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사상은 중국 예술 사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노자의 “도법자연(道法自然)” 은 노자의 ’큰 기교는 마치 서툰 것 같다‘는 뜻의 “대교약졸(大巧若拙)”과 통하는 사유이며, 이것은 뛰어난 기교를 뛰어넘는 무위의 졸박미(拙樸美)를 지향한다. 노 자는 ‘도(道)’의 본성에 부합하는 대교(大巧)를 추구였고 그것은 도지교(道之巧)이 다. 졸(拙)은 꾸밈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것을 뜻한다. 약졸(若拙)하기 위해서는 “득심응수(得心應手)”의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이기우(李基雨)(1921∼1993)는 한국 근현대 서예가이자 전각가이다. 무호 이한 복(無號李漢福)과 위창 오세창(葦滄吳世昌)에게 사사하였고 문화의 암흑기에서 서단활동을 하며 전각의 예술성과 서예의 발전을 알리고자 노력하였다. 고졸박소 (古拙素朴)의 토대 위에 현대적 미감을 접목하여, 서예는 물론 황무지와 같았던 전 각 분야를 과감히 개척하였다. 그는 석각(石刻)뿐 아니라 다양한 매체로 전각의 세 계를 무한히 넓혀갔다. 본 고는 그 기교가 “득심응수(得心應手)”의 경지에 올라 무 위함으로 대교약졸을 이루었던 철농의 예술관을 조명한 것으로, 이기우 전각 작품 에서 드러나는 고졸미를 통한 조형미, 격변(擊邊)을 통한 무계획의 계획, 도각(陶刻) 등 전각 매체의 경계 확장을 통한 예술 경계의 무한성 추구 등을 논하였다. 본 연구가 현대 예술가들이 근현대 한국 서예·전각가와 그 작품세계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며, 유한한 자원으로 창작 활동을 하는 현대 예술가들에게 도가미학적 시야를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도법으로 풀어내는 매체 특징을 가진 전각예술은 중국 서화와 구별될 뿐만 아니라 문화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다른 문화 속 새김 예술들과 차이가 나므로 전각의 주요한 형식 요소로 간주 된다. 현대 문화 속에서, 전각에서의 칼이 자아내는 미적 의미는 중국예술전통을 계승함과 동시에 현대전각의 품평과 평가 기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중국의 고대 시품을 기본 형식으로 삼아 당대 정신에 부합하는 미적 계보와 체계적 틀 구축은 그 의의가 매우 중대하다고 본다. 이를 위해 본 논문에서는 원형에 맞는 우아미 등의 평가 기준과 근거로 4가지 미적 유형을 제안한다.
篆刻의 역사는 문자의 형태가 온전하게 갖춰지기 전부터 도기에 문양과 부호를 찍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印材에 새겨지는 주된 문자는 초기 신석기 시대의 부호표기에서 문자 표기로의 이행기를 거쳐 한자의 서체변천 과정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며 형태가 변하여 왔고, 전각의 시대적 요구와 용도의 특징에 따라 내용 또한 변천하여 왔다. 전각이라는 명칭은 印文에 사용되었던 서체가 주로 전서였기 때문에 포괄적으로 붙여진 것이다. 인문의 서체는 당대에 유행하던 전서 서체를 중심으로 갑골문, 금문, 대전, 소전 순으로 변하였고, 이후에는 예서와 해서도 사용되었다. 이는 전각의 용도가 실용에서 신표의 상징, 장식용 및 주술용, 예술적 영역의 표현으로 바뀌면서 인문에 새겨지는 내용 또한 달라졌고, 지역적인 특색의 영향으로 서체형태의 변화와 변형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를 통해 전각의 서체변천은 실용적으로 사용되었던 관인과 사인, 봉니와 건축물의 와당문에서 후대로 갈수록 자연스럽게 간략화시키고 쉽게 쓰려는 형태로 변천해 왔음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이는 하대에 이미 인문도의 紋飾에서 도기상의 부호를 새기는 과정에 갑골문이 탄생하였으며, 금문의 자형 또한 은대 청동기문식에서 1.2자가 새겨짐과 동시에 <은새삼과> 에서 서체변천을 주도하였고, 대전 또한 주대의 새인에서 변련과 인장의 형식을 갖추어 방정함을 띠게 되었다. 이후 중국이 통일을 이룬 진대에는 이러한 서체변천과정에서 소전으로 문자 통일을 이룸과 동시에 전각의 제도적 관리가 이루어지며, 인문의 자형이 소전체로 변해갔으나 사인에 있어서는 전 시대의 서체들이 동시에 새겨졌다. 