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고키(1975년생)는 지난 2013년 제 55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일본관 대표 작가로 선정되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 준비된 첫 베니스 비엔날레였던 만큼, 그 해 일본관의 화두는 세계인들을 향해 재난에 대응하는 ‘일본’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작가는 3.11 대지진이 ‘일본’이라는 국가의 재앙이라고 할지라도 개개인에 따른 체험의 격차가 상당할 뿐 아니라, 아무리 공동체적 단결을 강조하더라도 과연 타인의 재앙에 공감하고 그 고통을 공유 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본 논문에서는 다나카 고키의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 와 이후의 일련의 프로젝트를 통해 동일본 대지진이 일본 사회에 일으킨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 한 의심과 그 새로운 전망, 그리고 참여형 미술의 사회적 역할 등을 살펴보았다.
최근 곤충이 식재료부터 의약품까지 산업 전반에 활용가치가 높아지면서 세계적으로 곤충 시장이 성장하고 있으며(한국농업신문, 2017) 앞으로 식품산업, 생명과학 및 의약 분야 등 다양한 측면에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유용곤충학, 2014 손민우 외). 본 연구는 국내의 곤충 산업 발전을 위해 곤충을 활용하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전북 부안 누에타운의 실태를 파악하여 곤충 체험 프로그램 만족도 및 개선방안을 알아보고자 한다. 기존에 있던 참여도가 낮은 프로그램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곤충 활용 프로그램을 통해 더욱 실용적이고 교육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누에를 활용한 촉감 치료나 미술(시각 위주) 치료 등을 통해 곤충을 이용한 동물매개치료 분야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 )는 1960년대 중반부터 자신이 수집하거나 직접 촬영한 사진, 인쇄물 삽화, 스케치로 구성한 <아틀라스 Atlas>를 제작하고 있다. 리히터는 자신의 거대한 트라우마인 나치 정권과 2차 세계대전의 흔적부터 가족과 아이들의 따뜻한 추억까지 <아틀라스>에 저장해왔다. 처참했던 과거를 의도적으로 망각 하려는 기억 위기에서 잠재된 기억을 소환해내려는 아카이브 열병이 모순적으로 발생했 고 <아틀라스>가 시작되었다. <아틀라스>는 리히터의 기억을 저장하는 매체로서 존재 하지만 망각과 기억 사이, 해체와 결합 사이, 은폐와 폭로 사이를 넘나들며 이중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모호하고 이중적인 형태로 담겨 있지만 <아틀라스>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리히터의 기억과 트라우마의 흔적들은 리히터가 살아온 복잡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구축한 자신만의 생존 방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의 유지관리예술에 관한 연구이다. 1969년 유켈리스는 ‘유지관리예술 전시계획서’ 선언문을 통해 여자들이 집안일을 떠맡는 것에 반박했 다. 이 선언서는 페미니즘 미술성향으로 쓰여 졌으며, 유켈리스는 의존이라는 불변의 제도에 갇힌 가정주부 이미지를 바꾸고자 시도하였다. 당시 첫째 아이를 임신했던 그녀는 사회적, 정치적 변화에 대항하는 한편 생물학적, 심리적 변화를 겪고 있었고, 이런 경험은 예술에 대한 그녀의 태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다시 말해서 유켈리스는 예술과 생활을 양립시킬 수 있는지 의문을 가졌고, ‘유지관리예술가’가 되어 가정주부와 예술가의 전형을 재해석하고자 했다.
‘우리의 일상이 돌아가도록 만드는 행위(performance)’인 ‘유지관리예술’은, 전통적으로 열등한 노동으로 여겨지는 여성의 가사노동, 즉 요리와 청소, 육아, 쇼핑(장보기) 등의 일을 ‘유지관리(maintenance)’ 양식의 작업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유지관리 양식은 ‘발달(development)’ 양식의 작업과는 대립되는 것으로서 정의한다. 즉 작가는 유지 관리예술 전시계획서에서 ‘발달’과 ‘유지관리’를 두 개의 기본적인 체계로 구분한다. 즉, 발달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창조, 새로운 것, 변화, 발전, 전진, 흥분 등이며, 유지관리는 순수하게 개인적인 창조물에서 먼지를 털어내는 것, 새로운 것을 보존하는 것, 변화를 인정하고, 발전을 보호한다, 전진을 방어하고 연장한다, 흥분을 새롭게 한다 등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유지관리’의 작업도 발달의 양식과 동등한 지위를 얻어내야 함을 주장 하였다.
