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에서 가장 지리적으로 근접한 섬은 우리나라의 울릉도일 뿐만 아니라 독도는 울릉도의 후배지 또는 판도에 속해 있는 섬이다. 지리적 근접성은 객관적으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일본정부는 독도에 대한 영토주권을 오로지 역사적 그리고 국제법적 측면에서만 주장 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학자가 지리적 근접성원칙 적용에 여러 가지 엄격한 조건을 강조하는 것은 영토주권의 권원으로서 지리적 근접성이 국제법적으로서 부정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이 주장할 수 없는 지리적 근접성에 근거한 영토권원의 가치와 무게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 이다. 한국과 일본의 여러 역사문서들은 독도가 일본보다는 한국으로부터 가깝다는 서술을 반복적으로 명확하게 하고 있으며, 울릉도쟁계 관련 한일 양국의 외교공문서에서도 도서영토의 귀속주체를 결정하기 위한 기준으로서 지리적 근접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중세 한일간에 영토귀속의 기준으로서 지리적 근접성이 고려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지리적 근접성이론은 기본적으로 판도이론 또는 영향이론과 상관관계를 갖는 이론으로서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강대국이 아닌 그 피해당사국이 주장하는 경우 이는 자국 영역의 온전성을 유지하기 위한 ‘도덕적 주장’일 뿐만 아니라 ‘정당한 주장’으로서 당해 지역에 대한 완화된 상징적 지배가 있으면 국제법상 ‘진정한 권리’로 인정되어야 한다. 이글은 우선 영토획득의 권원으로서 지리적 근접성원칙을 분석하고, 제3장에서 일본 시마네현의 죽도문제연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나카노 테츠야 교수의 지리적 근접성 논의를 검토 하였으며, 제4장에서는 영역주권 판단의 근거로서 지리적 근접성과 판도이론을 반영하고 있는 일본의 문서기록들을 살펴보았다.
고전적 권원, 봉건적 권원, 본원적 권원 등 역사적 권원은 현대 국제법에 의해 타당한 권원으로 권원의 대체를 이룩하지 아니하면 법적 효력이 없다. 현대국제법상 권원으로 대체된 역사적 권원은 현대 국제법상 법적 효력이 없다는 것이 국제 판례와 학설에 의해 관습국제법으로 승인되어 있다. 한국정부가 독도영토주권의 역사적 권원을 주장함에 있어서 역사적 권원만을 주장하고 역사적 권원의 대체에 관해서는 주장해온 바가 거의 없다. 그 결과로 한국은 신라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을 정복하여 수립한 한국의 독도 영토주권의 역사적 권원은 오늘에 법적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정부가 독도의 역사적 권원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권원뿐만 아니 라 여사적 권원의 대체에 관해 지적하여야 함이 시급히 요청되고 있다. 신라 이사부 장군의 우산국 정복에 의해 수립된 한국의 독도영토주권의 역사적 권원은 1910년 10월 25일의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의해 현대국제법상 유효한 권원으로 대체 된 것이다. 역사적 권원의 대체의 관습국제법은 특히 독도를 연구하는 사학자에게 보급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이는 관계 정부당국에 부여된 책무인 것이다.
1951년 6월 20일 미8군부사령관 John B. Coulter 중장은 대한민국 국무총리에게 독도폭격연습기지 사용 인가를 신청한 바 있다. 미8군부사령관은 미국의 국가 기관이고 동인가신청의 주체는 법인격자인 미국이다. 미국이 대한민국정부 당국에 독도폭격연습기지의 사용을 인가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은 미국이 대한민국의 독도영토주권을 묵시적으로 승인한 것이다. 영토주권의 승인은 국제법상 금반언의 효과를 창출하므로 미국은 대한민국의 독도영토 주권의 승인과 모순⋅저촉되는 행위를 하지 아니할 국제법상 의무를 부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대일평화조약”의 체결과정에서 Sebold의 “대일평화조약”안 에 대한 1949년 11월 4일의 권고적 의견에 따라 1951년9월 8일의 “대일평화조약”에서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아니한 것에 대해 국제법상 정치적⋅법적 책임을 부담한다. 한국 정부는 미국에 의한 한국의 독도영토주권의 승인을 국제관계에 있어서 외교정책에 반영하고 대일외교정책에도 반영하여야 한다.
