 속한다고 하겠다. 북성의 전체 둘레는 내성 219m, 외성이 310m로 내외성의 공유벽 100m를 포함하여 전체 둘레는 429m이다. 南城은 이성산 정상부를 에워싼 테뫼식산성과, 계곡을 포함한 포곡식산성이 부가된 복합식산성으로 테뫼식산성의 둘레는 741m이고, 포곡식의 외성은 1,052m으로 내·외성 공유벽 191m를 제외하면 전체 둘레는 1,411m에 달한다. 남성의 체성 축조기법은 성토기법을 기본으로 하되 부분적으로 유사판축기법이 채용되고 있으며, 북성은 남성 보다 유사판축기법이 좀 더 많이 채용되면서 판축기법도 관찰되고 있어 남성 보다 발전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고 하겠다. 기저부 조성에 있어서 성토층의 유동성을 억제하고 안정화시키기 위하여 목주를 시설한 점과 암반 외벽 경사면에 성토층의 접착력 감소를 최소화시키기 위하여 길게 홈을 파서 기저부 성토층과의 밀착력을 높이기 위한 시설은 새롭게 확인된 것으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특히, 남성과 북성 모두 체성 축조에 있어서 벽심을 시설하여 이에 의지해서 축성해 나간점과, 남성 서벽에서 확인된 표토블록의 사용 사례는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토성축조기법에 있어서의 다양한 축성방법 중의 하나가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영정주와 협판을 사용하지 않고 성벽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벽심이 협판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에 유사판축에 의한 축성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토성 축조에 있어서 판축기법이 보급되기 이전에 축성공정을 앞당길 수 있는 중요한 시설이라 하겠다. 남성 서벽에서 확인된 표토블록은 외벽 벽심을 내향하여 사직선으로 보축하여 형성한 중심토루를 보강한 것이라 하겠다. 표토블록은 유사판축이 판축기법에 준해서 목봉으로 다지기 때문에 이 압력으로 중심토루가 뭉개지거나 내려않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설한 발전된 축성기술의 하나라 하겠다. 중심토루를 토괴(土塊)로 보강하고 이 중심 토루에 의지해서 유사판축으로 토성을 구축한 사례로 지탑리토성이 주목되며, 증평 이성산성 보다 선행한다고 판단되어 어느정도 계통성을 살필 수 있는 성곽유적이라고 하겠다. 앞으로도 점토괴나 표토블록을 사용한 토성의 조사사례가 축적되어 비교 검토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토성 조사과정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성토법, 삭토법, 판축법 외에도 다양한 축조기법이 확인될 가능성이 있음에 유의하여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진하해수욕장 서편 야산 구릉에 위치한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은 임진왜란 시기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 의해 축성되었다. 서생포왜성은 남․동해안 각지에 현존하는 30여개의 왜성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뛰어나 왜성 연구의 최적지가 되고 있으며 임란 중 사명대사가 가토 기요마사와 4차례에 걸친 평화교섭을 진행하여 많은 외교적 성과를 거둔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임진왜란 직후부터 1895년까지 약 300년 동안 조선 수군(水軍)의 동첨절제사영(同僉節制使營)으로 사용되었기에 근세기 한일간 축성법의 비교연구뿐만 아니라 성곽이용방식에 대한 상호 고찰도 가능하다. 이에 본 연구는 지금까지 주로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진행되었던 서생포왜성에 대한 조사연구를 진행함으로써 일차적으로는 왜성의 성곽구조와 체성 축조기법상의 특성을 밝히고 이차적으로 한국성곽과의 비교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연구방법으로는 일차적으로 문헌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토대로 현장실측조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입지 및 평면형태, 성곽 내부의 공간구조, 虎口와 해자 등의 방어시설물, 체성 및 隅角部축조수법, 성벽의 기울기 등 서생포왜성의 제반 특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 40호로 지정되어 있는 기장읍성은 조선시대의 읍성축조수법이 정형화된 형식으로 정리되기 이전에 축조되어 고려시대 성곽 축조수법과 조선의 읍성축조수법이 혼합되어 성곽축성사에 있어 읍성축조수법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기장읍성에서 확인되는 사직선기단의 축조는 과거 고려시대말까지 계속 축조된 판축토성(版築土城)의 기단부 축조방식을 읍성축조에 적용한 결과로 고려 판축토성에서 조선시대 석축성인 연해읍성의 축조로 이어지는 흐름의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다. 기장읍성 동벽 체성부에서 확인되는 세장방형 외벽면석 축조수법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조선시대 읍성의 장대석 입수적 축조수법과는 차별성을 지닌다. 기장읍성 남벽과 동벽 체성부 기저부 축조수법은 김해읍성, 웅천읍성, 동래읍성, 고성읍성 등에서 확인되는 지대석 설치 이전에 바닥에 판석을 이용하여 바닥면의 수평을 맞추어 정리된 구조물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축조수법이 사용되기 이전 시기에 축조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기장읍성은 사직선기단축조수법, 체성부 세장방형 외벽면석의 사용과 더불어 고려시대의 성곽축조수법과 조선시대 연해읍성 축조수법이 혼용된 과도기적 읍성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