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신라 말기 문학 서예 역사 철학 등에서 매우 뛰어난 인물로 특히 우리나라 서예사(書藝史)에 큰 족적(足跡)을 남긴 거목이다. 최치원에 대한 시 문학과 사 상. 정치. 철학. 종교 등에 대해 많은 연구논문이 계속 나오고 있다. 그는 서예의 대표작으로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와 『숭 복사비(崇福寺碑)』를 남겼고 시문집으로 『계원필경집(桂苑筆 耕集)』과 『고운집(孤雲集)』등 많은 문헌을 남겼다. 이처럼 그는 인문학적으로 깊고 넓은 학풍과 문학적인 정감을 갖춘 문 장가이며 사상가이며 또한 서예가이다. 본 고에서 논하는 <진감선사비>는 885년에서 887년에 세워 졌다. 본 비문은 학문적 자료 가치가 매우 높으며, 특히 한국의 불교사는 물론 한문학사. 서예사. 사상사에 연구 대상이 되었 다. 더욱 <진감선사비>의 독창적인 전액(篆額)은 수준 높은 경 지를 보여준다. 이는 당(唐)나라에 머물렀던 17년 동안 모든 서 예를 섭렵한 결정체라고 할 것이다. 아울러 <진감선사비> 전 액에서 <설문해자>와 <한간>, <삼체석경>의 조형을 벗어나 오늘날 서예의 한 장르를 창조했다. 이미 1200여년전에 외형적 문자 조형에 깊은 조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특한 최 치원 체라고 할 수 있는 혁신적인 서풍을 탄생시킨 것에 큰 의 의를 둔다 그러므로 본 고에서는 서예가로서의 최치원의 <진감선사비> 를 분석하여 서예미를 논하였다.
본 연구는 중국 노인 고혈압 환자를 대상으로 서예 활동을 통해 정신건강과 생활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을 검증하였다. 분 석은 IBM SPSS Statistics 25를 이용하였다. 먼저 실험 전 실 험군과 대조군의 차이를 살펴보기 위해 독립 표본 t-검증을 실 시하였다. 다음으로, 실험 후 실험군과 대조군의 차이를 살펴보 기위해 독립 표본 t-test를 실시하였다. 검증결과 서예 활동은 노년층 고혈압에 정적인의 영향을 미치고, 노년층 고혈압 환자 는 서예 활동을 통해 우울증, 스트레스, 삶의 만족도에 정적의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는 서예 활동의 영향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고령 고혈압 환자에게 여가 활동을 위한 방법을 제공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아울러 이번 연구를 통해서 서예활동이 노년층 고 혈압 환자의 우울증 완화, 삶의 스트레스 완화, 삶의 만족도 등 구조적 관계를 확인시켜 정성적 연구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하 였다. 더불어 서예 활동의 역할을 이해하면 고혈압 환자의 노 년 생활에 의미 있는 여가 활동을 제공하고 더 많은 고혈압 환 자가 심리적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 라 사료된다.
조선 후기 연행사는 청나라 문인들과 필담을 하거나 간찰을 보냈으며, 서예 비첩을 감장(鑒藏)하거나 금석학 교류활동을 활 발히 전개하였다. 본 연구는 이계 홍양호 『이계집』과 관암 홍경모 『관암전서』·『운석외사』에 기록된 서신, 제발, 서문 등을 확인하여 청대 문인 대구형, 기윤, 섭지섭과의 서예 교류 를 주요 연구 범위로 설정하였다. 위 문집과 『동문신교척독 책』과 『두남신교첩』자료를 활용하여 저서, 비첩, 서찰 교류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또한 홍양호와 홍경모의 학서 소양, 금석 고증 능력, 비첩 감장 원칙을 논술 및 분석하여 교류 의의를 도출하였다. 홍씨 가문은 양국 문인의 가족적인 서예 교류의 대표적 사례이자 견고한 학문적 토대 위에서 진행된 교류를 의 미한다. 양국의 문인들은 필담을 통해 고금의 서예, 금석 학술 에 대해 전면적이고 심도 있는 토론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다 층적인 문화교류는 한·중 서예문화의 발전을 촉진하였다는 점 에서 그 의의가 있다.
