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8

        1.
        2022.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중국의 장의예술은 보수성을 띄며 전례를 중시하기에 다른 예술장르에 비해 민족성과 지 역성이 아닌 시대와 사회 변화에는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북송 말엽 화북지역에 집중적으로 축조되기 시작한 벽화고분은 전례 없는 특이점들을 보이게 되는데 이 와 같은 변화의 원인으로 벽화고분의 주요 주문자인 묘주층의 사회적 신분 변화가 지적된 바 있다. 송대 이후 성장한 부유한 중간계급은 기존의 상류계급 전유의 고급문화를 선호하여 벽 화고분 축조를 주도했지만, 형식상의 전례를 따르지 않고 벽화의 구성과 양식을 취향에 맞게 변화시키는 등 자기화하였다. 북송대 이후의 신흥 묘주층은 벽화고분의 형식을 바꾸어 놓았 을 뿐 아니라 벽화고분이 사회적으로 인식되고 이용되는 방식도 바꾸어 놓았다. 이 점에 있 어 북송대 벽화고분은 새로운 사회적 가치가 형성되는 시대적 환경 속에서 어떻게 다르게 이 해되고 받아들여졌는가를 살펴볼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본 연구는 북송대 벽화고분의 특징을 가장 잘 보이는 벽화 속 <宴飮圖>를 집중 분석하여 이 시대의 벽화고분이 오대 이후 급변한 사회를 반영하는 방식을 살펴보고자 했다. 본 논문 이 주목하는 <연음도>는 묘주부부가 한가로이 연회를 즐기는 장면으로 단순히 벽화를 구성 하는 하나의 도상일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묘주의 정체를 명확히 하고 그들의 내세생활을 대변하는 벽화의 중심 주제로서 기능하였다. 따라서 그 세부 표현에 있어서는 묘주의 신분과 사회적 위치가 강조되며 사자의 특권으로서 현실에서 보기 힘든 신비로운 광경들이 연회의 장면으로 연출되곤 하였다. 그러나 북송대 고분벽화에서의 <연음도>는 묘주의 표현으로부터 전반적인 분위기에 이르기까지 이전시대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그 차이는 ‘세속성’ 의 강화로 요약되며 이는 묘주인 중간계급이 벽화고분 축조와 사용에 투영한 그들만의 바람 을 반영한다. 본 연구는 북송대 고분벽화 속 <연음도>에서 세속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 현되는가를 분석하고, 그것이 벽화고분이 오랜 전통으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사회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근본적인 요소로서 작용했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6,600원
        2.
        2016.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퓌비 드 샤반느는 1895년-1896년 보스턴 공공 도서관을 위해 벽화 9점을 제작, 설치 했다. 보스턴 공공 도서관에 설치된 <계몽의 천재를 환영하는 뮤즈들>과 <시, 철학, 역 사, 과학> 벽화는 퓌비의 벽화 작품 가운데 미국이 소장하고 있는 유일한 공공 벽화이 며, 프랑스 벽화의 미국 정착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프랑스 아카데미의 중심에 있 던 퓌비 벽화의 개념, 양식, 기법 등은 두 가지 경로로 미국 미술가들에게 전파되었다. 퓌비의 벽화 미술은 첫째, 파리에서 유학한 학생들이 직접 접한 경험과 둘째, 보스턴 공 공 도서관 벽화를 통해 전파되었다. 특히 보스턴 공공 도서관 벽화 구성법은 미국 미술 가들에게 유럽 대륙으로 가지 않더라도 에콜 데 보자르식의 벽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서 인물 구성, 테마의 적용, 알레고리와 상징의 사용 등 많은 영향을 끼쳤다. 미국 벽화가들은 퓌비 벽화의 알레고리 재현 방식을 따랐다. 퓌비의 알레고리 회화 들은 1846년과 1848년 두 차례의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서 본 이탈리아 미술의 영향 때 문이다. 초기 아메리칸 르네상스 벽화가들은 창백한 톤, 평화로운 아카디아 풍경, 주름 옷을 입은 인물 등에서 퓌비의 테크닉을 따라했다. 퓌비는 보스턴 공공 도서관 벽화를 의뢰받았을 때, 벽화를 구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에 대해 고민했다. 퓌비는 토머스 에디슨이 발명한 전기가 미국에서는 가장 중요 한 요소라고 보았다. 퓌비는 바로 이 전기가 가장 미국적인 발명품이라는데 공감했으 며, 보스턴 공공 도서관 벽화에서 미국의 산업과 테크놀로지를 통한 미국적 가치관을 강화하고자 했다. 미국 벽화가들은 퓌비가 묘사한 테크놀로지 테마에서 고전주의가 아 닌 현실을 묘사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으며, 미국의 산업 발전에서 미국적 정체성을 발견했다.
        5,800원
        3.
