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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1.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교육용기초한자 자소표 制定을 위한 試案 연구」(2015)에서 제시한 ‘試案’과 현재 중국 교육부에서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는 「現代常用字部件及 部件名稱規範」(2009)과의 상호비교를 통하여, 兩者 간의 得失을 따져 보고, 그 결과에 근거하여 ‘試案’의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이를 위하여, 우선 ‘試案’에서 제시한 310개 組 453개 기초자소와 중국의 441개 組 514개 部件을 서로 비교하여 일차적으로 아래와 같은 兩者 간의 차이를 가려내었다. 1. 양자가 동일하게 선정한 자소: 343개 2. 前者에서 따로 설정한 자소: 110개 3. 後者에서 따로 설정한 자소: 171개 본고는 위의 3과 4를 중심으로 하여 양자 간에 차이가 나는 원인을 분석한 결과, 그 원인은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임을 적출 할 수 있었다. 1. 楷書體와 簡體字 간의 乖離 2. 對象 字數의 차이 3. 문자의 系統性과 現實性에 대한 인식차이 4. 層次分析 방법의 채택여부 5. 기타 이상의 비교작업을 통하여 양자 간의 得失을 糾明해 본 결과, 양자 모두 각 각 설정한 ‘자소추출원칙’을 일관되게 지키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게 확인되 었고, 疏漏한 부분 역시 적지 않게 발견되었다. 그러나 작업을 통하여 전자 의 문제점을 다시 검토하고 보완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으 며, 자소 數의 增減 、分組(組 나눔) 등의 문제에 있어서는 구체적으로 修訂 해야 할 부분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라고 판단되었다. 이외에 도, 본고의 작업결과는 한자문화권에서의 한자공용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 초자료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며, 현재 韓中 양국에서 각각 公式字形으로 사용하고 있는 楷書體와 簡體字간의 互換原理를 파악하는데 있어서의 중요 한 학습자료로도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502.
        2016.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North Korean tale Ch’ŏngryongŭi poŭnn which was covered in this article is a representative folktale which was modified based on Juche Ideology. It is identical with Chinegaksi which is a representative folktale in the Korean penisula except for the ending part. The difference in the ending is whether the fortune given to the male protagonist is individual or collective in its nature. This difference seems to be due to modification with the influence of collective morality and Juche ideology of North Korea. To assess the literary value of the modified narrative, this article learned about the identity and value of this tale based on the pre-division era records. And by comparing how modern tales in South and North Korea from a similar period and status accept archetype of this tale, this article aimed to analyze the narrative value of this tale. North Korean tale Ch’ŏngryongŭi poŭnn will be regarded as an important material to understand the social culture of North Korea and an old story with the message of social integration in the future society of the unified Korean peninsula. This tale is a story about two different beings trusting each other and working toward a better future. In other words, it is a story about the value of “symbiosis” being realized in the dimension of “group.” Despite the modification intention behind this literature which is based on the North Korean view of history, this tale is an important literary work that shows what kind of life “we” as a group should pursue in a modern society filled with suspicion and fear.
        503.
        2016.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의 주 목적은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에 나타 난 근대성과 시간의 의제가 지닌 중요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산업화 와 도시화의 결과로 인간소외 현상이 심화되는 후기 근대의 도시로 부터 탈주하고자 하는 프루프록은 대립적인 인간관계가 해소된 마법 화된 시공간을 꿈꾼다. ‘상상적인 동일시’를 통해 구성된 이 세계는 기본적으로 여성적인 영역으로, 방안의 여인들로 대표되는 이 공간 에서는 교감과 친밀성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관계가 유지되고 있다. 또한 프루프록은 동일한 것의 반복을 특징으로 하는 근대의 일상적 시간을 특이성과 우발성이 충만한 차이의 시간으로 대체하고자 한 다. 하지만, 프루프록을 표준화하고 사물화하는 근대성의 시선의 회 귀와 더불어 그는 인간의 시간이 중단된 신화적 세계에 감금되며, 이것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프루프록의 상징적 죽음을 의미한다.
