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에서는 방사성탄소연대와 부트스트랩 리샘플링을 활용하여 북한강 유역 청동기 시대의 취 락 규모 및 분포의 변화, 그리고 인구 재조직의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3200-2800bp에는 취 락들이 산발적으로 분포해 있다가 2800-2600bp 시기에는 특정 취락들의 규모가 커짐과 동시에 일 부 중소형 취락들의 규모가 감소하는 현상을 파악하였다. 2600-2400bp 시기에는 춘천 중도 유적이 다른 유적의 규모를 압도하는 현상이 관찰된다. 이처럼 소수의 취락들이 거대해짐에 따라 중소형의 취락들의 규모가 축소되거나 소멸하는 현상은 북한강 유역의 대형 취락들의 존재가 단순히 자연적인 인구 증가의 결과물이 아니라 당시 지역 범위 내에서 오랜 시간 누적된 인구의 이합집산의 결과물이 라는 점을 방증한다. 그중에서도 춘천 중도 유적은 2600bp이후 북한강 유역에서 가장 거대한 인구 집결지로서 기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춘천 중도 유적의 공간 점유 양상뿐만 아니라, 유구 및 유물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분석을 시행하였다. 각 구역별 점유 기간을 살펴본 결과 취락 규모의 변화와 인구 유입에 조응하여 공간적인 점유 양상이 달라지는 것을 확인하였다. 춘천 중도 유적의 경우 인구 규모가 증가함에 따라 주거 구역의 밀집도가 높아지는 한 편, 새로운 중심지가 형성되면서 취락이 공간적으로 팽창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유물상에서 가구 간 분화가 선명하게 확인되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그간 전제해 온 청동기 시대 사회복합화 양상에 대한 재고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본고는 생계경제의 변화에 따라 취락 점유 방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생 계경제의 전환 과정에서 사용된 도구 중 석기는 다양한 활동에 사용되고, 잔존율이 높아 당시 생계경 제 변화 과정을 추적하는데 효과적이다. 따라서 경기지역 청동기시대 취락의 생계경제를 살펴보기 위 해 주거지에서 출토되는 석기도구에 주목하여 지역별, 시기별 조성비의 변화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시기별, 지역별 생계경제의 차이가 취락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하였다. 경기지역의 취락은 생계경제 전략에 적합한 방식으로 점유 양상이 변화한다. 생계경제의 변화를 검 토한 결과 경기지역은 전기 전반에 복합 생계 활동을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세부 지역별로 차이가 있 으나 전기 전반에는 수렵·채집에 사용되는 도구의 비율이 높아 이동 생활의 비중이 높았을 것으로 판단되며, 이로 인해 장기 점유의 필요성이 낮았을 것으로 보인다. 중기에는 생계경제에서 농경의 비중이 증가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전기 후반부터 전체 석기 도구 중 농경구의 비중이 증가하기 시작하는데, 중기 단계가 되면 농경구의 비율이 최대로 확인되며 채집 활동과 같은 이동이 필요한 생계 활동은 감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농업 생산물을 증대하기 위해 당시 인구는 장기 점유를 하며 관개시설과 같은 생산 설비와 농지를 관리할 필요성이 증가했을 것이다. 따 라서 농업 생산량 증대에 적합한 점유 방식을 채택해 점유를 이어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가 되면 농경구의 수량이 전체적으로 감소하고 수렵, 채집, 어로 활동에 필요한 도구의 비율이 증가한다. 따라서 농경 중심의 생계경제에서 복합 생계경제로 변화하면서 장기 점유의 필요성이 감소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취락고고학에서 주거지의 동시성을 파악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유물 과 유구를 총망라한 양식 편년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기존의 토기의 문양이나 주거지의 형식을 통하여 청동기시대의 시기와 단계를 설정하였던 관습에서 벗어나 문양, 무문토기 壺, 淺鉢, 적색마연토기의 壺ㆍ甕ㆍ鉢, 內彎口緣甕, 底部의 두께, 胴 下半部 의 傾斜度 등의 器形과 또 석촉과 有溝石斧, 반월형석도, 방추차 등의 형태적 차이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주거지와 수혈에서의 공반상을 통하여 순서배열보충법으로 양식을 편년하였다. 그 결과 110개의 유구에서 51단계의 시간적 차이를 구분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단계는 너무 세분된 편년이라 취락의 변천 과정을 살피기에는 어려움이 있어서, 각 단계에서 새로운 형식이 출현하는 경향을 살펴 9단계의 획기를 설정하였다. 그리고 점토대토기 단계에 발견할 수 있는 유물들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점토대토기 단계 직전의 재지계 유물의 변형으로서 先粘土帶土器文化(청동기시대 晩 期)를 설정할 수 있었다. 이 획기를 통하여 지좌리유적의 취락상은 협곡에 입지한 주변 취락으로 타 공동체와의 교류가 적어 전통문화의 존속기간이 긴 다소 폐쇄적인 성격을 밝힐 수 있었고, 청동기시대 전기ㆍ후기ㆍ만기의 문화가 혼재함을 알 수 있었다. 지면 관계상 차후에는 이 편년을 이용하여 지좌리유적 Ⅰ~Ⅸ기(기원전 1100년~550년 전후)의 취락 변천 과정을 살펴서 그 시대상을 복원하고자 한다.
