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중국 상산시 청산관, 백양욕, 희봉구 관광지구 등 총 15개 지구를 대상으로 만리장성 유적지 의 공간활력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분석하고 공간활력 평가방법을 수립하여 관광지구 개선에 기초 자료를 제공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연구방법으로는 첫째, 여가활동 관찰기법(SOPARC)을 활용해 탐 방객의 활동특성을 관찰·분석하였다. 동시에 인간·시간·공간의 3차원적 접근방식을 통해 ArcGIS 핵밀 도 추정 알고리즘(KDE)을 이용하여 만리장성 유적 관광지의 활력특성을 분석하였다. 둘째, 탐방객을 대상으로 공간, 편의시설, 동선, 건축 및 자연경관, 역사 문화, 문화 활동 등 15개 항목에 대해 5점 리커트 척도로 설문조사를 수행하였다. 셋째, 전문가 대상 델파이법과 계층분석법(AHP)을 통해 공간지표를 선정하고 지표의 가중치를 설정하여 대상지의 공간활력을 평가하고 활력도 제고를 위한 지침을 마련 하였다. 연구결과는 첫째, 만리장성 유적 관광지의 공간 이용자 중 젊은 층이 절대적인 비율을 차지하였 다. 또한 접근성이 좋고 시설이 잘 갖추어져 공간의 규모가 적절하고 자연경관과 문화경관이 우수하며, 문화활동이 다양하고 활발한 관광지일수록 이용자 간의 혼합도가 높았다. 공간기능이 다양한 관광지 는 공간활동의 다양성도 더 높았다. 둘째, 관광지의 활동 피크 시간대는 주로 오전 10시에서 12시,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로 나타났으며, 미기후가 쾌적한 관광지에서는 피크 시간대의 활동빈도가 더 높았다. 시설이 잘 갖추어지고 관리가 잘된 공간일수록 활동변동이 적었으며, 경관이 아름답고 문화환경이 우 수한 공간에서는 활력이 오래 지속되었다. 셋째, 주변 인구밀도가 높고 역사요소가 잘 보존되며, 유지 관리가 우수한 관광지일수록 공간 활동빈도가 높았다. 또한 특색 있는 지역산업이 발전하고 상업활동 이 활발하며, 공간의 기능이 다양한 경우 공간집적도가 더 높아진다는 결과를 확인하였다. 넷째, 사례 연구 결과와 만리장성 유적 관광지의 특성을 결합하여 자연환경, 산업공간 기능, 시설 서비스, 문화 및 경관 등 4가지 주요 영향요인을 도출하였다. 델파이법을 통해 1개의 목표층, 4개의 1차 지표, 9개의 2차 지표 및 29개의 3차 지표로 구성된 만리장성 유적 관광지의 공간활력 평가모델을 수립하였다. 이를 토 대로 계층 분석법을 통해 공간활력 평가지표 시스템의 가중치를 결정하였으며, 가중치는 문화 및 경관 활력(45.12%), 자연환경 활력(26.09%), 산업공간 기능 활력(16.89%), 시설 서비스 활력(11.9%) 순으로 나타났다. 이는 관광지의 공간활력을 조성하는 데 있어 문화와 자연경관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 한다. 다섯째, 연구를 통해 도출된 평가지표와 대상지의 현황을 종합하여 만리장성 유적 관광지의 공간 활력 5단계 평가등급을 정의하였다. 각 요인 항목에 점수를 부여해 최종 활력값을 도출할 수 있었으며, 이 값은 공간의 활력정도를 정량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실제 검증을 통해 구축된 평가 시스템과 5단계 평가등급은 신뢰성이 높았으며, 만리장성 유적지의 공간활력 평가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했음을 확인하였다.
