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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2017.12 KCI 등재 SCOPUS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Porous materials such as polymeric foam are widely adopted in engineering and biomedical fields. Porous materials often exhibit complex nonlinear behaviors and are sensitive to material and environmental factors including cell size and shape, amount of porosity, and temperature, which are influenced by the type of base materials, reinforcements, method of fabrication, etc. Hence, the material characteristics of porous materials such as compressive stress-strain behavior and void volume fraction according to aforementioned factors should be precisely identified. In this study, unconfined uniaxial compressive test for two types of closed-cell structure polyurethane foam, namely, 0.16 and 0.32 g/cm3 of densities were carried out. In addition, the void volume fraction of three different domains, namely, center, surface and buckling regions under various compressive strains (10%, 30 %, 50 % and 70 %) were quantitatively observed using Micro 3D Computed Tomography(micro-CT) scanning system. Based on the experimental results, the relationship between compressive strain and void volume fraction with respect to cell size, density and boundary condition were investig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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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2016.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수출 딸기 중 병원성 E. coli와 Salmonella spp.를 제어하기 위하여 이산화염소 가스 농도, 상대습도, 시간에 따른 이산화염소 가스의 미생물 저감효과를 조사하였다. 병원성 E. coli, salmonella spp.를 접종한 딸기에 이산화염소 가스 농도(10, 20, 30, 40, 50 ppmv), 상대습도(50, 70, 90%), 처리시간(0, 5, 10, 20, 30분)에 대한 삼요인 실험을 하였다. 그 결과, 각 처리 조건 간의 상호작용이 나타났으며 미생물 저감효과는 상대습도가 가장 높은 조건인 90%에서 이산화염소 가스 농도와 처리시간의 값이 증가할수록 높아지는 경향이 있었다. 상대습도 90%, 이산화염소 가스 농도 50 ppmv에서 처리시간에 따른 미생물 저감화 효과는 5분 동안 처리하였을 때 병원성 E. coli와 Salmonella spp.이 각각 0.5, 0.7 log CFU/g 정도 감소하였으나 20분간 처리하였을 때는 각각 2.07과 2.28 log CFU/g 정도 감소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는 수출 딸기 중병원성 E. coli와 Salmonella spp.를 제어하기 위한 최적의 이산화염소가스 처리 조건을 확립한 결과로서 수출 딸기의 미생물 안전성 향상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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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2016.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For several decades, lactic acid bacterium (Lactobacillus graminis: LAB) has been generally recognized as safe. To develop the pan-environmental bio-control agent, algicidal activity of the live LAB cell and its culture filtrate (CF) was examined against Microcystis aeruginosa. LAB cells perfectly lysed M. aeruginosa within 3 days, while the CF had a less effect than the live cells, approximately 78% inhibition of algal growth during a same culture period. The concentration of microcystin in alone culture of M. aeruginosa was 7.1 μg L-1, but gradually increased and leach 158.5 μg L-1 on 10 days. However, LAB cells clearly decreased the microcystin by 10.3 μg L-1 in the same period, approximately 93.5%. CF of LAB showed a strong algicidal activity over 75% between pH 2-7, 91.3% by the treatment of proteinase K, 87.8% by below 3 kDa in particle size, and 75.3% by heat treatment, respectively. Of five solvents, fractions of CF passed through solvents diethyl ether and ethyl acetate showed an obvious algicidal activity in the algal-lawn test. Among 5 fractions purified by silica-gel TLC plate, two spots showed a most strong removal activity on M. aeruginosa. Another analysis of GC indicate that CF contained six representative fatty acids. Even though most of these substance have been known as an anti-algal substance against M. aeruginosa, oleic acid is the most effective. These results suggested that the culture filtrate or specific substances, like a fatty acids, in comparison with live L. graminis can be a successful and eco-friendly agent to control Microcystis bl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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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2016.