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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4.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aims to examine how the Gyeongseong Hokuk Shrine established the natural environment in Yongsa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focusing on the relationship between Japan and Chosen Hokuk Shrines. In the colonies, the establishment of shrines strongly tended to symbolize Imperial Japan and visually represent its ruling logic. The Gyeongseong Hokuk Shrine holds historical significance as a place to commemorate soldiers who died for the Emperor and as a tool of colonial rule, but further discussion is needed on how it was organized within the Yongsan. This study focuses on Hokuk Shrine planning under which the Shrine Bureau of Home Ministry constructed similar shrines across Japan by the Ministry of Home Affairs Ordinance No. 12 of 1939. As a result, this study examines the environment and architectural styles of Hokuk Shrines through examples from Japan and uses this analysis to explore the characteristics of Gyeongseong Hokuk Shrine and its relationship with the Yongsan. The significance of this research lies in highlighting the historical urban significance of Yongsan during the modern period.
        4,500원
        3.
        2024.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설탕을 필수 재료로 하는 오늘날의 ‘과자’가 일제 강점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한국과 타이완에서 어떻게 전파·대중화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의 경우, 근대 이전 설탕을 식재료로 사용하지 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단맛에 즉각 반응하기보다 조선인에게 익숙했던 얼음과 결합한 아이스케키가 출시된 이후에야 설 탕맛에 익숙해졌다. 와카시의 일종인 연양갱의 대중화 역시 재래부터 먹어온 우무묵 이 있었기에 향유될 수 있었다. 반면, 청말부터 설탕을 생산·향유해온 타이완의 경우, 현대식 과자 자체보다 신제품을 홍보하고 더 많이 팔기 위해 과자 상인들이 운영을 겸했던 ‘킷사텐’이 거꾸로 식민 모국인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덕분에 일본 은 여급을 두는 퇴폐적인 ‘카페에(カフェ―)’에서 벗어나 일본 지식인들이 꿈꾸던 프 랑스식 문화살롱을 실천할 수 있었고, 음료값을 지불할 수 있다면 누구든지 바쁜 일 상 중 가벼운 마음으로 잠깐 들러 휴식을 취하는 현재의 ‘카페(café)’ 형태로 발전하 게 되었다.
        6,700원
        4.
        2024.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본 논문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시멘트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이래, 건축적으로 주요한 변화의 기점 및 그 배경을 도출하는 사적(史的) 연구에 큰 목적이 있 다. 이를 위해 시멘트 산업과 관련한 일본 국내의 상황 과 일제 치하 조선에 적용된 정책을 고찰하는 한편, 구 체적인 건축자재의 유형과 특징을 살펴보고 시멘트가 건축·토목사업의 주요 자재로 사용되는 양상을 규명하 고자 했다. 소재와 기술 면에서 진일보한 근대적 건축자재는 근 대와 전근대 건축을 구분하는 비교적 명확한 기준이라 고 할 수 있다. 산업혁명으로 추동된 공업화, 산업화 과 정을 거쳐 일정한 규격으로 양산된 자재들은 열강의 식 민지 확보 경쟁에 따라 일원화되기 시작한 전 세계 시 장에 판매되었다. 건축자재가 열강의 점유지역을 중심으로 범용성을 획 득함에 따라 건축문화의 지역 특성은 이전보다 미약해 지고 보편화되었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대량생산과 신소재의 등장이 건축문화에도 영향을 미친 것인데 가 장 대표적인 자재로 철, 유리 그리고 시멘트를 꼽을 수 있다. 특히 시멘트와 그 파생 자재들은 근대 이후 공장을 통해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가장 대표적인 건축자 재이다. 