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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6 KCI 등재후보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한국의 독도영유권의 역사와 수호전략을 분석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신라·고려·조선·대한제국의 독도통치, 일제의 독도침탈과 미군정기의 독도영유권 회복, 일본의 독도도발과 한국의 실효적 지배, 독도문제의 국제정치적 함의와 한국의 독도수호전략을 살펴본 후 결론을 도출해본 것이다. 신라 이사부가 우산국(현 울릉도와 독도)을 정벌한 이래 오랫동안 우리민족은 독도를 통치해왔다. 그러다가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 중 한반도 침탈과정에서 한국영토 독도를 일본영토로 강제 편입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 일제의 패망이후 우리는 독도 를 수호하여 실효적으로 지배해왔다. 하지만 일본은 전후 일본질서를 규정한 샌프란시스코조약에서 한국에의 반환도서로 독도가 명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독도의 일본영유권을 제기하고 있다. 일본은 독일이 포츠담협정을 통해 강제합병한 모든 영토를 말끔히 반환한 것과는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일본군 무장해제라는 빌미로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 과는 거리가 먼 한국이 일본 대신 분단되어 고통 받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여, 일본은 더 이상 독도도발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은 외교 적·군사적 대응역량 강화를 통해 우리 영토 독도를 착실히 수호·개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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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7.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명시된 석도(石島) 명칭과 독도(獨島)와의 관련성을 밝히기 위한 연구는 상당한 진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측 연구자들은 여전히 칙령 속 석도 명칭이 독도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석도=독도’에 대한 선행연구는 주로 순한국말과 한자 표기와의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독섬(돌섬)이 석도나 독도와 같이 표기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어 활용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이 한국어와 한자표기와의 관계를 이해하기에는 여전히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따라서 이 연구의 목적은 제3자의 눈에 비친 조선후기 독도 명칭의 용례를 밝히고, 이러한 사실이 오늘날의 독도영유권 논거에 주는 함의를 도출하는 것이다. 즉, 독일인 지도학자 시볼트의 「한국전도」에 표기된 독도(Tok to) 명칭을 조선후기 고지도 및 현대 북한지도 속 석도 명칭과 비교함으로써 석도 명칭과 독도와의 상호 관련성을 좀 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측면에서 다루고자 하였다. 연구결과, 조선후기에 한국에서는 독도라 부르던 섬을 지도와 문서에는 석도로 표기했던 사실이 확인되었다. 연구결과는 칙령 속 석도 명칭이 독도를 지칭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더욱 확고하게 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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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4.1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최근 일본은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바 그 중 하나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 에 제소하겠다는 일본의 의도인 것이다 특히 일본은 독도를 한 일간 영유권 분쟁도서로 간주하여 이 문제를 국 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하자고 수차례 제의해 온 바 있다 즉 년 월 일 일본 정부는 구상서를 통하여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하자고 하였고 년 한 일 외무부장관 회담에서 국제사법재판소 제소제의를 한바 있 다 또한 일본 외무성의 년 펴낸 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포인트 등에서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제의 등을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본고는 독도문제에 대한 일본의 국제사법재판소 제소제의에 대한 한 국 정부의 반대논리를 제시하여 독도문제가 영유권 분쟁도서가 아닌 한국의 고 유영토임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일본의 국제사법재판소 회부 주장에 대한 반박 논리 및 근거를 제공하여 향후 예상되는 일본의 주장에 대응하기 위한 법적 이론적 및 논리적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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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4.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5,200원
        5.