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어린잎 채소와 생산환경에서 미생물학적 오염도를 조사하고자 수행하였다. 이를 위하여 11종의 어린 잎채소와 종자, 관개용수, 상토, 작업도구 및 작업자 장갑 등 총 126개의 시료를 채취하여 위생지표세균(대장균군, E. coli)과 병원성미생물(Escherichia coli O157:H7, Salmonella spp., Staphylococcus aureus, Listeria monocytogenes, Bacillus cereus)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종자와 관개용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료에서 대장균군이 검출되었다. E. coli는 분석시료 중 10.3% (13/126)에서 검출되었으며 검출된 시료 로는 관개용수, 칼, 작업자 장갑, 및 다채, 적무, 청경채였다. 또한 B. cereus는 상토, 작업도구 및 청경채, 비트, 적근대 등 총 38% (48/126)의 시료에서 검출되었다. 한편 E. coli O157:H7, Salmonella spp., L. monocytogenes는 검출되지 않았다. 본연구의 결과로 미루어 볼 때 어린잎채소 는 미생물 안전성면에서는 크게 우려할 수준은 아니지만 어린잎채소의 미생물오염을 사전 예방하는 차원에서 농업 현장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위생관리 기술 개발과 보급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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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2015.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위생적인 수확후처리를 통하여 안전한 농산물 생산을 유도하기 위하여 영양부추를 대상으로 수확후 처리시설 모델을 개발하였으며 개발된 수확후 처리시설 설치와 위생교육이 미생물 안전에 미치는 효과를 검증하고자 본 연구를 수행하였다. 이를 위하여 양주지역 영양부추 생산 농가의 수확 후 처리시설 환경과 영양부추에서 위생지표세균(일반세균수, 대장균군, E. coli)과 병원성미생물(Escherichia coli O157:H7, Salmonella spp., Staphylococcus aureus, Listeria monocytogenes, Bacillus cereus)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빗, 칼, 도마 등 수확후 처리시설에서 사용하는 작업도구의 일반세균수 오염수준은 수확후 처리시설 설치농가(A, B)에서 수확후 처리시설 비설치농가(C) 보다 1.44~2.33 log CFU / 100cm² 정도 낮았다. 특히 도마의 경우 A농가에서 1.00 log CFU / 100cm²이하, B 농가에서 2.23 logCFU / 100cm²인데 반해 C 농가에서는 6.03 log CFU / 100cm²로 농가간의 위생 상태에 따라 B. cereus의 오염수준이 차이가 크게 나타났다. 또한 지하수에 침지 한 영양부추에서 침지 전 보다 대장균군이 0.57~1.89 log CFU/g이 증가하였다. E. coli는 영양부추, 침지한 후 지하수, 토양에서 검출되었으며, E. coli O157:H7, Salmonella spp., L. monocytogenes는 검출되지 않았다. 따라서 본 연구의 결과를 통하여 소규모 수확 후 처리시설 설치와 위생교육을 통하여 농가 내 수확후처리 환경의 위생을 개선하는데 효과적이라 판단된다. 이와 더불어 유해미생물에 의한 식중독사고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는 수확 후에 오염된 유해미생물을 저감화 할 수 있는 세척, 소독 기술의 개발과 도입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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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202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소코트라에 인도인, 아랍인, 헬라인들이 거주하며 홍해와 인도양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국제무역을 했다는 사실이 1세기에 저술된 『에리트라이해 항해기』에 기록되어 있다. 2000년에 발견된 호크 동굴에서 인도 브라흐미어, 남부 아라비아어, 에티오피아어, 헬라어, 팔미라어 등으로 기록된 낙서들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낙서들의 기록 시기를 분석한 결과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라는 사실이 밝혀져 『항해기』의 내용이 확인되었다. 이렇게 국제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소코트라에 빠르면 4세기 후반 늦어도 6세기에는 기독교가 들어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빠른 시기에 기독교를 전파한 인물은 354년 콘스탄티우스 황제에 의해 힘야르 왕국에 파견되어 기독교를 수용하도록 활동했던 테오필루스이다. 그는 힘야르 왕의 허락을 받아 세 개의 교회를 건축한 후에 자신의 고향인 소코트라에 기독교를 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악숨은 525년 이후에는 힘야르 왕국을 정복하여 기독교를 믿도록 개종을 시켰다. 이 시기에 소코트라는 힘야르 왕국의 지배 하에 있었으므로 악숨인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졌을 것이다. 셋째로 코스마스의 『기독교 지형학』은 소코트라 섬에 페르시아에서 임직받은 감독들과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코트라의 다하이시와 SHP_067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포크형의 네스토리안 형태의 십자가 모양이 발견되는 것으로 볼 때 페르시아에서 기독교가 전파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소코트라에서 고대 시기에 로마제국에서부터 인도양에 이르는 국제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그러한 교류활동 가운데 기독교도 함께 전파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28.