본 연구에서는 식민시대 또는 전쟁점령 등에 의해 영토를 침탈(점령)한 국가들이 영유권 주장을 포기함으로써 침탈당한 국가에게 원래의 영토주권을 되돌려 준 사례들을 발굴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독도 관련하여 억지 주장을 해 온 일본의 영유권 주장 포기를 유도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담론을 주도하는 한편 일본의 억지 영유권 주장 포기를 유도할 수 있는 요인들을 도출해 보고자 하였다. 침탈한 국가들이 침탈한 영토를 되돌려 주거나 아니면 억지 영유권 주장을 포기할 경우 어떤 계기로 어떤 요인이 작용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독도의 경우처럼 억지 영유권 주장을 해 온 일본과 같은 침탈국의 억지 영유권 주장 포기를 유도해 낼 수 있는 정책적 시사점을 제시해 보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아시아, 중남미, 유럽, 구미 등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의 유사 사례들의 조사를 통해 20개의 영토갈등 사례들을 추출하였으며, 영유권 주장의 포기 및 침탈한 영토를 되돌려 준 요인 내지 배경을 경제적 요인, 정치적 요인 및 외교안보적 요인 등으로 구분하여 분석해 보았다. 분석결과 많은 사례들이 외교안보적 요인들이 적지 않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며, 특별히 미국-쿠바 간 후벤투드 도서영유권 사례 등 침탈한 국가의 국가적 결단에 의해 침탈한 영토를 되돌려 준 사례들도 일부 도출됨으로써 일본 등 억지 영유권 주장을 하는 침탈국가들을 대상으로 국제사회에 주는 시사점도 제시되었다.
독도는 역사적, 국제법적 및 그 실효적 관할 상 엄연히 대한민국의 영토이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근거 없이 일본정부가 “독도는 자국 땅“이란 부당한 주장만 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아베정부에 이르러 독도왜곡이 더욱 심화되어, 일본 중·고교 교과서에 “다케시마(독도)는 일본의 고유한 영토인데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거짓 내용을 실어서,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이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거짓내용일 뿐만 아니라 여러 국제법 위반 사항임을 지적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전에는 1699년 1월 당시 조선국 정부와 일본 막부정부 간 외교서계교환을 통하여 합의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조선국의 영토주권에 대한 위반임을 지적할 수 있다. 2차 대전 후에는, 포츠담선언8) 후단규정, 스카핀 (SCAPIN) 677(1946.1.29.), 샌프란시시코 평화조약 제2조(a) 및 동 조약 제19조(d)를 위반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전기 일본교과서에 게재한 ‘일본의 고유영토인 독도를 한국이 불법점거‘ 하고 있다는 내용은 ’독도‘ 재침탈을 위한 일종의 “위협”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영토는 타국의 위협이나 무력사용으로 인한 탈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유엔총회결의 2625호(1970.10.24)와 정면으로 충돌되는 것으로 규탄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학계 일부의 ‘독도’ 영토주권에 관한 논조가 애매모호한 것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할 것이다. 일본정부의 헛된 주장에 따른 국제법위반 사항을 포함하여 이 모든 것들은 각종 학술발표회를 통하여 검증되고 사안에 따라 퇴출되고 또 규탄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1905년 독도의 불법적 영토편입을 시작으로 일본의 대한제국의 영토주권에 대한 전면적 침탈은 1904년 시작된 러일전쟁과 직접적 관련성을 갖는다. 이 글은 우선 국제법적으로 러일전쟁의 발발과정에서 대한제국의 제물포사건이 갖는 의미, 전쟁개시 시점 그리고 국제법상 일본의 전쟁선포행위가 합법적인지에 대해 검토하였다. 러일전쟁의 개시 시점에 대하여는 일본 해군이 중국 뤼순 항구에 정박 중인 러시아함대에 대한 무력공격을 도발한 1904년 2월 8일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글에서는 러일전쟁의 발발과정 특히 대한제국의 영해인 제물포 앞바다 사건에 대한 검토를 통해 일본이 러일전쟁의 개전 일자를 일본 해군이 전쟁수행을 위해 사세보항구를 출항한 2월 6일으로 주장하는 이유가 일본이 전시국제법을 위반하여 러일전쟁을 시작하였음을 은폐하려는 의도임을 밝히고 있다.