이 논문은 울산 무거동 옥현유적의 자료를 중심으로 옥현유적의 취락구조와 출토유물양상을 검토하여 주거지의 규모나 배치양상에 따라 주거군집을 설정하고, 출토유물양상에 따른 각 주거군집의 특징을 파악 하여 당시의 생업경제활동이 취락 내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옥현유적에서 확인된 주거지는 독립 구릉의 능선부에 형성된 4개의 정상부와 그 사이 소곡부를 기준으 로 4개의 주거군집으로 나누었다. Ⅰ·Ⅱ군은 주거지 2~3기가 소군집을 이루고, Ⅲ·Ⅳ군은 대형주거지 3 기와 다수의 중형, 소형주거지들이 소군집을 이루고 있다. Ⅰ·Ⅱ군은 Ⅲ·Ⅳ군에 비해 공지가 많아 취락 전체의 집회나 회의 등의 장소인 광장의 기능이 보다 더 강조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Ⅲ군은 주거지의 밀 집도가 높고 농경구를 비롯하여 모든 생업경제활동과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어 논 경작을 중심으로 생업경 제활동을 주도한 주거군으로 파악된다. 옥현유적에서 확인된 청동기시대 논은 논경작에 유리한 입지선정 과 논둑과 수구, 수로 등 물을 이용하는 시스템을 통해 당시의 농경기술의 체계화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울산지역 취락에 대한 기존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옥현유적과 비교하면 한 구릉내에서 정형화된 구조의 주거지가 축조되고, 일정한 배치양상을 가지고 주거지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양상이 공통적으로 확인된 다. 대부분의 취락이 주거중심의 생활공간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생업경제활동에 있어서도 울산지역에서 옥현, 입암리유적을 제외하면 비교적 큰 규모의 경작유구(논)가 확인된 예가 없고, 출토유물 중 농경구보 다 수렵구, 어로구의 비중이 더 높다는 점에서 청동기시대 전기의 수렵과 어로를 통한 생업경제활동이 울 산지역에서는 청동기시대 중기에도 활발하게 지속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청동기시대 전기 취락의 구조와 변화과정을 통해 당시 취락사회의 성장과 그 배경에 대해 검토해보고자 하였다. 전기의 이른 단계에 소규모 취락단위로 이주해온 집단은 대규모 노동력을 필요치 않는 화전과 같은 농경방식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안정적으로 취락을 유지하고 자원예측성을 높이기 위해서 농경에 대한 의존도가 강화되고, 그에 따라 취락의 규모가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산만지역의 전기 유적에서 확인되는 탄화미 등의 자료로 보아, 당시에 벼재배는일반적 현상으로 생각된다. 천안 백석동 취락의 규모와 구조로 볼 때 수전의 경영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보았다.
