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칭 전략은 상대성이 있는 두 국가가 예측 불가능한 목표와 방 법, 수단과 의지로 싸우는 전쟁 승리의 내재된 본질이라 할 수 있다. 금번 연구의 목적은 비대칭 전략의 형태를 중심으로 그 기원을 성경 속 전쟁 사례 분석을 통해 알아보고 함의를 도출하여 현존 및 미래의 위협 에 대응한 한국군의 비대칭 전략의 발전방향을 제시하는데 있다. 연구 결과 비대칭 전략은 3,000년 전 성경 속 전쟁 사례를 비대칭 전략의 형태 면에서 분석한 결과 고대로부터 비대칭 전략이 전쟁승리의 본질적인 요소 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현존 및 미래의 위협에 대비한 한국군의 비대칭 전략 발전방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변국과 북한의 위협을 고 려 균형적인 비대칭 전략 추구가 필요하며. 국방예산 측면을 고려하여 위 협을 고려한 효과적인 대응이 요구된다. 둘째, 한국군은 상대적인 비대칭 성을 강화해야 한다. 특히, 방법의 비대칭 전략 발전에 관심을 증대시켜야 한다. 셋째, 한국군은 국가총력전 차원에서 상대적인 비대칭성을 강화하여 북한이 비대칭 전략을 사용할 수 없는 여건을 조성해 가야 한다. 끝으로 평상시부터 많은 연구 및 토의와 군교육기관에서부터 비대칭 전략에 대 한 연구, 토의 및 발전이 병행되어야 한다. 향후에도 비대칭 전략에 대한 이론적 논의를 활성화하여 비대칭 전략에 대한 핵심요소 도출, 실행방법 구체화로 한국군의 비대칭성이 발전되기를 기대한다.
현재 마약문제는 전 세계적 문제로 부각되고 있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다른 사회문제들에 비해 그 주목도가 떨어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 만 이 문제는 결코 우리 사회의 주변 문제로 치부될 수 없다. 마약문제 는 한국 사회의 주요 현안들과 긴밀하게 연동되며 시대에 따라 보건문제 를 넘어 하나의 정치문제로, 때로는 경제문제로, 또 일종의 문화현상으로 부각되기도 해왔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역사적 흐름과 시대적 배경 을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는 것은 당대 한국의 사회상을 보다 폭넓게 이 해하는데 있어서도 의미 있는 작업이다. 본고의 목적은 그간 공백으로 남아있던 한국전쟁기 한국 마약문제의 유형과 사례를 분석하고, 이를 바 라보는 당국의 문제인식이 이후 「마약법」 제정의 배경으로서 어떻게 반 영되었는지 살펴보는데 있다. 본고에서 주목한 1950년대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남북 간 치열한 체제경쟁이 벌어졌던 시대였다. 따라서 해당 시 대 연구는 주로 남북 간 경쟁관계로 인한 중독 위험의 증가라는 관점에 서 간단히 이해되어 왔다. 본고는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당대 마 약문제의 구체적 유형과 사례를 검토함으로써 마약문제에 비친 한국전쟁 전후 한국 사회의 모습을 그려볼 것이다. 이 시기 마약문제의 양상을 구 체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이후 「마약법」 제정의 배경뿐 아니라 현재까지 이어지는 마약문제의 양상을 연속적으로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지점이라 할 것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전쟁 후의 정의에 있어 정치적, 윤리적 우선순위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살펴 보는 것에 있다. 본고에서는 이를 위해 정 의 전쟁론에 기반하여 전쟁의 규범성 및 윤리성을 검토함으로써 전쟁 후 의 정의에 필요한 요건들을 살펴보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 라엘의 가자지구 하마스 섬멸 작전은 최근 신냉전 담론을 일반화 시키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는 동시에 전쟁 규범의 목소리를 키웠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쟁들의 정당성과 전투 가운데 벌어지는 제 사건들 에 대한 윤리적 비난 등이 그것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혼란 가운데 전 쟁의 규범성에 주목했다. 정의로운 전쟁이 되기 위한 정당성은 어떻게 형성이 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정의전쟁은 구현할 수 있는가? 사실 이는 규범과 국가이성, 합리적 자조(self-help)행위 간 충돌과 그로 인해 폭로 되어진 규범의 이중성은 권력의 불가분성을 설명한다. 그리고 완성은 전 후 정의에 대한 승전국의 선언으로 끝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동시에 전쟁 피해자의 피해 복구 또한 전쟁 후 정의로서만 복구 가능하다. 혹자 는 이러한 피해자의 피해 복구는 전쟁범죄에 대한 처벌로만 가능하기 때 문에 승전국은 이를 피해 화해를 앞 세워 전쟁의 정당성을 완성하려 한 다고 본다. 그러나 전후의 정의는 오히려 처벌과 화해가 동시에 양립함 으로써 수립된다고 본 고에서는 주장한다. 이러한 연구는 전쟁이 한참인 가운데 전쟁 이후의 정의로운 평화를 구상하는 편린이 될 수 있다는 점 에서 유의미하다. 더불어 현재 전쟁들에 대한 정당성이 아닌 전후의 정 의를 논한다는 점은 연구의 공헌성을 더 한다.