두 번째, 이 글은 일본이 아시아의 유일한 문명국으로 인정받게 된 근거와 러일전쟁과정에서 영국과 미국이 유럽국가인 러시아가 아닌 일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도록 하기 위해 일본 지식인들과 관료들의 유럽과 미국에서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러일전쟁을 통해서 일본이 국제사회에 강대국으로 등장했다는 인식과 다르게 일본은 러일 전쟁이전에 유럽의 소수국가와 미국이 중심이 된 제국주의국가들의 국제클럽(international club)에 의하여 아시아에서 유일한 소위 문명국(civilized state)으로 인정되어 있었으며, 러일전쟁은 러시아와 일본이 대한제국과 만주의 패권을 놓고 벌인 소위 문명국 간의 전쟁이었다.
세 번째, 러일전쟁의 발생 이전에 국제법상 중립(neutrality)을 선언한 대한제국의 영토 주권이 어떠한 이론적 배경에서 일본에 의하여 무시되고 침해당하였으며 미국과 영국 등 당시 국제사회를 주도하던 국가들은 왜 이를 묵인하였는지 그리고 러일전쟁 당시 한일 간에 체결되어 있던 조약들은 어떻게 양 국가 간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었는지를 분석해 보았다. 이와 함께 일본의 대한제국 흡수행위의 근거가 된 소위 국제클럽 구성 국가들의 낙후지역(backward territory)이론의 문제점에 대하여도 살펴보았다.
이 논문은 19세기 중엽에 일본 외무성에서 편찬된 「죽도고증」이 지금의 독도 영유권 관련 이슈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흔히 「죽도고증」이 독도 영유권 관련 자료인양 인식되고 있으나, 이 자료는 어디까지이 고 울릉도 영유권 관련 자료이다. 19세기 중엽 당시 일본 외무성에서 울릉도 영유권에 대해 논의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일본 에도 시대 이래의 문서들에서 울릉도는 항상 독도와 함께 취급되어 왔다. 「죽 도고증」은 이러한 문서들을 저본으로 편찬된 것이다. 따라서 이 자료는 에도 시대 독도 관련 기록에 대한 내비게이션의 역할도 한다. 「죽도고증」은 또 다른 의미에서 지금의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와 관계가 있다. 「죽도 고증」에 기술되어 있는 19세기 당시의 외무성에서의 울릉도 영유권 관련 논의에서 독도는 제외되어 있다. 그러나 이 때 기록국장 와타나베 히로모토가 울릉도가 일본 섬일 수도 있다 는 주장을 하였는데 이 주장과 함께 그가 자신의 논리를 펼친 방법 -섬의 명칭 혼란-, 근거 자료-오키의 마쓰시마-가 후에 1950년대 일본 정부의 독도 영유권 논리와 주장의 토대가 된 것이다.