        2014.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신라 지증왕 13년(512) 우산국의 신라에의 귀복으로 수립된 독도의 역사적 권원은 대한제국에 이르러 1908년 10월 25일의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의해 현재 국제법상의 권원으로 권원의 대체(replacement of title)가 이루어질 수 있 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로부터 10년이 되는 1910년 8월 22일의 "한일합방조약"의 체결로 독도를 포함한 한국의 모든 영토는 일본에 사실상 병합되어 현대국제 법상 권원으로 대체된 대한제국의 독도영유권의 사실상 중단되게 되었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사실상 중단되었던 권원은 1910년에 소급하여 회복하게 되었다. 이 회부된 권원이 오늘의 대한민국의 독도영유권의 권원을 이루고 있다. "한일합방조약"에 의해 사실상 중단되었던 독도영유권의 권원은 연합국의 일련의 조치에 의해 회복되게 되었고, 1951년 "대일평화조약"에 의해 이는 결정ㆍ승인ㆍ확인되게 되었다. 따라서 1951년 이후 오늘의 시점에서 독도영유권의 권원은 "대일평화조약"이며 그 이전의 "항복문서", "카이로선언", "포츠담 선언", "연합국 최고사령관 훈령 제677호"가 아니다. 이들은 "대일평화조약"의 해석의 근거로 원용될 수 있을 뿐 그 자체가 독도영유권의 권원으로 보기 어렵다. 독도의 imperium은 동훈령에 의해, dominium은 "대일평화조약"에 의해 회복되게 된 것으로 본다. 오늘의 독도 영유권의 권원은 "대일평화조약"이다. "대일평화조약" 제19조 (d)항의 규정에 따라 "SCAPIN 제677호"에 의해 분리된 것이 승인되므로 독도는 직접적으로 "대일평화조약"에 의해 분리된 것이며 간헐적으로 "SCAPIN 제677호"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대일평화조약" 제2조 (a)항의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의 규정에 의해 1948년 8월 15일까지 승인의 효력이 소급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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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4.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에서는 지리학자들이 울릉도 및 독도 연구, 정착 및 영유권 연구에 주로 사용하는 세 가지 수단에 집중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지리학에서 중요한 세 가지 전환점을 선정해 보았는데, 이 전환점들을 계기로 지리학이 설명적인 학문에서 분 석적인 학문으로 변모되었다. 지리학의 세 가지 전환점은 다음과 같다. 1) 지리학 에서의 탐사(exploration), 2) 지도제작과 크로노미터의 발전, 3) 21세기 영토 문제 에 있어 공간정보 기술의 중요성이다. 사람이 최초로 울릉도와 독도에 도착한 정확한 날짜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고학적 증거 및 기록에 따르면 기원후 6세기에는 한국 선조들이 울릉도에 살고 있었다. 한국 어민들이 독도에 자주 갔지만 정착한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부터였다. 지리학적 연구는 울릉도에서 발견된 고대 유물도 연구 대상으로 한다. 고대 유물을 보면 삼국시대 말과 통일신라 시대에 정기적인 무역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유물이 나중에 발굴되게 되면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이 울릉도에 정착했었음을 드러낼 것이다. 울릉도와 독도 간의 긴밀한 관계가 수세기 동안 이어졌음을 증명하는 수백 개의 지도와 해도가 증거 서류에 포함되었다. 두 섬간의 연관성과 동해에서의 인간 활동은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울릉도와 독도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 증거의 양은 방대하고 이는 영유권 차원에서 독도와 감정적 그리고 문화적 유대가 없는 사람에게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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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2.08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삼국사기」권4의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이사부장군이 512년에 동해 중간에 위치하고 무릉도(울릉도)와 우산도(독도)로 구성된 우산국을 목사자를 실은 전함의 해군력에 의해 정복했다. 그 결과 신라의 독도의 영토주권이 수립되었다. 즉 신라는 독도의 영토주권에 대한 역사적 권원을 취득했다. 따라서 512년에 지증왕 시기에 우산국이 신라에 귀속되었다는 사실에 관해 어떠한 의문도 제기될 수 없다. 그러나 오늘 역사적 권원은 현대 국제법상 타당한 권원으로 대체될 것이 요구된다. 역사적 권원은 대체 당시에 타당한 권원으로 대체되지 아니하면 법적 효력이 없다. 그러나 역사적 권원과 그에 유사한 개념은 그 후의 역사적 발전에 의해 대체된 후에는 법적으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권원의 대체 이론은 많은 학자와 국제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일반적으로 수락되고 승인되어 있다. 대한제국은 독도의 관할권에 관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1900년에 선포하였다. 동 칙령의 선포에 의해 512년에 취득된 독도의 역사적 권원은 현대 국제법상 유효한 새로운 권원으로 대체되었다. 따라서 독도의 역사적 권원은 오늘 현대 국제법상 법적 효력이 없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 권원은 대체되기 이전에는 독도 영유권의 권원으로 법적 효력이 있는 것이다. 