이러한 제도를 계승한 한 대에는 백화만방한 인문서체의 시대를 열게 하여 전서와 예서,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에 성행하였던 조충서, 수전, 무전 등의 다양한 서체가 사인에서 새겨져 예술적 표현 영역을 확대해 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전각이 서예의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표현영역을 차지 하고 있으며, 印工에 의해 금ㆍ은ㆍ동ㆍ옥에 새기었던 시대와 문인들에 의해 석인재에 스스로 각을 하던 시대의 풍격은 매우 차이가 났으나 전각의 인문과 측관, 봉니, 와당문에서 새겨지는 서체의 변천은 한자의 字體연변을 주도했으며, 또한 유행서체가 그대로 반영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고 하겠다.
전각이란 다양한 印材의 인장(印章) 위에 文字를 새기는 예술이며, 이러한 전각의 역사는 먼저 인(印.도장)의 역사와 같이 하였다. 刻(새김)은 인류역사상 의사 표현의 첫째 수단으로 그리거나 쓰기 이전에 인간의 원초적 사고 표현의 흔적이다. 중국의 경우 상공업이 급속히 발달한 전국시대 초기부터는 인의 새김이 유통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인장(印章)의 출현은 고대사회의 경제, 정치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인장은 본래 예술품보다는 신용의 상징물로서 물건을 봉하거나 몸에 지니고 다니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들기 시작하였으나 점차 시대의 변화에 따라 권력과 지위, 신분을 상징하는 법물(法物)로도 사용되어 지위와 신분에 따라 다양하게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새김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이미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의 빗살토기, 울주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 등에서 보인 새김은 원시 조형예술의 일단이다. 전각은 단순한 문자의 조합이나 새김의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철학적 사유가 내재한 예술로 미학적 이론체계 를 갖추어야 한다고 본다. 예술성에서 보면 전각은 새기는 자의 정신과 감정 등이 표출 되는 독특한 미감을 지닌 시각예술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서예 (書), 그림(畵)과 같이 순수한 조형성을 가진 전각을 동양 예술의 꽃이요, 정수라고 한다. 문인 사대부들이 행하는 문인전각의 중요한 점은 서화와 마찬가지로 작가의 성정(性情)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그러므로 전각은 많은 서화가와 문인들이 인고(印稿) 를 그리고 자각(自刻)을 하면서 문자학적(文字學的) 지식과 문학성(文學性), 즉 전각예술가의 학문(역사, 문학, 회화)적 수양 이 겸비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아울러 기법(字法, 書法, 刀法, 章法)상의 필의(筆意)와 도미(刀味)의 조형 감각이 함께하는 예19-43술체계를 갖추게 된 종합적인 예술이다. 사회문화적 가치로 볼 때 사회생활의 실용적 목적으로 인장을 소지하였던 전각은 문인이 직접 새기고 감상하면서 신표의 기능에서 예술의 기능으로 변화된 시각예술에 속하는 문화예술 콘텐츠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전각예술의 기술성은 특수한 작업방식의 하나로 손과 칼로 파고 뚫고 두드리는 등의 수단을 통해 작가의 주관적 정 취를 미의식과 정감을 담아내어 표출시키는 최상의 예술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인장만을 새기는 공인(工人)과는 다른 차별이 있으며, 방촌(方寸)의 공간에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조형적 시각효과의 예술성이 있다. 첫째, 고대의 새김의 문화적 관점에서 순수예술적 지위로 감성과 창의를 발휘한 사의(寫意) 전각이라고 본다. 둘째, 전각예술은 서예 문인화뿐만 아니라 디자인과 건축양식 분야까지 그 영역이 확대된 종합예술이라 본다. 셋째, 가치 창출을 위한 예술계와 대중이 공유되는 조형적 시각예술의 콘텐츠이다. 전각은 방촌의 공간에서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과 사회구조, 의식과 사상들을 조명할 수 있다. 표현 형식의 다양성과 예술성을 통해 독자적이고 심미적인 예술 장르를 담아내며 공예성이 매우 강한 하나의 종합예술로 자리매김하였다고 본다.
