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rnization is an important stage in the process of human civilization. It is believed that Industrial Revolution of 18th century occurred in UK represents the starting point of modernization. This process occurs not only in the social changes of developed countries but also in the process taken by developing countries to catch up with the advanced countries after the Second World War. Developing China's modern industrial system typified by “Made in China 2025” is in line with world’s common practice and Chinese government’s aspiration of enhancing well-beings of its people.
The study of modernization goes through a theoretical development process from classical modernization to the second modernization. China's modern industrial system policy making complements and improves the classical modernization process. It is also a strategy aimed at keeping up with and leading the second modernization process. From the perspective of theoretical application, China's modern industrial system is a compound mode of industrial modernization.
Based on the review of modernization theory, this paper studies the policy evolution of China's modern industrial system and comprehensively evaluates its policies. In the policy evolution part, China’s different industrial policies in the stages of planned economy and market economy are distinguished, based on an explanation to the concept description of China's "modern industrial system" proposed by the 19th National Congress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and the meaning of various policy elements. The comprehensive evaluation of China's modern industrial system includes characteristic evaluation, effect evaluation and spillover evaluation. This research aims at helping other countries to gain a better understanding of China's modern industrial system.
동아시아 사회 전반에 걸친 연구에서 유학에 관한 이해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유학에 대한 다양한 학문적 접근과 통합적 방법론의 모색은 동아시아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연구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동아시아에 대한 전 세계적 관심은 아주 뜨겁다. 한반도의 정세나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심해지는 현황에서 동아시아를 정확히 보는 혜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유학의 다변적 해석에 관한 연구는 동아시아학 연구자들에게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여겨진다. 다만 하나의 사상을 특정한 시대의 요구나 편의성에 따라 임의적으로 해석하고 이용하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유학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영위해 나아가면서 필요로 한 동아시아적 복잡한 요소들이 융합되어 만들어진 보편적 가치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유학에 대하여 다시금 짚어보는 것은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철학, 사학 등 무한의 영역들이 세대를 뛰어넘어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실현됨으로써 공감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변화된 동아시아 세계에서 인간의 존재와 역할의 상실에 따른 근본적인 해결을 유학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This study on various kinds of footwear in the Late Qing Dynasty and the Republic of China (1840-1949) is based on the collections in the Folk Costume Museum of Jiangnan University. The utility functions of the various kinds of footwear are introduced in depth according to their different formation features and ergonomics. The basic utility function of the traditional footwear is to meet the basic needs of the body (mainly the foot) and people’s daily life with the special design of material, shape-making, craft skill and relevant foot accessories in the process of making and using of footwear under certain material conditions, such as abrasion resistance, anti-skidding, waterproofing, and warmth retention, etc. In addition, the traditional Chinese footwear has some comfortable and hygienic functions, such as hygroscopicity, breathability, antibacterial property, deodorization and foot massage and so on, which has much reasonableness and practical value for wearing. Therefore, the utility function of traditional footwear in Modern China is not an empty, isolated or intentional addition, but constantly discovered, summed up and amended in people's long-term living and working.