당시의 소규모 취락의 경우, 주변의 취락사회와의 관련 없이 단독으로 영속하기 어려웠을 것이며,주변의 취락사회와의 상호관련성을 유지하기 위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을것이다. 또한 취락사회의 안정을 얻고 생태적·사회적 압력을 극복하기 위해 개별 취락조직의 확대를꾀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형성된 대형취락들은, 일정한 공간적 거리를 두고 분포하는데,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글은 가락동유형의 중심시기인 청동기시대 전기를 이분 또는 삼분으로 나누는 틀에서 탈피하여 세분된 편년을 기반으로 한 개별취락의 미시적 분석결과를 통해 금강유역 가락동유형 취락의 변천과 정을 검토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작성되었다. 금강유역 가락동유형 취락의 변천상을 지역적으로 나누어 살펴본 결과, 미호천유역의 취락은 초현기의 양상이 타지역에 비해 뚜렷하지만 전반적으로 소규모의 단위취락 중심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갑천유역은 최초 용산동취락을 중심으로 국지적인 형성을 나타낸 이후 재지화되면서 주변으로 확산되고, 이러한 과정속에서 단위취락과 중위취락으로 발전하게 되며 4단계에 최대 성장기를 나타낸 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성장은 대부분 5단계를 기점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지만, 6단계에도 중층의 구조를 갖는 관저동취락에 결집하여 상위취락을 형성하고 있다. 금강 중류역은 2단계부터 상위취락인 송담리를 중심으로 취락의 본격적 성장이 확인되는 점이 타 지역과 비교되는 특징이다. 3단계에는 취락 성장의 균질성이 나타나는 특징이 있으며 외부로부터 파급된 문화가 금강유역 전역에서 재지화되는 시점으로 파악되는데, 주변으로 확산되면서 대부분 중위 취락을 형성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각 취락별로 성장의 동력이 분산되지만, 4단계에 이르러 상위취락인 송원리로 다시 집중된다. 송원리취락은 이후 6단계에 이르기까지 상위취락을 유지하는데, 특히 금강유역 일원에서 전기의 취락 대부분이 쇠퇴하는 6단계에서도 송담리와 함께 상위취락을 유지하고 있다. 끝으로 전기 마지막단계에는 취락의 영역이 축소되어 주거밀도가 높아지는데, 상위취락을 유지하는 송원리취락 등의 공간범위가 직경 약 150~200m 정도이며, 갑천유역의 6단계 상위취락인 관저동취락도 직경 150m의 공간범위이다. 이와 같이 취락영역이 줄어드는 점은 대외적 취락 영향력의 감소가 예상되지만, 오히려 취락내 구성원간의 유대감과 동질성의 향상을 통해 효과적이고 집중화된 취락의 운영이 가능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본고는 경기지역의 청동기시대 취락을 대상으로 기본적인 자료를 정리하여, 유적의 시기별 편년을검토하고, 이에 맞는 주거지의 배치를 통하여 취락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목적이 있다. 중부지방의 청동기시대 취락의 시기적 구분은 조기,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한 안과, 전기(전·중·후), 중기(전·중·후), 후기로 나눈안으로 크게 대별될 수 있다. 두 구분 모두 토기문양과 유물의 조합을 기준으로 나누는데 있어서 큰 차이점은 없지만, 후기를 점토대토기단계로 인정하는 것은 공통점이며, 돌대문토기 단계를 조기로 인정할 것인의 여부, 구순각목공렬토기의 중기여부의 차이라 할 수 있겠다. 본고는 토기문양의 계기적 변천과정이 잘 나타나는 후자의 안을 기준으로 시기적 특징을 살펴보았으며, 시기별 주거지 배치관계도 살펴보았다. 전기취락의 구조는 정상부의 능선을 중심으로 구축하였고, 계획배치 형태보다는 주거지간의 공간확보차원에서 조성되었고, 중기에는 구릉사면에 집중화되는 현상이 나타나며, 후기에 들어서서는 외곽으로 배치되고 있는 특징이 확인된다. 이는 중기중반이후에 인구가 줄어드는 양상과도 부합되는 현상으로 풀이된다. 한편, 중기에 분묘가 확인되기 시작하는데, 집단묘보다는 소규모로 조성되는 현상이 간취되는데, 이는 분묘공간의 확대로 정의될 수 있으며, 농경과도 연관된다. 