        2021.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의 국경선을 298년에 국경선을 시네로 철수하였고, 메로에 왕조가 4세기 중반 이후 붕괴하자, 트리아콘타스코이노스에서 정치적인 공백이 발생하였다. 이 무렵에 이 지역에서 블레미스인들과 노바데스인들이 등장하여 충돌하였다. 먼저 블레미스인들이 394년에 탈 미스를 점령하였고 5세기 전반기에는 도데카스코이노스와 함께 동부 사막 지대의 에메랄드 광산을 개발하였다. 동부 사막지대에 거주하던 이들은 정치적인 공백이 발생하자 매장지와 목초지를 구하여 도데카스코이노스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치적으로 지배하면서 에메랄드를 중심으로 중개무역을 하였다. 5세기에 제2폭포 지역을 중심으로 노바데스인들이 등장하여 노바디아 왕조를 세웠다. 이 왕조의 실코 왕은 5세기 중엽에 부족연합국가를 형성하여 블레미스인들을 물리치고 도데카스코이네스 지역을 차지하였고 6세기에 접어들어 중앙집권화된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부족연합국가 단계를 넘어 중앙집권화된 왕국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실코 왕은 다른 전통 종교들과 함께 기독교도 하나의 종교로 인정하였다. 그러한 증거로 블란나 지역의 무덤들에서 기독교의 표지를 가진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고, 사람들을 함께 매장하던 풍습이 사라지다가 500년경에는 큰 무덤을 만드는 매장 풍습이 사라졌다. 동로마제국에서 선교사를 파송하여 나라가 543년에 정식으로 기독교를 수용하는데, 이것은 5세기 후반부터 기독교가 점진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의 정점으로 보인다.
        29.
        2020.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강홍모 장로는 6.25전쟁 과정에서 겪었던 생명의 위기 속에서 고아들과 경제적으로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교육을 통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가졌으며, 영생교회와 함께 영생학원을 세워 이들을 교육하였다. 영생학원은 전주에서 1956년에 처음으로 야간학교이면서 동시에 남녀공학 학교로 출발 하였다. 영생중고등학교는 1962년에 주간교육을 원하는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주간과 야간학급을 함께 운영하였다. 그리고 여학생들을 위해 1963년에 영생여자중학교와 영생여자실업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지역의 공무 원, 초등학교 교사, 목회자들의 고등교육에 대한 수요가 많아지자 1964년에 이들을 위한 영생대학이 야간으로 설립되었다. 이렇게 설립된 영생학원 산하의 학교들은 1970년대의 새로운 사회적인 변화를 맞이하여 여러 가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첫째 영생학원은 1972년에 영생중학교와 영생여자중 학교를 폐교하고 고등학교와 대학의 발전에 집중하였다. 둘째 야간교육 수요가 줄어들자, 1978년에 고등학교는 주간으로 전환하고 영생대학은 주간을 신설하여 주간과 야간을 병행하였다. 셋째 1976년에 영생공업전문학교를 설립하여 중화학공업이 발전하던 한국사회에 필요한 산업인력을 육성하게 되었다.
        30.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코스마스는 6세기 중엽에 알렉산드리아에서『기독교지형학』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지구가 둥글다는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미의 그리스 우주관을 비판하고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려는 목적으로 저술되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자신이 젊어서 항해무역을 하면서 여행을 했던 에티오피아와 타프로바네와 인도와 중국 지역과 이루어지는 중계무역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바다와 만을 통한 국제무역활동은 인류의 삶에 필요한 물자들을 유통시켜 상호간의 우의를 증진 시킨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는 당시 자신 이 직접 방문했던 에티오피아의 아둘레를 중심으로 향료를 비롯한 다양한 무역이 이루어지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방문하지 않았던 타프로바네에서 인도와 중국 등지와 이루어지는 비단과 향의 무역을 설명한다. 그는 특히 인도의 동물과 식물과 해양식물을 소개하면서 에티오피아의 동물들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각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중계무역을 편견 없이 문화횡단성의 시각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6세기 동서양을 통해 이루어지는 무역을 통해 이러한 상품교역과 함께 각 지역에 전해진 기독교의 활동들을 설명하여 기독교 확산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31.