이 글에서는 베트남전쟁 60주년을 맞아 그동안 조명받지 못했던 한미 해병대의 연합작전인 배리어상륙작전을 분석하였다. 배리어상륙작전은 선견부대 미운용, 상륙철수 시 혼잡 발생, 게릴라전에 매몰된 연합군이 작전 시 상륙작전의 효용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점 등의 미흡한 점 이 식별되었다. 그러나 한국 해병대 청룡부대 주도로 전개되었던 배리어 상륙작전이 갖는 전략적 의의와 가치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호이안지역 평정작전을 통해 베트남 1번 국도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 하였다. 둘째, 한국군 주도로 상륙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성공적으로 작전 을 수행함으로써 한국 해병대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고 연합 상륙작전 수 행에 대한 자신감을 함양할 기회가 되었다. 셋째, 배리어상륙작전을 통하 여 한미 해병대 간 군사적 유대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넷째, 전시 지역 평정작전과 안정화 작전 수행 시 상륙작전이 유용함을 입증하였다. 배리어상륙작전은 6·25전쟁 이후 최초로 한국 해병대 주도로 실시된 연 합 상륙작전으로 상륙작전의 효용성과 융통성 그리고 충격력을 충분히 입증해 준 작전이었다. 또한 상륙작전이 미래 전장 환경에서도 충분히 융통성 있게 활용될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국군은 다양한 환경하에서 상륙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교리개발과 교육훈련이 요구되며, 한국 주도 의 연합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충분한 역량을 갖출 필요가 있다.
본 논문은 현대 국제 에너지 정치의 주요 이슈인 미-러 에너지 전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사태가 유럽연합의 에너지 안보와 정책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먼저, 미국과 러시아 간 에너지 패권을 둘 러싼 전략적 대립의 기원과 전개 과정을 탐구하며 글로벌 에너지 시장과 지정학적 균형에 미친 영향을 평가한다. 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유럽연합의 에너지 시장과 정책에 끼친 파장을 분석하여 에너지 공급의 불안정성, 가격 변동성, 그리고 정치적-경제적 연쇄 반응을 포괄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에 따라 유럽의 에너지 위기가 유럽연합의 에너지 안 보 및 정책 결정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조명하겠다. 이어서, 유 럽연합 회원국인 독일과 폴란드가 직면한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취한 다양한 에너지 정책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에너지 위기를 타파하 기 위한 유럽연합 국가들의 다변화 전략이 유럽의 에너지 안보와 정치적 통합에 어떤 장기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종합적 평가 및 전망 을 제시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2022년 2월 24일 러-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의 러시아 문화정책의 변화와 특징을 고찰한다. 러시아의 문화정책은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시작한 이후 강력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며 우경화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한국과 러시아는 상호 비우호국가로 지정하여 얼 어붙은 양국 관계와 국제 정세 속에서도 여러 분야의 K-콘텐츠는 러시 아 사회에서 선전하고 있으며 경제적인 효과까지 창출하고 있다. 