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 목적은 북한의 사회복지제도화 초기 단계의 역사적 동학을 추적하여 북한사회복지의 태동 배경과 요인을 규명하는 것이다. 본 연구의 분석범위는 해 방 이전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활동기간을 중심으 로 한다. 본 연구방법은 역사서술적 접근을 통한 문헌연구방법을 통해 분석하였 다. 분석결과, 첫째, 각 독립운동 단체와 단체, 계열과 계열 사이의 연결성에 이 은 상호성과 인과성은 비교적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제강점기 동안 각 독립운동 단체들은 독립운동과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이 공존했다. 둘째, 마지막 으로 북한의 경우 사회주의계열의 복지정책을 이어받아 이를 적용하고 노력한 흔적이 확연히 나타났다. 북한은 정권 초창기부터 사상적 배경을 기반으로, 사회 복지정책을 도입하고 적용하고자 노력했고 이는 무엇보다 사회주의계열의 복지 정책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This study investigated the initial capital trend of newly-established fisheries companies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The initial capital size of fisheries companies provides information about the viability of the fisheries companies as well as the utilization intensity of fisheries resources. According to the analysis results, the average initial capital size of fisheries companies was larger in the enforcement period of “Chosun Company Ordinance” than in its abolition period. The initial capital size of the Chosun-capital fisheries company was smaller than that of the Japanese-capital fisheries company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The number of new fisheries companies funded by Chosun capital was less than the number of new fisheries companies funded by Japanese capital. Therefore, it could be seen that the Japanese fisheries companies had stronger dominance in the fisheries sector than the Chosun fisheries companies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and that Japanese fisheries companies were more viable than Chosun fisheries companies.
실제로 체험해보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감옥 체험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설이나 영화, 드 라마 등을 통해 감옥에 대한 간접 체험을 하게 된다. 더운 여름철 감옥이라는 폐쇄된 공간은 이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좀 더 넓은 공간, 시원한 물만을 찾는 욕망의 존재로 전락시킨다. 욕망만이 남은 공간에서 민족적이고 이념적 사유는 불가능해지고, 개인적이고 육체적인 경험만 남게 된다. 한편 수감자 중 병에 걸린 환자들을 별도로 수감하는 병감을 배경으로 하는 「무명」의 재소자들은 시기, 질투, 탐욕 등 욕망만 남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태형」, 「물」, 「무명」의 작가인 김동인, 김남천, 이광수 3 인은 모두 일제강점기에 수감 생활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글은 일제강점기 감옥을 배경으로 수감 자들을 형상화한 「태형」, 「물」, 「무명」을 대상으로 과밀 수용과 기본권의 침해, 일본의 통제와 작품의 인물들이 순응하는 양상, 이기적인 태도를 극복하고 집단적 연대를 이루는 과정 등을 비교 연구하였다.
The palace byeoljeon(別殿), the King’s non-ceremonial space, were created as a space for the king to comfortably use and for the king to do what he wanted to do. The byeoljeon housed various types of spaces and were flexible in that they could be repurposed to meet the demands of the times. Nevertheless, their characteristic as palatial building created for the King’s convenience has remained unchanged. In this study, we examine the process by which such royal spaces were created by focusing on the reconstruction of the Changdeokgung Huijeongdang during Japanese occupation period, with a view to continuity and the transformation process. The reconstruction of Huijeongdang at the time may be considered along internal and external characteristics. Internally, Huijeongdang connected the symbolism of the king’s space as the palace byeoljeon. Externally, Huijeongdang is characterized by its mixture of traditional and western style, where western style structures were housed within traditional buildings. The plans for the block of Huijeongdang also included the coexistence of traditional building, western style building, and mixture of traditional and western style building. This reflects the characteristic continuity of the byeoljeon as well as the architectural techniques of the time, manifested together within a specific spatial block.