        2019.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일제의 추방으로 폐쇄되었던 전주 스테이션은 1947년에 복구되어 활동을 시작했는데, 1948년에는 9명의 선교사들이 활동하였다. 이들 가운데 인돈, 위인사, 조요셉 등은 노회원으로 교회들의 목회활동을 도왔지만, 주로 교육분야와 의료분야에서 활동하였다. 인돈 부부는 신흥과 기전의 교장으로, 윈과 폰테인은 한예정신학교를 위해 사역하였고, 구바울 부부와 변마지는 예수병원에서 사역하였다. 해방 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합병되었던 전주 시내 5개 교회들이 문을 다시 열면서 교회가 성장하기 시작하여 1952년에는 12개로 늘어났다. 1952년부터 기장과 예장으로 총회가 분열하면서 노회도 분열하였고, 1959년에 다시 예장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하였다. 이 과정에서 1960년에 기장 전북 노회는 16개의 교회로, 통합 전북노회는 1962년에 자립 9개와 미자립 6개로 늘어났고, 합동은 1960년에 7개로 출발하였다. 인톤 선교사가 1946년 7월 귀국한 후에 신흥과 기전 학교의 복교가 추진되어 11월에 문을 열었고 1950년에 중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강흥모에 의해 1955년에 영생중학교와 영생고등학교를 인가받았고 1963년에 영생여자중학교를 인가받았다. 그 결과 1960년대에 전주에서 기독교학교가 중학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30%이고, 고등학교에서는 30-40%를 차지하였다. 고등교육기관은 강흥모가 세운 영생대학교와 전주공업전문학교가 오늘 날 전주대학교와 전주비전대학으로, 여자성경학교였던 한예정성경학교가 1968년에 한일여자신학교로, 예수병원의 간호기술학교는 1973년에 간호전문학교로, 기전여자고등학교에서 1974년에 기전전문학교로 발전하였다. 전주예수병원은 1948년 45병상으로 출발하여 1960년에는 160개 병상의 종합병원이자 지방거점병원으로 발전하였다. 구바울, 설대위, 켈리, 필립 등의 다양한 분야의 의사들이 진료를 하였고, 전문수련의 병원으로서의 역할을 통해 1960년대에는 외과, 이비인후과, 안과, 신경외과 등과 함께 암전문치료 병원으로 발전하였다. 전주는 미션 스테이션의 복구와 전주 장로교회들의 협력을 통해 교육과 의료의 인프라를 구축하고 많은 교회들이 설립되어 최근에도 27.6%의 높은 복음화율을 가진 도시가 되었고 많은 기독교 관광장원을 활용하여 기독교를 지역의 특성으로 활용하는 도시가 되었다.
        32.
        2018.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배은희 목사는 대한제국 말기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숭덕학교를 운영하다 한일합병당시에 투옥되는 경험을 하였다. 이 투옥의 경험이 그의 독립운동의 씨앗이 되었다. 그는 3.1운동에 가담하였고 1919년 10월에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장로교 목회자 중심의 독립운동 조직인 대한국민회에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1921년부터 전주 서문외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유치원, 숭덕학교, 여성야학을 운영하였고 1927년 전주 신간회 회장을 하였으며, 1929년부터는 독신자선교회와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농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반대하다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그는 전주에서 임시시국대책위원회와 전주청년단을 조직하여 치안유지활동을 하였다. 그는 12월 28일 이후 반탁운동이 벌어지자 전주를 중심으로 이승만이 조직했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지부들을 조직하여 반탁운동에 참여하였고, 1946년 1월 13일에 전북지부를 조직하였다. 전북대표로 활동하며 2월 8일에 독촉국민회가 조직될 때 5명의 고문 아래 있는 18명으로 구성된 참여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는 독촉국민회에 가담한 이후에 이승만의 반탁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1947년 10월에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47년 7월에는 이승만의 승인을 받아 민족대표자대회를 조직하였고 김구의 비상국민회의와 통합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비상국민회의는 임정의 법통론을 주장하였던 반면에 민족대표자회의는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주장하여 통합에 실패하였다. 통합에 난항을 겪자 민족대표자대회와 독촉국민회가 연합하여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나섰고, 배은희는 총선거 실시를 위한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배은희는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운동을 추진했던 이승만의 정책에 독촉국민회와 민족대표자대회를 통해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목회자였다.