아직까 지 러시아 사회에서 한국의 대중문화는 러시아 청년들의 하위문화로 주 류문화에 영향을 줄 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수 요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양국의 대중문화 분야의 인적·물적 교류 활성화를 전제로 실리적이고 실효성 있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한국전쟁은 서울을 폐허로 몰아넣는 파괴의 문(門)이 자 새로운 독립국가의 이상적 수도 서울을 다시 지어내 는 재탄생의 문이었다. 전후 30여 년간, 발전의 꿈과 의 욕에 부푼 계획가들은 저마다 새 서울의 골격을 구상하 고 만들어 나갔다. 이 연구는 ‘주체’와 ‘과정’에 주목하 여, 1950년대-1980년대 중반의 서울 도시계획과 개발 을 이상적 도시에 관한 상이한 목표와 방법을 추구했던 계획가들 간 충돌과 경쟁 과정이었음을 드러내고, 그들 간 힘겨루기 국면에 따라 도시계획과 개발 방향이 변화 를 거듭하며 전후 서울이 조성되었음을 그리고자 한다. 이 연구는 그동안 현대 도시계획사가 계획안이나 제 도, 도시 개발상 등의 ‘결과’를 중심으로 서술되면서, 서 울 도시개발이 특정한 방향으로 변화하거나 일관성을 갖지 못하는 흐름을 보였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 음에 주목하였다. 이로부터 ‘도시계획가’라는 특정한 집 단의 관점과 기준에 의하여, 그들과 다른 생각을 지니 고 활약하였던 다른 계획가들이 소외되어 있으며, 시기 구분과 인식 또한 그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정의되어 있 음을 발견하였다. 이에 따라 토목기술자와 건축가라는 계획가들과 그들의 구상을 발굴, 복원하고, 그들의 참여 에 의하여 수도재건 논의가 시작되었던 1952년부터 확 장된 서울시역과 한강의 개발이 마무리되는 1986년까 지의 기간을 전후 서울의 틀이 구상되고 완성되는 중요 한 시기로 파악하였다. 이 시기를 계획가들의 갈등과 조정 양상에 따라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각 시기별 도 시계획 논의와 실행 과정, 도시변화를 고찰한 연구 결 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52-65년은 관 주도로 도시계획이 마련된 시기로 서, 일제강점기 기술관료 출신 토목기술자들과 대한국 토계획학회 중심 도시계획가들이 기성 도시계획의 영향 하에서 분산 위주의 도시계획을 수립하였다. 최경렬 등 토목기술자들은 일제 하 도시계획을 이어 받아, 평면적 인 용도 구분과 체계적인 공지 확보를 통한 저밀도의 도심 경관을 추구하였다. 또한 동서방향 간선축 중심 도시 확장 방식에 따라 교외 주택지를 조성하여 인구를 분산하고자 하였으며 경인 간 연속적 도시 형성을 추구 하였다. 한편 주원을 비롯한 도시계획가들은 이를 극복 하고자 하면서, 경제지리학에 기반하여 국토의 균형 개 발을 추구하고 동심원형 도시 확장 방식을 통하여 교외 주택지를 조성하고자 하였다. 상이한 두 도시계획 논리 는 1960년대 중반, 동심원형 도시구조를 기초로 하면서 도 부분적으로는 간선축 중심의 선형 도시구조를 강조 하는 방향으로 절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계획은 현실과의 괴리로 상당 부분 구상 차원에 머물렀다. 1966-74년은 도시계획이 관 외부 전문가들에 의하 여 제안되도록 민간 용역화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계 획가 그룹에 더해 김수근 등을 중심으로 한 전후 해외 유학파 건축가와 그 유파, 외국인 도시계획 자문가 등 새로운 그룹이 등장하여 기성 도시계획을 비판, 변화시 켜 나간 역동적 시기였다. 이들은 물리적 환경의 조작 을 구체적으로 구상하는 ‘도시설계’에 의하여, 부분적 실행으로부터 도시를 바꾸어 나가고자 하였다. 그들은 슬럼화된 도로용지 위에 복합적 도시기능을 고밀도로 담는 ‘메가스트럭처’를 제안하면서 기성 도시계획 체계를 변형하고 주변부에 불과했던 도심 동부에 새로운 중 심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또한 선형 도시구조로의 전환 을 위한 인프라를 구상하여 도심을 관통하는 고가고속 도로 건설을 지원하였다. 그들은 교외에 주택지 건설 대신 직주근접의 고밀복합 ‘신도심’ 건설을 통하여 선형 도시구조로의 전환을 꾀하였으며, 이를 여의도 개발에 적용하였다. 1970년대 초, 국토종합개발계획 수립과 그 린벨트 설치로 도시계획가들의 동심원형 도시계획이 다 시 주도권을 가지면서 서울시는 영동 등지에 교외 주택 지 개발 중심의 신시가 건설을 전개하게 되었지만, 여 의도에서는 ‘고층 아파트 단지’라는 새 도심 주거 유형 이 출현하여 신도심화 지향이 여전히 지속되었다. 