연속적인 맥락에서 보이는 아름답거나 흥미있는 현상, 자연특질에 있는 장소를 ‘경승’ 또는 ‘승경’이라 한다. 또 승지, 승구, 승소, 승적과 유사한 의미로 ‘명승’이라는 단어가 주로 사용된다. ‘명승’은 동양의 대표경관으로 현재 중국, 일본, 대만, 남‧북한이 지정 관리하는 문화재의 한 유형이기도 하다. 한반도 명승의 최초 유행은 그동안 중국에서 유래된 소상팔경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상팔경도는 북송시대 송적이 그리기 시작하여 널리 유행하여 명승을 소재로 한 산수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팔경문화는 많은 문인과 화가들에 의해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명승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다. 한국의 팔경은 명승을 바탕으로 이를 향유한 계층인 고려 후기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받아들이면서 선계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부터 ‘송도팔경’과‘신도팔경’등이 유행하면서 승경을 팔경화하는 고유 팔경의 전통이 확립되었으며, 이것이 우리나라 명승의 시작으로 인정되어 왔다. 이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시대의 일반적 현상이라 취급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명승이 여말선초에 유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면 최초의 명승 개념은 어디서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또 다른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제는 우리나라에 전래되고 유행한 명승에 대해 다양한 역사적 맥락에서의 심층적 고찰이 요구된다.
근대기 국가차원에서 법령이 마련된 것은 1933년 조선명승고적천연기념물보존령에서 출발한다. 그 후 우리나라 명승은 1946년 북한이 먼저 자체 법령으로 분리되고 1962년 문화재보호법으로 남한이 자체의 법령을 배포함으로서 최초의 자주적 법령체제가 완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후 2006년에 문화재청에서 명승지정보호 활성화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전까지 1970년에 최초로 지정된 명승은 국보나 보물, 사적 등의 보존관리에 치중하던 문화재정책으로 인해 국민적 공감대를 얻지못하고 성숙되지 못한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한 채 유지되어 왔다. 명승 문화재를 지정하던 초기에는 사적과 차별적인 다른 문화재 주변의 자연환경을 포함한 대면적의 문화재라는 개념을 반영하는데 그쳐 과거 전래명승에 대한 자료수집이나 현장조사 등 과거 우리 명승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또한 집경형식의 연속경관 형식을 취한 팔경은 국토개발로 인해 단절되고 파편화되어 명승의 대표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한반도내 명승은 조선시대에 와서 크게 유행했으며 일제강점기에도 일부지식인층이나 일본인들에 의해 명승 관련 정보가 끊임없이 생산되었던 동양 고유의 문화경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해방이후 6.25동란을 겪으면서 점차 그 수가 사라져갔고 1970년 최초의 명승이 지정되기 시작한 시기에는 전래명승에 대한 기록이나 정보가 명승 지정시 반영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본 연구는 한국 명승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역사적 접근으로 한반도내 유행했던 지식인층이 저술한 명승관련 문헌자료수집과 분석을 통해 한국명승의 개념 확립과 변화 과정 속의 나타난 특징을 발견하는데 기초자료 구축을 목적하고 있다. 연구방법은 시대별 사회 지식인층이 작성한 문헌자료의 내용분석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주요내용을 기술하였다.
먼저 고려시대에 나타난 명승에 대해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는 불교국가로 많은 사찰들이 건립되어 명성을 떨쳤지만, 원림을 중심으로 한 정원문화와 명승을 유람하고 감상하는 활동도 유행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시대 현전하는 기록이 많지 않아 자세한 경향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조선시대 명승 문화가 발달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기정사실이다. 고려시대 문인들이 명승을 유람하고 유람기 등으로 남긴 기록을 여럿 확인할 수 있고 그중에서 금강산은 당대 최고의 명승으로 회자된 것으로 보인다. 그 중 대표적으로 지순(至順) 2년(1331, 충혜왕1) 2월에 안축(安軸)이 쓴 『근재집 』 권1, 의「경포신정기(鏡浦新亭記)」에 명승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오늘날 경포대는 관동팔경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경관미를 자랑하는 곳으로 평가된다. 그렇지만 처음 경포대가 건립될 당시에는 사실상 무명의 공간에 불과했고 고려시대 일반적인 사람들은 금강산과 총석정만을 명승으로 손꼽았다. 안축에게 태정(泰定) 병인년(1326, 충숙왕13)에 지금의 지추부학사(知秋部學士) 박숙(朴淑) 공이 관동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경포대에 정자를 짓고 기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는데 박숙은 영랑의 정자터가 있었던 곳에 정자를 다시 짓고 이 곳의 장소성을 부각시켰다. 이 사건은 고려시대에 명승적 개념에 입각한 사고의 기록이라는 것에 의미를 두게 한다.