청말 사상가들은 시대성을 강조하게 되면 민족 전통성이 소 홀하게 되고, 민족성을 강조하면 시대적인 진보사조(進步思潮) 에 뒤떨어지게 되는 곤감성(困感性)을 고민하였다. 여기서 시대 성이란 바로 서학(西學) 수용의 자세에 수반되는 문제이며, 민 족성이란 중국 전통성을 고수하는 데 따르는 문제일 것이다. 강유위(康有爲: 1858-1927)는 청나라 말기 아편전쟁(鴉片戰 爭)과 남경조약(南京條約)·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亂)을 거치 며 중국 역사상 가장 큰 국가적 위기에 태어난 인물이다. 이때 는 서양문명과 중국의 전통적인 사상이 교차하는 시기이다. 이 러한 시기에 여러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따라 중국의 주권이 크게 제약되고 영토까지 분할되는 가운데 지식인들이 새로운 개혁사상을 일으켰다. 본 논문은 기존의 강유위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그가 남긴 자취에 대한 문예 미학 사상을 포괄적으로 연구하고자 노력하 였다. 이를 서술하는 데 있어서 바탕이 되는 것은 그가 세계를 인식하는 세계관인 변법(變法)적 사유의 형이상학적 틀이다. 첫 째는 원기론(元氣論), 둘째는 변법(變法), 셋째는 비학존중(碑學 尊重)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특히 서예 예술이 크게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조하였다. 특히 강유위의 미학 사상은 서예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금 석학 중심의 비학 미학 사상과 존비경첩(尊碑輕帖)의 서예 미 학 사상을 전개하였다. 그는 첩학(帖學)의 음유미(陰柔美)에 대 비해 비(碑)의 양강미(陽剛美)를 강조한다. 강유위가 양강미를 선도한 이유는 생명미가 깃든 약동적이며 역동적인 아름다움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유위는 기존 서예풍조의 하나인 첩학(帖學) 위주의 서예는 온화하고 세련되어 있지만 연미하여 힘이 없는 것이 마치 정치 적으로 대국의 힘이 없는 것과 암암리에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에 강유위는 정치적으로 변해야 된다는 이론을 문예 미 학 사상에 적용하여 양강미를 담은 비학(碑學)을 추숭하였다. 이러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서예의 발전은 고대부터 현재까 지 언제나 근본적으로 사회적 변화에 기초함을 알 수 있었다.
서예의 미적 패러다임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변화에 기초한 다. 현대의 서예는 현상적 측면에서 볼 때 창작의 영역에서 전 통과 다른 풍모와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인간만의 영역 이었던 서예 예술의 탄생 과정이 AI 서예 로봇이 등장하면서 혼란을 맞고 있다. 현재로선 AI의 서예 창작을 예술로 인정하 기 힘든 분위기지만 급변하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미래의 서예 에 대한 추세를 예측하기 힘든 실정이다. 21세기의 서예는 현 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과학은 물론 사회학적 요소가 매우 강조되고 있다. 이는 과거의 전통 서예와 다른 형식의 미학적 메커니즘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 대 서예의 가장 큰 특징은 다원적 시각화 경향이다. 이 이면에 는 서예 미학에 대한 인식의 변화 및 새로운 창작의 형식과 관 련된 문제들이 존재한다. 현대 서예의 창작적 성향은 과거보다 더욱 실험적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에 서예의 심미적 가치 기준이나 그 미학적 특색을 가름하기는 쉽지 않다. 본고에서는 현대 서예의 변화 과정을 좀 더 체계적으로 규명 하기 위해 서예학 분야의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을 제시하 였다. 현대 서예의 발전과 변화는 결코 서예 예술 내부의 자율 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새로운 미적 패러다임의 발생은 필연적으로 사람이 중심이 되는 예술사회학의 각도에서 탐구해 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현대성이란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현 대의 서예가 고대와 다른 새로운 미학적 규범의 전환을 의미한 다. 다만 오늘날 서예의 현대화 과정에서 대두되는 시각적 경 향은 이미 많은 대중들에게 환영을 받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서예계의 공통된 신념으로 정착되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본고에서는 『홍루몽』 텍스트에 소품으로 등장하는 역대 명화와 서예 작품들이 해 당 공간에서 어떠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곳에 사는 인물들과 어떠한 상호작용을 하 는지 분석함으로써 『홍루몽』 속 전통 서화 예술의 의의와 가치를 고찰해 보고자 하 였다. 『홍루몽』에서 서화는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 보여주고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하 나의 중요한 서사적 장치로 운용되었다. 처음에는 서화의 자체적인 형상으로 독자에 게 다가가나 어느 순간 공간 속의 인물과 어우러지면서 모종의 의미체계로 독자에게 수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홍루몽』의 서화 예술은 단순히 그림이나 글씨라고 하는 개별적인 소품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인물 감상 및 주제의 차원으로 확장되어 소설의 경계를 더욱 높은 수준으로 고양시켜 주었다고 하겠다.