충주 호암동유적은 금강유역과 남한강유역, 낙동강유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하고 있는 데, 적석목관묘는 기원전 2세기 초, 목관묘 2기는 기원전 2세기 전·중엽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과학적 분석 결과, 호암동유적의 청동기들은 구리-주석-납의 3원계 합금으로 추정되며,『주례』고 공기의 금유육제와 비슷한 비율로 주조되었다. 이는 호암동유적의 청동기들이 기능과 용도에 따라 적 합한 성분조성비로 주조되었음을 나타낸다. 납동위원소비 분석을 토대로 한 원료산지추정 결과 중국 북부산 4점, 남한3지구산 10점, 남한2지구산 6점으로 추정되어서 청동원료가 넓은 지역에서 수급되 었음을 보여준다. 충주 호암동유적은 세형동검문화의 중심부인 중서부지역과 원료산지인 남한2지구(강원 동남부-경 북 동북부지역) 사이에 자리해서 무덤 피장자들이 청동원료를 수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세형동검문화가 일본열도로 파급되는 시기는 호암동유적의 유이식동모보다 늦은 시기로 추정되므로 발전Ⅰ기 말보다는 발전Ⅱ기 초로 생각된다. 호암동 적석목관묘의 무기류는 “원격전용 투사무기+근접전용 단병충격무기(세형동검)+근접전용 장병충격무기(동모·동과)”조합 을 이루고 있어서 충주지역이 군장사회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무기조합이 원삼국시대 토 광묘로 이어지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현재 관광 산업과 문화 사업이 번성하는 대배경 하에, 유적지 기념 경 관의 가치는 국가 문화 공원 건설 과정에서 더욱 돋보여야 한다. 본 연 구는 문화 경관 이론의 관점에서, 쓰촨 원촨 대지진 유적 공원을 기념 관광 고전 지구로 삼아 연구 대상으로 하여, 유적 기념 경관에 대한 관 광객 지각의 구조 방정식 모델을 구축한다. 설문조사를 통해 관련 수칙 을 얻고 분석하였다. 연구 결과, 지각된 가치가 관광객 만족도와 긍정적 인 상관관계가 있으며, 만족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충성도에 영향을 미친 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각된 품질과 전체 이미지는 지각된 가치의 중요 한 요소이며 서로 영향을 미친다. 지각된 품질은 경관, 교육, 서비스의 3 가지 차원을 포함하며, 유적지 본체 외에도, 관광객들은 경관 조각, 경관 장치, 상징적 경관, 문화 창조 제품 및 교육 체험에 대한 지각이 높아, 지각된 가치를 향상시키는 중요한 요소이다. 전체 이미지는 인지 및 감 정의 2가지 차원을 포함하며, 지각된 가치를 통해 간접적으로 충성도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사례 지역에서 관광객 지 각을 향상시키기 위한 대책 및 제안을 시도하였다.
대구 숙천동 유적은 대구지역에서 처음으로 확인되는 청동기시대 고지성 취락유적으로 볼 수 있다. 기존 청동기시대 후기 점토대토기가 출토되는 연암산유적이나 침산유적이 주변 평지와 비고차가 적지 않으면서 특별한 입지조건으로 인해 주목받기는 했지만 고지성 유적으로 분류되지는 않았다. 이번 숙 천동 유적은 두 개의 구릉 정상부가 해당되는데 각각 해발 약 196m와 해발 155m이며 주변 평지와의 비고가 최고 130m에서 최저 80m에 이르며 남쪽 금호강 주변 일대 평지가 한눈에 조망되는 최적의 입 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정상부에는 원형점토대토기편과 무문토기편이 수습되었는데, 석기는 전혀 확인되지 않아 다량의 석기가 출토된 연암산유적과 비교가 된다. 향후 정식조사가 이루어져 취락의 양 상이 밝혀진다면 청동기시대 후기 대표적인 고지성 취락인 보령 교성리와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용인 영문리유적 출토 편주형 석도 5점에 대한 사용흔을 분석하여 그 사용 방식을 추정하였다. 