        504.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대한제국의 칙령은 입법체계상 법률의 위임에 의하여 제정되는 내각결정이나 명령, 훈령, 고시 등과 달리 대외적 구속력을 갖는 상위의 법규범이며 입법절차에서 법률보다 존중 되는 법규범이었다. 대한제국의 입법체계는 당시 일본의 법제와 대체로 동일하였다. 대한제국은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통해 대한제국의 영토관할권에 독도(석도)가 포함되어 있음을 국가의 대외적 의사표시를 하는 공식문서로서 관보를 통해 공포하였다. 대한제국의 입법체계와 절차를 규정한 법률로서 ‘공문식’에 따른 입법절차를 거쳐 제정되어 관보에 공포된 대한제국의 칙령 제41호는 법체계상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에 불과하며 국가적 의사 표시를 위한 공식문서인 관보에도 게시되지 않은 1905년 일본의 시마네현 고시보다 상위의 법체계상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칙령 제41호는 독도를 새로이 대한제국의 영토로 편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울도군의 관할에 포함되는 독도(석도)에 대하여 별도의 지리적 위치 등에 대한 설명 없이 법률로 명시하였다. 칙령 제41호에 따른 관할권의 행사는 울도군 절목이라는 후속적 하위법령의 제정을 통해 세금의 징수라는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방식으로 시행되었다. 칙령 제41호는 대한제국이 일본보다 먼저 서구적 근대법의 형식으로 독도에 대한 직접적 주권을 행사한 1차 증거로서 의미를 갖기 때문에 독도에 대한 영토주권의 근거로서 그 무게와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505.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스크랜튼은 기숙제 학교인 이화 학당과 보구여관이라는 여성 전용 병원 그리고 공옥여학교를 비롯한 수많은 여자매일학교를 세우고 여성교회와 부인성경학교를 세워 여성을 교육하고 여성지도력을 개발했다. 이것은 여 성교육 활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개화기의 한국 여성들에게 ‘여성의 공간’ 의 창출이었고, ‘여성 주의’ 의식의 개발이기도 했다. 특별히 그녀가 설립 한 이 나라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이었던 이화 학당은 스크랜튼이 뿌린 ‘여성주의’ 의식이 싹을 틔우고 태동하는 중요한 묘판이 되었다. 이화학당 이라는 기독교적 여성 고등 교육 시설 안에서 개화기 한국 여성들은 사물 을 규정하고 명명하며 자신과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여성주의 의식’에 각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자기의식을 현실화하여 당당한 사 회적 전문인으로서 혹은 민족 독립 운동가라는 정치적 주체로서 자립해 가 게 되었다. 이화라는 공간 안에서 여성들은 무지로부터 해방되었고 가정이 라는 공간에서 해방되었고, 아내, 딸, 어머니라는 전통적인 역할로부터 해 방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여성을 자신의 삶과 역사의 주체로 세우고 사회적 존재로 확장해 가는 의식해방을 이루었던 것이다. 개화기 이화학당에서 태동된 ‘여성주의’ 의식이 가부장제적 성적 위계질서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으나, 개화기의 ‘여성주 의’ 의식은 자유주의적 ‘여성주의’ 의식이나 사회주의적 ‘여성주의’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저변을 이룬 우리 나라 ‘초기 여성주의’로서의 의의가 크다. 그러한 의미에서 스크랜튼은 이 나라 여성 교육의 개척자임과 동시에 ‘여 성주의’ 의식의 개척자이자 여성 운동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06.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9세기에 중국에서 활동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가톨릭교회의 선교에 비 해서 그들의 선교가 여러 측면에서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음을 인식하 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교현장에서 의도적으로 개신교회가 ‘성서의 종교’ 임을 강조하고, 성서를 번역하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었으며 성서를 보 급하는 일에 노력하였는데 이는 개신교 선교부의 가톨릭교회와의 차별화 전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가톨릭교회가 초기에는 ‘선교보호권’(宣敎保 護權)을 중심으로, 1622년부터는 포교성성(布敎聖省)을 중심으로 하여 국 가 및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 및 중국선교를 수행하였던 것과는 달리 개신교 선교사들은 대체적으로 자발적 선교회 등을 중심으로 하여 국 가 또는 강력한 교회중심체제로부터 벗어나 선교를 수행하였다. 일부의 현 상이나마, 가톨릭교회가 기독교를 선점한 중국에서 그리고 당시 직접적 복 음전도의 자유가 없던 중국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의 최선의 전략은 성서원 문으로부터의 성서번역과 보급이었으며 이는 종교개혁의 후예로서 자신들 의 정체성과도 일치하는 일이었다. 로버트 모리슨의 번역본을 시작으로 첫 100여년동안 8개의 다른 중국어번역본을 출판한 개신교의 열정이 그들의 성서에 대한 관심을 증거한다. 그러나, 대립되는 성서판본을 출판할 수밖에 없었던 개신교회의 불일치성은 오늘날 진지한 성찰을 요구하기도 한다.