대체된 이후에도 역사적 권원이 귀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적 사실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권원의 대체에 따라 역사적 권원에 기초한 주장은 현대국제법상으로는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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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9.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독도는 512년에 신라의 영토로 편입한 이래 우산도(于山島)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한국의 영토였으며 일본은 오랫동안 울릉도를 죽도, 독도를 송도라고 부르며 한국의 영토로 인정하였었다. 그러나 일본은 1905년에 독도를 불법적으로 그들의 영토로 편입하고는 죽도(竹島)라고 칭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많은 지도들이 증명하는 것처럼 독도는 엄연한 한국 땅이다. 일본에서 간행된 공식지도에도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인정하였으며, 19세기 들어와 제작된 300여종의 일본지도에서도 독도는 한국 땅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 외에 서양에서 제작된 많은 지도에서도 독도는 한국 땅으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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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2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에서는 1953년부터 1965년까지 벌어진 양국 정부의 외교문서에 의한 논쟁에 서 역사적인 근거만을 대상으로 무엇이 쟁점인지에 대해 고찰해보고 쟁점의 변용에 대해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한일 양국 정부의 견해는 상세한 자료와 고증을 들어 독도에 대한 자국의 영유권을 주장함과 동시에 상대방의 주장을 부정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양국의 독도 영유권 관련 주장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단편적으로 시사되기는 했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것은 없다. 따라서 양국 주장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1953년부터 1965년까지의 교환공문에 대한 분석을 통해 독도영 유권 관련 주장의 논점과 변용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일본의 독도 영토 편입조치를 한반도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정의 일환에서 이루어진 일로 보고 있으며, 일본은 한국강점과 독도영토 편입을 전혀 별개 의 사안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독도 문제를 보는 기본적인 역사 인식에서부터 한일 간에 는 메꿀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이와 같이 독도 문제와 관련해서 한국과 일본은 서로 다른 시점에 서 있으며, 이러한 아포리아를 해결할 수 있을 단초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적인 구조를 타파하 기 위해서는 우리의 주장이 제3자에게도 합리적인 주장으로 비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 가 있으므로 우리 주장의 문제점에 대한 자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11.
        2021.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독도에서 가장 지리적으로 근접한 섬은 우리나라의 울릉도일 뿐만 아니라 독도는 울릉도의 후배지 또는 판도에 속해 있는 섬이다. 지리적 근접성은 객관적으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일본정부는 독도에 대한 영토주권을 오로지 역사적 그리고 국제법적 측면에서만 주장 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학자가 지리적 근접성원칙 적용에 여러 가지 엄격한 조건을 강조하는 것은 영토주권의 권원으로서 지리적 근접성이 국제법적으로서 부정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이 주장할 수 없는 지리적 근접성에 근거한 영토권원의 가치와 무게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 이다. 한국과 일본의 여러 역사문서들은 독도가 일본보다는 한국으로부터 가깝다는 서술을 반복적으로 명확하게 하고 있으며, 울릉도쟁계 관련 한일 양국의 외교공문서에서도 도서영토의 귀속주체를 결정하기 위한 기준으로서 지리적 근접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중세 한일간에 영토귀속의 기준으로서 지리적 근접성이 고려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지리적 근접성이론은 기본적으로 판도이론 또는 영향이론과 상관관계를 갖는 이론으로서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강대국이 아닌 그 피해당사국이 주장하는 경우 이는 자국 영역의 온전성을 유지하기 위한 ‘도덕적 주장’일 뿐만 아니라 ‘정당한 주장’으로서 당해 지역에 대한 완화된 상징적 지배가 있으면 국제법상 ‘진정한 권리’로 인정되어야 한다. 이글은 우선 영토획득의 권원으로서 지리적 근접성원칙을 분석하고, 제3장에서 일본 시마네현의 죽도문제연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나카노 테츠야 교수의 지리적 근접성 논의를 검토 하였으며, 제4장에서는 영역주권 판단의 근거로서 지리적 근접성과 판도이론을 반영하고 있는 일본의 문서기록들을 살펴보았다.
        12.