분 석 결과 아래쪽 날에 대해서는 기존의 사용 방식을 다시 한 번 입증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사용법은 오른손 중지에 끈을 연결하여 석도를 잡은 다음, 엄지로 벼과식물을 석도에 밀착시키고 검지로 누르 면서 손목을 비틀어 이삭을 따는 형태로 복원되었다. 측면 날에 대한 분석에서는 날을 따라 분포하는 발달된 벼과식물 접촉 광택, 날과 같은 방향의 선상흔 등이 관찰되어, 수확 후 짚 확보나 잡초 제거를 위해 날과 평행하는 방향으로 석도를 움직여 여러 줄기의 벼과식물을 한 번에 자르는 용도가 상정되 었다. 또한 앞뒷면 광택 발달 정도의 차이에 따라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의 사용을 구분할 수 있었으 며, 구체적인 사용법으로 직접 석도를 손에 잡고 다른 손으로 벼과식물의 윗부분을 잡은 다음 작업자 의 몸 쪽으로 석도를 당기면서 절단하는 방식이 추정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을 통해 편주형 석도 가 수확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두 가지의 다른 작업에 대응 가능한 다목적 도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강 유역에 위치한 진주 대평리, 평거동, 초장동 등 대규모 유적의 분묘 경관을 통해 취락 안팎의 구조와 상호작용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분묘의 가시 경관과 취락 영역 간의 관계를 추론하였다. 이 는 분묘에서 바라본 시각적 체험 경관은 사회구성원들이 일상에서 인식하고 있었던 영역이며, 취락의 정치적·경제적·이념적 영역과 직접 관련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 가시권분석 결과, 대규모 취락의 가시권은 대체로 반경 5km에 해당하며, 서로 가시권을 공유하지 않는 배타적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이를 통해 국지적 단위공동체는 각기 독립적인 영역을 유지하며 상호작용하는 등질적인 구조 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취락 내부의 경관은 분묘군을 중심으로 차별적이고 역동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는 분묘의 군집 유형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Ⅰ유형은 대형 묘역지석묘 주변에 분묘군이 조영된 것으로, 선대 권력을 상징하는 지석묘 주변에 분묘를 환상이나 열상으로 배치하여 전통적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던 경관 조성 전략이 작용한 결과로 이해된다. 특히 이 분묘군은 취락 안팎에서 상시 체험 가능한 현저한 곳에 축조되어 있어 구성원들의 시선과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는 지배적 경관을 구성하고 있 었다. Ⅱ-1유형은 생활 공간에 분묘를 열상으로 배치하여 이를 매개로 공동체성을 강화하려는 의도 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Ⅱ-2유형은 농경지 경계면에 분묘를 축조하여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 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Ⅲ유형은 분묘들의 장축이 상호 교차하는 군집으로, 무덤의 공간 순서 변 경을 통해 사회 질서의 변화를 추구하였던 행위자의 표현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군집 유형은 모든 대규모 취락에서 일률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취락 내부의 공간적 맥 락을 통해 볼 때, 분묘는 단순히 매장시설이 아니라, 유력자들이 권력 관계를 합리화하거나 재조정하 고 구조화하는 사회적 행위 공간이었다. 이러한 공간 조성은 각 취락의 물리적 환경과 구성원들의 경 관 해석에 영향을 받았으며, 분묘 축조를 주도하였던 주체들의 공간 구현 전략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 로 나타났다. 