이 시기 건축가들의 새로운 시도를 통하여 서울의 경관과 구조는 실질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1975-86년은 안보 위기에 대응한 도시개발 여건 제 한 속에서 상이한 구상을 지녔던 각 그룹의 입장이 조 정되고 서울 도시계획 방향이 전환되어 오늘날 서울 경 관과 구조의 틀이 형성되는 시기였다. 강북 인구 소산 책에 따라 단핵 동심원형 구조로부터의 탈피가 추구되 면서, 서울시는 해외 유학파 건축가 김형만이 새롭게 제시한 ‘3핵 도시’ 구상을 채택하게 된다. 그는 김수근 의 구상을 계승하면서 구도심, 영등포와 함께 영동의 도심화를 추진하였으며, 이에 따라 메가스트럭처, 고층 아파트 단지 등 신도심 조성을 위해 시도되었던 선례들 이 이식되어 직주근접의 고밀복합 도시를 신속하게 완 성하였다. 기성세대가 물러난 뒤, 최상철 등 새 인물들 이 중심이 된 도시계획가들은 기존 구상에서 구심성을 소거한 ‘다핵화’를 지향하면서, 해외 유학파 건축가들과 구상을 맞추어 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동일한 자연 인식을 공유하면서 도시구조 재편의 일환으로 한강 정 비를 추진하였으며, 여기에 토목기술자들의 오랜 국토 개발 구상이 힘을 더하여 한강종합개발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로부터 서울은 구도심과 오랜 동서방향 간선축 에서 탈피하여 한강을 중심으로 세 도심이 배치된 도시 구조를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이상의 전후 서울의 탄생 과정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먼저, 이는 도시계획 주체를 민간화해 나가기 시작한 과정이었다. 관 주도의 일관된 질서에 의해 도 시가 조성되는 대신, 대규모로 확장된 도시의 각 부분 이 여러 주체들에 의해 다원적으로 구상되는 시대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는 전후 서울 도시계획의 일관성 부재를 설명하고 평가하는 중요한 지점이 될 것 이다. 다음으로 이는 전후 문화적 세대교체 속에서 시 차를 두고 도입된 국제적 도시계획 이론들이 제3세계 도시 서울이라는 문맥 속에서 만나 새로운 형태의 도시 구상을 낳는 과정이었다. 이로부터 대형복합시설, 고층 아파트 단지, 3도심 체제, 한강 중심 공간구조 등 오늘 날 서울을 특징짓는 경관과 도시 구조가 자리 잡기 시 작하였다. 한편 이는 상부의 철학, 원칙, 신념 등으로부 터 도시 형태를 만들어 나갈 것인지, 하부의 물리적 시 설 조성 기술로부터 도시 발전 방향을 결정해 나갈 것 인지, 규범과 경험 간 대결 속에서 도시계획 방법을 찾 아나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이때 중요한 성취는 ‘도시 계획(urban planning)’ 뿐 아니라, 이에 대응하는 ‘도시 설계(urban design)’라는 건축가의 새 업역의 등장이었 다. 마지막으로, 이는 앞서 밝힌 변화들을 통해 도시계 획에 관한 오랜 관념을 딛고 기성 도시가 담지 못하는 전후의 새 정치·경제적 요구를 수용하여 도시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전환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이와 같이 서울 도시계획이 다양한 입장을 지닌 여러 주체들에 의해 수립되었으며, 주체들 간 경쟁구도에서 비롯된 긴장을 내포하고 있음을 살핀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또한 이는 지금까지 서울 도시계획 주체로 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했던 건축가들의 구상을 고찰 하고, 전후 서울 경관과 구조 재편에 대한 그들의 기여 를 발굴하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그럼에도 이 연구 는 전후 서울의 탄생 과정의 다양한 장면들을 두루 살 피지 못하고, 도시 경관과 구조 재편의 시선에서 중요 한 사건들을 추려 한정적으로 살폈다는 점에서 빈틈을 갖고 있다. 앞으로 이 연구에서 다루지 못한 계획가들 과 그들의 구상, 실천을 살펴, 오늘날의 크고 복잡한 서울을 만들어 낸 힘들을 더욱 풍성하게 드러내게 되기를 기대한다.
During wartime, the operation of engineering equipment plays a pivotal role in bolstering the combat prowess of military units. To fully harness this combat potential, it is imperative to provide efficient support precisely when and where it is needed most. While previous research has predominantly focused on optimizing equipment combinations to expedite individual mission performance, our model