This study analyzed 『Bukgwol Dohyeong (Drawing Plans for the Northern Section of Gyeongbokgung Palac e)』, which is an important source material for the restoration of the palace, by applying Paltaekron, the geomantic principle of bearings, in order to clarify the building layout principle of Gyeongbokgung Palace. Gyeongbokgung Palace shows the typical geographical conditions that meet the principle of Baesan Imsu (mountain in the back and water in the front) which takes Baegaksan Mountain as the main mountain and the overall layout of the buildings that meet the principle of ‘Jeonchak Hugwan (narrow in the front and broad toward inside)’ by using the natural topography that meets the principle of ‘Jeonjeo Hugo (low in the front and higher toward back).’ It is estimated that this layout and arrangement must have been led by geomantic principle of bearings. The analysis of the building layout plan of Gyeongbokgung Palace in the late Joseon Dynasty Period suggests the application of two methods: one is to divide central area from Gwanghwamun Gate to Geoncheongung Hall into eight layers and the other is to apply the bearings of the Eight Trigrams based on the building that becomes the center. As a result, the gate, main hall, and kitchen of all major buildings where the royal family lived are located in the auspicious bearings according to the geomantic principle of bearings while the spaces where people other than the royal family such as those who served the royal family and the officials operated in the palace or the hall that enshrines the ancestors such as Taewonjeong Hall are located in the ominous bearings. Therefore, the buildings of Gyeongbokgung Palace are arranged based on the geomantic principle of bearings.
전각은 인류 문명의 시작과 그 궤를 같이 하면서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어 왔다. 그 표현대상에 있어서도 초기 신석기 시대 도기에 찍었던 문 양에서부터 도상·도안·문자로 변천하였으며, 그 용도 또한 실용과 신 표의 표시에서 완상용·주술용으로 변모하여 당시 사람들의 토템이즘과 샤머니즘을 표현하는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용도의 변화는 당시 사람들의 시대의식 및 민속의식과도 밀접 한 관련이 있어서 부귀·장수·벽사·압승용으로 차고 다니는 애장용으 로 까지 발전하였다. 특히 圖像印을 통해서는 祈福의 의미가 강화되어 위진남북조시대의 도교인들은 산속에 기도하러 갈때도 맹수나 귀신을 쫓기 위해 <황신월 장>이라고 새긴 인장을 차고 갔으며, 이러한 풍습은 도상인의 예술성을 더욱 드높게 하여 원대의 押印으로 발전하였으며, 명청대 이후 독자적인 예술로 체계를 갖추게 하였다. 즉 단순한 실용에서 독자적인 예술체계를 확립하기까지의 과정에서 많은 용도 변천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출현한 전각작품들의 형식과 내용을 통해 전각이 갖는 의미와 상징성을 찾아 볼 수 있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전각이 단순한 실용적, 예술적 예술분야의 산물만 이 아니라 인류의 문명과 더불어 생성되고 변천되면서 발전한 역사적 유 물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음을 조명하여 그 가치를 드높이고자 하였다.