본 논문은 역대 서론에 나타난 품평의 개념과 그 내면의 미학적 가치를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역대 서가 들은 서예를 품평하는데 격조, 자연, 대비 등의 방법을 통 해 간결한 언어와 생동감 있는 비유법을 많이 사용하며, 말로 전달하기 어려운 서예적 특징에 대해 깊이 묘사하고 있어 많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품평의 등급에서는 먼저 ‘능품(能品)’은 필묵의 기교, 필법, 묵법, 결구, 장법 등이 정통함을 뜻하지만 ‘묘품(妙品)’ 보다 서가의 독창적인 개성미, 풍격미, 자연미, 정서미가 확연하지 않으며, ‘신품(神品)’과 비교해 ‘능품’의 서가는 천부 적인 재능이 부족하고 ‘일품(逸品)’에 비해 정취가 부족함을 뜻한다. ‘일품’과 ‘신품’은 모두 서예의 가장 높은 등급으로써 ‘일 (逸)’은 비교적 노장철학의 무위(無爲) 사상과 가까우며, ‘신(神)’은 비교적 공자철학의 중화사상에 가깝다. 기법 중시의 ‘신품’은 마음이 하고자한 바, 법도를 넘어서지 않는 것이고, 기법을 초월하는 ‘일품’은 자연의 묘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일품과 신품’은 모두 서예의 최고 형식이지만 ‘신품’이 ‘일품’ 보다 낮다고 보는 이유는, 인위적인 흔적이 그래도 존재하기 때문에 아래에 두고 평가한 것이다.
송대는 중국 문화사의 중요한 시기로 간주되어 서민문화(市 井文化)가 발달하고 도시가 번영하며, 정치하고 우아한 사대부 문화나 아문화(雅文化)가 전면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전통 유학의 사상은 끊임없이 갱신되었고, 아울러 이학의 흥기와 발전을 촉진시켰다. 이 시기의 문예 미학 이론과 품평 기준도 시대의 미적 가치의 취향을 반영할 수 있다. 특히 송대의 서예은 위진 시대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법도와 풍격을 계승하여 오대십국 시기의 기법을 전수받아 전인처럼 엄격한 법도를 추구하지 않고, 서예의 의취(意趣)와 예술 풍격이 다양성을 더욱 중시하여, 유학의 체계까지 포함하였다. 단순한 윤리적 의미를 우주 본체론적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주관적 표현을 강조하고 예술을 인간 정신의 품격을 상징으로 삼아 서예의 문화적 품격을 강화함으로써 새로운 길을 열었다. 전통 서론에서 서예 품평의 이면에는 옛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숨어있는데, 그중에서도 주요 참여자인 고대 문인사대부 집단의 사고방식, 가치관념, 심미적 취지 등, 특히 유가 사상의 영향을 받은 아정한(雅正) 사회관은 서예가의 작품과 개성적인 풍격에 대한 품평에 자연스럽게 작용한다. 송대의 문인사대부들은 서화이론에 탁월한 공헌을 하여 원시적인 유가의 윤리정신에 입각하여 개인의 생명체험과 예술실천을 결합하였다. ‘문도통일(文道統一)’ ‘기도병진(技道並進)’ 등을 추구하는데, 이 시기의 주류인 ‘상의(尚意)’ 서풍도 유학의 심성 화와 ‘내성지학(內聖之學)’이 문예의 심미에 영향을 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송대의 서예 풍격과 이론의 품평 사조는 시종 송대의 이학 관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이학(理學) 관점에 따라 서예에 대해 품평하고 윤 리적 의의를 지나치게 중시하면서 서예의 예술적 가치를 소홀히 한다면 서예가의 정서와 상상의 자유의 표현을 저해될 수밖에 없고, 이는 서예의 예술성에 대한 무시이자 훼손이다.