        509.
        2014.10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부산은 18세기말 서양에게 처음으로 알려졌다. 이후 19세기말 조선이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국제 열강들에게 개항되었을 때에도 중요한 국제적인 개항장이었다. 국제 선박들의 왕래가 늘면서 부산항의 항만시설과 등대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등대의 설치와 관리는 부산 해관원들이 담당하였다. 개항기 해관의 작업들은 봉건사회에서 근대국가로 변천하는 조선의 역사적 기원이 된다. 이처럼 소중한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개항기 해관문서들이 상당부분 소실되어 정확한 역사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내부문서와 외교문서 그리고 국내외 언론들 에 의해 작성된 기록들을 비교 검토함으로써 객관적인 사실관계를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는 최근 출간된 자료들과 수집된 고지도들을 바탕으로 조선말 개항기 부산항에 설치된 근대식 등대를 확인하는 것을 우선적인 목적으로 한다. 이를 통하여 대한민국 근대사의 올바른 정립에 객관적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510.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신학, 과학, 형이상학의 범주들은 서로 양립할 수 있는가? 인격적 경험의 요소를 주요 구성 내용으로 삼는 신학은 이러한 요소와 무관한 듯, 물리적 실재에 대한 진술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자연과학과 어떠한 관련성을 갖고 있는가? 본 연구는 이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을 시도하는 작업으로 자연과학의 신학적 형이상학의 토대를 탐구한다. 근대 과학혁명 이후 신학과 과학의 영역은 서로 양립할 수 있는 관계라기보다 상호배타적이며 대립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리하여 종교와 과학은 각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채 갈등과 반목을 되풀이하며 서로의 주장만을 강조하여 왔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비판적 실재론자들’로 불리는 이안 바버(Ian G. Barbour), 아더 피코크(Arthur Peacocke),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등은 신학, 자연과학, 형이상학의 통섭을 지향하여 종교와 과학의 불필요한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글은 두 가지 목적을 갖는다. 첫째 근대과학의 기계론적인 세계관은 기독교적 신념체계 및 가치와 얼마만큼 친화성을 갖는지를 밝히는 것이고, 둘째 신학과 자연과학의 매개체로서 형이상학적 추론들이 얼마만큼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판단해 보는 것이다. 결국 이 글은 ‘기계론적인 세계관’으로 대변되는 근대 과학혁명은 과학의 탐구에서 신학의 형이상학적 요소를 배제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것은 무신론적인 자연주의 혹은 과학적 결정론으로 귀결될 수 없고 오히려 심오한 합리성의 틀 속에서 과학과 신학의 영역을 조화로운 관계로 설정했음을 밝히고자 한다.
        512.
        2014.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7-19세기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노력 이 지속되었으며, 전쟁 상대국이었던 조선과 명의 문헌도 수집 정리 대상에 포함되었다. 근세 일본에서 임진왜란 문헌군이 형성될 때 가장 큰 영향을 미 친 외국 문헌은 명나라의 「양조평양록」과 조선의 「징비록」이었으며, 그 밖 의 문헌들은 상대적으로 이용되는 비중이 낮았다. 이 논문은 이상과 같은 전 제에서, 김성일의 저작인 󰡔해사록󰡕과 「학봉선생문집」 그리고 김성일 그 자 신의 이미지가 근세 일본 특히 쓰시마 번에서 어떻게 유통되었는지에 대해 「조선통교대기」를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그 결과, 「학봉선생문집」 초간본에 포함된 「해사록」이 쓰시마로 넘어가서 이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쓰시 마번과 일본 본토에서 공히 김성일과 1590년 통신사행에 대해 부정적・경멸 적 인식이 통용되다가, 「징비록」의 일본 유통으로 인해 본토에서는 그 인식 이 일변하여 “충신” 김성일 상이 수립되었음을 확인하였다.