본 연구는 포스트모던그림책에 나타난 유아 창의인성교육 매체로서의 의미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유아 창의인성요소(최현주, 최연철, 2017; 서현정 외, 2017)’, 좋은 그림책 기준, 포스트모던 그림책의 특성이 명확히 드러나는지에 대한 분석 및 유아의 관심과 요구, 현장 적용의 적합성 등을 고려하여 최종 선정한 5권의 그림책을 대상으로 연구를 수행하였다. 임의로 선정한 5인의 공립유치원 교사를 연구 참여자로 하여 2018년 4월 2일부터 5월 13일까지 6주 동안 면담, 저널, 토론 등의 절차가 이루어졌으며, 이 기간 중 연구자는 연구 자료로 면접과 토론 및 비형식적 대화내용 전사본, 연구 참여자의 저널, 현장노트, SNS 및 MMS 메시지 등을 수집하였다. 자료 분석은 전체적 맥락 포착, 영역 분석, 반복적 검토, 해석, 수정, 유목화, 재확인 및 재검토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연구결과, 유치원 교사의 시각으로 본 포스트모던그림책의 유아 창의인성교육 매체로서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 ‘창의인성의 출발: 교사의 자기성찰’, 둘째, ‘열린 결말이 주는 권한’, 셋째, ‘서로 다른 입장에 서보는 열린 장’, 넷째, ‘갈등을 허용하고 다름을 조율’, 다섯째, ‘탐구와 열정’, 여섯째, ‘끝나지 않는 몰입’이다. 유치원 교사의 시각으로 볼 때 포스트모던 그림책 속에는 유아 창의인성교육의 의미가 다면적으로 내포되어 있으며 이는 포스트모던 그림책을 활용한 창의인성교육이 활성화 될 필요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 연구는 근대 일본의 대표적 관찬사료인 『조선국 교제 시말 내탐서』, 『죽도고증』, 『태정관 지령』에 나타난 울릉도·독도 인식에 관한 연구이다. 19세기 후반 일본정부에서 발행한 이 사료들은 울릉도⋅독도가 역사적⋅지리적으로 한국의 영토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17세기말 안용복사건에 의해 촉발된 울릉도쟁계(죽도일건)를 통해 확인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영토’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사료들이다. 먼저 『조선국 교제 시말 내탐서』13항 ‘죽도와 송도가 조선의 부속이 된 경위’에 대한 검토를 통해 일본 외무성이 “울릉도(죽도)는 물론이고 독도(송도)에 관해서도 기록된 서류가 없다”고 인정함으로써, 울 릉도와 독도가 하나의 세트로 인식되었으며, 역사적·지리적으로도 조선의 영토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죽도고증』에서 기타자와 마사나리는 울릉도에 대해서는 한국의 영유권을 인정하면서 독도에 대해서는 일본의 영유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1860년대 이후로 당시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의 명칭과 지리적 인식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웠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당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일본의 역사적⋅지리적 인식이 매우 부족했 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태정관 지령』에 대한 검토에서는 “죽도 외일도는 본방 과 관계없음”을 확언한 태정관지령과 첨부지도 ‘기죽도약도’를 통해 독도가 역사적·지리적 으로 한국의 고유한 영토임을 확인할 수 있다. 기죽도약도에서 표기된 조선동해-울릉도-독도-오키섬 간의 지리적 거리도 현재의 거리와 수치적으로 거의 일치하고 있으므로 ‘외일도 =송도(독도)’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결국 근대 일본의 대표적 관찬사료인 『조선 국 교제 시말 내탐서』, 『죽도고증』, 『태정관 지령』을 검토해 봐도 울릉도⋅독도가 역사적 ⋅지리적으로 한국 영토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17세기 중반 이래 독도에 대해 실효적 지배를 해왔다는 일본의 ‘고유영토론’은 조작된, 허구적 주장이라는 사실이 한층 더 명백해 졌다.
일본은 2005년에 ‘독도의 날’을 제정한 이래 초중등학교 사회과에서 독도 관련 교육을 강화했다. 이에 한국의 초중등학교 사회과에서도 독도교육이 강화되었다. 본 연구는 근대 한국과 일본의 초중등학교 지리교육에서 독도교육의 기원을 밝히고, 그 특질을 명확히 하는 것이 목적이다. 연구 결과, 근대 한국에서는 초중등학교 지리교과서 및 지리부도에 독도를 한국의 소속으로 나타내었다. 반면 근대 일본에서는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기술한 지리교과서가 보인다. 게다가 대다수의 지리교과서에 수록된 지도와 지리부도에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의 영역과 무관하게 채색되어 있지만, 소수는 두 섬을 일본의 영역으로 나타내기도 했다. 이러한 혼란은 187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 지속되지만, 1880년대 후반부터 1905년 러일전쟁 직전까지는 이들 교과서에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과 무관하다는 입장이 지배적이다. 이는 일본 정부의 독도에 대한 정치적 결정이 지리교과서 및 지리부도에 반영된 것이다.