        33.
        2017.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제헌국회에 진출한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50명으로 확인된다. 한민당 11 명, 독립촉성국민회 13명, 대동청년단 5명, 무소속 14명, 기타 단체 7명이 며, 여기에는 천주교인 3명이 포함되어 있다. 기독교인 의원들 50명이 전 체 의원들 209명 가운데 차지하는 24% 비율이 전체 인구 가운데 기독교 인구 0.5%를 과대하게 대표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당시 고등교육을 받았 던 기독교인들의 인구비율이 20-30% 정도 된다는 점에서는 적절한 비율의 대표성을 나타낸다고 평가할 수 있다. 기독교 의원들 가운데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24명으로 거의 절반에 가까워 전체 국회의원들 가운데 독 립운동 가담자 27%보다는 훨씬 더 높다.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국내에서 공부한 경우에 미션스쿨에서 공부를 하였고, 졸업 후에도 대부분 실력양성 운동의 일환이었던 사립 기독교학교에서 교원을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해방 후에는 미군정, 민주의원, 입법의원 등의 다양한 정치활동 을 하였고, 면장, 읍장, 군수 등의 다양한 행정직도 하였으며, 교육기관에도 상당수가 근무하였다. 이들은 해방 후에 한민당과 독촉국민회, 여러 청년 단에 소속되어 활동하면서 우파 세력의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제헌국회에 진출한 후에는 한민당에 소속된 사람들은 거의 한민당에서 활동하였고, 독촉국민회에 소속된 사람들은 상당수가 일민구락부에 소속되 어 이승만 지지세력으로 활동하였고, 6-7명의 사람들은 소장파에 소속되어 개혁활동을 지지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국회의원들은 자신이 소속된 정당 이나 구락부에 따라 활동하며 개인들의 경우에 이합집산이 심하였다.
        34.
        2017.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독촉국민회는 이승만과 김구가 연합하여 1946년 2월에 지방우익세력을 조직하려고 만들었던 연합조직이었다. 초기에는 오하영과 김구가 중심이 되어 조직을 이끌었으나, 이승만은 지방 조직을 확산시킨 남부지방 순회여 행 후 1946년 6월에 열린 2차 전국대회에서 중앙조직을 장악하였다. 이 조 직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신익회의 정치공작대 세력의 적극적인 참여가 중 요한 요인이었다. 그는 6월 29일에 민족통일총본부를 조직하였고, 7월에 이 조직에 애국단체 총연합회를 통합시켰다. 이러한 세력 확장을 이룬 후 에 독립촉성국민회의 운영에서 드러난 난맥상을 해결하기 위해 1946년 9 월 7일에 제3차 전국대회를 열었는데, 임원진에 임정세력이 상당히 참여했으나, 중앙위원조직은 이승만이 확실하게 장악하였다. 이승만은 1946년 말에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미국방문에 나섰다. 그의 미국방문기간 동안 임정세력은 비 상국민회의, 민족통일총본부, 독촉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임정봉대론에 입 각한 임시정부수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을 지지하는 배은희와 이윤영등의 반대로 임정세력의 이러한 통합운동은 좌절되었다. 그렇지만 김구 중심의 임정세력은 임정봉대론을 계속 추진하였으며, 이러한 책임을 물어 이승만은 1947년 4월에 열린 제4차 전국대회에서 임정세 력을 정리하고 자신의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독촉국민회를 재편하였다. 그 이후에 점차로 단독선거를 지지하는 세력을 중심으로 임원진을 개편한 후 에, 이 조직을 바탕으로 1948년 5월 총선거에 임하였다. 그 결과 제헌국회 의원 가운데 가장 많은 55명이 독촉국민회에서 선출되었다. 이러한 독촉국민회 중앙조직에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참여하였다. 초기에는 오하영이 이승만과 김구 사이의 중간역할을 하면서 부위원장을 하 였다. 중앙에서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인물로는 배은희목사와 이관 운목사 그리고 이승만의 직계였던 송필만, 임영신, 북한에서 월남한 이종 현 등이었다. 특히 월남기독교인들로 주목되는 그룹이 이윤영과 이종현, 변성옥이었다. 그리고 최태용은 반공과 국민운동을 통한 건국운동이란 점 에서 독촉국민회의 지지자가 되었다. 독립촉성회 중앙조직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적어도 20%에서 40% 정도 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비율은 해방공간에서 기독교인들이 우파 세력의 중 심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며, 이 조직의 임원진에 참여한 기 독교인들은 대부분 일제 강제기 동안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이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지지 기반이었다.