        513.
        2013.11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다문화 이주여성을 위한 화훼장식 프로그램에 대한 참여자의 만족도, 프로그램 수강동기, 국적별로 구분하여 살펴본 결과 기관의 권유 및 원예활동의 관심에 따라 참여한 참여자 모두 프로그램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것을 알 수 있었으며 국적별로 러시아 그룹에서 만족도가 가장 높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화훼장식 프로그램 참여 후의 다문화 이주여성의 자아효용감의 변화에 있어서 전체적인 자아효용감 및 하위요인 별로 사회적 자아효용감 영역에서 통계적으로도 유의한 증가를 나타낸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다양한 화훼장식 프로그램의 참여가 다문화 이주여성들에게 특정한 상황이나 행동에 얽매이지 않는 상황에서 자기 자신의 능력과 효용감을 표출할 수 있었다는 결과라 하겠다. 본 연구의 결과를 통해 다문화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한 화훼장식 프로그램은 다문화 이주여성들의 자아효용감을 상승시키고 화훼장식 프로그램의 만족도가 높을수록 자아효용감이 높아졌다는 연구 결과를 알 수 있었다.
        514.
        2013.11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경쟁지상주의와 개인주의의 확산으로 도시민의 정서와 심리적 불안이 사회적 문제로 확대되는 현대사회에서, 일반가정 대상으로 정서적 안정 및 친밀도 형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도시농업원예활동 프로그램을 실시한 결과,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는 과정 속에서 도시농업 원예활동이 가족의 정서적 안정 및 친밀도 형성 모두에서 긍정적인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517.
        2012.07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 world is facing a serious food and energy crisis. Plant mutation breeding ha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overcoming this crisis and maintaining world stability. New techniques are required to achieve faster and more effective breeding. At RIKEN, we have developed a unique technology for mutation induction by using heavy-ion beams from particle accelerators at the RI Beam Factory. This development was achieved through an efficient synergistic link between agricultural science and accelerator physics. The use of ion beams for mutagenesis has a number of advantages: the approach has low exposure levels and high survival rates with high mutation rates, and it creates a wide variety of different mutations. Because heavy-ion beams provide a very high amount of energy, even a single ion is enough to significantly damage a gene – in fact, the beams have enough energy to break the double strand of the DNA. The technique is also very useful in producing mutants that lack just a single gene; multiple propagation technology can be used to convert these mutants into new cultivars. Examples of such breeds include ‘Safinia Rose’ (petunia), ‘Temari Bright Pink’ (vervena) and ‘Olivia Pure White’ (dianthus). The development period for producing new varieties is only 2 years. Over last decade, molecular biology has made great advancements through technological innovation. We use high-throughput DNA sequencing techniques such as next-generation sequence instruments and microarray technologies for analysis of gene mutations. Mutants have become more and more useful and important in modern genetic studies, enabling the discovery of genes that control important traits, and revealing the functions and mechanisms underlying their operations. The discovery of genes using mutants may lead to the emergence of a new field in biology, ‘Mutagenomics’.
        518.
        2012.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현대 웨딩화훼장식의 통일성(Unity) 표현기법에 대한 인식과 선호도를 일반인과 전문가에게 설문하여 비교분석하였다. 통일성 표현기법의 개념을 인식하고 있는 경우는, 일반인 집단에서 인식하고 있는 경우는 로 전문가 그룹이 통일성의 개념에 대하여 화훼장식전문가 그룹과 일반인 그룹의 인식에 대한 집단의 인식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웨딩 화훼장식의 표현기법에 있어서 통일성에 대한 중요성 인식 정도는 전문가 그룹이 일반인 그룹 보다 더 높았다. 통일성 표현기법을 사용한 웨딩화훼장식의 선호도를 분석한 결과, 화훼장식가와 일반인 모두 통일성 표현기법의 웨딩화훼장식을 선택하였다. 오브제의 통일성을 이룬 화훼장식을 선택한 그룹은 이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는 오브제를 전체 웨딩 화훼장식과 통일시킨 경우에 있어 선호 경향이 높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브제 통일이 되었을 때 전체적으로 일체감을 이룬다는 이유를 가장 많이 선택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고급스럽고 세련됨이 였고 유니크 하면서도 로맨틱하다는 이유가 였고 유행하는 스타일로 나타났다. 색채의 통일성을 이룬 화훼장식을 선택한 그룹은 91%(143명)이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는 9%(14명)로 나타났고 색채를 통일시킨 것을 선택한 이유로는 고급스럽고 세련됨이 가장 비율이 높았으며 유니크 하면서도 로맨틱하다, 고급스럽고 세련된, 유행하는 스타일 순으로 나타났다. 화훼소재의 통일성을 이룬 사진을 선택한 그룹은 83%(130명)이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는 17%(27명)로 나타났으며 화훼소재를 전체 화훼장식과 통일시킨 경우에 있어 선호 경향이 높은 것을 알 수 있었다.