이러한 유켈리스의 작품 성향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같이 일반 사물이 예술적 공간에서 기능을 잃고 변형됨으로써 나타나는 경계의 와해와 영역의 파괴라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의 성격이 있다. 뒤샹은 미술에 대한 기존의 관념, 작품의 인습적인 제작, 평가, 수용, 유용의 모든 과정에 도전했다. 작품과 작가의 범주, 미에 대한 관객의 기대, 작품의 서사 체계, 이성적 해석 등을 무력화하기 위해 우연이라는 방식을 선택하고 미의 객관적 가능성을 시도했다. 뒤샹의 방식대로, 유켈리스의 작품은 가사생활에서의 문제점들과 관련된 레디메이드를 지속하고 확장시켜나갔다. 그녀의 작품들이 담아내고자 하는 내용은 명백히 일상적인 가사노동과 관련이 있었고, 이는 예술활동의 대상에 대한 개념주의적인 태도로써 레디메이드의 본래의 도전도 계속적으로 이어나갔다.
그녀는 또한 초기부터 제도비판에 대한 옹호자였으며, 하트퍼스에서의 퍼포먼스를 통해 박물관의 권력구조가 어떻게 전복되는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유지관리를 위한 노동은 예술처럼 흥미롭거나 전위적인 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 이다. 유켈리스의 유지관리 작업은 행동주의와 학문적 관점에 대한 접근을 통해 페미니즘적인 자기 정체성과 공동체 사회와의 연관성을 명백하게 드러내면서 다양하게 확장하게 한다.
마틴 하이데거는 “세계 그림”을 세계 박람회에 의해 악화되는 해로운 기술 효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를 욕망하는 관람객들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드러난다. 관람객들, 미 술가들, 그리고 박람회의 조직원들이 제각각 다른 의도를 가지고 세계 박람회라는 국제 무대에 임했듯이 오늘날 전지구적인 비엔날레에서 활동하는 후예들 역시 서로 다른 의도로 이 무대에 오른다. 본 논문은 1851년의 대영박람회와 2005년의 리옹 비엔날레 사례를 통해 박람회의 축 제적 기능에 의해 촉발된 “경험의 미학”을 논한다. 경험의 미학은 대중에게 예술을 개방하고 대 중들이 스스로 예술의 의미를 변화시키고 당대의 현안에 관한 국제적인 논의를 이끌어내도록 독려했으며, 국제적인 노예 경제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불완전하나마 서구 세계에 아시아의 철 학과 문화, 치유의 과학을 삽입하려는 시도였다.
본 연구는 온라인 큐레이션 플랫폼을 이용한 외현적 정보의 제공이 현대미술에 대한 일반대중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효과를 가지는지 알아보았다. 현대미술은 일반대중이 접근하기 난해한 장르로 여겨져 왔다. 한편, 미술 감상에 대한 연구들은 외현적인 정보의 제공이 미학적 감상 경험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밝혔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작품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현대미술을 감상하는 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알아보았으며 감상 경험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한 Leder et al.(2004)의 이론적 모델에 기초하여 외현적 정보가 어떠한 인지적 처리과정을 도와주는지 분석하였다. 더 나아가 최근의 전시 트렌드를 반영하여 온라인 플랫폼 환경을 적용하였다. 실험 1에서는 작품과 설명문이 제공되었고 작품에 대한 이해도, 관람의향을 보고하였다. 실험 결과, 해설이 제시된 조건에서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더 높았다. 또한, 긴 해설이 제시된 조건에서 해설 이해도와 관람의향을 작품이해도가 완전매개하는 매개모형이 나타났다. 실험 2에서는 ARS 설문을 추가하고 온라인 큐레이션의 능동적인 조작 환경을 재현했다. 실험결과, 해설이 제공된 조건들에서 관람의향, 작품이해도가 더 높았다. 예술사적 의미, 자아성찰, 창의성 등 Leder et al.