남강 유역 대규모 취락의 분묘는 각 사회-공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 차별적 경관 을 구성하고 있었으며, 권력과 공동체성을 대표하는 의미화된 장소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청동기시대 전기의 방형계 주거지는 당시 사회의 가족 구성의 결과물이며, 그 형태적 변이는 가족 의 발달과정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또한, (세)장방형 주거는 복수의 방형(단위)주거가 병렬적으로 연결된 형태이며, 그 단위주거는 핵가족의 주거공간이라는 추정 또한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많은 연구자들이 장단비가 시간성을 반영한다는 관행적 판단에 기초하여, 한 유적에서 공존 하는 장방형 주거지와 방형 주거지의 관계를 단지 시기적 차이로 해석함에 따라 주거의 변이에 대한 여러 요인―가족의 발달에 따른 주거 규모의 변화, 주거의 사용(신축과 증ㆍ개축)과 폐기 등―의 이 해를 저해하는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 극복을 위해, 한강 하류역 청동기시대 전기 취락 유적들의 양상을 분석한 기 초자료를 바탕으로 가족 형태와 가구 양상 변화를 연결할 수 있는 고고학적 설명모형을 통해 가구발 달주기에 대한 인식이 한강 하류역 청동기시대 전기 주거 양상의 역동적 측면을 이해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주거지 간 중복양상이나 절대연대가 모호한 상황에서 주거지 평면 형태에 주목하는 기존의 편년관 안에서는 한강 하류역 청동기시대 전기 주거 양상을 역동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결합주거지를 고정된 문화적 실체로 파악하고 주거의 형태 차이를 양식적 차이로 이해하기보다는 가 족의 성장에 따른 주거 규모의 변이라는 기능적 측면을 상정해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으로 보인다.
원형점토대토기에서 삼각형점토대토기로의 변천과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변화는 단연 구연부의 형 태와 제작기법이다. 지금까지 단면형태를 중심으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지만, 점토대토기 변천 의 요인에 주목한 연구는 많지 않다. 본고에서는 점토대토기의 구연부에 내포된 제작규범과 상징적 의미에 주목하여 구연부의 변천이 일어나게 된 요인을 추론하고자 하였다. 연구 대상은 사천 방지리유적에서 출토된 점토대토기로, 구연부의 제작기법을 분석하여 점토대토 기 제작패턴의 개념을 설정하고 단면형태와 내면형태, 지두흔과 정면흔의 조합을 통해 제작패턴을 분류하였다. 제작패턴은 점토대토기 구연부가 어떠한 의도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제작되었는지를 보 여주는 것으로, 점토대토기 구연부의 성격을 파악하고 점토대토기의 변화를 이해하는 토대가 된다. 이를 통해 도출된 제작의도에 범형의 개념을 적용하여 분석한 결과, 원형점토대토기와 삼각형점토대 토기의 제작은 유기적이며, 점토대토기의 변화는 구연부 제작방식의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점토대토기의 구연부는 제작자, 나아가 집단의 정체성이 표현되는 부분으로, 일종의 상징적인 의미 가 부여되어 있다. 원형점토대토기는 점토대의 형태를 원형으로 유지하려는 제작규범 하에서 제작되 었으며, 삼각형점토대토기로의 변화 요인은 이러한 제작규범의 약화로, 제작규범의 약화는 점토대토 기 구연부에 대한 제작집단의 관념과 구연부 제작의 편의성에 대한 인식이 맞물려 일어난 것이다. 결 국 원형에서 삼각형으로의 변화는 외래계 요소의 영향이나 이주민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동일 집단 내에서의 변화라 볼 수 있다.