서예는 중국의 개혁 개방 이후 여타 예술 분야보다 매우 발 전되었다. 특히 서예교육은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 ‘세련된 인 격’ 실현이라는 전통적 사상과 현대적 의미를 달성하는데 효능 이 있다는 생각으로, 정부에서는 초ㆍ중ㆍ고등 교육과정에 서 예를 필수과목으로 선정하여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목적을 실 천하는 과정에서 ‘기능’을 위주로 한 서사교육 방식으로 진행되 면서 ‘예술교육(美育)’의 핵심인 상상력과 창의성이 결여되면서 학생들의 ‘흥미성’을 잃고 있다. 이렇게 흥미 없는 기술 반복 교육은 ‘美育’의 궁극적 목적인 ‘세련된 인격’ 완성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다양한 심미전달 방법을 통하여 흥미 로운 상상력과 창의력을 계발하여 ‘美育’이 ‘흥미’를 통해서 ‘도 덕’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중국 전통 사상인 ‘善美一體’를 실현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고구려ㆍ백제ㆍ신라 삼국시대는 한국 서예의 시작점이다. 그 중에 고구려는 중국과의 교섭에서 비교적 일찍 한자문화를 받아들이고, 민족의 심미관을 융합해 자신만의 풍격을 갖춘 서예를 형성하였다.
고구려는 동북아의 강국으로서, ‘지역 문화 거점’ 역할을 하여서 신 라ㆍ백제ㆍ일본의 서예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멸망한 후에도 고구려 서풍이 여전히 통일신라시대와 일본에 부분적으로 지속되었 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귀족과 그 자손들은 여전히 ‘구양순체(歐陽詢 體)’를 숭상하였는데, 유민 묘지명에 대부분 구양순체의 풍격으로 이루어졌다.
고구려 서예의 대외교섭을 연구하는 것은 한국서예 대외교섭의 시 발점이며, 한국서예 연구의 기초 작업이기도 하다.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삼아 한국서예의 대외교섭에 관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보람이 될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이산해는 1576년에 <이달선비>, 1577년에 <이언적신도비>, 1585년에 <조광조신도비>를 썼다. 30대 후반부터 40대 중반까지 쓴 삼비 중 첫 비인 <이달선비>는 조선시대 승정원 좌부승 지를 지낸 문장가 이달선(1457-1506)의 묘비로, 전남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 도덕산 아래에 있다. 윤구가 비문을, 이이가 추기를 짓고, 비액과 양면의 글씨는 모두 이산해가 써 당대의 명문장가와 명필의 조합이 환상적인 의미 있는 비다. 전서와 해서로 쓴 이산해 글씨의 출중함은 그가 조선 중기의 명필임을 분명히 말해 준다. 이 글은 두 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은 <이달선비> 글씨의 특징을 살펴 그 서예사적 가치를 찾아보기 위한 것이다. 변화가 많은 비액의 전서는 물론 정연하면서 행기가 부분적으로 있는 전면의 해서, 행서의 필의가 농후한 후면의 해서까지 조금씩 다른 느낌으로 쓰여 <이달선비>는 첩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이산해의 특출한 솜씨를 보여 준다. 동시에 비 상부의 원형, 전서의 원필, 해서 비문의 유려한 서풍이 종합적 조화를 이룬다. 이런 이질감과 동질감을 동시에 표현한 이비는 문화재적 가치가 큰 금석문이다. 이산해는 조선 초기의 유행 서풍인 송설풍을 잇고, 중기의 유행 서풍인 석봉풍과 부분적으로 그 맥을 같이 하면서 동시에 풍후한 안진 경풍도 드러냈다. 그러나 그들에 머물지 않고 힘차면서 유려하고, 노 련하면서 능통한 자신의 독창적 서풍을 창조하여 일가를 이룬 명필 이다. 따라서 그의 나이 38세에 쓴 첫 비인 <이달선비>의 서예사적 가치도 마땅히 그의 서예적 명성에 걸맞게 평가되어져야 한다.
