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성경의 일부 혹은 전부가 문학적 해석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는 관점에서 로마서에 기록된 사도바울의 자기 고백을 수사학적인 도구로 본다. 로마서 해석의 역사에서 바울의 개인적 고백이 담긴 7장 7-25절은 율법을 논하는 다른 부분의 내용과 문체적 차이를 보인다는 이유로 여담, 삽입, 낯선 내용으로 여기거나 혹은 바울이 저자가 아니라는 시각이 존재해왔다. 사도의 권위로 어렵고 중대한 율법을 다루는 담론에 지극히 사적인 고백이 들어간 것은 바울적이지 않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 논문은 그것을 본문에서 벗어난 내용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난해하고 논란이 많은 율법이란 이슈를 1세대 크리스천 커뮤니티가 이해하도록 생생한 일인칭 내러티브로 설명한 문학적 도구로서 필수 불가결한 본질로 본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우리가 이제는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을 보강하려고 사적인 고백을 사용한 것이다. 바울의 문학적 전략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같은 믿음 안에 들어오게 하여 그들이 교회 안에서 서로 포용하도록 도와주는 데 있었다. “율법이 죄냐?”는 그의 물음은 율법을 지켜야 하느냐 마느냐로 대립하고 있던 교회 안의 두 그룹 모두에게 던진 질문이다. 따라서 바울의 자기 고백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그리스도의 은혜 외에 율법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문학적 도구로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본 논문은 코로나19(COVID-19)의 출현으로 새롭게 재정립되는 한국 교회의 선교적 행보를 꿈꾸며, 교회의 본질에 대한 ‘선교적 교회’의 적합성을 논하고, 교회 공동체의 핵심 주체인 평신도들의 선교적 그리 스도인(missional Christians)으로서의 소명(calling, 召命)을 발견 한다. 이에 따라 대럴 구더(Darrell L. Guder)가 제시하는 ‘선교적 공동체’의 사도직을 한국 교회의 평신도들에게 접목시켜 선교적 증인 공동체의 올바른 선교적 삶을 모색해본다. 평신도는 목회자와 더불어 세상에 파송된 하나님의 선교 동역자로 목회자와 함께 사도직을 부여받은 존재이며, 교회와 사회를 연결해 주는 유일한 통로이다. 이것을 인식하는 교회는 기존의 방식, 즉 교회 내부 중심의 프로그램들의 획기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교회 지도층 들의 일괄적 프로그램 개발과 평신도들의 수동적 참여가 아닌, 평신도 들의 자발적 참여로 함께 만들어 가는 창의적 프로그램들이 요구된다. 따라서 교회의 핵심 주체인 평신도들이 세상을 향해 ‘증언의 도구’로 나아가 ‘세속적 임무(secular order)’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수 사도 공룡발자국 화석지는 많은 수의 공룡발자국 화석과 함께 공룡의 집단행동에 대한 연구로 잘 알려진 지역이다. 또한 다양한 종류의 지질유산 및 지형유산이 분포하고 있어 지질관광과 지질교육의 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지리적 위치에 따른 접근성, 조차에 의한 시간적 제약, 지속적인 풍화 및 훼손에 의해 학생들의 교육을 위한 야외조사는 매우 제한적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이번 연구는 최근 다양한 분야에서 이용되고 있는 사진측량법을 이용하여 사도의 공룡발자국 화석들의 3D 모델과 이미지를 생성한 후 이를 통해 과거에 확인하지 못한 화석에 대한 세부적인 정보를 확인함과 동시에 이를 교육자료로 활용 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하여 제안하고자 한다. 획득한 3D 이미 지를 통해 확인한 결과 기존에 육안이나 사진으로 확인하지 못하였던 일부 발자국 화석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고 기존에 발견된 화석이라도 사진이나 해석 드로잉으로 표현하지 못하였던 세부를 이미지로 나타낼 수 있었다. 또한 발자국 화석의 3D 모델은 향후 반영구적인 데이터로 보존할 수 있어 여러 형태로의 활용과 보존이 가능하다. 이번 연구에서는 사진측량법으로 얻어진 3D 모델을 활용하여 3D 프린팅 및 가상야외조사에 활용할 모바일 증강현실 콘텐츠를 구현하였으며 향후 3D 모델이 필요한 다양한 교육 콘텐츠 분야에서 사진측량법을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본 논문은 조지 헌터가 말하는 사도적 교회의 의미와 내용이 무엇인지 해명하고 헌터 자신이 사도적 사역의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한 존 웨슬리의 사역이 실제로 헌터가 말하는 사도적 교회의 특징들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를 검증하고자 한다. 