본 연구는 우리나라 근대 관광문화상품에 나타난 특징을 통해 현재 우리나라의 획일적이며 창의성이 부족한 관광문화상품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시작되었다. 관광산업은 한 가지만 갖춰진다고 활성화 되는 것이 아니라 분야별로 짜임새 있게 일정 수준에 도달해야 가능하다. 관광을 활성화 시키는 주요한 관광인프라 요소는 교통, 숙박, 먹거리, 볼거리, 즐길거리에 추가로 관광문화상품 같은 살거리가 빠질 수 없다. 이런 이유로 관광산업 활성화 측면에서 지난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관광문화상품 속에 담긴 디자인적 특징을 도출해 관광문화상품 발전에 기여코자 한다. 연구방법은 디자인적 특징을 도출 할 수 있는 객관적 분석틀 모형을 만들고 이에 대입하여 특징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연구범위는 우리나라의 근대디자인 자료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근현대디자인박물관의 소장품 중 1920-30년대에 생산된 관광문화상품 중에서 그룹을 지울 수 있는 문화상품군(文化商品群)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연구내용 및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쇄 및 후 가공의 마무리 수준이 매우 높다. 둘째, 한국적 전통소재와 지역적 특징을 잘 살려 타 지역과 차별화 하였다. 셋째, 신선한 아이디어를 돋보이는 자연친화적인 상품이 많다. 넷째, 장정이나 패키지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썼으며 사용설명문이 첨부돼 있다. 이상과 같은 연구 결과로 우리나라 관광문화상품디자인에 자극제가 되어 참신한 관광문화상품들이 생산되길 기대한다.
본 연구는 한국의 문화전통인 ‘웃음’이 한국 근현대 예술음악에서 어떻게 현전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그 연구의 중심 대상을 한국 창작 희극오페라로 제한하였다. 고찰의 대상이 된 작품은 한국 오페라 수용사에서 성공적인 수용을 기록한 희극오페라들인 《춘향전》, 《결혼》, 《시집가는 날》, 《천생연분》, 《봄봄》이다. 또한 비극오페라에 내재된 한국적 웃음문화의 특성을 배제하지 않았으며, 그 대표적인 예시로 비극적인 전쟁 오페라 《산불》에 나타난 전통 웃음의 특성인 ‘웃음으로 눈물 닦기’를 살펴보았다. 연구결과 크게 두 가지 유형의 성격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그 첫째는 한국특유의 해학과 풍자이다. 고전을 음악화한 오페라 《춘향전》이 여러 작곡가들에 의해 각각 다른 희극적인 어법으로 작곡되어 있었으며, 대표적인 해학 예술인 『맹진사댁 경사』 또한 홍연택의 《시집가는 날》과 임준희의 《천생연분》에서 각각 날카로운 풍자와 밝은 해학과 같은 다른 성격을 가진 오페라로 작곡되는 등 시대적 감성에 따라 차별화된 수용이 나타난다. 두 번째 유형은 청중을 자기성찰적인 비평적 인식으로 유도하는 웃음이다. 실내 오페라인 공석 준의 《결혼》과 이건용의 《봄봄》에서 이러한 웃음이 추구되었으며, 각각 유머적, 해학적 웃음을 통해 물질적인 삶의 우스꽝스러움을 조명하거나,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자기성찰로 청중을 유도하고 있다.
최근 패션마켓은 소비자들의 각기 다른 개개인의 취향을 반영하여 더욱 세분화되고 있으며, 다양한 컨셉과 디자인을 선보 이고 있다. 패션과 패션색채는 사회⋅문화 맥락에서 상징성과 의미를 가지는 대표적 문화 기호이며, 인간의 근원적 욕구인 미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기표현과 차별화 수단으로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상징적 가치를 전달하는 시각기호’로서 패션 색채가 변화하는 의미를 지닌 가치대상이며, 동시에 사회적 승인을 기반으로 새로운 상징적 가치를 창출하는 가치행위로 패션마켓에서 사회현상과 함께 패션색채의 변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매우 중요하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Barthes의 신화론과 Baudrillard의 소비이론에 근거하여 현재 패션마켓에서 색채의 기준이 되고 있는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는 시기적 구분을 14 ~ 16세기 르네상스 전후, 18세기 중반 ~ 19세기 초반까지의 산업혁명 전후, 제 1,2차 세계대전, 20세기 이후로 나누어 특징적인 색채 5가지를 선정하여 기호학 관점으로 패션색채의 변화를 분석하였 다. 패션과 패션색채의 변화에 대한 이론적 고찰과 선행이론을 토대로 심층인터뷰를 통해 패션의 소비가치 변화, 패션색채 변화의 기호학적 함의, 현대 패션색채 변화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요인은 어떠한 것이 있는지 정성적 조사를 하였다.