        35.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에서는 항산화 기능을 가진 자소엽, 어성초 그리고 녹차 추출물들과 이들 추출물의 혼합물을 사용하여 항산화, 미백, 세포독성실험을 진행하였다. 자소엽, 어성초와 녹차의 추출물을 동일 양으로 혼합하였을 때 처리농도가 증가함에 따라 농도 의존적으로 DPPH와 ABTS 라디칼 소거활성이 높아졌으며, 추출물을 혼합한 경우 낮은 농도인 10 μg/mL에서도 80.2%, 98.0%의 DPPH와 ABTS 라디칼을 소거시키는 우수한 항산화 효과를 나타내었다. 미백효과의 정도를 조사하기 위하여 tyrosinase 저해효과를 조사한 결과 자소엽과 녹차추출물 그리고 각 추출물의 혼합물이 농도 의존적으로 tyrosinase 저해효과가 증가되었다. HaCaT 세포를 사용한 세포독성실험의 경우 자소엽, 어성초 추출물의 경우 세포생존율이 무처리 대조군과 같거나 높게 나타났으며 특히 어성초추출물의 경우 100 μg/mL에서 무처리 대조군 보다 10% 이상의 높은 생존율을 보였다. 녹차와 각 식물 추출물 혼합물의 경우 500 μg/mL 이상에서는 무처리 대조군에 비하여 세포생존율이 감소하였다. 그러므로 세 가지 식물의 추출물 혼합물이 100 μg/mL 농도일 때 세포에 안전하며 높은 항산화 활성과 함께 tyrosinase 저해 효과가 있었다.
        36.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밀턴은 청교도 혁명이 진행되던 1643년부터 45년에 걸쳐 작성한 이혼론 산문 4편과 실낙원 등을 통해 결혼과 이혼과 성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혼론』 초판과 재판은 의회와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를 대상으로 저술하면서 교회법 개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혼에 관한 법률제도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당시 영국에서 교회법과 의회법 모두에서 결혼을 성사로 인정하여 합법적인 이혼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음행 등의 이유로 이혼한 경우에 과실이 없는 사람도 재혼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불행한 결혼생활과 함께 영국의 이러한 이혼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한 밀턴은 불합리한 이혼제도를 개혁하려고 공적 논쟁에 뛰어 들었다. 밀턴은 이혼론 산문들을 통해 결혼의 목표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내세우게 되었다. 당시까지 자녀출산과 음행 방지가 결혼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이해되고 있었는데, 밀턴은 창세기 2장 18절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부부간의 고독을 해결하기 위한 영적인 성숙과 정신적인 사랑이 결혼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자녀출산은 결혼의 목적이라기보다는 사랑의 결과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부부간의 정신적인 대화와 사랑이 불가능한 경우에도 이혼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음행만이 이혼의 근거가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바리새인들의 과도한 이혼에 대한 책망이므로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며, 신명기 24장 1절에서 이혼 사유로 인정한 수치스러운 것에는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까지 포함된다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밀턴은 부부간의 정신적인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에도 이혼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밀턴의 이혼론은 남성의 입장에서 제기되어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반영하여 여성의 위치를 비하하는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밀턴은 결혼에서 여성을 대화의 동등한 반려자로 인정하고 행복의 동반자로 인정하는 측면도 있다. 더 나아가 당시 밀턴의 관심은 영국의 국교회와 왕정 하에서 종교와 개인과 정치의 개혁을 통한 인간의 자유의 확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혼론 산문들은 인간의 개인적인 자유의 확보를 위한 차원에서 저술되었다. 그의 이혼론 산문들은 부부간의 사랑이 결혼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밝힌 것은 중요한 공헌이었고, 당시 그의 이혼에 관한 입장은 수용되지 못하였으나, 20세기에 들어와 성격차이가 이혼의 요소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앞으로 이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밀턴이 말한 바와 같이 부부간의 건전한 사랑의 관계가 잘 형성되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37.