        202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올해는 대한제국이 칙령 제41호로 독도 영토주권을 천명한 지 120주년이자, 일본에 의한 을사늑약 115년과 한국강제병합 110년이 중첩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을사늑약 100년이던 2005년 일본은 시마네현을 통해 ‘죽도의 날’을 선포하여 한국의 독도주권에 대한 침탈의 역사를 기념하고 계승한 이래, 2020년 재개관한 영토주권전시관에서는 1905년 이후 일본의 국제법상 합법적 지배와 한국의 불법점거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노선의 근간인 일제식민주의에 입각한 일본의 지속적인 독도주권 침탈의 역사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오늘 우리에게 부여된 역사적 과제에 대해 다시 검토해 보게 된다. 독도는 한국 영토주권의 상징이자 명백한 우리의 고유영토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독도주 권에 대한 일본의 도발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일본정부가 한국의 독도주권을 인정한 1696년에도막부의 도해금지령과 이를 승계한 1877년 메이지 정부의 태정관지령을 의도적으로 은폐 하고, 국제법적 권원을 강화하는 정책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존재한다. 국제법상 권원(title)이란 영토주권과 관련하여, 문서상의 증거에 국한되지 않고 권리의 존재를 확립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증거와 권리의 현실적 연원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으로, 정당하고 적법한 권원이 결여된 권리는 성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자체가 한국의 독도주권에 대한 불법적인 침탈도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전제에서 일제식민주의에 입각한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정책적 토대로서 국제법적 권원 법리의 계보를 추적하고 주장의 법리적 문제점을 검토해 보았다. 일본 국제법학계의 독도영유권에 대한 권원 주장의 계보는 미나가와 다케시(皆川洸)의 역사적 권원론, 우에다 도시오(植田捷雄)의 본원적 권원론, 다이쥬도 가나에(太壽堂鼎)의 대체적 권원론, 세리타 겐타로 (芹田健太郎)의 공유적 권원론으로 이어지며, 권원 계보의 정점에 히로세 요시오(広瀬善男)의 국제법사관을 전제로 한 독도영유론이 존재한다. 일본의 국제법 권원 계보의 귀결점인 히로세 요시오의 국제법사관은 제1차 세계대전을 경계로 ‘식민지화’와 ‘비식민지화’로 개념을 구분하여 식민지배와 독도영유권 문제를 분석한다. 비식민지화란, 국제연맹기 법질서의 성립을 계기로 새로운 식민지 형성의 행동이나 강제적인 타국의 보호국화 혹은 영역편입행위는 완전히 위법하다는 것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의 국제법상 합법성을 주장함과 동시에 독도영유권 문제를 분리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첫째, 일본이 대한제국의 독도주권 선포 이후 1905년 독도 편입조치를 했으나, 국가활동의 지속적인 전개에 따른 영유권 주장의 유효성 결정에는 양자간 군사적 지배력 등 상대적인 권력 관계가 당시 국제법에서 일반적으로 승인, 둘째, ‘실효적 점유’라는 것은 토지의 현실적 사용이나 정주라는 물리적 점유보다도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권의 확립이라는 사회적 점유로서 일본의 점유 상황이 국력을 배경으로 최종적인 법적 효과를 귀속, 셋째, 일본이 영역편입조치를 취한 1904년~05년의 시기에 소규모 일본인의 어업이 실시되었고, 조선 측으로부터의 유효한 항의나 배제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던 점은 독도에 대한 일본정부의 실효적 관리가 있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법도 국가실행과 유착된 일본형 법실증주의가 아닌 보편적 국제규범에 입각한 규범성이 제고되고 있는 점과 1935년 UN국제법위원회의 조약법협약 법전화 과정에서 ‘하버드 초안’의 국가대표 개인에 대한 강박에 따른 무효조약의 대표사례인 1905년 을사늑약의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다. 더욱이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정책적 토대를 구축해온 일본 국 제법 권원 관련 계보의 주장들은 카이로 선언에서 천명한 폭력과 탐욕의 본질로서 일제식민주의와 일치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식민지배 합법론’을 전제로 한 일본 국제법 사관의 ‘독도영유론’은 한국의 독도주권에 대한 국제법을 앞세운 중대한 법리적 침해라는 점에서 일본은 21세기 평화공동체를 향한 진정한 국제법적 책무를 다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3.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7세기 조・일 양국 간 ‘울릉도쟁계’에서 교환된 외교문서는 ‘거리관습’에 관한 ‘약식조약’을 맺었다는 박현진의 주장을 둘러싸고 논쟁이 계속 중이다. 본고는 쟁점 중에서 일본의 구상서를 외교문서로 볼 수 있는지, 또한 외교문서의 원본에 관한 문제에 대해 외교 기록 『동문휘고』등을 활용해 검토했다. 그 결과 ‘약식조약’설에는 의문이 남는다. ‘거리관습’설에 관해서는 조・일 양국은 먼저 울릉도(다케시마)가 조선 땅이며, 일본 땅이 아님을 확인한 다음 울릉도와 양국과의 근접성을 거론했으므로 ‘거리관습’설이 성립될지 의문이다. 한편, 조・일 양국은 ‘울릉도쟁계’에서 낙도의 귀속에 관한 판단기준을 세웠으며, 이는 ‘광의의 국제법’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우산도(독도)의 귀속을 판단하면 우산도도 조선 땅이 된다. 