거푸집 형태와 시공 방법에 따라 자유로운 형 태 연출이 가능하고, 일정한 품질로 양산과 유통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댐 건설과 철도부설 등 대 규모 토목공사에서 필수적으로 대량 수요가 발생할 뿐 아니라 구조, 마감, 방수 등 건축공정의 거의 모든 부문 에 걸친 범용성을 지녔기 때문에 근대적 건축자재로서 대표성을 띤다. 한국에서 근대적 의미의 건축용 철강과 판유리, 시멘 트는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도입되었다. 철의 경우는 미쓰비시제철(三菱製鐵)이 1917년 황해도에 건 설한 겸이포제철소를 통해 1918년부터 생산을 시작했 는데, 당시 생산된 철은 대부분 선철(銑鐵)로, 군수용 납품이 주목적이었다. 시멘트는 일본의 오노다(小野田)시멘트 주식회사가 1917년, 평양 인근인 평안남도 강동군 승호리에 공장을 건설하고 1919년부터 생산을 시작했다. 1936년부터 우 베(宇部)시멘트, 아사노(淺野)시멘트 등 일본의 시멘트 자본이 추가로 진출하면서 조선 북부지역의 석회석 매 장지대를 따라 공장을 건설했다. 조선에서 생산되는 시 멘트는 점차 생산량과 수출을 늘려가면서 조선 국내뿐 아니라 일본과 만주의 수요에 대응했다. 유리의 경우 의료와 식기용 병의 제조소는 확인할 수 있지만, 건축 용 판유리의 본격적인 공장생산이 이루어진 것은 해방 이후로 생각된다. 일본의 대표적 시멘트 제조사인 ‘오노다시멘트 제조 주식회사(小野田セメント製造株式会社)’는 일본, 대만, 조선, 만주의 시멘트 수요 증가 예측에 기반하여 1913 년부터 준비 단계를 거쳐 1919년 평안남도 강동군 승 호리에 평양지사 공장을 설립하고 시멘트 생산을 시작 한다. 시멘트 생산 초기의 수요는 철도, 도로, 교량 등 대형 토목공사에 집중되었다. 시멘트는 잔골재와 물, 기타 혼화재료를 섞은 콘크리트로 가공하여 교량의 기초와 교 각, 댐과 항만의 거대한 제방을 이루었고 콘크리트관과 블록은 배수시설과 축대의 주요 자재로 사용되었다. 시 멘트는 토목공사에서 널리 쓰이며 자연 지형을 극복하 는 수단이 되어 도시기반시설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벽돌 조적조가 다수를 이루던 건축의 구조에도 1920 년대부터 점차 콘크리트 도입이 늘어났다. 1923년 일본 에 발생한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건축자재의 내화·불연 성능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양한 건축자재와 시 공수법의 개발이 진행되어 시멘트, 콘크리트의 실효성 이 높아졌으며 이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시멘트는 인조석과 슬레이트, 시멘트기와 등 건축의 다양한 마감 재로 가공되었으며 전통적 건축자재인 석재와 흙을 대 체하면서 건축의 경량화를 이끌었고 불연·내화재료로써 각광받았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조선 북부 압록강 일대의 수력 개발 사업으로 인해 댐과 발전소 건설로 대량의 시멘트 수요가 발생하는 가운데 오노다시멘트의 평양지사 증설 과 공장 추가 건설, 일본의 우베시멘트(宇部セメント㈱) 와 아사노시멘트(浅野セメント㈱)의 진출로 조선의 시 멘트 생산은 계속 증가했다. 수요가 집중되는 도시 인 근에는 시멘트기와, 관(管), 슬레이트 등 시멘트 관련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공장이 집중적으로 설립되었다. 일본이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면서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조선도 전시체제에 돌입한다. 모든 자원의 사 용이 법으로 제한되면서 군수를 제외한 전 산업은 타격 을 받게 되었다. 철 및 비철금속의 사용을 금지하는 법령으로, 기존에 철근 및 철강을 사용하기로 계획되어 있던 건물은 공사 가 연기되거나 설계 변경을 통해 그 자재를 교체하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 속에서 관 주도로 소위 ‘대용품 공 업’을 진흥시키게 되는데 건축자재도 본래에 사용했던 금속 성분을 최대한 배제하고 시멘트 등을 혼합하여 화 학적 처리를 통해 대체품을 찾고자 했다. 이러한 일련의 건축자재 대용품은 구조용 재료로써 철을 대체하기에는 강도가 약했기 때문에 주로 소형 철 물과 설비, 상하수도관, 마감재 종류 개발에 집중되었 다. 그러나 범용성, 성형 용이성, 색채연출, 내수‧내화‧ 내산 성능 면에서는 기존 자재에 비교하여 우수한 측면 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 종료 이후에도 신흥산업으로 계 속 진행되었다. 한편 자원 수급 통제를 위해 여러 제도를 마련하면 서, 자원을 분배하기 위한 배급제를 시행하게 된다. 전 쟁이라는 비상 상황의 대처를 위한 이와 같은 일련의 조치들은 종전 후의 건축 자재 유통구조 형성에도 영향 을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통해 1920년대 이후 한국 근대 건축사 전개에 있어 시멘트라는 근대건축 주요 자재가 보편화되는 양상과 건축 및 토목에 있어서 구별되는 건 축자재로서의 지향,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건축의 경제 적 효율을 추구하기 위해 단행된 변혁의 특징을 제시할 수 있다.