        2016.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아메리칸 르네상스 벽화에 드러나는 와스프 계층의 타자화 전략과 그들의 지배 이 데올로기를 이민의 급증이라는 사회적 문맥 내에서 고찰한 연구이다. 1880년대 이민의 급증으로 사회적 위기의식을 느낀 와스프 계층은 와스프 문화를 지키는 과정에서 그들 문화의 범주를 지형 학적으로, 인종적으로, 종교적으로 제한했다. 이 시기 아메리칸 르네상스 벽화들은 와스프 지배층 의 지배 이념과 이상을 포함하고 있으며, 와스프 계층은 이 벽화들을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 하려 했다. 다문화주의로 변화하는 시기 아메리칸 르네상스 벽화들은 와스프 계층의 상반된 두 가 지 전략을 보여주었다. 한편으로는 이주민들을 자신들의 영역에서 분리해서 자신들만의 공적 영 역을 강화시키는 방식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회유와, 설득을 통해 자신들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7,000원
        4.
        2014.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도시벽화의 역사적 의미와 유형을 고찰하고 국내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2006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시행된 7개 사례 지역 벽화를 대상으로 유형, 제작기법과 주제, 그리고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특성을 분석하고 특징과 경향, 문제점을 도출하여 지역재생을 위한 벽화사업의 개선 방향 제시를 목적으로 하였다. 지역재생을 위한 벽화는 개선된 환경을 제공하고, 지역주민들에게 소속감과 자긍심을 부여하며, 이를 계기로 문화적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여러 가지 연계활동과 사업으로 확대되어 지역의 재생은 물론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게 된다. 그러나 사례분석에 의하면 이러한 목표를 일부는 달성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도시벽화는 소통의 매개체로써 주민조직이 주체적으로 추진하고 행정은 지원자의 역할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또한 벽화는 경관과 주변 환경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적절한 벽화 주제 선정과 기법의 차별화로 지역의 장소성과 당대의 정치적·사회적 정체성을 표현하도록 해야 한다.
        5,100원
        5.
        2012.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중국 위진 시기 고분벽화는 한대 고분벽화와 화상석과 더불어 중국 고대 회화의 발전을 볼 수 있는 중요한 회화자료이다. 동북과 하서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는 중국 위진 벽화고분의 연원을 고찰하기 위하여 본문에서는 두 지역에 벽화고분이 나타나기 시작한 신망에서 동한 전기의 벽화고분부터 시작해서 동한 후기-서진의 벽화고분까지 그 출현과 발달 및 전개과정을 같은 시기 다른 지역의 벽화고분들과의 상호관계를 고려하면서 정리하였다. 먼저 동북과 하서지역에 처음으로 벽화고분이 등장하는 신망-동한 전기의 요녕 대련 영성자 한묘와 감숙 무위 한좌 오패산 한묘를 통하여 서한부터 낙양, 장안 등지의 벽화와 화상석에 보이는 鎭墓辟邪, 引魂昇天을 반영한 제재와 승선관이 이미 신망-동한 전기에 동북이나 하서지역으로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동북지역 고분벽화의 출현에는 중원지역에서는 신망-동한 전기부터,관중지역에서는 서한 후기부터 나타나는 생활풍속적 제재의 전파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보인다. 동시에 내몽고나섬 서북부와같은 북방지역의 동한 후기 벽화고분과도 벽화제재와 표현에서 유사한 특징을 공유한다. 동한 후기에 와서 동북, 내몽고, 하서를 잇는 북방지역이 벽화고분 축조의 중심지로 되면서 벽화문화권이 형성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서지역의 동한 후기-서진의 벽화고분은 무위, 주천, 돈황 등에 분포되어, 요양에 집중된 동시기 동북 벽화고분보다 다양한 발전양상을 보여준다. 하서지역 위진벽화고분은 연원을 해당 지역한대고분에서 찾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남, 관중, 섬북, 산서지역 한대 벽화고분과 화상전고분과의 다양한 교류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요녕 조양 원대자묘 벽화는 요양지역 벽화고분에서 보이지 않던 여러가지 새로운 제재들이 출현하는데 1세기 앞선 요양지역의 벽화고분과 다른 벽화 제재들이 외부로부터 유입되어 고분의 벽화 구성에 영향을 미쳤음을 말해준다. 四神, 力士, 狩獵과 같이 요양지역에 등장하지 않은 제재들의 전파경로를 살피면 대체로 하남, 섬서 지역(서한 후기)에서 북방과 하서지역(동한)으로 전파된 양상을 관찰할 수 있다. 감숙 주천 정가갑 5호묘의 벽화의 제재와 구성 배치는 신망-동한 전기 하남지역에서 발달한 궁륭형 천장을 가진 전축분의 특징과 유사하며 고구려 벽화고분과도 친연성이 보인다. 고구려와 하서지역 고분벽화의 친연성은 서한 이후 벽화문화의 전파과정과 동한 후기부터 북방지역을 따라 형성된 벽화문화권의 교류가 그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위진 벽화고분의 연원에 대한 고찰은 3-4세기에 벽화고분이 조성된 동북과 하서지역만이 아니라 그 이전인 한대부터 각 지역별로 발달한 고분벽화 및 화상석의 특징과 지역 간 상호 교류 관계를 보다 깊이 있게 고려하면서 폭넓은 시각으로 조망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동북·하서 지역의 시기별 벽화고분의 연원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의 단순한 전파과정이 아니며 다양한 지역적, 시기적 편차를 가지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달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중국 위진 벽화고분보다 더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고구려 벽화고분의 연원은 인접한 동북, 하북, 산동만이 아니라 보다 시야를 넓혀 중원, 관중, 북방, 하서가종축과 횡축으로 연결된 교류 상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8,700원
        6.
