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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동시대 미술에서 나타나는 아카이브의 형식을 통해 개인의 차원에서 역사를 반추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아카이브는 단순히 기록 보관소의 역할을 넘어서 사적인 기억을 재편하고 가상의 서사를 전개하는 데 두루 활용되고 있다. 또한 선형적인 시간성을 의도적 으로 흐트러뜨려 본래와 다른 맥락을 만들어내며 현재를 과거와 매개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렇게 선별된 것들은 탈맥락화의 과정을 거쳐 임의적이고 가변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작업은 개인이 집단과 맺게 되는 관계에 질문을 던지고 흩어진 과거의 흔적을 재구성하여 비공식적인 역사로 다시 쓰려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본인과 마르셀 뒤샹, 아크람 자타리의 작품을 사례로 분석하여 대안 서사의 개념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결국 이 논문은 수집과 배 열의 방법론을 통해 과거의 잔해를 발굴하고 새로운 형태로 복원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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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3.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전쟁 결정 원인으로서 역사적 필연성 사고 체계에 주목하였다. 이에 대하여 냉전 시기 소련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 우선 본고는 전쟁 결정 여부를 설명하는 데 있어 타자와의 관계 인식을 양립불가성 또는 공존불가성에 기반한 관계로 분류할 수 있는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인식론을 분석틀로 제시하였다. 이 중에서 후자가 전쟁 결정을 야기시킬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본고는 소련의 역사적 필연성 인식을 살펴보았 다. 냉전 시기 소련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진영과의 전쟁불가피론과 필 연적 승리론을 채택하였으나, 흐루쇼프 시기를 기점으로 이를 폐기하고 전쟁가피론을 수용하였다. 더 나아가 본고는 소련이 미국과의 전쟁에 대 하여 새로운 역사적 필연성 인식을 가졌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에 대하여 소련이 전쟁 대신 체제 경쟁을 통해 미국을 이길 수 있다고 판단 하였으며, 핵무기의 등장으로 전쟁은 궁극적으로 공동 멸절을 가져올 것 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필연성의 확립으로 인해 소련의 전쟁불가피론에서 전쟁가피론으로의 사고 변화는 불가역적 속성을 갖는다는 결론을 도출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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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9.1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한국 사회에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은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 대하여 사회 전반에 반성을 이끌었다. 그동안 한국의 전통 사회는 유교 전통의 강한 가부장 주의적인 성격으로 여성을 억압해왔고, 여성은 시대에 종속된 모습으로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 한국 사회에 개신교는 여성을 거듭난 존재와 새로워진 정체성을 가지게 하여 시대를 주도하는 존재로 인식시켰다. 초기 한국 교회의 여성들은 개인적 차원을 초월하여 타자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한국 사회를 치유하려 는 선교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여성들은 근본주의적인 교회 안에서 차별을 기억하고 경험하였다. 한국 개신교 여성은 그들만의 유연함으로 한국 교회의 경직된 문화를 품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이 시대의 사명을 가지고 억압과 차별이 만연한 사회를 변화시켜가고 있던 것이 다. 또한 부당한 처우에도 이 시대를 품고 보듬어 가는 여성들의 사랑은 한국 개신교 역사에 존재하는 그들의 인내와 헌신을 통하여 갈등과 차별을 초월한 모습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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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7.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의 목적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출간된 역사지도책에 반영된 한국의 영토, 일본의 의도, 그리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인식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일본역사지도(日本歷史地圖)」와 이 책의 증보판인 「신편일본역사지도(新編日本歷史地 圖)」의 편저자인 시바 카츠모리(芝葛盛), 당시 시대상 및 간행 배경 등에 대해 알아보고, 두 역사지도책의 내용 구성방식을 비교·분석 하였다. 이어서 두 역사지도책에서 우리나라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연구 결과,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두 역사지도책에 수록된 지도의 스케일이 확대되었으며, 일본이 역사지도를 통해 한반도 지배에 대한 역사적 정당성을 추구하였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즉 일본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역사적 연속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한반도가 일본의 대륙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또한 일본은 우리나라를 ‘조선’으로 인식하였는데, 울릉도는 물론 독도까지 조선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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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1.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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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1985.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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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8.10 KCI 등재후보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변화하는 사회에서 유아의 정체성 교육의 일환으로 역사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에서 자녀에게 유의미한 유아기 자녀를 둔 아버지들이 유아역사교육에 대하여 인식하는 바와 이에 대한 교육의 실제를 조사하기 위하여 시행되었다. 이를 위해 설정한 연구문제는 유아역사교육에 대한 아버지의 인식은 어떠한가?, 유아역사교육에 대한 아버지의 교육실제는 어떠한가? 이다. 이를 위해 J시의 만 3-5세 유아 아버지 348명을 선정하여 설문지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연구도구로는 권이정과 김나림(2018)의 도구를 사용하였다. 수집된 자료는 빈도와 백분율, 교차분석, 상관계수로 분석하였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버지들은 역사교육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였으며 역사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높았다. 역사교육의 실시 시기로는 만 6~7세가 가장 많았으며 답사나 실물교육을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둘째, 유아역사교육의 실제로, 아버지들은 대부분 가정에서 역사 활동을 실시하고 있었으며, 명절이나 놀이를 통해 교육을 하고 인터넷 컨텐츠를 참고하여 활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아버지들은 온라인 형태의 역사교육을 받는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본 연구의 결과를 기초로 아버지를 위한 역사교육 컨텐츠를 개발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며 이는 유아의 올바른 역사적 태도와 가치관 형성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9.