1989년 11월 28일에 서명되고 1999년 1월 22일에 발효된 「한일어업협정」은 한국의 독도에 대한 영토주권, 영해 주권 그리고 배타적 경제수역주권을 훼손하는 많은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1) 독도의 영토주권의 훼손
동 협정이 독도를 동해 중간 수역 내에 위치하고 있는 것(제9조)은 한일간에 독도의 영유권에 관해 분쟁이 존재함을 묵시적으로 승인한 것이다. 왜냐하면 한일간에 독도영유권분쟁이 존재하지 아니하면 독도 주위의 수역에 중간수역을 설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쟁의 존재승인을 설정한 것은 독도의 영유권에 관해 한국과 일본의 법적 입장을 1:1의 대등관계를 승인하여, 결국 한국의 독도 영토주권을 훼손한 것이 된다. 동 협정은 “이 협정의 어떠한 규정도 어업에 관한 사항 이외에 국제법상 문제에 관한 각 체약국의 입장을 해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아니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제15조). 이 배제 조항에 대해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한국측에서 보면 현상유지의 이익 밖에 없으나, 일본 측에 보면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한국과 1:1의 대등 관계를 갖는 것으로 되어 이는 일본에 대해 현상유지 이상의 이익이 부여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의 독도 영토주권을 훼손하는 것이 된다.
(2) 독도의 영해 주권의 훼손
동 협정은 동해 중간 수역을 설정하고 동 수역에서 기국주의를 채택하여(제9조, 부속서 Ⅰ제2항) 한국의 영해를 침범한 일본 어선에 대해 중간 수역에서 추적권의 행사를 부정하여 한국의 영해주권을 훼손한 것이다.
(3) 독도의 배타적 경제수역주권의 훼손
동 협정에 의해 독도의 배타적 경제수역이 동해 중간수역 내에 위치하게 되어(제9조) 독도의 배타적 경제수역주권이 훼손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한국의 독도영토주권, 독도영해주권 그리고 독도배타적 경제수역주권은 「한일어업협정」에 의해 훼손되었다. 오늘의 국제사회에서 영토취득의 중요 원인은 묵인, 승인, 그리고 금반언으로, 이들의 반복으로 영토취득이 응고되어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독토영토주권을 훼손한 「한일어업협정」을 방치하면 장차 독도의 영토주권을 응고 취득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일본의 비교우위의 상대적 권원을 취득할 수 없도록 조속히 두 협정을 폐기하여야 한다.
1945년 9월 2일 동경만의 미국전함 미조리함 상에서 “항복문서”에 일본의 서명이 있었다. 맥아더 장군 지휘하의 연합군최고사령부의 설립이후에 동 사령부는 일본어선에 대한 어로활동을 전면적으로 제한했다. 1945년 9월 27일까지 일본어선이 제한 영역에서 어로활동이 인가될 수 있게 연합군최고사령관은 인가된 어로구역을 발표했다. 이 인가된 어로구역의 경계선을 연합군최고사령관의 이름을 따라 맥아더 라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동 맥아더 라인은 수차에 걸쳐 수정되게 되었다. 맥아더 라인의 수차례 걸친 수정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라인은 독도의 외측에 설정되었으며. 더구나 1946년 9월 22일의 “SCAPIN 제1033호”는 이 후 일본어선과 인원의 독도의 12해리 이내에 접근을 금지했다. 따라서 한편으로 맥아더 라인은 연합군최고사령관에 의한 한국의 독도영토주권의 승인을 의미함이 명백하고, 다른 한편으로 1951년의 “대일평화조약” 제2조 (a)항의 해석에 있어서 통합의 원칙에 따라 일본이 “SCAPIN 제 1033호” 를 승인한 동 조약 제19조 (d)항은 조약의 문맥의 전체를 구성한다. 동 조약 제19조 (d)항과 “SCAPIN 제1033호”에 의거 독도의 영토주권은 한국에 귀속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정부당국에 대해 독도의 영토주권의 권원은 “SCAPIN 제1033호”가 아니라 “대일평화조약” 제2조 (a)항에 있으며, 통합의 원칙에 의해 동 조약 제 19조 (d)항에 의거 “SCAPIN 제 1033호”에 있다는 것으로 정책 전환을 할 것을 제의한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 및 그 실효적 관할 상 대한민국의 영토임은 재론을 요치 아니한다. 이는 우리 역사기록 뿐만 아니라 일본의 태정류전(太政類典)과 일본총리부 령 제24호(1951.6.6) 등에도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다. 