        5.
        2023.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연구의 목적은 2·8 독립선언 전후의 사정과 의의를 체계화하여 3·1 독립운동의 도화선의 한계를 넘어 학생운동의 한국적 의미와 독립운동 전반에 미친 영향, 이후 학생활동에 미친 영향 등을 규명하는 데 있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윌슨의 민족자결론과 고종황제의 서거는 조선 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기대와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둘째, 동경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과 해외 독립운동가와의 네트워크가 3·1독립운 동을 촉진한 요인으로 나타났다. 셋째, 동경 유학생 단체는 조선 독립의 방향과 이론을 정립하는 조직적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민족 독립의 지 혜와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넷째, 2·8 독립선언은 일단 실패로 돌아갔으 나 이후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은 국내 독립운 동가 지도층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끌어냄으로써 3・1 독립운동에도 지대 한 영향을 미쳤다. 다섯째, 2・8 독립선언은 이후 오사카에서 독립선언이 나 국내 독립운동 등 다양하고 분화된 형태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큰 역 할을 담당했다. 또한, 많은 유학생이 귀국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거나 나 중에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결론적으로 2·8 독립선언은 이후 실천적 행동적 의지를 갖추고 향후 독립운동을 전 개하는 데 발판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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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23.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study confirmed the "house search report(家宅搜索調書)" containing criminal record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s well as the production process and the way of expressing the illustrations contained in them. It also explored architectural values through analysis of the location and use of the building. This records the discovery of evidence by searching the residences of those involved in the crime from 1919 to 1922. The illustrations contained in this record were not standardized, so the contents of the article differed depending on the author's background and cultural experience. Nevertheless, this painting reflects the regional characteristics of traditional houses located throughout the Korean Peninsula. It is also evidence that the house was used for cultural, commercial, and industrial purposes, beyond the general assumption that it was used only for residential purposes. The "House Search Report(家宅搜索調書)" provides information on ordinary buildings that existed as the background of everyday life, rather than buildings with a specific purpose or exceptional design. It is evaluated as an important resource for understanding the diverse life and spatial structures of buildings during tha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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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23.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은 일제강점기 조선에 세워진 젠코지(善光寺)와 그 불상의 특징을 살핀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일본의 젠코지 아미타삼존상은 백제 성왕이 전해준 일본 최초의 불상이다. 젠 코지 상에 대한 연구는 전근대기 일본의 상황을 중심으로 구미와 일본에서 여러 차례 진행되 었으나, 그 모각상이 일제강점기 조선에도 봉안됐음은 주목되지 않았다. 이는 조선 젠코지와 그 상이 현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일제강점기 조선에 유입된 일본 불교 미술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또한 백제와 일본의 미술사적 교류 사실이 근대기에 어떻게 정치적으로 해석되었는가를 살필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논문에서는 조선에 들어온 젠코 지의 사례로 1916년에 창건된 진해 젠코지와 1942년에 승인된 공주 젠코지를 제시한 후 각각의 특징을 고찰했다. 이를 통해 첫째로 젠코지 상은 조선 내에서 그 내력이 재발견 되었 으며 이에 따라 동일한 상이 모각됨에도 모각 시기와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성격을 갖게 되었음을 확인했다. 둘째로 조선에서 젠코지식 상은 나가노 젠코지의 분신으로 여겨졌으며 상의 모각이 나가노 젠코지의 엄격한 통제 하에서 이루어졌음을 확인했다. 본 논문은 이를 살핌으로써 일제강점기 조선 내 일본 불상의 연구 범위를 확장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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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2023.