안축의 명승에 대한 개념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천하의 사물 중에 대체로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이치를 담고 있다. 크게는 산수, 작게는 조그마한 돌멩이나 한 치의 나무에 이르기까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없다. 유람하는 사람들이 이 사물을 둘러보고 흥취를 붙이고 이를 통해 즐거움으로 삼으니, 이것이 누대와 정자가 만들어진 까닭이다. 형상이 기이한 것은 드러나는 곳에 존재하여 눈으로 완상할 수 있고, 이치가 오묘한 것은 은미한 곳에 숨어 있어서 마음으로 터득한다. 눈으로 기이한 형상을 완상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모두 같아서 한쪽만을 보고, 마음으로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는 것은 군자만이 그렇게 하여 그 온전함을 즐긴다. 하고 그 가치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명승경관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 내용도 나타난다. 경포호(鏡浦湖)는 맑고 깨끗하여 바람 따라 잔물결이 찰랑거렸다. 멀리 있는 산은 골짜기가 천 겹이어서 구름과 이내가 아득하였고, 가까이 있는 산은 봉우리가 십 리에 뻗어 초목이 푸르렀다. 항상 갈매기와 물새가 나타났다 잠겼다 하고 왔다 갔다 하면서 대(臺) 앞에서 한가하게 놀았다. 봄 가을의 안개와 달, 아침저녁의 흐리고 갬이 이처럼 때에 따라 기상이 변화무쌍하다. 이것이 이 경포대의 대체적인 경관이다. 하는 대목이다.
조선시대의 명승은 유학의 발달에 힘입어 최고의 중흥기를 맞게 된다. 공자가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라고 한것은 기이한 것을 완상하여 한쪽만을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오묘함을 터득하여 온전함을 즐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명승을 즐겼으며, 이는 ‘명승문화’ 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이다. 특히 유교적 자연관과 수련문화가 지배한 조선시대에는 명승문화가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사람들은 명승 유람을 통하여 자연과 친화함으로써 산수지락(山水之樂)의 감흥과 인지지락(仁智之樂)의 경지를 얻는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명승을 향유하는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본질적 가치나 활동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일체감을 얻고자 하는 중요한 실천 활동이었다. 명승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임경제지’ 등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중 ‘임원 경제지’ 이운지 편에는 명승을 여행할 때 갖추어야 할 행장과 재료, 용도, 제조법, 가치, 사용법, 효과 등 명승의 여행법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명승의 유행정도를 알 수 있다. 채제공의 번암집에 보면 “여러 유명한 노선생들은 거의 모두 몸소 좋은 경치 좋은 곳을 점령하여 살면서 글 읽고 학문하는 곳으로 삼고 사후에는 제사하는 곳이 된다. 그러한 땅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바둑을 벌여 놓은 것처럼 많다. 그러나 그 사람이 거기에 가지 않으면 명승이 또한 스스로 나타나지 못한다. 이것은 서로 기다려서 이루어지는 이치이다.”라고 명승의 개념과 가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명승 문화의 유행은 ‘청구남승도’ 놀이에도 응용되어 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아녀자나 유생들에게 전국 각지의 명승 120곳을 놀이판에 담아 곳곳을 누비면서 그곳의 정취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기도 했다.