이 논문은 20세기의 위대한 선교신학자 레슬리 뉴비긴(1909-1998)이 종 교개혁사상을 후기 계몽주의 다원주의 사회에 어떻게 적용하였는지를 살 펴보려는 것이다. 뉴비긴은 20세기 후반의 서구사회에서 과학적 세계관을 새로운 이교주의로 보고 기독교 신학에 인식론적 새 출발을 하려고 했다. 뉴비긴은 개혁신학의 토대위에 선교사의 경험과 에큐메칼 운동의 경험을 수렴하여 통전적이고 독창적인 신학을 제공하였다. 이 글은 첫째, 뉴비긴 의 생애와 그의 신학형성에 영향을 준 사건들을 검토했다. 둘째, 20세기의 세계기독교의 변화에 대한 뉴비긴의 이해를 검토했다. 셋째 뉴비긴의 신학 에서 종교개혁사상과 관계된 부분을 ⑴ 하나님 지식, ⑵ 오직 믿음, 오직 은혜, ⑶ 성경의 권위, ⑷ 교회: 하나님의 가족, ⑸ 선택의 교리, ⑹ 만인제 사장직과 직제, ⑺ 교회와 국가의 순서로 연구했다.
기존 연구는 팔라다호 소속 장교의 인명, 팔라다호의 출발과 도착의 항해과정, 곤차로프의 출발 이유 등에 대해서 초보적인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 이유는 선행 연구가 대체로 조선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팔라다호의 이동을 중심으로 전체적인 탐사 과정을 주목하였다. 그 과정에서 독도와 울릉도의 발견 과정을 추적하였다.
러시아황제 니꼴라이 1세(НиколайⅠ)는 1852년 청국과 일본과의 개항을 추진하기 위해서 러시아 제독 뿌쨔찐(Е.В. Путятин)을 특사로 임명하였다. 팔라다호는 1852년 10월 7일 끄론쉬따트(Кронштат)를 출항했고, 1853년 8월 10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 에 도착하였다.
제독 뿌쨔찐은 전함 팔라다호(Фрегат Паллада), 캄차카 함대 소속 코르벳함(군함) 올리부차호(корвет Олибуца), 스쿠너 범선 보스톡호(шкуны Восток), 수송선 공작 멘쉬꼬프호 (транспорт Князь Меньшиков)으로 함대를 구성하였다. 뿌쨔찐은 소령 꼬르사꼬프(Корсаков)를 추천하여 스쿠너 범선 보스톡호의 함장으로 임명하였다. 팔라다호는 함장 소령 운꼽스키(Унковский)를 비롯하여 장교 22명과 승무원 439명으로 구성 되었다. 이 중에서 보스톡호에 승선할 장교 6명과 수병 37명도 포함되었다. 알렉산드르 넵스끼 수도원(Alexander Nevsky Lavra) 아바꿈(Аввакум) 신부는 중국어통역을 맡았다.
뿌쨔찐은 1855년 1월 26일 일본정부와 시모다조약(Treaty of Shimoda, 下田条約)을 체결하였다. 팔라다호는 일본과의 외교 수립, 해군부의 탐사 지시에 따른 실행 등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였다. 하지만 팔라다호는 1854년 3월 발발한 크림전쟁의 여파로 서방 국가들과 관계가 단절되어, 미국에 있는 러시아 식민지를 방문하지 못했고, 오호츠크해 해안을 조사하지 못하였다.