본고는 당나라 서예가 겸 서예이론가인 손과정이 직접 짓고 쓴 『서보 (書譜)』에 나타난 심미관을 살펴 그의 서예미학사상을 고찰하는데 있다. 손과정은 동진(東晉)시대 왕희지와 왕헌지의 필법을 얻은 서예가로 특 히 초서에 가장 뛰어났다. 더욱 그의 진적인 『서보』는 뛰어난 초서작 품인 동시에 내용에서도 박식하고 고상한 문장으로 서예이론뿐만 아니라 당시의 미학저작에서도 불후 걸작이라 칭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서예로 서의 예술 가치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론으로서도 매우 가치 있 는 명작이다. 『서보』는 서예의 원류를 비롯하여 각 서체에 대한 기능과 특징, 그 리고 서예를 배우는 태도와 수양을 논술하고 있다. 특히 글씨 쓰는 기본 기법과 서예의 창작 경험들을 총괄하고 있다. 그는 서예의 골기(骨氣)에 있어 ‘양강(陽剛)의 아름다움’과 ‘음유(陰柔)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의 (意)와 세(勢)의 통일을 말한다. 그리고 충화미(沖和美) 등으로 예술심미 를 논술하고 이들을 ‘도(道)’의 차원에 이입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손과정의 미학사상은 강하고 부드러움의 조화로 유가와 도가 의 서로 보완된 철리(哲理)가 내재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유가의 “강건 유위 자강불식(剛健有爲, 自强不息)”과 도가의 “청정무위(淸靜無爲)”가 그 의 사상 저변에 깔려 있다. 그래서 손과정의 사상은 그의 서예에 나타난 ‘강하고 부드러움(剛柔)’을 함께하는 심미이상과 부합함을 알 수 있겠다.
서예와 캘리그라피는 동서양에서 20세기까지 문자를 대상으로 아름답게 꾸미고 이를 예술로 발전시킨 분야이지만, 현 시대에는 전통적인 캘리그래피 조차도 서양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것은 전위주의나 후기 계급주의의 풍조가 문자예술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변화된 문자예술 분야의 장르를 구분하자면 문자 예술분야에 대한 용어는 전통서예, 현대서예, 디자인서예로, 영문은 클래시컬 캘리그라피(서예), 모던서예(캘리그라피), 디자인서예(디자인 캘리그라피)로 구분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다양하게 확장될 수 있는 서예 분야를 새로운 시각을 갖는다면, 영화, 드라마, 무용, 공연, 회화등의 예술분야와 강연등의 인문학분야, 마케팅의 광고분야에서 이 시대의 트랜드를 반영하여 신선한 서예의 문화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급변하는 문화전반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신진 작가들로 하여금 신문화조류와 함께 한국적 예술원형을 찾고 시대 정신을 발휘하여 창작활동을 펼쳐갈 수 있도록 전문가 양성을 위한 교육전반에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It is an irreplaceable important issue in the artificial intelligence (AI) development of the 21st century to establish a database, to recover the related memory, and even to extract big data from written texts in the Chinese characters cultural circle.