근대시대의 명승은 과거 전래된 명승에 대한 추적이나 평가, 근대문물과 함께 유입된 유원지 문화가 명승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과거 전래된 명승에 대한 내용들은 일본인이나 신지식인들에 의해 책자로 발간되는 일이 잦았다.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조선의 명승・고적과 관련된 비롯한 다양한 서적은 조선시대 지리지 등 고문헌을 참고하여 작성되었는데 일제강점기 초기에 작성된 나루시마 사기무라[成島鷺村]의 『 조선명승시선(朝鮮名勝詩選), 1915 』의 서문에서 조선시대 명승관련 고서를 탐구하여 집대성한 결과를 밝히고 있는 대표사례에 해당된다. 명승에 대한 보호체계가 시작 된 것은 일제강점기 문화재 관련 법령과 정책이 도입되면서 부터이다. 먼저 일본에서 제정된 「사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법(1919)」을 기준으로 1922년에 11개소가 명승으로 지정되고 이후 조선에서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1933)」을 통해 ‘고적 및 명승’ 5건과 ‘명승 및 천연기념물’ 2건이 지정되었다. 그러나 당시 지정되었던 명승은 현재 사용하는 명승 문화재의 개념과는 다른 개념의 것이였다. 현재 통용되는 역사와 문화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명승’에 대한 논의는 1980년대에 대두되었다. 명승기정기준은 1962년에 제정되었고 1979년에는 7개소만이 명승으로 지정되었었다. 한국의 명승은 유형별로 산악형, 계곡형, 하천형, 도서해안형, 원림형, 옛길형, 산업형으로 구분되고 최근 문화경관적 가치가 확대되어 지정시 반영되고 있다. 2018년 한반도내 명승은 총 111개소에 달한다. 전래 명승의 고찰을 통한 한국 명승만의 특성이 명승 지정에 반영되어야 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articles of food and nutrition published in the Yeo-Sung magazines from 1936 to 1940 in Korea. Out of the 67 articles about the food and the nutrition from the Yeo-Sung magazines, 28 (41.8%) of them were about the brief information of food and nutrition news, 16 (23.8%) of them were about the recipes, 6 (9.0%) were about the nutrition information, and 17 (25.4%) of them were about others. As the number of recipes mentioned from the Yeo-Sung magazine was 103, 77 items, the majority, were about the Korean foods, 18 of the Western foods, 6 of Chinese foods, and only 2 of Japanese foods. This result showed that the Japanese colonization didn't seem to influence on Korean tastes and gastronomy. During this period, the modernization caused the numerous changes to our traditional cuisine with introduction of new western menu items and concept of nutrition. The nutrition articles highly recommended eating brown rice, vegetables, tofu, and the white meat. Shin-Young Bang, one of the main authors, insisted that "Cookery is not only the skill, but also the one of the very important academic sciences." showed budding modern cookery sciences in Korea.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analyze post-liberation Korean Physical Education (P.E) and the
effect of US forces' occupation on the P.E curriculum development and delivery. Physical Education
during the US Army-occupied era has had positive and negati
In this research, we analyzed the activities of Japanese architectural offices in Korea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era, classifying them into two groups: first, Japanese architectural offices that had their bases in Korea, and second, Japanese architectural offices that had their bases in Japan. There were totally 98 Japanese architectural offices that had their bases in Korea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The number of those offices had increased rapidly since 1920s. Nakamura(the design of bank buildings), Tamada(the design of theaters), Otsumi(the design of Japanese style residential houses) can be regarded as the most remarkable Japanese architectural offices among them. We found that these offices already specialized in certain architectural planning fields, such as bank buildings, theaters and residential houses. It was also found that, during the Pacific War period, even privately-managed architectural offices were mobilized for the war by Japanese government, through designing munitions factories, etc. On the one hand, since some large Japanese corporations entered into Korea, many Japanese architectural offices, that had their bases in Japan, got into working in Korea and designed a number of buildings, with the exception of the architectural office of Vories, who was a Christian architect. Even though the place that the activities of these Japanese architectural offices were carried out was Korea, any factors of Korean architectural style couldn't be found In their works. This means that they just transplanted the Japanese modern architectural style in Korea.
安龍福의 존재와 행적은 독도영유권 논쟁의 핵심이다. 안용복은 당대는 물론이고 일제강점기에도 영토를 지킨 인물로 기억되면서 그의 행적이 재현되었다. 민족적 이미지와 결합하 면서 역사적 인물로 재현된 것은 그가 민족의 현실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여겼 기 때문이다.
안용복이 1920년대 『逸士遺事』를 통해 민족적 인물로 거듭나면서 호걸의 칭호를 얻은 것은 영토문제와 외교권을 회복시켜 줄 인물을 염원한 시대의 희망과 결합된 결과였다. 그는 『동광』을 통해 쾌걸로 거듭나면서 올바른 일·통쾌한 일을 한 호걸로 이미지화 되었다. 일제에게 빼앗긴 주권을 되찾는 통쾌한 일을 그를 통해 염원했던 것이다.
안용복은 1930년대 해상의 쾌인용사로 이미지화 되면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한 저항의 인물로 그려졌다. 1940년대에는 늠름한 기상을 지닌 무사로 거듭났지만, 파쇼체제에 맞서기 어려운 조선의 현실과도 같은 무사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안용복의 동상건립을 통해 장쾌한 의협을 이어가려는 점에서는 희망이 보였다. 안용복의 다양한 이미지하의 변화는 시대정신, 시대적 과제와 맥락을 함께 했고, 오늘날 안용복이 울릉도·독도와 연계되는 상식이 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