팔라다호는 1854년 4월 2일부터 4월 7일까지 거문도에 정박했고 1854년 4월 20일 조선 연안에 도착해서 5월 11일까지 동해안 조사를 시작하였다. 곤차로프는 거문도를 직접 답사하였다. 그 과정에서 서양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명명한 국가는 러시아였다. 팔라 다호 소속 올리부차호는 독도를 발견하면서 서도를 올리부차(Оливуца), 동도를 메넬라이 (Менелай)라고 명명하면서, 실측에 기초하여 최초로 정확하게 좌표에 기입하였다.
그 후 러시아 태평양함대는 동해에서 울릉도를 경유하며 해상훈련을 실시하였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알렉셰예프는 동해에서 전략적인 거점으로 울릉도를 주목하였다. 이것은 러시아가 1896년 9월 두만강·압록강·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획득하여 한국에 경제적·군사적 영향력을 실행한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통영의 나전칠기는 색과 광채가 뛰어난 최고의 나전과 지리산 등 인근 지역에서 채취한 질 좋은 옻칠로 만들어져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는 한국의 대표 공예 예술품이다. 뿐만 아니라 300여 년간 이어온 통제영 12공방에서의 체계적인 상호분업 과 협업은 한국 옻칠예의 중심으로 인정받는 원동력이자 그 근간이 되고 근·현대 우리나라 옻칠예의 뿌리가 된다. 본 논문은 통제영 12공방의 설영과 폐영을 분석하고 이후 한국 근대 통영나전칠기의 교육과 주요 장인들을 연구하고 서술 하여 전승교육과 전승자 계승의 중요성을 연구하였다. 통제영 폐영 이후 개화와 식민지교육으로 나전칠기의 부정적인 면이 도출되었다. 그러나 교육기관 설립과 전승교육을 기반으로 통영 장인의 끊임없는 창작과 생산의 노력은 한국 전통나전칠기 의 전통성과 독창적인 예술품 제작으로 계승될 수 있었다. 따라서 침체된 통영나전칠기의 부흥을 위해 국가기관은 물론 지 방기초단체를 중심으로 체계적인 디자인교육과 전승교육이 절실하며, 정통성과 예술성을 지닌 나전칠기 예술가로 발전할 수 있도록 우리 고유의 전통성을 현대사회의 요구에 맞게 새롭게 창조하고 계승하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 논문의 목적은 근세 일본의 사료에 나타난 울릉도 · 독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을 중심으로 그들이 말하는 다케시마(울릉도)와 마쓰시마(독도, 우산도, 자산도)가 한국의 영유임을 재확인해보는 것이다. 일본이 17세기 고유영토설의 근거 사료로 삼고 있는 『죽도기사』의 곳곳에서 이미 울릉도와 우산도가 조선의 역사지리서에 기술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음을 볼 때, 일본은 이미 17세기 이전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이 영유하고 있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죽도고』에서도 역시 오야와 무라카와 집안이 80년간 울릉도에서 불법적인 어로활동을 한 사실만을 가지고 자신들이 되찾아야 할 섬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인식으로 지적할 수 있다. 왜구의 노략질로 고통 받던 울릉도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섬을 비워둔 것을 사람이 살지 않는 폐도라고 하면서, 잠시 동안 그곳에서 어로활동 한 것을 핑계로 자신들이 되찾아야할 섬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의 ‘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가지 포인트’ 중 <포인트 3>의 ‘17세기 고유영토확립설’ 주장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원록각서(元祿覺書)』에서 안용복 일행이 타고 온 배에 걸린 「조울양도감세장 신 안동지기(朝鬱兩島監稅將 臣 安同知騎)」라고 쓰여진 깃발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바로 안용복이 울릉도 · 독도가 조선의 영유임을 일본 측에 선포하는 강력한 의지가 담긴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울릉도와 우산도(자산도) 양도의 감세장을 칭하며 죽도(울릉도)의 조선영유를 당당히 확인하기 위해 도일한 것임을 가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근세 울릉도 · 독도 관련 일본사료에 나타난 지리적 인식의 특징을 보면, 조선에서 울릉도 · 독도까지 거리를 실제보다 훨씬 더 가까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원록각서』와 『죽도기사』에서 안용복의 진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죽도고』를 편찬한 오카지마는 오히려 조선에서 울릉도 · 독도까지의 거리가 더 가까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울릉도 · 독도가 조선영토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공간적 거리보다 인식적 거리가 훨씬 가까웠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근세 일본의 사료에 대한 검토, 특히 ‘울릉도 · 독도의 지리적 인식’에 대한 검토는 일본 측의 ‘17세기 다케시마 고유영토설 주장’을 비판하기 위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The modern agriculture has been damaged through the rapid changes due to the policy of the plundering of foo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the Korean War, the industrialization, etc.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is to define the scope and the concepts of the modern agricultural heritages and to establish utilization standards of the modern agricultural heritages. With such a purpose, this research proceeds with three phases. First, the definitions the systems of the organizations the modern age and the modern agricultural heritages. Second, the analyses of the patterns and the special characteristics through the general investigation. Third, the regeneration through the comparative examinations of the case examples of the conflicts between the modern agricultural heritages. And the new attempts through the drawing of the new discussion points and the advanced tendencies are proposed. It is judged that this research will provide the point of the aim when looking at the modern agricultural heritages as the historical and cultural assets, and that it will provide the several principles when formulating the plans for the invigoration of the farm villages and the plans for the developments of the agricultural regions and provide the bases for the practical formulations.