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의 주된 목적은 고당(顧堂) 김규태(金奎泰, 1902~1966)의 경우를 사 례로 일제강점기에 나타난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의 이상과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소중화주의는 ①「도(道)/비도(非道)」 「왕도(王道)/패도(覇道)」를 문명 판 단의 준거로 삼음으로써, 「자국/타국」의 경계를 넘어 ‘도(道)가 실현되는 세계’ 를 꿈꾼다. ②그러나 현실에서는 「중화=문명/비(非)중화=야만」 「‘도(道)’는 귀 한 것/‘기(器)’는 천한 것」이라는 도덕절대주의(moral absolutism)의 믿음을 근거 로 한 ‘자기중심적 편향(Egocentric Bias)’에 빠진다. 이러한 해명은 일제강점기 소중화주의적 이상이 어떤 현실적 한계에 직면하는지를 드러내는 시도로 규 정될 수 있을 것이다. 김규태는 일제강점기 35년과 한국전쟁의 중심에 서서 ‘기정진(奇正鎭)―정재규(鄭載圭)―정기(鄭琦)’로 이어지는 노사학맥을 계승하며, 향촌 사회의 유교 질서 수호에 주력한 도학 계열 유학자이다. 그는 위정(衛正)의 시각에서 정학 (正學)을 지켜내는 일이야말로 시대적 혼란과 곤경에 대응하는 처사의 임무임 을 주장하고, 강학과 교유를 통한 유교의 저변화에 힘을 기울였다. 이 시기 나라의 존망이 ‘도’ 수호에 달려 있다는 도학 계열 유림은 주로 ①이기심성론 의 재수립 ②성리 논쟁 재연 ③강학과 교유를 통한 성리학의 저변화 ④문집 발간과 원우(院宇) 복설 및 신설에 주력함으로써 소중화주의의 현실화를 꿈꾸 었다. 도학자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것은 「자국/타국」의 경계를 넘어 ‘도 가 실현되는 세계’이다. 도학자들이 수호하고자 했던 인의(仁義) 도덕은 원시유학의 지향이자 온 인 류가 바라는 ‘좋은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김규태를 포함한 도학자들의 결정 적 한계는 국가와 사회의 특수한 현실을 부정하고 「중화=문명/비중화=야만」 「‘도’ 는 귀한 것/‘기’는 천한 것」을 절대 원리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것의 문제는 변화된 세계, 인식, 사고, 관념, 가치관의 대부분을 간과하고, 그들이 ‘믿는’ 절대 원리를 벗어난 문화적 요소 및 학문 등을 ‘나쁜 것’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이 러한 규명은 성리학의 도덕절대주의적 이론화가 원시유학의 현세적 제안을 오 히려 유폐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드러내는 데 의의가 있다.
        7,000원
        18.
        2022.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 목적은 북한의 사회복지제도화 초기 단계의 역사적 동학을 추적하여 북한사회복지의 태동 배경과 요인을 규명하는 것이다. 본 연구의 분석범위는 해 방 이전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활동기간을 중심으 로 한다. 본 연구방법은 역사서술적 접근을 통한 문헌연구방법을 통해 분석하였 다. 분석결과, 첫째, 각 독립운동 단체와 단체, 계열과 계열 사이의 연결성에 이 은 상호성과 인과성은 비교적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제강점기 동안 각 독립운동 단체들은 독립운동과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이 공존했다. 둘째, 마지막 으로 북한의 경우 사회주의계열의 복지정책을 이어받아 이를 적용하고 노력한 흔적이 확연히 나타났다. 북한은 정권 초창기부터 사상적 배경을 기반으로, 사회 복지정책을 도입하고 적용하고자 노력했고 이는 무엇보다 사회주의계열의 복지 정책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8,700원
        20.
        2021.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examines changes and features of provincial office buildings in Suwon and Chungju after relocation during Japanese occupation. Gyeonggi and Chungbuk provincial offices(Gwanchalbu) were relocated by Japan. Gyeonggi Provincial Office in Suwon used HwaseongHaenggung buildings and moved to Seoul in 1910. After relocation, most of HwaseongHaenggung buildings used for Suwon Governmental hospital(JaHye Uiwon). Suwongun Office, Suwon public elementary school, Japanese Military and Suwon Police station also used HwaseongHaenggung buildings with the Hospital. At first, Japan remodeled local government buildings for their use. Most of HwaseongHaenggung buildings had been destroyed to build new buildings since 1920s. Chungbuk Provincial office in Chungju used DongHeon building which is Chungju local government building and relocated to Cheongju in 1908. DongHeon building changed to Chungju county office after relocation. This building was renovated. Chungju county office moved to other site, this building was used for Chungju county conference room. During Japanese colonial period, Suwon local government buildings were destroyed and replaced with new Japanese style buildings. Chungju local government buildings were also renovated or destroyed.
        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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