대형 및 중형취락의 기준에 대해 살펴본 결과, 김포 양촌, 소사동, 토진리·양교리 주변 일대 유적을 대형취락으로 판단하였다. 특히, 소사동유적은 전기~중기에 걸쳐 시기별로 고른 분포를 보이면서,마을이 운영된 점이 돋보이며, 양촌리, 토진리·양교리 주변 일대 4개유적은 중기에 집중된 유적으로,유적 상호간의 거리가 근접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한단위의 취락으로 판단하였다. 경기지역 청동기시대 취락의 시기적 변천은(물론 지역적 변천은 인정하며), 중기전반에 가장 취락의 규모가 융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전기에 있어서 평택 소사동유적과 같은 규모가 큰 유적도 존재하지만, 대체적으로 중기전반에 규모가 최정점을 이루다가 중반이후로 규모가 쇠퇴하기 시작하는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폐기라는 행위는 단순히 버린다는 행위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폐기 양상을 통한 폐기 양식을 분석하여 청동기시대인의 행동 양식에 접근하고자 하는데 이 글의 목적이 있다. 폐기는 故意(의도적) 폐기와 不意폐기로 구분된다. 故意폐기는 주거인의 의도에 의해 폐기된 것으로 이동으로 인해 폐기하거나 폐기장ㆍ토기요지ㆍ야외노지ㆍ의례ㆍ무덤 장소로 전용되는 경우 등이 있다. 不意폐기는 주거인이 의도하지 않은 불의의 상황이나 자연 재해로 폐기된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失火ㆍ飛火ㆍ放火등의 화재, 홍수, 화산 및 지진 등에 의한 자연 재해 등이 있다. 이러한 폐기 원인에 따라 방치ㆍ해체ㆍ소각 행위가 보이며 유물 위치 및 수량에 따라서도 구분됨을 알 수 있다. 각 유적 내 개별주거지에서 보이는 폐기 양상을 분석한 결과 송국리문화의 폐기 양식은 시기별ㆍ지역별ㆍ규모별로 확인된다. 시기별 폐기 양식은 주거지의 평면 형태 및 중복 관계, 유물 등으로 보아 폐기장으로 전용된 주거지가 유적 내에서 늦은 시기에 해당함을 확인할 수 있다. 지역별 폐기 양식은 서해안지역에서 확인되는데, 특정 위치에 완형 유물을 정치한 폐기 양상이 서해안지역에 집중되어 보이고 있다. 규모별 취락의 폐기 양식은 위에서 세분한 폐기 양상들이 다양하게 보이는 취락을 오랜 기간 존속되어 온 대규모 취락의 폐기 양식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계룡 입암리 유적의 경우는 소규모 취락의 폐기 양식으로 이동성이 강한 반복 점유 폐기 양식으로 생각된다.
금강 중류역의 청동기시대 전기 문화는 일반적으로 가락동유형으로 대표되어왔다. 이 지역에서 가락동유형은 둔산식 주거지와 가락동식토기를 표지로 한다. 둔산식 주거지는 과거 둔산식-용암Ⅰ식-용암Ⅱ식으로 분류하였으나 최근의 조사 자료를 재검토하여 세분된 분류안을 제시할 수 있다. 가락동식 토기와 기타 공반된 토기의 문양요소에 대한 분석을 통해 가락동식토기 고유의 문양요소는 출현과 소멸의 과정이 진행되는데, 주거지의 변화상과 연관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으로 최근 이 지역에서 기존의 가락동유형과는 다른 양상의 청동기시대 전기 취락유적이 조사되었다. 대평리유적은 충적지에서 취락이 조사되었는데 미사리유형의 취락으로 판단된다. 대율리유적은 환호취락으로서 그 성격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 외에 일부 유적에서도 가락동유형과 다른 성격의 주거지가 조사되어 금강 중류역 청동기시대 전기 문화는 이제 다양한 양상으로 접어들고 있다 가락동유형의 취락은 지형적으로 구릉의 평탄면에 입지하며. 하천과의 관계속에서 볼 때 주로 2차 하천의 주변에 위치한다. 취락의 형태는 취락지리학의 성과를 참조하여 (단독·분산)점상취락-면상취락으로 구분한 후 각 유적을 검토하였다. 이를 통해 금강 중류역의 가락동유형 취락은 세대공동체 중심의 소취락을 기본구조로 조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지역별 변천상을 통해 중대형 취락을 중심으로 주변으로 확산되고 시간에 따라 취락의 분포상도 증가함을 알 수 있으며 형태는 점상취락에서 면상취락으로 변화된다.