그간 지리산권문화연구단은 ‘지리산권 문화 연구’를 여러 분야에서 폭넓게 수 행해 왔다. 현대문학 분야에서는 ‘지리산’에 함축된 ‘근대성’을 규명하기 위해 ‘기행(탐험, 여행, 관광 등)’에 초점을 맞춰 일제 강점기의 기행문학 등을 대상 으로 지리산의 근대적 표상을 다각적으로 규명하였다. 또한 르포‧소설‧희곡‧시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분석하여 지리산에 얽힌 역사적 상흔과 그의 문학적 대응 양상을 면밀하게 논구해 왔다. 본고는 기왕의 논의를 바탕으로 연구 성과를 집약하고, 지리산권 현대 문학의 특징과 의의를 종합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試論的 논의이다. 이를 위해 본고는 지리산이 전근대시기에는 둔세자의 피난처이자 민중의 도피처였으며, 근대 이 후에는 남과 북이 대립했던 이데올로기 戰場이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지리산을 배경으로 창작된 여러 문학 작품에 함축된 주요한 인문학적 사유와 태도 등을 靖獻 意識과 哀悼 倫理, 그리고 自癒 意志로 나누어 논구하였다. 정헌 의식이란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는 탈정치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학문 적·사상적 신념을 고양하고, 이를 통해 도덕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식을 일컫 는다. 김택술과 이은상의 기행문학, 그리고 지리산의 중심 인물인 박태영에 게서 이와 같은 정헌 의식이 나타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근대 이후 지리산에서 죽어간 ‘만혼령’에 대한 문학적 애도 작업은 일찍이 70 년대 지리산 소재 시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만혼령’을 존재론화‧의미론 화하는 상징화-애도 작업은 ‘國史로부터의 伸冤’과 ‘대문자 역사로의 기입’이라 는 두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이성부와 송수권의 시편 에서 ‘지리산 만혼령’이 다시 출현하게 되는데, 그의 ‘비탄’과 ‘피울음’이 ‘만혼 령’에 대한 충실한 기억을 목표로 하는 哀悼 倫理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고찰하 였다. 분단과 전쟁은 ‘지리산 만혼령’을 출현시켰을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에 게도 깊은 상흔을 남김으로써 그 후과는 또다른 비극의 맹아로서 상존하고 있 다. 이러한 후과는 우연적으로 혹은 운명적으로 해소되거나 극복될 수 없는 것 이다. 여러 작품들이 반목·불신·원한·증오를 넘어 화해와 용서를 향한, 자성·고 백·참회·공감·생명 존중이라는 자발적이고 자각적 행위, 즉 自癒 意志를 역설하 고 있음을 검토하였다.