그 후 조선정부는 울릉도와 우산도에 대한 영유의사를 계속해 관찬서에서 밝혔다. 또한 일본에서도 다케시마(울릉도)와 마쓰시마(독도)의 귀속을 판단할 기회가 수 차례 있었는데, 그때마다 일본정부는 두 섬을 조선 땅이라고 판단했다. 이 판단은 17세기의 판단기준대로였다. 그 판단기준은 양국에서 관습으로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해금정책으로 인해 한말에 우산도는 위치를 알 수 없는 전설의 섬으로 되었다. 이와 별도로 전라도 어민들에 의해 ‘독섬(독도)’이 발견되어 어렵에 이용되었 다. 이 섬이 1900년 칙령 제41호에 ‘石島’라는 한자 표기로 울도군 관할로 명시되었다. 이는 대한제국의 독도에 대한 주권 표시다. 독도는 무주지가 아니므로 1905년 일본정부가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했던 처사는 국제법에 위배된다. 위와 같이 독도에 대한 한국의 역사적・원시적권원이 계속 확인되었더라도, 국제법원에서는 분쟁당사국의 주장에 따라 조약 및 ‘우티 포씨디티스’ 원칙 등이 중요한 검토 대상으로 된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는 독도의 귀속에 대해 결론을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티 포씨디티스’ 원칙에 따라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이 확정된다.
        14.
        201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2014년의 ‘중·고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의 일부 개정안’ 발표 이후에 일본 중학교에서 실시되고 있는 독도 관련 교육의 실태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논문에서는 실제로 교육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지리 및 공민, 역사교과서의 기술내용의 변화를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2014년에 개정된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서는 일본정부의 견해가 교과서에 반드시 반영되도록 하는 교과서 검정기준에 따라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로 명기하도록 하였으며,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기술하도록 하고 있다. 이 러한 검정기준과 학슬지도요령 해설서에 따라 기술된 교과서에는 일본정부의 우경화된 영토정책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기존의 기술내용과 비교하면 거의 2배 이상의 분량을 할 애하여 독도에 대한 일본정부의 주장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 중학교 교과서의 독도 관련 기술 내용은 일본정부의 요구가 있기 전부터 선제적으로 우경화정책에 대응하 고 있었던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2014년에 개정된 검정기준은 이미 2011년에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들에 대한 사후추인적인 성격이 강하며, 2015년에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의 경우는 일본정부의 요구보다 더 우경화된 내용을 게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일본정부의 주도하에 2014년에 개정된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따라 2015 년 이후에 검정을 통과하고 간행된 교과서들은 독도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견해를 무비 판적으로 수용한 대대적인 대국민 홍보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15.
        201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에서는 식민시대 또는 전쟁점령 등에 의해 영토를 침탈(점령)한 국가들이 영유권 주장을 포기함으로써 침탈당한 국가에게 원래의 영토주권을 되돌려 준 사례들을 발굴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독도 관련하여 억지 주장을 해 온 일본의 영유권 주장 포기를 유도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담론을 주도하는 한편 일본의 억지 영유권 주장 포기를 유도할 수 있는 요인들을 도출해 보고자 하였다. 침탈한 국가들이 침탈한 영토를 되돌려 주거나 아니면 억지 영유권 주장을 포기할 경우 어떤 계기로 어떤 요인이 작용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독도의 경우처럼 억지 영유권 주장을 해 온 일본과 같은 침탈국의 억지 영유권 주장 포기를 유도해 낼 수 있는 정책적 시사점을 제시해 보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아시아, 중남미, 유럽, 구미 등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의 유사 사례들의 조사를 통해 20개의 영토갈등 사례들을 추출하였으며, 영유권 주장의 포기 및 침탈한 영토를 되돌려 준 요인 내지 배경을 경제적 요인, 정치적 요인 및 외교안보적 요인 등으로 구분하여 분석해 보았다. 분석결과 많은 사례들이 외교안보적 요인들이 적지 않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며, 특별히 미국-쿠바 간 후벤투드 도서영유권 사례 등 침탈한 국가의 국가적 결단에 의해 침탈한 영토를 되돌려 준 사례들도 일부 도출됨으로써 일본 등 억지 영유권 주장을 하는 침탈국가들을 대상으로 국제사회에 주는 시사점도 제시되었다.