Theories about the “transitional forms” and “intermediary graphs” of Chinese characters provide theoretical basis for the big data excavation of the written texts in Chinese characters cultural circle. Chinese characters have been deconstructed twice during its long-time development history from the Warring States period to the Six Dynasties period. Experts tend to focus on the first time which is known as “libian” (transformation of the graphic shapes of the zhuanshu into clerical script forms) so there are lots of investigation and research on it. Regard to the second time, as the cursive scripts prevailed, the components of a graph can be reorganized or distorted and some strokes’ order can change the direction in hand-writing process, making a new distinguishing mechanism to produce batches of “transitional forms”. A very few of the “transitional forms” were evolved into “fixed standard scripts”, and a bulk of them were conversely developed as “intermediary graphs” gradually.
The first priority for establishing a database for the written texts in the Chinese characters cultural circle is to exclave massive amounts of related information based on big data construction. It is imperative to collect and sort the ancient written letters which are of great value in Japan, Korea and China. This database acts as not only the foundation of the research on history of Chinese writing systems and new historical data, but also the “firsthand data” for revealing the rules of the development of cognitive behavior and intellectual inheritance of human being.
한극서예의 국제화를 위해서는 그 동안 한자 중심의 전통세예를 탈피 한 디지털시대 맞는 방법론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라는 말과 같이 서양 동양 중국 일본 한국 등 특정 문화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우리 한글이 우수성과 문자의 독자성을 찾아 서 거기에 맞는 방법론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논자는 그 방법론 중에서 문자텍스트와 이미지가 융합된 전형적인 도 상텍스트를 중심으로 연구를 하고자 한다 아울러 본 연구에서는 서구기 호학이 천착해운 기호사각형 관점을 빌려 서양의 타이포그래피 나 캘리 그래피 동양의 전통서예 나 문자도에 나타나는 상이한 차이에 대한 물음 을 제기하면서 서예문화를 연구한다. 한글은 타 글자와는 다른 추상문자에서 출발하여 점차 이미지로 변환 되어가는 문자 추상이 중심이 되므로 기호학 관점을 빌어 연구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淸代의 哲學은 明道救世와 實事求是였다. 즉 ‘도를 밝히고 세상을 구 하려는 것’이며. 淸代 學術 變遷의 요점은 史學으로 經學을 포함하는 것 이었다. 淸代의 學術은 乾嘉考證學이 으뜸이긴 하나, 淸朝의 특색이 진 보적이고 창의적인 시대에 걸 맞는 思想이 없다는 것이 아쉽다.
博學多識한 楊守敬은 金石學을 좋아하고 考證學에 저명한 학자로, 수 많은 자료들을 섭렵하여 목록을 작성하고 다방면의저술을 편찬하여 淸 末에서 民國 초기의 가장 걸출한 인물로 회자되고 있다.
楊守敬의 學書과정을 보면, 顔眞卿을 宗으로 삼았고, 阮元과 何紹基 의 書를 배웠으며, 그는 전통적 기법을 학습하고, 다른 碑帖에 있는 특징 들을 반영하며, 학습 상 相互 補充的이며 다른 碑帖과의 관계를 辨證的 으로 인식하였다. 그의 書를 보면, 篆書의 書體는 書法에 대한 求學精神 이 나타났고, 楷書작품은 風格이 각기 달랐으며, 결체 상 에서 새로운 조 형을 구현했다. 행서는 “碑帖融合”을 지향한 그의 書學思想이 반영된 결과이며, 蘇東坡, 黃山谷의 훌륭한 점을 傳受하였다.
楊守敬은 서예가이며 서예 이론가이기도 했는데, 그의 저서『學書邇 言』에서는 우수한 書藝家가 반드시 갖춰야 할 素養인 ‘五要’를 주장하였 고, 필법에 있어서는 ‘八面出鋒論’과 ‘楷法源頭說’을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중국 정통 서예를 일본에 전하여 日本 書藝界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日本 書藝 近代化의 아버지’라 불린다.
또한 그는 中國의 서학사상과 서예를 學問的으로 정리하여 中國 書藝 史에 큰 業績을 남겼고, 韓國과 日本의 書學, 地理, 圖書 등에도 큰 족적 을 남겼다.
楊守敬의 著書로는,『激素飛淸閣評碑記』『楷法溯源』『激素飛淸閣評帖 碑』『楷書邇言』외에 83種이 있으며 40만권의 책을 소장한 藏書家였다.