지리산권문화연구단은 2007년 9월부터 10년 동안 인문한국(HK)사업으로 지리산권 문화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를 수행해 왔다. 이 글의 목적은 한국근현 대사 영역에 한정하여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향후 과제와 방향을 모 색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근현대사 영역에서 사업단 실적은 자료집 발간 총 7권, 사업단 소속 연구 자 논문 9편이며, 사업단에서 주최한 학술대회에 외부 연구자로 참여하여 그 성 과물을 사업단 저작물에 실은 논문은 5편이다. 이러한 연구성과를 자료집과 연 구논문이라는 두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연구논문은 주 제별로 검토할 경우 유형화할 수 없는 논문이 있기 때문에 편의적으로 근대시 기와 현대시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근대사 연구는 동학농민혁명에 집중된 편이다. 이러한 논문은 지리산권 동학 농민혁명의 구체적인 전모, 지역별 확산과정과 향촌사회의 대응, 남원지역의 동학 포교와 조직화 과정 등을 파악하였다. 또한 한말 의병장 고광순의 지리산 근거지론을 탐색함으로써 지리산이 의병의 장기항전의 근거지로 주목을 받았 다는 사실을 조명하였다. 이밖에도 지리산권 지식인 황현의 연구사 정리, 지리 산권의 근대학교 설립 등을 다룬 논문이 있다. 현대사 연구는 여순사건과 빨치산 활동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여 순사건을 둘러싼 정부와 국회의 대립 양상이나 수습방안, 여순사건의 주도층이 었던 14연대가 지리산으로 입산하는 과정, 그리고 지리산 지역에서 유격대를 조직하여 빨치산 활동을 전개한 전모, 빨치산 활동에 영향을 받은 지역의 실태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서 드러난 한계를 살펴보고 앞으로의 과제를 전망하였다. 먼저 연구 시기의 편중성을 들 수 있다. 앞으로는 일제시기, 해방 3년기, 한국전 쟁 이후 시기, 산업화시기로 넓혀 연구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둘째, 연구 대 상으로써 지역공간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지리산권역을 지리산과 인접한 지역 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현 시기에 맞게 적절하게 범위를 설정하는 것이 무엇 보다 중요하다. 셋째, 연구 주제가 운동사에 집중된 편이다. 지리산권역에서 펼 쳐진 사회, 경제적인 변동과 그에 따른 문화 양상의 변화상을 탐구한 연구는 거 의 없다. 따라서 지리산권역이 담아내고 있는 정체성과 다양한 가치를 파악하 기 위해서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사회변동이나 문화 양상을 탐색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생활사, 일상사 연구가 필요하다. 일상사 연구는 주변화 되거나 배제된 지역민의 경험과 실천을 재현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 다. 넷째, 기초자료의 정리‧분석과 발간 작업을 보다 활발히 할 필요가 있다. 지 역사 연구의 활성화, 체계화를 위해서는 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기초자료의 수 집과 정리가 선행되어야 한다.
본고는 「교육용기초한자 자소표 制定을 위한 試案 연구」(2015)에서 제시한 ‘試案’과 현재 중국 교육부에서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는 「現代常用字部件及 部件名稱規範」(2009)과의 상호비교를 통하여, 兩者 간의 得失을 따져 보고, 그 결과에 근거하여 ‘試案’의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이를 위하여, 우선 ‘試案’에서 제시한 310개 組 453개 기초자소와 중국의 441개 組 514개 部件을 서로 비교하여 일차적으로 아래와 같은 兩者 간의 차이를 가려내었다. 1. 양자가 동일하게 선정한 자소: 343개 2. 前者에서 따로 설정한 자소: 110개 3. 後者에서 따로 설정한 자소: 171개 본고는 위의 3과 4를 중심으로 하여 양자 간에 차이가 나는 원인을 분석한 결과, 그 원인은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임을 적출 할 수 있었다. 1. 楷書體와 簡體字 간의 乖離 2. 對象 字數의 차이 3. 문자의 系統性과 現實性에 대한 인식차이 4. 層次分析 방법의 채택여부 5. 기타 이상의 비교작업을 통하여 양자 간의 得失을 糾明해 본 결과, 양자 모두 각 각 설정한 ‘자소추출원칙’을 일관되게 지키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게 확인되 었고, 疏漏한 부분 역시 적지 않게 발견되었다. 그러나 작업을 통하여 전자 의 문제점을 다시 검토하고 보완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으 며, 자소 數의 增減 、分組(組 나눔) 등의 문제에 있어서는 구체적으로 修訂 해야 할 부분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라고 판단되었다. 