        2013.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저품위 회중석을 최종 선별처리 하기에 앞서 비교적 조립자에서 많은 양의 맥석을 제 거하여 경제적이며 효율적인 선별기술을 개발하는데 있다. 일반적으로 저품위 회중석의 경우 1차 조 선정광을 얻기 위해 지그나 스파이랄 등의 비중선별기가 사용되지만, 본 연구에서는 KC3 Knelson Concentrator를 이용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시료는 파쇄와 분쇄과정을 거쳐 1㎜ 이하로 준비하였으 며, 주요 실험변수로 처리횟수, 시료 급광량, Bowl의 회전속도(G Force), 급수량, 자성산물 사전제거, 시료입도 그리고 시료품위 변화 등이 1차 조선정광 회수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하였다. KC3 Knelson Concentrator를 이용한 비중선별 실험결과 처리횟수, 급광량, 시료입도 그리고 원 시료의 품위(WO3%) 등이 선별효율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실험변수임을 확인하였다. 실험결과 최적실험 조건에서 텅스텐 의 품위와 회수율이 각각 3.0%WO3와 90%인 1차 조선정광을 얻었다.
        38.
        2013.11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지구상에 주된 에너지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석유자원은 그 매장량의 유한성으로 인해 고유가 행진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고유가 시대에 석유 산업의 한 축인 플라스틱 산업은 그 나라 경제규모를 가늠하는 척도로 인식될 만큼 각종 분야에서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으며, 대체물질이 개발되지 않는 한 지속적인 성장이 예상된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4번째로 많은 연간 약 900만 톤의 플라스틱을 생산하고 있으며, 매년 약 400만 톤의 폐플라스틱이 발생하고 있으나, 재활용률은 20~30%로 낮아 많은 양이 매립이나 소각에 의하여 처리되고 있다. 그러나 폐플라스틱의 매립은 유해성분이 용출될 수 있으며, 단위 무게에 비하여 부피가 커 보관, 운반의 문제와 매립 효율이 낮고, 소각에 의한 처리는 일부 열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지만 많은 경제적인 손실을 초래하고 유독성 가스를 방출하여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특히, PVC(polyvinyl chloride) 재질의 경우 Cl, DEHP, 왁스 등이 함유되어 있어 소각이나 매립 시 염화수소, 다이옥신, 중금속 그리고 독성첨가물 등이 유출되어 환경 유해성이 심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소각 설비 장치의 수명 단축 및 부식을 유발시키고 있다. 또한 PVC재질은 폐플라스틱 고형연료제품(RPF, Reused plastic fuel), 생활폐기물 고형연료제품(RDF, Refuse Derived Fuel), 유화, 물질재생 등에 있어 폐플라스틱의 재활용을 어렵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문제점을 원천적으로 해결하고 폐플라스틱의 재활용률을 높일 수 있는 PVC 제거기술 개발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폐플라스틱의 경우 다른 물질에 비해 쉽게 분해 및 변질이 이루어지지 않아 효율적인 선별기술만 개발된다면 재활용이 가장 용이한 물질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폐플라스틱을 재활용 할 수 있는 기술로는 물질 재활용, 화학적 재활용 그리고 에너지 재활용 방법이 있으며, 이중 물질 재활용이 자원보존이라는 관점 및 에너지 측면 등에서 볼 때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어느 방법이든 다른 종류의 폐플라스틱이 혼재되어 있으면 재활용의 효율이 크게 저하된다. 따라서 폐플라스틱의 재질분리 기술은 재활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며, 특히 플라스틱의 가격을 고려할 때 경제적인 재질분리 기술이 요구된다. 본 연구에서는 PVC와 PET가 혼합된 가전 포장제를 대상으로 풍력선별 연구를 수행하였으며, 시료의 투입량, 공기량 등 다양한 조건을 변화하며 최적 분리조건 및 분리효율을 규명하여 대상 시료의 본 선별법을 통한 분리 가능성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39.