헌터는 불신자들을 향한 복음 전도에 강한 소명의식을 느끼고 기존의 종교적 제도와 관습을 뛰어넘어 불신자들의 문화에 성육신하는 방식으로 다양하게 선교하는 교회를 사도적 교회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10가지 특징을 제시하였다. 이 10가지 특징은 다시 좀 더 큰 4개의 범주 곧 말씀과 기도, 불신자들에 대한 사랑과 복음 전도, 소그룹 중심의 사역과 목회적 돌봄, 평신도 사역의 활성화로 재구성할 수 있다. 이런 지표에 따라 존 웨슬리의 사역을 분석해 보았을 때 그의 사역은 대체로 이 10가지 특성을 모두 반영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웨슬리의 사역은 헌터가 말한 사도적 사역의 전형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선교적 교회에 관한 논의와 실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선교적 교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평신도들의 정체성과 역할은 충분히 연구되지 않고 있다. 선교적 교회의 평신도들은 자신의 사도적 정체성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이웃과 지역사회, 직장을 포함하는 일상적 삶에서 하나님의 선교적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해야 한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신앙의식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살펴보고, 신학적인 관점에서 사도직의 의미를 탐구하고, 실천적으로 평신도 사도직이 어떻게 현장에서 전개되는지를 논하였다. 한국교회에서 평신도들은 수동적이고 단순히 예배당 중심적인 신앙생활에 익숙하며, 선교적 사명의식이 빈약한 편이다. 이런 문제의 근원에는 성직주의와 성속 이원론이라는 왜곡된 신학적 관념이 있다. 이 두 가지 신학적 관념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사도직이 오직 목회자들에 게만 부여된 것일 뿐 자신들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성경적으로 열두 사도와 기타 사도들의 사역을 살펴볼 때, 사도직 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명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보편적 사도직의 관점에서 사도직은 근본적으로 어떤 직위나 인물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에 속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반면에 은사로서의 사도는, 그것이 희생과 모험을 필요로 하는 일이든지 일상적 삶에서의 복음증거를 뜻하든지 간에,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사도적 교회는 이런 사도직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의 선교적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평신도 사도직을 올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선교적 부르심이 단지 목회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 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된다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그들의 사도직은 일상적 생활로부터 사도적 사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다.
이 연구는 남명의 신명사도에 나타난 인간 마음의 특징과 그 작용에 대한 관점을 인간정보처리론적 학습심리 관점에서 학습심리적 함의를 고찰하는 것이 목적이다. 우선, 신명사도의 의미와 인간정보처리론과 정보처리모형을 살펴본 다음, 신명사도의 학습심리적 요소와 정보처리모형을 상호 비교해 볼 것이다. 그럼으로써 신명사도가 지니는 학습심리적 함의를 인간정보처리 론에 기초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신명사도는 외부의 자극에 대한 마음의 작용을 통해서 실천적으로 나타나 는 행동을 표현하는 그림이다. 구조적으로는 원곽, 원곽내, 그리고 하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신체적으로 눈·귀·입, 두뇌 및 마음, 몸으로 구성되어 있고, 기능적으로는 정보수집, 인지과정, 몸의 행동으로 작용한다. 또한 신명사도는 인간정보처리론적 학습심리의 관점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러한 관 점을 밝혀냄으로써 본 연구는 서구의 학습심리 이론보다도 무려 400여년이 나 앞서 교육에 활용되었다는 점을 구명했다는 측면에서 연구의 의의를 찾 아볼 수 있다.