국제법적 견지에서는 II차 세계대전 후 포츠담선언(8)과 일본항복 후 초기 일본의 점령 및 통제를 위한 연합국최고사령관에 시달된 훈령(1945.11.1) I(d)에 근거하여, 연합국최고사령관(the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SCAP)이 훈령(지령) 677호(1946.1.29)에 의거 명문으로 ‘독도’ 등을 일본주권에서 제외 조치한 것이고, 당시 일본정부는 이를 전적으로 수용하여 일본총리 부령 제24호(1951.6.6) 및 대장성 고시 제654호(1946.8.15)에 ‘독도’ 등이 일본 땅이 아니라 외국 땅임을 명문으로 규정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시 동 강화조약 제19조(d)에 동 SCAPIN 677호의 효력이 계승되어 있다. 또한, 일본은 한·일 기본관계조약 (1965.6.22)에 의거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국제법상 묵인(acquiesence)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그간 터무니없이 ‘독도’가 일본영토 소위 ‘다케시마’라 고 주장하여 왔다. 근간에는 한국정부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가 일본의 초, 중, 고교 교과서(사회과)에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일률적으로 왜곡하여 교육을 실시하고 있 다. 이런 여건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2012년 8월 10일 독도를 방문하였다. 일본정부는 이명 박 대통령의 독도방문을 강하게 비난하고, ‘독도영유권’ 문제를 공동으로 국제사법재판소 (ICJ)에 제소하여 그 판결을 받아 결정하자는 제의를 우리정부에 하여 왔다(2012.9.21). 끈질긴 일본정부의 동 ICJ제소 공세 결과 인 듯 근간 우리사회 일각에 ‘부득이한 경우’에 대응하여 우리도 ICJ를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지난 (2013년) 3월 25일 국회헌정기념관에서 ‘독도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국제사법재판소 (ICJ)제소에 대한 대응방안’ 제하에 세미나가 열렸다. 본고는 동 세미나에서 배포된 자료 등을 중심으로 동 ICJ제소 문제를 심층 고찰하여 소위. 독도문제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정 에서 그 일환으로 우선 ‘독도’가 불법적으로 탈취 된 역사적 문제(a historical issue)이고, 새삼스럽게 독도영유권에 관한 법적다툼(a legal dispute)이 될 수가 없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가 독도문제를 계속 심도 있게 앞으로도 연구하여야 하는 것은 어디 까지나 독도영토주 권보유국가로서 독도를 온전히 보존하고, 불법부당한 일본의 독도 재 침탈 야욕을 밝히고, 규탄하고, 국내외적으로 홍보하여 일본의 독도 재 침탈야욕을 저지하는 데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지, 결코 우리 독도영토주권을 ICJ에 회부하여 결정하자는 일본의 제의에 동의할 수 없음을 국제법적 견지에서 접근코자 하는 것이다.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관해 ‘국제연합헌장’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국제연합의 어떠한 회원국도 그의 계속이 국제 평화와 안전의 유지를 위협하는 분쟁에 대해 안보리에 주의를 환기 시킬 수 있으며(제35조), 안보리는 분쟁의 어떠한 단계에 있어서도 적절한 조정의 절차와 방법을 권고할 수 있다(제36조 제1항). 안보리는 권고를 함에 있어서 일반적 으로 법적 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규정’이 정하는 바에 따라 당사국에 대하여 국제사법재판 소에 회부하여 해결할 것을 고려하여야 한다(제36조 제3항).
일본정부는 1954년 9월 25일 독도영유권 문제를 먼저 분쟁으로 간주하고 그 분쟁을 국제 사법재판소에 제소하여 해결할 것을 한국정부에 제의한 바 있으며, 이에 대해 한국정 부는 1954년 10월 22일 한국의 권리를 어떠한 국제재판소에 의해 확인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근거로 일본정부의 제의를 거절했다. 2012년 8월 10일 이명박대통령의 역사 적인 독도방문에 대해 일본정부는 8월 24일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여 해결하 자고 제의해온 바 있다. 역시 한국정부는 이를 일축했다.