Looking for the identity of Korean Calligraphy is quite important but not easy work also hard to define what it is in a sentence. However, it is needed to find out what is identity of it. The reason why it is hard to find out is that Korean have basic identity but the identity of Calligraphy has been different by centuries. It can be largely divided into three reasons. Firstly, the period from three Kingdoms to the beginning of Goryeo, Secondly, the period between the end of Goryeo and the middle of Joseon, this is the time when the doctrines of Chu-tzu was dominated to the society. Thirdly, the end of Josen is the period when scholars of the Realist School of Confucianism were appeared. In this periods, Buddhism was flourished but Buddhist insisted the intercommunication of three religions named Confucianism, Buddhism and Immortal Taoism. The ancient tasteful ideas was called Geupbaek(皀帛) scholar in Koguryo, Hwarang(花郞) scholar in Shilla and Taoist in Goryeo that could be unique. This intercommunication of three religions was expressed as scholar or Taoist by the people named Choi Chiwon, Lim Chun, Lee Gyubo and etc. They could have different the period of their lifetime or ages, but have the similarity of the selection of words through their articles. Thus, it could be known that the identity of calligrapy was considered by the articles about calligraphy or poems of these three people mentioned formerly. From this research, the identity of calligraphy from late Shilla to early Goryeo was influenced by the intercommunication of three religions based on tasteful ideas followed by Hwarang sprit and the scholar thought. And, it is summarized that the identity of calligraphy is Taoist ideology because this scholar thought could be concluded to Taoist ideology through the directivity of great writing and conduct.
현대 중국의 서예 환경은 전통서예의 생존환경과 매우 큰 차 이가 있다. 연필이나 볼펜 등 강한 필기구를 쓰게 되면서 더 이상 붓을 사용하지 않고, 컴퓨터와 헨드폰 등이 발명됨으로써 서예 또한 실용에서 멀어진 지 오래 되었다. 이렇게 서예가 일 상생활에서 멀어짐으로써 현대인들은 서예를 잘 이해하지 못하 게 되었다. 둘째, 전통사회에서 서예를 하는 사람들은 문기(文氣)가 있는 사대부 계층이었던 반면, 현대의 서예가들은 문인적 소양이 많 이 약해졌다. 셋째, 전통서예의 형식은 현대 시문의 내용을 표현하는데 적 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현대시문에 맞는 새로운 형식이 나와야 하지만, 아직도 성공적 사례가 나오지 않고 있다. 전술한 서예환경의 변화에 따라 서예에 대한 시야 또한 많이 변했다. 거시적 관점으로 보면, 縱的전개(線索)이다. 즉 시간에 따라 전개되는 서체와 서풍이 변하는 서예사적 맥락의 전개 이 외에도, 서예를 회화·건축·조소·디자인 등 기타의 현대 예술장 르와 나란히 자리매김하려는 시야이다. 서예가 현대 예술의 한 장르에 속한 바에야 서예 또한 회화·건축·조소·디자인 등 여타 의 예술장르로부터 자신이 발전할 수 있는 유익한 성분을 받아 들이고자 한다. 마찬가지로 서예도 자신의 기법과 사유방식 등 스스로의 가치와 장점을 다른 예술장르에 영향을 주고자 한다. 이렇게 서예가 여타의 예술장르와 상호 상보상생(相補相生)하 면서 현대예술과 현대문화를 발전시키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 고자 한다. 이렇게 한다면 현대 중국 서예의 가치는 전통서예 보다 훨씬 확장될 것이다. 미시적 관점으로 보면, 현대 서예의 관점은 더욱 깊이 들어 가고 있다. 서예 감상의 대상을, 전통적 서예 감상 방식의 최소 단위는 ‘낱글자[單字]’의 감상이었다. 반면 현대의 서예 감상 방 식은 ‘분할된 최소공간[單元空間]’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시각의 전환이 비록 작은 변화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감상방식 의 전환은 전통서예에서 현대의 서예를 발견하는 커다란 단초 가 될 수 있다. 본 논문은 현대 중국서단의 현황을 전통의 계승과 심화, 새 로운 장르와의 교섭을 통한 새로운 서풍의 창조, 전통서예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서예세계의 개척이라는 세 갈래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대상은 60년대에 이후 출생하여 현재 40~50대가 된 서예가들을 세 갈래의 나누고, 각각 대표 작가 3명씩 예시 하고 설명하였다.