considers routing challenges encompassing multiple missions and temporal constraints. We implement a comprehensive analysis of potential wartime missions and developed a routing model for the operation of engineering equipment that takes into account multiple missions and their respective time windows of required start and completion time. Our approach focused on two primary objectives: maximizing overall capability and minimizing mission duration, all while adhering to a diverse set of constraints, including mission requirements, equipment availability, geographical locations, and time constraints.
Since Russia-Ukraine war, India and the United States has enhanced their cooperation as evidenced by the recent engagements. Multiple meetings by officials and leaders including two Quad and 2+2 dialogue summits, have provided a clear stance on each country’s perspective on the recent conflict. The US-India dispute regarding Russia-Ukraine war demonstrates that it is a stress test for the US-India ties, as well as a test of the US leadership in the global politics. The balancing act required to settle the differences between the two countries will have implications for the Indo-Pacific region as well as global security, even though the disagreements are not yet mutually incompatible. Strengthening ties with the US is now a tightrope walk for India. While there are differences between the two countries in Ukraine, the real challenge is turning these differences into opportunities. The paper deals with the different issues arising from the Russia and Ukraine conflict in the context of US-India interface.
During wartime, the operation of engineering equipment plays a pivotal role in bolstering the combat prowess of military units. To fully harness this combat potential, it is imperative to provide efficient support precisely when and where it is needed most. While previous research has predominantly focused on optimizing equipment combinations to expedite individual mission performance, our model considers routing challenges encompassing multiple missions and temporal constraints. We implement a comprehensive analysis of potential wartime missions and developed a routing model for the operation of engineering equipment that takes into account multiple missions and their respective time windows. Our approach centered on two primary objectives: maximizing overall capability and minimizing mission duration, all while adhering to a diverse set of constraints, including mission requirements, equipment availability, geographical locations, and time constraints.