본 연구는 정저우시에 최근 조성된 상성유적공원, 상성공원, 인민공원, 자형산공원 등 4개 유적지 공원을 대상으로 6개의 경관요소 즉, 전통수종, 역사적 폐허 및 유적, 전통건축, 조형물, 도로포장 및 소재, 수경요소 등의 측면에서 지역문화경관의 적용 및 문제점을 분석 평가하고자 하였다. 분석결과, 전통건축과 역사적 폐허 및 유적의 관리 측면에서 문제점이 드러났다. 상성 유적공원, 상성공원, 자형산공원에 조성된 전통건축은 모두 송나라 이후의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어 상나라시대의 건축적 특징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인민광장의 경우 유적은 반개방적인 방법으로 보존 전시하고 있으나 부실한 관리로 인해 유적의 인위적인 훼손이 심각하고 특히 유적지의 고목들이 벽체를 크게 훼손하고 있다. 조형물 측면에서는 인민광장의 경우 상나라시대와 관련된 조형물이 없으며 도로포장 측면에서는 상성유적공원과 상성공원의 일부에만 문화적 토템이 적용되었을 뿐 공원 도로포장의 대부분이 현대식 포장으로 인해 지역의 역사문화적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전통 수종 측면에서는 상성유적공원과 인민광장의 경우 대부분 전통수종을 식재했으나 상성공원 및 자형산공원의 경우 외래수종이 많아 지역 고유의 자연경관 을 연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면밀한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지역문화경관의 구성요소 및 설계원칙을 고려하여 개선해 나갈 필요가 있다. 수경요소는 자형산공원에만 적용 되었으나 지역특성을 상징하는 황하강을 모티브로 한 은유적 설계의 적용이 부족하다. 지역의 역사문화에 대한 은유적 표현 방법과 의미 해석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는 만큼 향후 이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고대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재원은 조세로 거둔 곡물이며 이를 보관하기 위한 창고는 주로 산성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당시 금석문과 산성에서 출토된 목간 내용으로 볼 때, 사찰 안에 창고가 존재했고, 산성 내 창고에는 보리와 같은 곡물을 60섬(石) 단위로 일정하게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 경주 성건동 500-18번지 유적에서 조사된 다 수의 대호를 매납한 대형 건물지는 삼랑사 안에 마련된 창고로 장류와 같은 액상식품과 쌀 등을 보관하던 창고로 추정된다. 성건동 창고유적에서 확인된 대형 창고는 <매호식 건물>로 구분되며 건물 안에 대호를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서 일정한 높이로 흙을 성토한 부분이 존재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 성토부에서는 대호를 절반 정도 묻어둔 모습과 파손된 대호를 수시로 교체한 모습이 확인되며, 대호 위에 토제 뚜껑을 사용한 점은 저장물에 대한 보관관리가 상시적으로 이루어 졌음을 알려준다. 창고 유적에서 출토된 국자는 청동제와 목제 또는 조개껍질로 만들어 사용했는데, 보관중인 저장품이 변질되지 않도록 관리하기 위해서 필요에 따라서 다른 재질의 국자를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호 안에서 출토된 숯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장류를 담글 때 백탄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당시 식생활 모습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당시 창고유적과 비교한 결과 경주 성건동 500-18번지 유적의 창고건 물은 삼랑사와 관련된 저장시설로 생각되며, 당시 황룡사, 실상사 등 당대 사찰 내 위치한 창고 모습을 알려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리고 이러한 창고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국가나 관청의 관리가 존재했음을 알려주므로, 향후 조사가 확대된다면 창고의 구조에 따른 차이가 확인될 것으로 판단된다.