(2004) 모델의 후기 단계에 해당하는 지표들 역시 해설조건에서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종합하면, 온라인 큐레이션 환경에서의 정보전달이 일반대중의 현대미술 작품에 대한 인지적 처리와 판단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이 글은 19세기 극락세계의 모습을 불화로 가시화한 <極樂九品圖> 에 대해 조성배경과 특징, 그리고 圖像의 연원을 구명한 글이다. 19세기 에는 전체 화면을 가로와 세로로 분할하여 나누고, 극락의 세계과 왕생장면을 그린 독특한 형식의 불화가 출현하여 近畿지역 왕실의 願堂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이러한 불화를 <극락구품도>라고 하는데 이 글 에서는 서울 興天寺에 봉안된 <극락구품도>를 통해 불화의 도상과 특 징을 살펴보았다. 흥천사는 19세기 후반 고종의 私親이자 실권자였던 興宣大院君李昰 應(1820∼1898)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佛事가 후원되었다. 이하응의 후 원에 힘입어 흥천사에서는 전각을 重修하고, 불화를 새롭게 조성하여 전각에 봉안하였으며 왕실의 祈福을 기원하였다. 이하응 이외에도 흥천 사에서는 상궁들의 후원으로 불화가 조성되었다. 왕실의 안녕을 빌기 위해 흥천사에는 1885년 <극락구품도>를 비롯하여 4점의 불화를 봉안 하였다. 이 때 함께 봉안되었다고 생각되는 <극락구품도>는 독특한 형 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른바 화면 분할식 나한도, 팔상도 등의 불화에도 적용되었으며 19세기에 주로 근기지역에서 유행된 형식이었다. 이 논문에서는 흥천사 <극락구품도>에 보이는 도상을 기본적으로는 극락을 묘사하는 불화나 경전의 變相에서 찾았지만 전각, 기물, 동물의 모티프 등은 당시 현실세계에서 吉祥을 상징하는 郭汾陽行樂圖나 瑤池 宴圖에서 차용하였다고 보았다. 길상의 기능을 하던 이런 그림들은 19 세기 이후 광통교를 중심으로 민간에 유통·확산되었다. 장수와 영원, 多 男과 자손번창, 태평과 복락을 바라는 상징체계가 구현된 회화의 이미 지는 극락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세계에 대한 바람과 이상향의 모델로 차용된 것이다. 또한 이 글에서는 제작연대가 기록되지 않은 흥천사 <극락구품도> 의 연대를 비정하였다. 1885년 조성되었다고 전해지는 흥천사 명부전 <十王圖> 10폭을 비교하여 전각, 인물표현 등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시왕도>는 <극락구품도>를 그린 畫僧大虛軆訓의 화풍과 유사하였 다. 따라서 <시왕도>가 <극락구품도>의 제작자였던 대허체훈이나 그 일파에 의해 그려졌을 가능성을 제기해보았다.흥천사 <극락구품도>는 19세기 왕실 원당에서 조성된 불화로 당대 인들이 꿈꾸었던 극락 세계의 일면을 보여준다.
<조완 좌상趙坐像>은 뉴욕 첼시에 있는 미술품보존연구소 Fine Art Conservation Group(소장: 김수연)에서 만난 무신초상화이다(도 1). 이 초상화의 얼굴은 영조 50년(1774년) 1월 15일(음력)에 시행했던 무과 과거시험에서 합격한 18명의 반신 초상화첩 《등준시무과도상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실린 을과 2등의 조완 반신과 동일한 인물임 이 확인된다(도 2). 18명의 무신상 가운데 당대 전신상으로는 유일본이 발견된 셈이다, 조완은 1724년에 태어나 영조 24년(1748) 정시무과에 급 제한 뒤 관료생활을 하였고, 벼슬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두 작품의 초상화법도 동일 화가의 솜씨여서, 새로 발굴한 <조완 좌 상>의 제작시기를 영조 50년(1774년)으로 보게 한다. 오사모에 해치 흉 배가 달린 동일한 단령포 관복차림이며, 두 손을 검은색 단령포 소매 안 에 넣어 가운데 모으고 양 무릎을 꿇고 정좌한 자세의 전신상이다. 앞의 초상화첩과 동일한 시기인 18세기 후반 도화서 화원 출신들의 초상화법 이 잘 드러나 있다. 약간 우향 한 자세, 뒷면에 흰색을 칠하고 그린 배 채기법, 종2품 가선대부 위상에 걸맞는 흉배와 관복 표현, 가볍게 입체 감을 넣은 얼굴묘사의 음영기법 등은 손색없는 화원의 묘사기량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