        16.
        201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에서는 일본에서 말하는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서 죽도(독도) 활용실태에 대해 그것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검토하고자 했다. 일본정부가 죽도(독도)의 활용실태를 주장함에, 오키섬에서 죽도(독도)로 직접 가서 어로로서 죽도(독도)를 활용한 사실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죽도(독도)의 활용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이 처음 등장한 1640년대 이후의 문헌들을 검토해보면, 울릉도와 세트로 활용됐다고 제시되어 있다. 항해 기술의 문제로 20세기 초엽에야 이르러 비로소 오키섬에서 울릉도로 직접 왕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죽도(독도)는 한국의 울릉도와 일본의 오키섬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 두 개의 큰 섬을 연결하는 동선 상에서 활용되고 있었다. 그 점에 유의한다면 죽도(독도)를 역사적으로 축적되어온 죽도(독도)의 특성을 무시하고 그 동선 상의 어느 한쪽만 갈라놓아 주장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17.
        201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일본 정부는 1900년 칙령 제41호가 말하는 石島가 독도라 할지라도 한국이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했던 사실이 없어 한국의 독도 영유권은 확립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근본은 근대국제법에 있는데 이는 주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법이며 전쟁조차 합법으로 하는 등 약육강식적인 법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한국 등 ‘반미개’(半未開) 나라들에 대해서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여 자국의 권익을 확대시키는 도구로서 근대국제법을 이용했다. 한편, 한·일 양국 간에는 영토 문제에 관해 17세기에 국제적인 약속, 즉 ‘광의의 국제법’이 존재했다. 이는 ‘울릉도 쟁계’ 당시 양국이 교환한 외교문서들에서 구성된다. 양국은 외교 교섭에 의해 울릉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하고, 아울러 낙도(落島)의 귀속 판단 기준을 확인했다. 이 기준은 ① 어느 정부가 낙도에 영유 의사를 가지고 있는가? ② 낙도는 어느 나라에 가까운가? 라는 두 가지이며, 실제로 어느 쪽이 낙도를 지배했는지는 영유 결정의 요인이 아니었다. 그 후 일본에서 울릉도와 독도의 귀속이 몇 번이나 문제됐지만 1877년 태정관 지령 등에 볼 수 있듯이 그때마다 위의 기준이 잘 지켜져 두 섬은 한국 영토로 판단되었다. 위의 기준은 양국 사이에서 관습으로 되고, 독도는 광의의 국제법상 한국 영토였다. 그런데 일본은 청일전쟁 전후부터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등 제국주의 국가의 본성을 드러내는 가운데 광의의 국제법이나 영토에 관한 관습을 무시하게 되었다. 1905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해군 수송선에 큰 피해를 입은 일본은 독도에 망루를 비밀리에 세우는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 때문에 일본은 무주지선점론을 구실로 삼아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할 것을 내각 회의에서 결정했다. 하지만 이 구실로 삼은 어민 나카이의 독도 점령은 성립되고 있지 않았다. 또한 독도는 무주지가 아니었으며 광의의 국제법상 한국 영토였다. 따라서 일본의 근대국제법에 의한 무주지 선점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며 일본의 독도 편입은 무효다.
        18.