이 글은 부여 송국리유적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석관묘의 주요 특징과 기능 및 성격에 관한 문제를 재검토한 것으로서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변지역의 사례와 비교되는 송국리유적 석관묘의 특수성은 대형화된 묘실 개석과 매장주체부, 그리고 벽석부의 보축시설 및 부장품의 문화적 상이성 등으로 요약된다. 둘째, 동검 부장묘로서의 1호 석관묘와 묘역내 중심적 입지에 자리한 5호묘간의 어색한 배치관계에 미뤄 볼 때, 그간 묘역내 중심묘적 기능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어온 송국리 1호 석관묘의 시간성과 성격문제는 재고될 필요가 있다. 셋째, 송국리 5호 석관묘는, 유구 자체의 제반 특징과 주변 지역 유사 사례 등을 종합적으로 비교한 결과 고인돌적 특성이 강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아울러 5호묘(추정 고인돌) 출토 이중구연 단사 선문토기를 시간성의 문제가 아닌 문화 성격적 측면에 보다 집중할 경우, 그것을 축조한 사람들의 성격을 이해하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넷째, 묘역의 형성과정은 구릉 정상부 방대상의 돌출부 중심에 자리한 5호묘와 그 서북쪽 4호 석관묘 및 미조사된 6호 석관묘 등의 관계가 성립된 이후(先), 중심묘적 기능을 가진 5호묘의 축선을 기준 삼아 1호 석관묘 및 그 사이의 2·3호 석개토광묘가 들어서면서 (후), 최종적으로 하나의 성토부가 구획되어 묘역화 되었을 것으로 본다. 다섯째, 송국리문화권내에서 고인돌적 전통이 수용되는 과정에는 송국리집단의 주도적 역할이 예상된다. 아마도 고인돌문화 속에 내재된 신앙과 의례풍습 등을 존중해주는 한편 서로 공유함으로써 두 집단간의 정신문화적 측면에서의 동화를 모색한 듯하다. 결론적으로 송국리 1호 석관묘와 5호묘의 관계는 고인돌 축조집단의 신앙체계나 문화적 관습 등을 수용한 송국리집단의 배려로 볼 수 있을 듯하다.
본고는 송국리유적의 시기와 성격 및 그 학술적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먼저 최신 발굴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유적의 시기와 성격을 살펴본 결과, 최초 대지 조성과 함께 방형계 주거 집단의 점유가 시작된 이후 원형계 집단이 등장하면서 대지 조성면을 목주열이 자리하는 공간으로 활용하였으나, 기존의 주거형을 일부 인정하여 양자를 모두 축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점유 기간의 공백은 없었으며, 전체 기간도 짧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송국리유적에서는 유력자 또는 유력 집단의 존재가 상정되는데, 그들은 대규모 노동력 동원, 식량 조달 및 분배에 대한 적극적 개입, 제사권 장악 등을 통해 지배력을 강화하였을 것이다. 일반 주민들도 어느 정도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여 인구가 점차 증가하였으며, 이와 같은 내부적 안정을 바탕으로 주변 유적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 정점에 위치하는 중심 취락으로 성장하였음이 짐작된다. 다음 송국리유적의 학술적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첫 번째로 송국리유적의 발굴 및 보고는 송국리유형과 송국리문화를 설정케 한 기초 자료의 최초 제공이라는 측면에서 학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하지만 최초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기보다는 다른 유적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특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편이 바람직하다. 다음 두 번째로는 완전한 형태를 갖춘 대단위 취락으로서의 자료적 가치를 들 수 있다. 송국리유적은 점유 기간이 청동기시대 중기라는 시간 범위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특정 시기의 취락 구성 원리나 해당 기간 내에서의 변화 과정을 살피는 데에 양호한 자료를 제공한다. 마지막 세 번째는 조사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는 측면에서의 학술적 발전 가능성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조사 기법의 발전과 더불어 앞으로 훨씬 더 다양하고 많은 정보가 획득될 것이 분명한데, 이것이 다른 유적과 비교할 수 없는 송국리유적의 가장 큰 학술적 가치라고 생각한다.