C, M, Y, K 색상의 출력물에 대하여 20°, 60°, 85°의 고정된 각도를 사용하는 상용 광택계를 이용하 여 광택값을 측정하고 이 결과를 전각 측각 광택계를 이용하여 측정한 BDRF와 비교하였다. 동일한 시료에 대하여도 상용광택계로 측정한 광택값은 사용한 각도에 따라 차이를 나타내며 BDRF 곡선의 전체 면적과 최 대높이와 비교하였을 때 입사각이 큰 85°에서의 측정값이 가장 유사한 값의 변화를 보였다. 다리미를 사용하 여 표면을 매끄럽게 하는 퓨징작업을 한 후 광택을 측정하니 BDRF의 최대값은 입사각이 작은 20°에서의 측 정값과 가장 비슷한 경향을 나타내었으며 BDRF의 면적은 85°에서의 측정값과 가장 일치하는 결과를 나타냈 다.
The study on Buddhism architecture in early Joseon dynasty was inactive. The period of King Sejo is important for studying the trend of Buddhism architecture in early Joseon, that was transmitted from the end of Goryeo dynasty, but it was difficult to know its exact situation due to lack of related records. The records were all written by Kim Su-ohn, which are Wongaksabi' 'Sangwonsajungchanggi' 'Bongseonsagi 'Geonginsajungchanggi'. The main hall was mainly second floor and there were necessarily annexed buildings at the right and left of the main hall. So the plane figure of □□□ was shown. It was a main stream for monk's living hall and meditation hall to be located at the right and left of yard in front of main hall. This layout may be referred to search for the origin of the layout in courtyard based structure(中庭形) in the late Joseon dynasty. Most of temples had 3 gates. Some part of horizontal corridor was used as 2 gates and the outer gate, far from main hall, was without corridor. The gate leading to front yard of main hall was called front gate, the next was middle gate and the outer gate was Oisamun(外沙門 )or Samun(沙門). In most of the temples, people could enter into the front yard through pavilion which had the function of bell tower. The pavilions were located between front gate and first corridor. It is thought that this layout of the place for making bean curd outside the temple area will contribute to different studies on temples making bean curd in the future. The records about temple's foundation studied above are a little different between temples, but have more similarities. These common denominators represent the architecture tendency of Buddhist temples in the related period. It is thought that such a tendency was also shown on architecture of other temples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as well as Buddhist temples.
Ceremony is important to Buddhism as a part of the religious practice. Buddhist ceremony is a kind of discipline and it rules the Chan monastery life. This discipline, called $\ulcorner$Qinggui(淸規)$\lrcorner$ also forms a part of the practice for enlightenment in the Chan monastery(禪宗). Qinggui is derived from $\ulcorner$Baizhang's monastic code(百丈淸規)$\lrcorner$ which no longer exists. $\ulcorner$Chanyuan qinggui(禪院淸規)$\lrcorner$ is considered the oldest surviving Chinese monastic discipline. Its success is partly due to the emphasis in the Chan monastery on the succession of monks to abbot hood. Qinggui has been called the only discipline in Buddhist monastic life in religion. Whether it is also the discipline of the architectural space of the Chan temples is the focus of this thesis. The examination of this assumption may expand the meaning of Qinggui as embodying not only the religious form of discipline but also a fundamental part of the architectural archive. The majority of the buildings in the Chan monastery in Qinggui are related to $\ulcorner$Five Mountains Ten Checks figures$\lrcorner$. Most of all, it can be clarified that the elements of Qinggui are expressed through the analysis of the activities in each building. This proves that Qinggui has become a stipulation not only for the regulation of the monastery life but also the architectural code of the Chan temples. In conclusion, this study shows how the meaning of ceremony and monastery life in $\ulcorner$Chanyuan qinggui$\lrcorner$ can be expanded to include the design program of temples. The research proves that there is a basic code in the Chan temples for designing the structure of the monastery space. Similarly, $\ulcorner$Five Mountains Ten Checks Figures$\lrcorner$ was a diagram for examination and analysis as well as a tool for creating drawings of the temples in the Song e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