        519.
        2012.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study tries to illustrate that oral history can open a new prospect in the field of a Korean church history, a modern history of Korea, and World history. Firstly, this paper deals with theoretical approach about oral history. A basic direction of oral history is to supplement establishing materials and to make people’s memories be historical. Furthermore, oral history aims at new historical fields through enlargement of interviewees and reflection on philosophy of history and historical theory. General historians overlook a religious inner side easily. However that is a mistake of ‘process-reduction.’ Oral history is an alternative overcoming that kind of mistake. Especially oral history of religion is a historical method to discover new histories by their own confess-language differed from the fact-language and the interpret-language. Secondly, this paper suggests that the oral history of religion probes many varieties of historical layer, focusing on the Christians who were participated in the Korean pro-democracy. Christian democratizers played a leading role under the military dictatorial government. Moreover, they consolidated not only people in many fields such as religion, press, student, judicial officer circles and so on nationally, but also compatriots overseas. Outside of those, this paper prefigures a possibility of enlargement of oral history by illustrating examples of various historical layers. Finally, the present writer finishes, giving discourse assignments to the readers. One is to reflect the way of sharing memory. If the survivors passed away, their experiences become extinct. In order to overcome that crisis, a oral history needs to be investigated, searched for the way of sharing memory. Another is to reflect on a position of a oral history between micro-history and macro-history. A oral history is located in the context of micro-history. Nevertheless, it is important to work a oral history having a mind to criticize individuality and generality in micro and macro dimension.
        520.
        2012.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Up to recently at the modern education in Namyang the christian education’s influence before 1905 has not particularly received attention. But according to Shin Hak Wol Bo, the Namyang Church was founded in 1900 and in 1902 nine churches were established around Namyang. From the time in which the churches were founded, the schools of the boys and the schools of the girls for the modern education were built. The schools of boys were Boheung elementary school and Powell school and the school of girls was Jeha elementary school and the nine day schools of boys and girls were built in the nine churches. Teachers of these schools were Lee Chang Heoi and An Elizabeth. They taught the Hangul and arithmetic. Particularly after the girls and women were participated in the Bible Class, they grew into the women leader of church and the modern education patron. After 1905’s Protectorate Treaty nineteen schools were founded. Among these schools, three schools such as Boheung girl school, Bosung elementary school, and Bomyung elementary school were set up by christians and church. Many christians such as Lee Chang Hoi, Choi Sung Dae, Kim Hyeun Jun were participating in the establishment of Sangdong elementary school, Yangsung school, Songlim school, and Junkok Private House. Moreover Boheung school was the center of many schools and held the union sport and inspired the patriotism and the military spirit. And Boheung school and Boheung girl school with YangSung school established the ordinary course and the higher course and led the middle education. These two schools with the public elementary school joined the National Debt Compensation Campaign. The Namyang branch of Daehan-Jaganghoi was set up by the leadership of christians such as Lee Chang Hoi. Christians such as Kim Hee Kyung and Kim Hyeui Kyung and An Maria founded the EuiSungHoi and they participated in the National Debt Compensation Campaign. They established Women Education Society and gave the positive support for the women education. On the contrary Buddism and the Cheondogyo did not establish even a modern school. When we observe from this side Christianity led the modern education and the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in Namyang quantitatively as well as qualitatively. Christians such as Hong Sung Ha and Lee Chang Hoi among Namyang church exhorters and SeoYeuDa Myeon Head Choi Sung Dae, Kim Kwan Hyeon as Kim Hong Su’s son and An Elizabeth got into the positive act in the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with country governors such as Jang Ho Jin, Bang Han Duck, and the enlightened confucian schol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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