이외에 도, 본고의 작업결과는 한자문화권에서의 한자공용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 초자료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며, 현재 韓中 양국에서 각각 公式字形으로 사용하고 있는 楷書體와 簡體字간의 互換原理를 파악하는데 있어서의 중요 한 학습자료로도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North Korean tale Ch’ŏngryongŭi poŭnn which was covered in this article is a representative folktale which was modified based on Juche Ideology. It is identical with Chinegaksi which is a representative folktale in the Korean penisula except for the ending part. The difference in the ending is whether the fortune given to the male protagonist is individual or collective in its nature. This difference seems to be due to modification with the influence of collective morality and Juche ideology of North Korea. To assess the literary value of the modified narrative, this article learned about the identity and value of this tale based on the pre-division era records. And by comparing how modern tales in South and North Korea from a similar period and status accept archetype of this tale, this article aimed to analyze the narrative value of this tale. North Korean tale Ch’ŏngryongŭi poŭnn will be regarded as an important material to understand the social culture of North Korea and an old story with the message of social integration in the future society of the unified Korean peninsula. This tale is a story about two different beings trusting each other and working toward a better future. In other words, it is a story about the value of “symbiosis” being realized in the dimension of “group.” Despite the modification intention behind this literature which is based on the North Korean view of history, this tale is an important literary work that shows what kind of life “we” as a group should pursue in a modern society filled with suspicion and fear.
본 논문의 주 목적은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에 나타 난 근대성과 시간의 의제가 지닌 중요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산업화 와 도시화의 결과로 인간소외 현상이 심화되는 후기 근대의 도시로 부터 탈주하고자 하는 프루프록은 대립적인 인간관계가 해소된 마법 화된 시공간을 꿈꾼다. ‘상상적인 동일시’를 통해 구성된 이 세계는 기본적으로 여성적인 영역으로, 방안의 여인들로 대표되는 이 공간 에서는 교감과 친밀성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관계가 유지되고 있다. 또한 프루프록은 동일한 것의 반복을 특징으로 하는 근대의 일상적 시간을 특이성과 우발성이 충만한 차이의 시간으로 대체하고자 한 다. 하지만, 프루프록을 표준화하고 사물화하는 근대성의 시선의 회 귀와 더불어 그는 인간의 시간이 중단된 신화적 세계에 감금되며, 이것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프루프록의 상징적 죽음을 의미한다.
대한제국의 칙령은 입법체계상 법률의 위임에 의하여 제정되는 내각결정이나 명령, 훈령, 고시 등과 달리 대외적 구속력을 갖는 상위의 법규범이며 입법절차에서 법률보다 존중 되는 법규범이었다. 대한제국의 입법체계는 당시 일본의 법제와 대체로 동일하였다. 대한제국은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통해 대한제국의 영토관할권에 독도(석도)가 포함되어 있음을 국가의 대외적 의사표시를 하는 공식문서로서 관보를 통해 공포하였다. 대한제국의 입법체계와 절차를 규정한 법률로서 ‘공문식’에 따른 입법절차를 거쳐 제정되어 관보에 공포된 대한제국의 칙령 제41호는 법체계상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에 불과하며 국가적 의사 표시를 위한 공식문서인 관보에도 게시되지 않은 1905년 일본의 시마네현 고시보다 상위의 법체계상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칙령 제41호는 독도를 새로이 대한제국의 영토로 편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울도군의 관할에 포함되는 독도(석도)에 대하여 별도의 지리적 위치 등에 대한 설명 없이 법률로 명시하였다. 칙령 제41호에 따른 관할권의 행사는 울도군 절목이라는 후속적 하위법령의 제정을 통해 세금의 징수라는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방식으로 시행되었다.
칙령 제41호는 대한제국이 일본보다 먼저 서구적 근대법의 형식으로 독도에 대한 직접적 주권을 행사한 1차 증거로서 의미를 갖기 때문에 독도에 대한 영토주권의 근거로서 그 무게와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