러-우전쟁은 장기전으로 전환하여 지리한 소모전을 수행하고 있다. 전 쟁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전쟁의 원인을 연구하여 전쟁의 발생을 억제하 고 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최소화하여야 한다. 따라서 본 연구의 목적은 러-우전쟁을 전쟁원인이론의 3가지 수준별 분석을 중심으로 연구하여 전쟁 의 원인과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데 있다. 분석 결과 러-우전쟁 은 인간적, 국가적, 국제체제적 수준에서 발발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결론 을 도출할 수 있었다. 또한 전쟁의 3가지 수준별 분석의 상호관계를 분 석하여 국제체제적 수준이 인간적, 국가적 수준의 발발원인에 영향을 미 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러-우전쟁의 영향은 동북아의 및 한반도 에 미치는 영향도 지대하다. 첫째, 우크라이나의 장기전 전환은 미국의 대선 국면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최근의 한미일 안보협력 에 대응해 북중러의 안보협력을 강화할 수 있다. 둘째, 북러의 실질적인 군사협력으로 북한은 러시아로부터 취약한 첨단 군사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다. 셋째, 북한의 위상 강화로 미국의 대선국면과 맞물려 핵실험 등 도 발을 해올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비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본 논문은 미국 남북전쟁의 전개와 의의 및 교훈을 분석하기 위한 것 이다. 이를 위해 남북전쟁의 배경 및 원인, 남북전쟁의 전개와 의의, 남 북전쟁이후 미국의 발전과 상흔극복 등의 순서로 살펴본 후 결론을 도출 해 보기 위한 것이다. 남북전쟁(1861~1865)의 원인은 매우 복잡하고 그 배경도 극히 광범위하지만 남북전쟁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노예제 존 속을 둘러싼 갈등이다. 남북전쟁의 주요과정은 남부와 북부의 대립 → 링컨의 대통령 당선 → 남부의 연방 탈퇴 및 독립선언→ 남북전쟁 발발 → 북부의 승리→노예해방과 미국의 재건 등으로 볼 수 있다. 링컨은 남 부를 ‘체제 반역’으로 규정했고 62만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지만 남부가 항복협정에 서명한 뒤에는 대통합·대사면을 단행하여 반역자를 처벌하지 않았다. 링컨이 보복정치를 감행했다면 지금의 미국은 없었을 것이다. 남 북전쟁의 전쟁사적 의의 및 영향은 ①군사 지휘력의 중요성, ②총력전 양상의 노정, ③전문 직업군인의 양성, ④과학기술발전에 의한 화력·전력 의 강화 및 전술변화 등으로 요약·정리해 볼 수 있다. 미국의 남북전쟁 참상의 슬기로운 극복과 민주국가와 세계적인 강국으로의 도약 그리고 남북전쟁의 상흔과 극복노력 등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아닐 수 없다.
The war in Ukraine found numerous global brands publicly taking stances on the issue. They turned to their social media channels to disclose their initiatives, which ranged from simple statements through to actions of greater substantiality such as donations and divestments and triggered a lively conversation and opposing consumer reactions. The phenomenon of brands advocating for crucial but polarising socio-political matters is known as brand activism and is a concept still under-conceptualised. Our study extends the knowledge of brand activism in two ways. First, we address literature calls for investigating the ways through which the marketplace endorses peace by exploring how brand activism serves as a peace marketing tool. We, therefore, term brands’ stance-taking promoting peace or in relation to war as “peace brand activism” and embark on fully unpacking it as a concept. Second, extending the understanding of the concept of brand activism that stands as mostly unidimensional, we proceed in developing a comprehensive conceptualisation of peace brand activism that tracks the range of forms it can take and accounts for its different types and characteristics. Our work employs an exploratory qualitative analysis to unravel how global brands become peace activists, as disclosed in their social media channels across different platforms. Our data captures the activities of a sample of global brands across social media channels. Our findings reveal the range of brand activism forms that can be employed by brands. We also unearth the types of peace brand activism approaches that can be adopted when disclosing peace brand activism initiatives on social media channels. Our work contributes to theory by providing a holistic understanding of the concept of brand activism for peace and explicates important implications for managers and policy makers alike.