신명사도를 인간정보처리론적 관점에서 고찰해 볼 때, 드러낼 수 있는 학 습심리적 함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학습자의 내적 인지과정을 이해할 수 있 는 학습심리모델을 제시하였다는 점, 둘째 인간의 학습과정에 있어서 효과 적인 학습방략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 그리고 셋째 학습자를 능동적인 정보 처리자로 간주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은 우리나라 대표적 사상가이며 대학자인 남명의 신명사도에 근거하여 오늘날 유아기 인성교육에 적합한 수업모형을 탐색하는 데 있다. 신명사도에 근거한 본 수업모형은 남명의 실천사상을 통해 개인의 감정 존중과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자기실천화를 고양시켜 조화로운 인성발달로 연결하는 전인교육의 함의를 제시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역사적 인물을 통한 정체성있는 인성교육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유아기 전인발달을 도우는 인성교육의 현장연구로 연결될 것이라 기대한다.
헬라 철학에서 유래된 영지주의 사상들은 초대교회시 이미 여러가지 초기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으나 본격적인 사상체계를 갖춘 영지주의의 존재를 입증 할 수 있는 문서는 오늘날 까지도 없다. 다만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는 이 천년 기독교역사 가운데 강한 영향력이 있는 이교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떠한 체계화를 통해 그런 지속성을 갖게 되었는지를 추론해 보고자 한다. 물론 각자의 독창성을 발휘하는 특색이 있었던 반면, 이러한 다양한 영지주의의 사상들을 관찰해 보면 어떤 패턴처럼 공유된 연속성을 이레네우스는 가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나름대로 다양한 영지주의 창시자들이 주장한 교리적 연속성과 특성들을 정리 하는 카달록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각양 기독교적 영지주의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모든 이교들은 싸이몬 마구스를 비롯하여 발단 되었으며, 싸이몬의 측근에서 메낸더가 그의 후계자로 등장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두사람은 각각 초창기 시절의 원동력을 일시적이나마 카리스마적인 구세주의 역할로 구심점을 이뤘다면, 다음세대의, 그리고 지속되는 영지주의란, 그 이상, 아니면 그 외의 것들을 갖추었을 때 지구력이 있는 종교로 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케린투스가 주장하는 교리내용은 그 당시 신비적인 부분을 적당히 갖추었던 헬라 문화가 실질적인 신인관계를 표출하는 스토리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케린투스가 영지주의를 다분히 지속성이 있는 종교가 되도록 했다면 결국 두 가지 중요한 패러다임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도케티즘의 구세주 (Docetic Savior) 와 영지주의적 부활 (non-bodily resurrection)이다. 영지주의에 있어서 이러한 패러다임의 가치는 그 뒤에 오는 싸터나이너스 와 벨렌티너스가 ‘divine spark’나 ‘divine seed’를 통해 영지주의적 부활을 설명 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본격적인 영지주의로 전개 해 나가기 까지는 케린투스가 초석을 마련 했다는 점이다. 케린투스가 싸터나이너스에게 직접 영향을 미쳤다는 언급은 없으나, 이레네우스의 ‘이단반박’에 따르면, 두 사마리아 출신인 싸이몬과 그의 후계자 메낸더가 유사했고, 케린투스와 싸터나이너스는 소아시아의 동시대의 영지주의의 리더였으며, 그들은 유대교적인 뿌리의 특성을 갖춘 인간론, 도케티즘적인 기독론, 그리고 도덕적인 강조점 등이 있음을 볼수있다. 그외에 ‘사도서신’ 은 싸이몬 과 케린투스 두 사람만을 명시 하고 있는데, 싸이몬 이후의 케린투스의 비성서적 부활의 가르침을 경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같은 입장을 강화하고 있다. 이와같이 케린투스의 독창적으로 계발한 두가지의 결과는 영지주의의 지속성을 기인 했을것 이라는 개연성을 갖는다.