독도영유권 분쟁의 해결에 관한 일본정부의 기본적인 전략은 ‘국제연합헌장’ 제36조의 규정에 따른 안보리에 권고 결의를 통해 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것으로 추정된 다. 이에 대한 한국정부의 대응전략을 수립함에 있어서 한국정부는 독도영유권 문제를 분쟁 화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안보리가 ‘국제연합헌장’ 제36조의 규정에 따라 국제사법재판소 에 제소하라는 권고결의를 해도 이 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지 아니하는 것을 고려 해야 한다.
독도가 한국 땅인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며 한국의 여러 역사책과 고지도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는 일본의 주장이 얼마나 억지 주장인가를 우리나라에서 간행한 고지도와 일본에서 제작한 고지도 그리고 서양에서 제작한 고지도들을 통하여 밝힐 수 있다. 독도가 우리나라의 영토가 된 것은 신라 지증왕 13년(512)에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을 병합한 1500년 전부터이다. 삼국사기 의 기록에 의하면,“신라 지증왕 13년(512)에 이사부가 왕명을 받고 나무 사자를 많이 만들어서 배에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러 거 짓으로,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놓아서 너희들을 밟아 죽이겠다.”고 하니 우산국 사람들이 무서워서 항복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도 “우산도(于山島)와 무릉도(武陵島)는 본래 두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바람이 불지 않고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우산과 무릉 두 섬이 현의 정동(正東) 해중에 있다. 두 섬의 거리가 서로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 우산국이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삼국사기와 고려사 지리지 그리고 세종실록지리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독도는 신라 지증왕 때 우리나라의 영토에 편입되었으며 우산국은 울릉도와 독도인 우산도를 가리킨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울릉도와 우산도는 15세기 제작된 팔도지도와 동람도 등에서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표시하고 있으며, 그 이후에 제작되는 거의 대부분의 지도들이 우산도를 한국의 영토로 표시하였다. 특히 1693년의 안용복 사건이 있은 후에 조정에서는 수토관(搜討官)을 파견하여 독도를 관리하였다. 1694년 최초의 수토관인 장한상은 울릉도와 우산도를 자세히 수토하고 돌아와 그 곳 지리 인식에 맞 게 지도를 제작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우산도를 동람도와 달리 울릉도 우측에 표시하였고, 이후에는 모든 지도에서 우산도를 울릉도의 우측에 표기하였다. 19세기 제작되는 대한전도에서도 우산도를 울릉도의 우측에 표시하였다. 이와 같이 많은 지도에서 독도인 우산도(于山島)를 한국의 영토로 표기하였다. 일본은 오랫동안 울릉도를 죽도(竹島), 독도를 송도(松島)라고 부르며 한국의 영토로 인정하였고, 일본의 공식지도를 비롯하여 80 여종의 지도들이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표시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울릉도를 송도, 독도를 죽도 또는 리앙코도라고 불렀다. 1905 년에는 독도를 불법적으로 그들의 영토로 편입하고는 독도를 죽도(竹島)라고 칭하며 자기 영토라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서양의 고지도에서도 단빌의 조선왕국도를 비롯하여 많은 지도들이 독 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 한국의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양의 포경선들이 출몰하여 독도를 마치 무주지인 것처럼 오인하고 리앙쿠르 암이나 호넷트 섬 등으로 명명하여 혼란을 가져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많은 지도들이 증명하는 것처럼 독도는 엄연 한 한국 땅이다. 6세기부터 우산도라고 불러 온 독도는 그 명칭이 어떠하든 간에 변함없는 우리의 영토이다.