Since the beginning of the seventh century, Islamic law has played an essential role in protecting the personal, economic, judicial, and political rights of civilians during armed conflict. Fourteen centuries before the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was drafted in 1948, it had already initiated a human revolution consisting of a set of human principles. In addition, Islamic law has made a significant contribution to international humanitarian law (IHL). This paper focuses on two specific legal constructs in warfare: the definition of the combatant and the principle of distinction. This article comparatively examines how these two laws deal with different aspects of war that fall under jus ad bellum, jus in bello, and jus post bellum. A comparative analysis of the various elements and aspects of just war theory in Islamic and contemporary international law provides a much deeper understanding of its limitations. We can safely conclude that there is a unique relationship between the Islamic law of war and IHL.
본 연구는 1959년 일본의 재일조선인 북한송환(북송) 발표 직후인 2월 부터 6월까지 한일 양국의 국회에서는 재일조선인 북송에 대해 어떻게 논의를 전개하였는지 분석하였다. 즉, 본 연구의 질문은 ‘1959년 초반 한국 국회와 일본 국회는 재일조선인 북송 문제에 대해 어떠한 논의를 했는가?’이다. 이에 답하기 위해 본 연구는 한국 국회와 일본 국회의 1959년 회의록을 분석했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선 한국의 국회는 북한을 주권국가가 아니라고 보며 일본의 재일조선인 북송 계획에 반대 하는 논의를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국회 내의 의견 차이로 한 국 국회가 재일조선인 북송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이고 본격적인 논의 를 진행하는 것은 어려웠다. 반면 일본의 국회는 한국 정부와의 관계 악 화를 우려해 재일조선인 북송 문제를 한일회담과 구분하여 처리하는 방 안을 논의했다. 또한, 일본 국회는 일본 정부가 북송 문제에 직접 관여하 지 않도록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재일조선인 북송 문제를 주도하여 해결해 야 한다는 방침을 세우며, 동시에 북송 실행을 위해 북한적십자사와의 회담에서 원만한 해결을 위해 논의를 확장하였다. 그러므로 재일조선인 북송 문제에 대한 1959년 2월부터 6월까지의 한국과 일본의 양국 국회 의 논의를 비교하면, 일본 국회의 논의가 한국의 국회 논의보다 구체적 이고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1959년 12월 재일조선인 의 북송은 결국 실행되었다.
본 논문은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했고, 문재인 전 대통령이 유엔연설 에서 여러 차례 제의한 종전선언을 북한이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를 김일 성이 밝힌 ‘3대혁명역량강화방침’에 입각해서 추론한 것이다. ‘북조선 혁 명역량강화’에서는 핵무력을 보유한 군사적 역량은 어느 때보다 강하지 만 국제제재와 경제난으로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등 정치·경제적 역 량은 매우 약화되었다. 이러한 체제내구력 보완을 위해 ‘강한 외부의 적’ 인 ‘미 제국주의’가 필요하므로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첫 단계인 종전선언 카드를 받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남조선 혁명역량강화’에서는 ‘이 석기 내란 선동 사건’처럼 제도권 침투를 비롯해 노동, 교육, 문화, 종교 계 등 사회 저변에 친북·반미 의식이 폭넓게 퍼져있다. 따라서 미-북 간 종전선언으로 인해 평화체제로 전환된다면 반미 명분이 약화되어 70여 년간 축적된 남한의 혁명역량이 치명적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국제 혁명 역량강화’의 핵심은 국제사회에서 반제·반미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미국을 고립시켜 궁극적으로 ‘혁명의 가장 큰 장애물’인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것이다. 