본고에서는 한말의 위기 상황에서 경상우도의 사림집단이 어떻게 그들의 사상을 定位를 확보해 나아갔는가를 후산 허유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后山을 포함한 寒洲學派에 대한 연구는 그렇게 활발하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한주학파 는 한말의 위기상황에서 퇴계와 남명의 사상적인 융합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정신 을 이끌어 내고자 치열하게 고민한 지식인 집단이다. 후산은 그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이다. 그는 남명사상과 퇴계사상을 그의 고유한 심즉리설을 통하여 통합해 보 고자 하였다. 그의 신명사도혹문 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는 남명의 신명사도를 주리론적 형식 속에서 해석함으로써 아 세계에 대한 심의 主宰的권능을 확인하 고자 하였다. 아울러 그는 퇴계의 理發說을 더욱 밀고 나가 分殊속에서 작동하 는 기의 의미를 축소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논의는 이미 상당 부분 양명학 적 요소를 잉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사회정치적 함의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后山許愈(1833-1904)가 살았던 조선말기는 李震相․朴致馥․趙性家․金麟 燮․崔琡民․鄭載圭․金鎭祜․郭鍾錫등이 진주 인근에 포진하여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학문적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후산은 李滉․金誠一․李玄逸․李 象靖․柳致明의 학맥을 이은 李震相의 문인이므로 외견상 퇴계학맥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10대조는 南冥曺植(1501-1572)의 門人이고 9대조와 8 대조는 모두 남명 私淑人이어서, 후산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명학파의 학문적 전통 을 이미 이어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겉으로 남명학파는 사라지고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의 학문이 강우 지역에 깊이 젖어든 이때, 후산이 남긴 神明舍圖銘或問이란 글을 중심으로, 남명학파의 후 예로서 그가 추구하였던 남명학 계승 정신과 그 의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후산이 1889년에 신명사도명혹문 이란 글을 지은 것은 남명 학문의 핵심을 闡 發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비록 이진상의 문인으로 서 퇴계학맥에 해당하면서도, 자신의 선조가 대대로 남명학파였기 때문에 자신이 당대의 남명학파 중진 학자들의 견해를 집대성하여 이 글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후산은 이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광범위하게 수집하 려 노력하였고, 이를 수용하거나 수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간에 이를 오직 논리에 따라 해결하려 하였다. 특히 쟁점이 되었던 부분은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 될 수 있다. 첫째는 神明舍銘註說의 刪削문제이다. 둘째는 神明舍圖교정 문제이다. 셋째는 신명사명 ‘動微勇克' 아래에 있는 自註‘閑邪'의 해석 문제이다. 넷째는 신명사도 의 ‘國君死社稷'의 의미 해석 문제이다. 다섯째는 신명사도 하단 止圈좌우의 ‘必至․不遷'의 위치 문제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학자들 사이에 첨예하게 대립되는 견해가 있기도 하여 매우 번 다하고 수용하기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후산은 발표한 지 1년이 지난 1890년 무렵 에 이를 거의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후산은 남명의 노장적 면모보다 는 성리학적 면모를 드러내려 하였고, 이는 자신이 퇴계학맥을 이은 학자이면서 남명학파이기도 하다는 데서 학문적 절충을 시도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 후산의 이러한 노력이 가져다 준 부수적 효과는 남인 학자들과 노론 학자들 사이에 남명 학파적 유대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1930년대 단성 지역에서 진행 되었던 남인과 노론 학자들 사이의 年例討論모임이 이루어진 것과 무관하지 않 기 때문이다.
Development of the Neo-Confucianism during the Chosen dynasty begun to get attention among international scholars since about three decade ago. Cho Sik (Nammyung, 1501-72) was one of the two most distinguished Neo-Confucian scholars at the sixteenth century with Yi Hwang (T'oegye, 1501-70). However, Cho Sik' scholarly achievements in the Neo-Confucianism had been neglected due to political reason during late Chosen dynasty. It was continued up to late 20th century.
Recently his contributions to development of Korean Neo-Confucian studies were rediscovered by new generation. His academic works written in classical Chinese had been newly translated into modern Korean and several research institutes for Nammyung studies had initiated international academic conferences on his works and their contributions to Korean intellectual community.
『 Diagram and Inscription of Shin-myung-sa』 is one of his most important works for understanding of his scholarly world-views. I have examined this work in terms of Dae-dae cultural grammar, my model of analysis on traditional Korean culture. The diagram and Inscription could be seen as the most representative summary of his life long search to understanding Sung and Ming Neo-Confucian traditions and their realization in the Chosun (Yi) dynasty. Two fundamental concepts he focused in the search are kyung and ui . In the diagram and inscription they are neatly explained how to practice in state rule and scholar's daily living. This paper shows that Dae-dae cultural grammar underlie 『 Diagram and Inscription of Shin-myung-sa』consistent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