        2010.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n this paper, I examine the development of the second stage of Chicano muralism and compare it with the first stage of the Chicano Mural Movement that was born out of the Civil Rights Movement. I then discuss the different aspects of the first stage in relation to the birth of institutionalized public art and question how Chicano murals influenced public art and, conversely, how mainstream public art transformed some of the attitudes and practices of Chicano muralism. Chicano murals initially functioned as a political mouthpiece for Chicano’s human rights and as a tool to recover the Chicano people’s cultural pride and legacy. However, the murals gradually developed into public art projects supported by the city or federal governments, who regarded them as an economic way to effectively communicate with the community. In this process of institutionalization, muralists became increasingly concerned with aesthetic quality and began to work more systematically. For example, amateur artists or community participants who produced the earlier murals were transformed into mural experts. Chicano essentialism and the politically volatile themes used previously were phased out and the new murals began to incorporate diverse subjects and people, for example, native culture, Blacks, and women. This phenomenon reflected the changing emphasis on multicultural understanding. This kind of institutionalization did not always draw positive results. Inadequate funds were the primary concern over the actual subject and creation of the mural work. Artists reduced the strong political metaphors and aestheticized the mural forms. However, their work was productive as well: thorough research on wall conditions and painting techniques was conducted and new processes and designs were developed. This paper examines the murals created for the 1984 Los Angeles Olympic Games, Judy Baca’s works, and the Balmy Alley Mural Environment project in San Francisco’s Mission District. Works by Las Mujeres Muralistas in Mission District, in particular, show case colorful patterns and the Latin American indigenous culture, exploring new interpretations of old icons and design. They challenged the stereotypical depictions of females and presented alternative visual languages that revised the male-centered mural aesthetics and elaborated on the aesthetics of Rasquachismo.
        6,300원
        7.
        201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공연에서는 오랜 역사와 전통문화 속에서 이상을 실현하는 한국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그 가운데 ‘평화의 땅’은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과 강서대묘에서 나타나는 무용도, 사신도, 인면조를 재해석하여 공연한 부분은 많은 관심을 받았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구려 시대 ‘옛 무덤의 벽에 그린 그림’을 말하는데 약 3세기말에서 7세기 전반까지 만들어졌으며 벽화의 내용, 구성 방식, 표현 기법에서 고구려인의 기질과 그들의 기상 그리고 많은 문화적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므로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고구려 고분벽화를 내용으로 하여 재해석한 공연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나타내었다. 본 연구는 고구려 고분의 무용총과 강서대묘 벽화인 무용도, 사신도, 인면조와 ‘2018 평창동계올림픽’ 공연에서 현대적으로 재현된 무용도, 사신도, 인면조를 비교하여 논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고구려 고분벽화의 변화와 표현을 알아보고 무용총과 강서대묘 벽화의 주된 표현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리고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공연 가운데 ‘평화의 땅’에서 무용도, 사신도, 인면조가 현대적으로 어떻게 재해석되고 있는지 그 표현들을 논하였다.
        8.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曺植의 晩年 講學地인 山天齋에는 3점의 벽화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벽화는 여타 선유들의 강학 공간에서는 보기 힘든 것으로 퍽 이채로운 유물이 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벽화의 所從來에 대하여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언급한 글을 접하지 못하였다. 필자는 평소 남명의 풍도에 감화를 받아 선생이 남긴 글 들과 참고 자료를 읽고 선생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장소를 답사하는 가운데 우 연히 그 벽화의 소종래에 대한 심증을 얻게 되었다. 仁祖反正과 함께 찾아온 北人의 몰락으로 그들의 地域的, 師承的 근거가 되었 던 江右 지역은 200년 가까이 출사길이 막혔고 그로 인해 학문이 침체되어 있 었다. 그러던 것이 1796년에 내려진 正祖의 賜祭文을 기점으로 하여 이 지역에 학문이 불이 일듯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의욕적으로 다시 일어난 남명에 대한 文廟從祀 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賜祭文碑 건립과 함께 山天齋의 재건 이 이루어졌다. 산천재 벽화는 1818년 산천재의 중수 때 강우 유림들이 四聖賢遺像을 환봉 한 것과 함께 그려진 것으로 필자는 추측한다. 이 벽화에 그려진 인물은 商山四 皓, 巢父・許由, 伊尹이고 그 소종래는 바로 정조의 사제문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정조의 사제문에는 정조의 깊이 있는 남명관이 잘 나타나 있는데 이 것이 江右 유림에게 있어 당시의 현실에서 남명을 선양하기에 시의적절한 계기 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산천재 벽화의 연원은 결국 남명의 사상에 맥이 닿 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