서예의 경우 남아있는 자료로 한국서예정체성을 규명하고자 한다면 두가지 측면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주로 비학 혹은 금석문 서예에 보이는 부정형성, 무작위성을 들 수 있다. 이런 점은 한국미 특질로 말해지는 자연미와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 는데, 이런 분석이 帖學의 측면에서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것 은 여전히 한계다. 다른 하나는 왕희지 추존에 담긴 유가 중화 미학 틀에서 논의되는 한국서예정체성에 대한 규명이다. 한국 서예역사에서 왕희지 추존 현상은 강하게 나타났지만, 한국최 대의 서예가로 평가받는 金生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이처럼 한 작가를 평가할 때 이해하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이 해가 가능하다. 이에 왕희지 중심주의와 중화미학의 틀에서 한 국서예정체성을 규명할 때는 한국서예가들이 중국서예가들과 어떤 차별상을 보였는가에 대한 정치한 분석을 통해 ‘古雅한 예술 측면으로서의 한국서예미의 특질과 정체성’을 밝힐 필요 가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왕희지 서예와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밝힐 필요가 있다. 그 ‘다른 점’에 한국인의 심성과 미의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특히 ‘偏’에 담긴 서예를 예술에서의 기교의 공졸 혹은 美의 우열이란 점을 기준으로 하 여 평가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서 천진스러움과 天機를 담아낸 서체, 즉 자신의 감성을 어떤 서체를 통해 자유롭게 표현했는 가 하는 점을 심도있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제 서예에서의 문화사대주의인 왕희지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오늘날 ‘우리들의 눈’으로 과거 한국의 위대한 서예가들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통해 한국서예정체성을 논할 필요가 있다.
문자는 언어를 기록하는 부호로서 문화의 일부분이고 문화의 발전을 촉진하며, 그 자체가 문화의 산물이다. 서예는 이러한 특징을 가진 문자를 떠날 수 없다. 문자학에서 문자를 연구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형태[形]ㆍ소리[音]ㆍ의미[義] 세 가지 영역이다. 여기에서 형태는 바로 서예의 연구 영역이다. 서예는 고대에 ‘서도(書道)’ㆍ‘서학(書學)’ㆍ‘서법(書法)’ㆍ‘서사(書事)’ㆍ‘서세(書勢)’ㆍ‘서장(書狀)’이라 일컬었고, 또한 이를 간단히 ‘書’라 일컫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명칭이든 간에 항상 ‘書’라는 글자가 있었다. 서예는 원래 죽백에 글씨를 쓰고 일을 기록하는 기예를 가리켰다. 이후 서예는 발전 과정에서 서체가 점차 많아지고 기법이 날로 정미해짐에 따라 문자를 서사하는 점과 획, 그리고 기운과 풍신을 나타내며, 작가의 성격ㆍ감정ㆍ취미ㆍ소양ㆍ기질ㆍ사상 등 정신적 요소를 표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서예는 이전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소도(小道)’ㆍ‘말류(末流)’가 아니라 반대로 이것으로부터 심오한 이치를 탐구하고, 민족성을 알며, 고금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동양문화의 정수라 하겠다.
서예는 문자 중에서도 한자와 가장 좋은 궁합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한자와 서예는 동양문화를 표현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매개체라 하겠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한자의 특징에 대하여 살펴본 다음 한자서예의 예술관념 변천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기초에서 한자서예의 서사를 동작ㆍ지각ㆍ인지로 나누어 살펴봄으로써 서예의 과학적ㆍ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 글의 목적은 한자의 특징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서예의 예술관념과 서사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며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동양의 특수문화 예술을 객관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 이 글을 통하여 전통문화를 선양하고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는 데에 밑거름이 될 수 있다면, 분명 현실적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