삼성퇴 문화는 중국 남서쪽 사천 분지에 분포하고 있으며 연대 범위는 대략 기원전 1600~1200년 사이 청동기문화에 속한다. 이 문화는 쓰촨(四川)성 광한(廣漢)시 난싱(南興)진 三星堆유적을 대표 유적으로 하고 있으며, 유적의 범위가 넓다. 왜냐하면 이 유적의 가 장 주요한 발굴작업과 가장 중요한 고고발견 모두 “三星堆”라는 언덕 주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삼성퇴유적”으로 명명되었다. 삼성퇴유적은 청두成都 평야에서 가장 오래 지속 된 선진先秦 취락과 성읍으로, 장강 상류지역에서도 이미 알려진 최대 규모의 청동기시대 유적이다. 삼성퇴유적으로 대표되는 삼성퇴문화는 쓰촨 분지 최초의 청동기문화로서, 중국 청동기시대 고고 중에서 중요한 지위와 작용을 하고 있다. 삼성퇴유적과 삼성퇴문화는 전설적인 고촉국古蜀国의 초기 역사를 탐구하고 연구하는데 풍부한 실물자료를 제공한다. 유적은 1929년에 발견되었다. 1934년, 화서대학華西大學박물관이 삼성퇴유적의 북쪽에 있는 月亮湾을 조사하고 발굴하였다.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쓰촨성 고고학자들은 연속적으로 삼성퇴유적에서 여러 차례의 고고학적 발굴을 실시했으며, 기본적으로 이 유적의 종적 변천 과정을 파악하였으며 동시에 삼성퇴문화의 명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986년에는 삼성퇴유적의 남쪽에 '삼성퇴'라는 언덕 서남쪽에서 두 개의 기물 구덩이가 차례로 발견 되어 대량의 금, 구리, 옥, 석, 뼈, 상아牙, 도질의 기물들이 출토되었으며, 이 때부터 삼성 퇴유적이 학술계의 광범위한 주의를 끌게 되었다. 1987년부터 1996년까지 고고학자들은 삼성퇴유적 동 서, 남 삼면의 외성벽을 확인하였고, 유적 서북부의 종횡의 두 개의 내성벽 유적을 모두 해부하여 하상시기夏商時期의 삼성퇴유적이 넓고 큰 토성담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서북쪽에도 내부에 작은 성(月亮湾小城)을 가지고 있는 규모가 매우 큰 성읍城邑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2018년 이후에는 쓰촨성 문물고고연구소 四川省文物考古研究所가 삼성퇴유적의 주요 지점 몇 곳을 체계적으로 발굴하였고, 삼성퇴의 기존 두 기물갱器物坑 사이에서 이전에 발 견되지 않았던 기물갱을 발견하였다. 고고의 재료가 많아지면서 연구자의 관심은 삼성퇴 두 기물갱에서 삼성퇴성터로, 삼성퇴성터에서 삼성퇴문화와 관련 고고유적지로 확대되었으며, 그에 따라 삼성퇴유적, 고촉역사와 문명, 삼성퇴유적의 보호에 관한 연구로 심화되었다. 삼성퇴유적은 1988년 중국의 '전국중점문화재보호단위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되 었으며, 전국중점문물보호관리요구에 따라 유적의 보호범위와 건설통제지대를 설정하였으며, 보호표지와 경계표지를 세우고, 삼성퇴유적의 전시와 보호를 하나로 묶은 관리기구 - 삼성퇴유적박물관三星堆遺址博物館을 건립하였으며, 아울러 삼성퇴유적의 기록물건설작업도 완성하였다. 삼성퇴유적의 중요'고촉국유적古蜀國遺蹟'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세계문화 유산 예비목록'을 등재 신청하였다. 삼성퇴유적과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중국 허난성 안양시 은허유적殷墟遺蹟은 모두 20세기 20~30년대 이미 고고작업을 시작한 청동기시대 고대국가의 도성유적이다. 삼성퇴유적의 많은 아름다운 유물들이 세계 고고학계와 문화유산 보호학계를 놀라게 하였으며, 몇몇 대표적인 유물들이 오랫동안 세계 곳곳을 돌며 전시되어 온 것은 삼성퇴유적의 세계적인 영향을 단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이에 따라 삼성퇴유적이 위치하고 있는 정부와 현지 사회공동체, 고촉국이 소재하고 있는 쓰촨 지방정부와 대중은 국내외 고고학과 문화 유산학 전문가들로서 삼성퇴유적의 <<세계유산목록>> 등재신청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현재 쓰촨성이 직접 관할하는 고고, 보호(保護)와 전시를 하나로 묶은 삼성퇴문명연구원(三星 堆文明研究院)이 이미 조성을 시작했으며, 삼성퇴유적의 대규모 발굴작업이 현재 진행 중으로, 유적 중 중요 유적이 소재하고 있는 구역은 토지 국유화 징수작업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고, 삼성퇴유적박물관도 증축과 전면적인 전시를 진행 중에 있으며, 유적박물관과 유적공원의 연결과 최적화 설계도 신속하게 추진되고 있다. 삼성퇴유적이 빠른 시일안에 더 좋은 모습으로 세계 각지에서 오는 관람객들을 맞이할 것이라고 믿는다.