        2012.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Lee Chang Hoi (Lee) was born in 1872 at Namyang. He became a christian in the early period when the gospel was spreading in the region. After conversion he worked hard for the modern education movement in the influence of George Herber Jones. Hong Seung Ha founded the Hoheung elementary school with Jones’ donation in 1901. The school was managed by Lee who established Powell school in purpose of teaching English in 1902. Lee managed nine day schools within nine churches which were founded by Hong Seung Ha. He also served as an exhorter in Namyang church, and worked as an assistant worker for a year in 1906. He later became the evangelist from 1907 to 1910. After 1906 he developed Boheung school as a central school in Namyang. He managed the school with general level edcuation department, high level education department, and measurement education department, and tried to keep Namyang redisents’ wealth from the intrusion of Japan. He held the United Sports Day gathering people from the surrounding elementary schools to inspire the patriotism. Some Japanese called Boheung school as a rioter training center for this reason, and insisted closing down the school since it was growing as a center for anti-Japanese thoughts. Lee also participated founding Sangdong elementary school, and he was directly and indirectly engaged in managing other schools. He also ran the evening school in Boheung school for children who couldn’t study in the daytime. He also worked as the principal of Sangdong evening school. He established the Namyang branch of Daehan-Jaganghoi for the progress of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The group protested against the Japanese economic invasion with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He was in ministry from 1913 to 1916 at Namyang church. He supported the neighboring churches not only to stand independently but also to found schools. He also inspired other people to build churches in the churchless areas and to teach the biblical knowledge and Hangul by running the Bible Classes. He became a circuit pastor of Namyang and Osan in 1916 and transferred to Gwangju in June 1918. When he was in ministry of Gwangju, the Samil Independence Movement broke out. As he participated in this movement, he was arrested and in jail for 4 months. After he was released for the lack of evidence, he met Lee Dae Jung who raised the independence funds with him. However, Lee got arrested due to the fund raising activity and got sentenced to two years in prison. He was a pastor who fostered the patriotic enlightment movement into the Samil Independence Movement and Independence Movement.
        40.
        2012.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Up to recently at the modern education in Namyang the christian education’s influence before 1905 has not particularly received attention. But according to Shin Hak Wol Bo, the Namyang Church was founded in 1900 and in 1902 nine churches were established around Namyang. From the time in which the churches were founded, the schools of the boys and the schools of the girls for the modern education were built. The schools of boys were Boheung elementary school and Powell school and the school of girls was Jeha elementary school and the nine day schools of boys and girls were built in the nine churches. Teachers of these schools were Lee Chang Heoi and An Elizabeth. They taught the Hangul and arithmetic. Particularly after the girls and women were participated in the Bible Class, they grew into the women leader of church and the modern education patron. After 1905’s Protectorate Treaty nineteen schools were founded. Among these schools, three schools such as Boheung girl school, Bosung elementary school, and Bomyung elementary school were set up by christians and church. Many christians such as Lee Chang Hoi, Choi Sung Dae, Kim Hyeun Jun were participating in the establishment of Sangdong elementary school, Yangsung school, Songlim school, and Junkok Private House. Moreover Boheung school was the center of many schools and held the union sport and inspired the patriotism and the military spirit. And Boheung school and Boheung girl school with YangSung school established the ordinary course and the higher course and led the middle education. These two schools with the public elementary school joined the National Debt Compensation Campaign. The Namyang branch of Daehan-Jaganghoi was set up by the leadership of christians such as Lee Chang Hoi. Christians such as Kim Hee Kyung and Kim Hyeui Kyung and An Maria founded the EuiSungHoi and they participated in the National Debt Compensation Campaign. They established Women Education Society and gave the positive support for the women education. On the contrary Buddism and the Cheondogyo did not establish even a modern school. When we observe from this side Christianity led the modern education and the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in Namyang quantitatively as well as qualitatively. Christians such as Hong Sung Ha and Lee Chang Hoi among Namyang church exhorters and SeoYeuDa Myeon Head Choi Sung Dae, Kim Kwan Hyeon as Kim Hong Su’s son and An Elizabeth got into the positive act in the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with country governors such as Jang Ho Jin, Bang Han Duck, and the enlightened confucian schol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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