        201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1952년 이래 한국의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으며, 고유영토론, 선점론 그리고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 근거로 한 3대 권원에 대한 주장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오고 있다. 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영유권은 17세기 중반에 확립되었고, 1905년 각의 결정을 통해 재확인되었으며,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의해 국제적으로 공인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시계열상 1905년 선점론에서 시작하여 1952년 고유영토론을 경유한 뒤 최근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으로 무게 중심을 전환하는 과정속에서, 국제법상 요건의 충족 여부 문제로 환치 및 축소, 역사적 권원으로서의 사실에 대한 왜곡에 더하여 국제법상 법리의 정합성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을 통해 근본적으로 일제식민주의의 침략이라는 본질을 은폐하고자 하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일본의 주장이 국제정치적 역학관계를 바탕으로 이미 결정했거나 실행한 불법행위를 사후적으로 합법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자 명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요컨대,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메이지 유신이래 제국 형성을 위한 대외팽창적 침략정책과 연동됨으로써 1875년 운요호사건,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등 동아시아 전역에 걸친 일본의 침략전쟁 가운데 한국의 독도주권에 대한 침탈을 무주지선점이란 이름으로 합법화한 것이다. 그러나, 운요호사건을 통해 1876년 2월 26일 근대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에는 국경획정문제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보완한 태정관(太政官)의 1877년 3월 29일 결정으로 ‘독도 외 1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 외무성의 홈페이지에는 이러한 메이지 정부의 중대한 결정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1962년 7월 13일 한국에 보내온 일본의 의견서에는 오히려 “메이지 초기에도 일본 정부가 다케시마를 일본의 고유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선점론과 고유영토론의 이러한 상충적 한계를 전제로 최근 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영유권 주장의 핵심은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으로, 그 기초과정에서 독도의 이름이 누락되었으나 일본이 제공한 정보에 입각한 딘 러스크(Dean Rusk) 서한을 전제로 실질적으로 일본 영토로 남게 되었다는 논거 역시 일제식민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제기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성격이 징벌적 조약에서 냉전을 전제로 한 반공조약으로 전환됨으로써 1905년의 가쓰라-태프트밀약으로 상징되는 식민주의를 기저에 둔 독도주권 침탈행위의 합법화로 이에 대한 국제법적 불법성과 문제점의 규명이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일본정부는 1910년 한일강제병합 관련 조약의 경우 무력을 사용한 강박 하에 체결된 조약으로서 법적 효력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일제식민지책임의 면탈을 위해 ‘당시의 법’에서는 합법이라고 강변하고 있는 반면, 한일간 협약체제를 일탈하여 주장하고 있는 독도영유권은 선점론에서 시작하여 고유영토론을 경유한 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으로 무게중심을 전환해 옴으로써 국제법상 시제법의 적용에 있어서도 상충되는 법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전제에서 일본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는 일본의 독도영유권 논거에 대한 비판에 주목하게 된다. 고유영토론의 실체에 대한 부정론과 그 논거로서 인용되는 1696년 쓰시마번의 도해금지령 및 메이지 정부의 태정관지령을 비롯하여,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공포 및 관보 게재에 상충되는 시마네현의 독도 편입은 국제법적 효력이 부재하며,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논거로 제기되는 딘 러스크 서한 역시 1905년 일본의 독도편입 이후 일본이 제공한 제한된 정보에 입각하고 있는 점에서 법리적으로 무효인 것이다. 더욱이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의 ‘일본의 독도포기론’, 세리타 겐타로(芹田健太郎)의 ‘한국의 독도개방론’, 히로세 요시오(広瀬善男)의 ‘비식민지화 법리론’ 등은 모두 일제식민지책임을 전제로 한국의 독도주권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 반면, 독도 주변의 한일공동조업과 독도에 대한 배타적 경제수역(EEZ)의 기점의 불용(不容)을 동일하게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하게 된다. 일제식민지책임으로서의 독도주권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일본의 이익에 대한 사전적 보장을 전제로 하고 있는 해결방안의 타당성은 의문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전제에서 와다 교수가 제시하고 있는 ‘한국의 1948년 쓰시마 영유주장 철회’와 동일한 일본의 조치가 필요하며, 제1차 세계대전까지는 식민지배가 국제법상 합법이라는 주장과 관련해서는 아라이 신이치 교수가 제시한 바와 같이 일본이 한국을 강제병합해 간 시기의 국제법은 국가실행을 중시하는 법실증주의가 주류였던 19세기의 국제법과 달리, 보편적 국제규범에 입각하여 구미의 국제법에도 법의 규범성을 둘러싼 새로운 변화가 제시되던 시기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일제식민주의 침탈사의 연장선상에서 제기되고 있는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폭력과 탐욕’에 의해 약탈한 영토의 포기라는 가장 기본적인 식민제국주의의 역사적 청산과 배치된다는 점에서 일본은 21세기 동북아평화공동체 구축을 위한 진정한 국제법적 책무를 다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9.