영동지역의 烽燧에 대한 기록은『朝鮮王朝實錄』과 『世宗實錄地理志』 이후의 각종 지리지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운영되는 과정에서 그 명칭이나 위치 이동, 봉수 수에서 별다른 변동없이 이어져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강원도 해안지역의 봉수는 동해안에서 間烽인 통천의 金幱城烽燧에 서 제 1거 直烽인 회양의 所山烽燧와 2거인 영덕 大所山烽燧에서 안동의 烽枝山 烽燧로 연결되는 총 38개 정도의 間烽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제 1거에 연결될 수도 있고, 2거에 연결될 수도 있는 間烽으로 볼 수 있으며, 그 형태와 기능면에 서 연변봉수로 볼 수 있다. 신라대에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 유물이나 유적으로 확인 할 수는 없으므로 조선 건국 초에 왜구와 여진족을 막기 위해 전국적으로 봉수제를 정비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봉수의 폐지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 이 지역에 왜구의 피해가 거의 없었고, 북변에 있는 여진족[만주족]이 이 지역까지 침입하지는 않았다는 사실과 『척주선생안』에 기록된 三陟府使 柳時會의 재임 중인 丙寅年(1626)에 영동지방의 烽臺를 폐지하였다는 기록, 그리고 『여지도서』에 삼척의 봉수는 폐지되었다고 한 기록 등을 종합해보면 인조 丙寅年(1626)에서 『輿地圖書』가 편찬된 18세기 중엽 사이에 폐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삼척지역의 봉수에 대한 현지 조사 결과 해발 100m 내외의 바다가 바라보이는 산봉우리나 곶에 위치하였고, 연소실이 하나인 단봉이었다. 연소실은 가곡산봉수에서만 방형의 연소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대 형태는 양야산봉수가 방형이고, 나머지는 원형으로서 축조 재료는 석축이 주조를 이루었고, 임원산봉수만 토-석 혼축이었다. 연대의 평면 형태에서 초곡산봉수와 가곡산봉수는 연대형이고, 양야산봉수와 임원산봉수는 연대 방호벽형, 광진산봉수는 연대 호형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건물지 배치 형식에서 광진산봉수와 초곡산봉수는 연대 단독형이고, 양야산봉수·임원산봉수·가곡산봉수는 창고지나 추정 창고지가 있기에 일곽형으로 볼 수 있었다. 규모로 보았을 때 삼척지역의 봉수는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연대 크기는 보통이나 방호벽이나 호는 작은 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광진산봉수의 호가 반원형이라는 점, 임원산봉수에서 창고지가 발견되었는데, 건물 축대가 6단 정도로 잘 남아 있다는 점과 반원형인 연대 방호벽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 그리고 가곡산봉수에서 비치물품 중의 하나였던 수마석이 발견되고,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는 점과 전체적으로 초곡산봉수를 제외하고 그 형태가 비교적 잘 남 아 있다는 점에서 삼척지역의 봉수는 동해안 지역의 연변봉수를 연구하고 분석하는데 있어서 많은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후망의 설치는 봉수제도를 보완하기 위하여 설치하였을 수 있고, 백성들 의 부담을 줄여주거나, 봉수제 폐지 이후 해안 경계를 위한 후속 조처로서 설치하였을 수도 있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