        200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각종 매스컴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의 학습 방식이 여학생에게 유리하여 남학생이 남녀공학을 기피한다는 보도가 있다. 이런 경향을 반영하듯, 수학과 과학, 언어에서는 남녀 학생의 학업 성취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쌓이고 있다. 그러나 역사분야에서는 이런 연구가 아직 미비하다. 따라서 학교 현장에 있는 역사교사는 남녀학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고 15명의 역사교사와 301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과 인터뷰를 통해 성별에 따른 학생 인식을 알아보았다. 조사 결과 교사와 학생이 성별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짧은 기간이든 오랜 기간이든 학교에 있는 교사는 남녀 학생의 차이를 인정하는 듯하다. 그러나 학생들은 역사 수업 중, 남녀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다. 학생들이 남녀 성별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이런 점을 감안하여 역사교사의 성별 인식에 대한 사고 전환이 필요하다.
        10.
        2007.02 KCI 등재후보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유아역사교육에 대한 유치원 교사의 인식 및 실태가 어떠하며, 이는 교사의 경력에 따라 차이가 있는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연구 대상은 유치원 교사 780명이었으며, 연구도구인 질문지는 4범주 24문항으로 구성하였다. 이를 기초로 유아역사교육의 필요성 및 목적에 대한 인식, 내용에 대한 교육실태, 교수-학습방법에 대한 활용실태, 지원 및 문제점에 대한 실태를 알아보았다. 자료의 처리는 문항별로 빈도와 백분율을 산출하였고, 교사의 경력에 따른 집단 간의 차이를 알아보기 위하여 χ²검증을 실시하였다. 연구결과를 기초로 유아역사교육에 관한 지원과 연구, 교사교육 방안 등을 논의하였다.
        11.
        200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독도에 대한 역사ㆍ지리적 인식을 밝히기 위해서 마련되었다. 이 연구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본 논문에서는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문헌 자료와 구전 자료, 그리고 지도들을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얻은 성과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에서는 역사적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하나의 세트로 인식하여 왔는데,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독도에 대한 실체를 별도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둘째 한국은 일찍부터 울릉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일본은 상대적으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지식을 근대에 들어서 가지기 시작하였다. 셋째 한국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울릉도는 울릉도로, 독도는 우산도로 인식하였으며, 이들 두 섬에 대한 위치와 크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졌다. 한편 일본의 경우는 이들 두 섬의 명칭부터 혼란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정확한 지식을 가졌다고 보기 어렵다. 넷째 일본은 독도가 무주지였기 때문에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무주지는 생활권을 함께 하는 곳에 속한다는 원칙에 따라, 울릉도에 속한 섬이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을 구명하였다.
        12.
        200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 16th century was a epoch-making time in the intellectual history of Korea because of the appearance of two greatest scholars, Nammyeong(南冥) Jo Sik(曺植) and T'oegye(退溪) Yi Hwang(李滉) who were leaders for the direction from the time forward in the intellectrual history of Korea. The difference of academic thinkings and political ideas between them clearly exposed at the beginning was one of the origins of the prosperity from 16th to 17th century in our intellectual history as their disciples were founding principal schools. On the other hand, it also brought about such serious matters as the start of confrontations and discordances between two leading schools. As Nammyeonghakpa(南冥學派) went on disorganization as a school after 17th century as well as downfall in the political world, it had been intensively under political oppression other than T'oegyehakpa(退溪學派) even in the political position similar to it within the political world. But, the negative understandings and evaluations of Nammyeonghak(南冥學) or Nammyeonghakpa in the next generation had virtually started from the discordance and conflict with T'oegye in academic thoughts and political ideas. Yi Hwang who considered as his own duty to restore the soˇngnihak(性理學) because of his awareness of the time being as a corruption conflicted undoubtedly with Nammyeong and his school, by bringing up the dispute of deviation from soˇngnihak's orthodoxy in the academic thinkings of Jo Sik made a difference with him. It also meaned the open of harsh criticism or denial against Nammyeonghak and its school. Such criticisms or negative opinions for Nammyeonghak grew in place after the severe criticisms for Chong Yinhong(鄭仁弘) who was a follower of Jo Sik. The typical critic was the Noronpa(老論派) of soyin(西人) from Yulgok(栗谷) Yi I(李珥) to Taekdang(澤堂) Yi Sik(李植). Especially Yi Sik among them tried to build the foundation of political justification by giving a criticism for Nammyeonghakpa including Chong Yinhong. Along with it, he also tried to give a harsh criticism in a full scale against Nammyeonghak through his large number of writings. After the members of Noronpa of Soyin were influenced by or followed his critical opinions, it ended up to the peak of criticism in the line of Nong'am(農巖) Kim Changhyup(金昌協) and his disciples. Kim Changhyup took a strongly critical and negative position other than Song Siyeol(宋時烈), his master, had a flexible position against Nammyeong. In the end, his negative opinions spreaded out and developed into an intensive criticism in the line of Chong'am (正庵) Yi Hyeon'ik(李顯益) who was his loyal disciple. However, in spite of the harsh journey of Nammyeonghak which had been denied even the worth for its being in history, it came to be a comeback because of its revaluation movement by the scholars of Kyeong sang Namdo(慶尙南道) province in 19th century. As it was in the 19th century of the crisis era, a group of scholars in the province started the revaluation movement of Nammyeonghak and its actual values. The movement was growing much more and continued steady to 20th century. Those flows of Nammyeonghak in the intellectual history of Korea became one of the principal reasons of understanding newly of the merit of Nammyeonghak and its reappearance. In brief, still within such continuous circumstances in crisis up to now, we started to revaluate the worth for Nammyeonghak's being as the valid thought even in our 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