미-북 간 종전선언이 합의된다면 적대관계가 청산되어 미국을 비롯한 반제·반미 이데올로기로 연대한 ‘국제 혁명역량’이 와해될 수도 있다. 따라서 향후 북한은 자체의 힘으로 충분한 대미 핵 억제력 및 체 제 내구력을 갖추고, 전술핵무기와 배합된 남조선 혁명역량을 완비할 때 까지 ‘종전선언 카드’를 받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남한, 북한, 미국 등 세 행위자 간에는 복잡한 상호작용이 지속되며 전략적 삼각관계가 형성되어 왔다. 세 국가 간 관계에 적용돼 온 디트머의 전략적 삼 각관계 분석틀에 따르면 냉전기엔 ‘안정적 결혼’, 탈냉전기엔 ‘안정적 결혼’과 ‘로맨틱 삼각관계’ 사이의 과도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북한이 대미 협상수단으 로서 핵개발 단계를 넘어 핵보유국 지위를 기정사실화하고, 미중 간 패권경쟁 과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구도가 본격화된 신냉전기에 들어서면서 남북미 간 전략적 삼각관계는 무너졌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래 미국과의 대화에 목매지 않고 대미 장기전체제에 돌입한 북한은 남한과의 대화도 철저히 단절한 채 동 맹국들과의 관계에만 몰두하고 있다. 북한의 핵 무력 완성으로 비핵화라는 목 표가 불가능에 가까워지고 ‘군축’이 최선책이 된 가운데 현재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하느라 여력이 없는 바이든 정부에도 북한문제는 후순위로 전락해 소극적 인 대북정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남북미 간 상호작용이 아예 끊겨버린 지금 이 오히려 북한의 배신행위 아래 불안정하게 유지되어 오고 있던 현재까지의 남북미 관계가 새롭게 거듭나는 중요한 기회일 수 있다. 기회가 오기까지 남북 관계에서의 긴장 국면이 확전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는 것이 현재 한국 정부의 과제일 것이다.
본고는 전쟁 결정 원인으로서 역사적 필연성 사고 체계에 주목하였다. 이에 대하여 냉전 시기 소련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 우선 본고는 전쟁 결정 여부를 설명하는 데 있어 타자와의 관계 인식을 양립불가성 또는 공존불가성에 기반한 관계로 분류할 수 있는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인식론을 분석틀로 제시하였다. 이 중에서 후자가 전쟁 결정을 야기시킬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본고는 소련의 역사적 필연성 인식을 살펴보았 다. 냉전 시기 소련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진영과의 전쟁불가피론과 필 연적 승리론을 채택하였으나, 흐루쇼프 시기를 기점으로 이를 폐기하고 전쟁가피론을 수용하였다. 더 나아가 본고는 소련이 미국과의 전쟁에 대 하여 새로운 역사적 필연성 인식을 가졌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에 대하여 소련이 전쟁 대신 체제 경쟁을 통해 미국을 이길 수 있다고 판단 하였으며, 핵무기의 등장으로 전쟁은 궁극적으로 공동 멸절을 가져올 것 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필연성의 확립으로 인해 소련의 전쟁불가피론에서 전쟁가피론으로의 사고 변화는 불가역적 속성을 갖는다는 결론을 도출하 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무력 침공이 계속되면서 갈등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 Z'에 맞서 우크라이나의 저항과 미국과 북 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지지에 고전하고 있 다. 전쟁 초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평화 협상은 성과가 없고 러시 아에 대한 경제제재와 나토 회원국들의 각종 무기 지원, 러시아의 핵무 기나 화학무기 사용 가능성 등이 제기되면서 군사적 긴장감은 고조되고 있다. 문제를 제기하면: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침략적인 전쟁을 정의할 수 있습니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합법적이고 규범적인 논 의가 유용한가? 본 논문의 목적은 국제사회의 비난과 제재에도 불구하고 푸틴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의 요인을 분석하는 데 있다. 이는 케네 스 왈츠가 제안한 "개인적 성향, 국내 정치, 국제 체제"라는 삼자적 이론 적 틀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또한 분단된 한반도에 제공된 전쟁의 교 훈과 시사점을 분석한다. 현대전에서 글로벌 안보위협의 변화 양상과 리 더십, 군 통수권자의 전략적 선택이 중요하다. 기술력 육성, 예비군 강 화, 하이브리드 전쟁과 정보기술이 평화를 위한 도구로서 중요해지고 있 다. 여기에 사이버전과 국제적 연대와 지원, 반전 여론 등이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