        201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독도는 지리적으로 울릉도의 부속섬과 같은 위치에 있다. 역사적으로 일본에서도 독도를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보았다. 1690년대 안용복사건은 일본 에도막부에서 울릉도 도해금지령을 내림으로써 종결되었는데, 그 당시에 돗토리번에서 에도막부에 제출한 지도가 「소곡 이병위 제출 죽도지회도」(小谷伊兵衛差出候竹嶋之絵図)이다. 이 지도는 독도가 일본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판단할 때 사용된 지도이다. 그 후 명치시대에 들어 안용복사건 당시 조선・일본 양국간 외교교섭 결과를 한 번 더 확인하여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땅임을 확인하고 공시한 자료가 1877년의 『태정관지령』이다. 일본측에서는 『태정관지령』의 마쓰시마(松島)는 독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2006년에 공개된 부속지도 「기죽도약도」에 의해 『태정관지령』의 마쓰시마(松島)는 독도 라는 사실이 명명백백해졌다. 광복 후 일본을 점령통치한 연합국최고사령부는 관할지역과 어선조업구역 양면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영토로부터 분리하였는데, 관할지역에 있어서는 연합국최고사령부훈령 (SCAPIN) 제677호로, 독도를 일본영토에서 제외하고, 「SCAP관할지역도」로써 독도가 남한지역에 포함됨을 분명히 하였다. 1948년 8월, 그 관할지역 그대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에 인계됨으로써 독도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일본을 연합국의 점령통치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한 샌프란시스코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연합국과 일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독도문제는 다시 불거져 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샌프란시스코조약은 독도에 대한 언급이 없이 체결되었으나, 최근에 공개된 「일본영역 참고도」는 당시에 일본이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스스로 인정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독도를 한국 땅으로 그린 「일본영역참고도」를 샌프란시스코조약 조인 전에 일본정부에서 제작하여, 샌프란시스코조약 비준과정에서 동 조약의 부속지도로 썼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고, 국제법적으로 증거능력 · 증명력이 큰 공적인 지도를 대상으로 분석하면, 에도시대부터 샌프란시스코조약 때까지, 일본의 독도 영유권 판정과 관련된 4개의 공적 지도는 모두 독도가 한국 땅임을 표기하고 있거나, 독도가 한국 땅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중 연합국점령통치 기간 중의 「SCAP관할지역도」를 제외하고, 3개의 지도는 일본정부 스스로 제작한 지도로서, 일본정부 스스로 3번이나 독도를 한국 땅으로 인정한 근거가 된다.
        20.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태정관지령의 관련성을 간단히 논하면 다음과 같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2조 a항은 ① 독도에 대한 미국의 제한된 정보와 ② 1905년 이전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간주된 적이 없다는 두 가지의 점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하다. ① 울릉도 쟁계에서 일본이 독도와 울릉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을 인정했고, 태정관 지령이 이를 승계한 것이므로 적어도 1699년 이후 일본에 의해 독도는 한국의 영토 로 인정되어왔다. ② 아무리 양보를 해도, 적어도 1905년 일본이 독도 편입 조치를 취하기 이전에 까지 태정관지령은 계속 효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일본에 의해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이 인정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독도에 대한 한국의 관할권을 인정할 만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더라도, 일본에 의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이 인정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독도에 대한 한국의 관할권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③ 앞의 ①과 ②가 사실인 이상, 미국의 제한된 정보라는 것은 결국 1905년 일본의 독도편입조치 이후의 정보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1905년의 일본의 독도편입을 사실로서 전제를 하고 작성된 샌프란시스 코조약 제2조 a항에 대한 해석은 변경을 요할 수밖에 없다. 즉 제2조a항에 독도가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일본이 포기해야 할 섬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샌프란시스코조약 제2조 a항은 미국의 잘못된 정보에 의해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일본의 자기부정에 해당한다. 태정관 지령의 현재적 의미는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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