1946년 1 월 29 일의 ‘연합군최고사령관훈령 저11677호’를 시행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제정한 1951 년 6월 6 일의 ‘총랴부령 제 24호’제 2조는 동 총랴부령의 규정은 독도에 적용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 고 있다. 1951 년 2월 13 일의 ‘대장성령 제 4호’제 2호도 이와 동일 한 규정을 두고 있다. 국제법상 영토주권의 승인은 특정 영토에 대한 영토주권이 특정 국가에 귀속된다는 특수한 사태를 수락하는 특정 국가의 적극적 행위이다. 영토주권의 승인은 타 당사자의 영토권원을 용인,수락 또는 인정하는 행위이다. 영토주권의 승인은 명시적 형식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 사정 하에서 묵시적 형식으로 승인될 수도 있다. 영 토주권의 승인은 학설과 국제판례에 의해 일반적으로 수락되어 있다. 일본 정부의 ‘총리부령 제 24호’의 규정이 독도에 적용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한 동 부령의 제정행위는 한국의 독도 영토주권의 묵 시적 승인 행위를 의미한다. ‘대장성령 제 4호’의 제정행위도 이와 동일하다. 따라서 일본 정부의 ‘총랴부령 제 24호’와 ‘대장성령 제 4호’의 제정에 의한 한국의 독도 영토주권의 묵시적 승인의 결과로 (1) 일본 정부는 금반언의 원칙에 따라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토주권 의 승인과 저촉되거나 또는 이와 모순되는 주장을 할 수 없으며,(2) 이들 법령에 의한 묵시적 승인은 독도에 대한 영토주권이 한 국에 귀속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된다. (3) ‘총리부령 제 24 호’와 ‘대장성령 제 4호’에 의한 한국의 독도 영토주권의 묵시적 승인은 한국의 독도에 대한 상대적 권원을 비교우위적 상대적 권원 또는 절대적 권원으로 전환하여 한국의 독도권원에 대한 역사적 응고를 공고히 하는 중요한 효과를 가져오게 한다. 정부의 독도정책 당국에게 독도정책의 입안·결정에 상기의 효과를 반영할 것을 권고 제의한다.
시마네현 다케시마문제연구회에서 나온 다케시마문제에 관한 조 사연구 최종보고서(2007.3)와 일본 외무성의 「竹島 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가지 포인트」(2008.3.8) 팸플릿의 경우 독도영 유권에 대해 ‘17세기 고유영토설’을 내세우고 있다. 본고는 이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기 위해 공도정책이란 용어 대신에 수토정책이란 용어를 사용하자는 주장과 함께 일본의 17세기 고유영토설을 불식하기 위해 향후 수토정책에서 어떤 논리를 보강해야 할 것인가를 살펴 보고자 한 것이다. 일본의 17세기 고유영토설을 주장하는 울릉도로 건너갈 때의 정박 장이나 어채지로 이용하여 늦어도 17세기 중엽에는 독도의 영유 권을 확립했고, 17세기말 울릉도 도항을 금지했지만, 독도 도항은 금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주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한일 양쪽의 자료에서 일본 어부들이 전적으로 독도를 목표로 하여 어로활동을 했다는 자료를 제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독도에서의 어 로활동은 울릉도를 근거지로 하여 이루어졌다. 일본 어부들은‘독도’만을 대상으로 해서 항해하지 않았다. 안용복 사건이후 울릉도와 독도에 들어온 사람들은 국제법 위반자들이었다. 그들은 1883 년 개척령에 의해 일본으로 소개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1882년 이전까지 조선인들이 울릉도에 들어가 살았고, 그것을 거점으로 하여 독도에까지 어로활동을 하였음을 입증하는 자료를 발굴하여야 한다. 수토정책의 경우 일본으로 하여금 울릉도·독도가 우리 땅임을 인식시키고자 하는 정책을 부각시켜야 하고, 그것을 공도정책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또 수토정책 의 대상에는 울릉도 뿐만 아니라 독도도 포함되었음을 드러내주어야만 한다. 지금까지의 자료 가운데 울릉도에서 독도를 보았다는 자료는 제시되고 있지만 독도에 들어가 어로활동을 한 자료, 그리고 수토관이 독도를 심찰한 자료는 아직 발굴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관한 자료 발굴에 초점을 두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