아산만지역은 역삼동·흔암리유형의 취락이 가장 밀집되어 분포하는 지역이다. 또한 금강유역의 가락동유형과는 차령산맥을 기준으로 분포범위가 명확하게 구분되고 있어 양자의 관계를 조명하기에도 매우 중요한 지역에 해당한다. 또한 중기의 송국리유형의 기원 및 형성과 관련해서도 다수의 연구자들에 의해 주목을 받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렇듯 아산만지역은 한반도 청동기문화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아산만지역의 청동기시대 유적의 구성은 전기에 해당하는 생활유적이 대부분이다. 일부 중기 단계의 유구들이 전기 단계가 중심인 유적들에서 소수 확인되는 양상을 보이며, 순수하게 중기 단계의 유구로 구성된 유적의 분포는 매우 희박하다. 또한 분묘, 경작유구 등 생활유적 외의 다른 성격의 유적은 거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본고에서도 생활유적으로 한정된 취락에 중심을 두고 검토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전기 전엽에는 독립된 생활단위인 개별 주거지가 구릉의 능선을 따라 병렬 배치되는 양상을 보이며, 이후 전기 중엽 단계에 인구증가에 따른 주거지 밀집화가 발생한다. 전기 후엽에는 구릉정상부의 공지를 중심으로 소주거군과 주거군이 형성된다. 전기 전엽과 중엽에 소수의 수혈이 취락 곳곳에 분산되어 분포하였지만, 후엽에는 주거군 내에 군집된 채 확인되고 있다. 이는 주거군에 포함된 구성원들이 공지 인근에 조성된 초·대형주거지를 중심으로 통합된 생활단위를 구성하여 수혈을 경영하였던 것으로 추정하였고, 이러한 양상을 토대로 전기 후엽에 이르러 보다 구조화된 취락의 모습을 갖춰 나가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한편, 전기의 인구밀집지였던 곡교천유역은 중기 단계에는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에 반해서 충청 서북부의 서산지역은 반대로 인구가 집중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후 이러한 인구이동은 차령산맥 이남의 금강유역으로 확대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본고는 청동기시대 석기의 취락 내 제작 양상에 관한 연구이다. 석기의 제작 단계는 대체적으로 타격에 의한 1차 성형의 1단계, 고타와 약마를 통해 거친 면을 다듬고 세부적인 형태를 조정하는 2단계, 세부 마연을 행하는 3단계로 구분할 수 있었다. 이상 설정된 단계별 미제품과 석기 제작 도구의 출토 양상, 그리고 석기 제작과 관련된 유구 내부의 흔적 등을 종합적으로 비교·검토한 결과, 유적의 점유시기보다는 입지에 따라 제작상에 차이가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취락 내 석기 제작의 시기별 변화상은 각 유적에서 출토된 미제품과 완제품의 조성 비율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었다. 먼저, 가공 도구 가운데 고석의 주거지 당 출토량이 전기에 비하여 후기에 급감하는데, 고타기법이 합인석부의 제작에 주로 이용되는 점과 합인석부가 화전농경에 관련된 도구임을 감안하여 이러한 농경 방식이 청동기시대 후기에 감소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미제품과 완제품의 조성비 비교 결과 전기 단계에 훨씬 더 많은 미제품과 파손품이 발생하였음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후기 단계에 석기의 형태가 제작하기 쉬운 형태로 변화한 사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밖에 입지·시기별 변화와 관계없이 주거지 면적이 넓어질수록 미제품과 완제품의 출토량이 많아지는 경향성도 확인되었다. 이와 병행하여 실시한 석기 제작 실험 결과, 선형석기의 제작에 있어서 양극기법의 유용함과 석도의 천공 작업 시 고타 과정을 거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효율적이라는 점을 확인하였다. 또한 석부는 강한 암질의 석재를 대상으로 제작하기 때문에 형태가 비슷한 것을 이용하여 작업을 최소화 하였으며, 특정 부분을 마연하는 경우 가공 대상물을 고정시키고 소형의 지석을 움직이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고는 북한강유역 청동기시대 취락의 전개와 석기제작시스템에 관한 연구이다. 주거지의 구조와
출토유물을 통해 볼 때, 돌대문토기문화, 가락동유형문화, 역삼동유형문화, 각형토기문화 등 다양한
문화요소를 받아들인 전기의 문화는 역삼동유형의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성이 강한 중기의 문화
로 전개되며 후기에 이르러 주거지의 규모가 축소되면서 점토대토기문화와도 접촉한다. 전기 중·후
엽 역삼동유형의 주거지의 내부구조가 노지중심의 구조에서 작업공간이 분리되면서 이색점토구역이
설치되고 취락내에서는 공방지가 성행하게 된다. 즉, 중기에는 이색점토구역이 설치된 주거지와 함께
공방지의 수적 증가가 관찰되고 후기에는 규모가 대폭 축소된 방형주거지가 출현하며 공방지 또한 지
속된다. 이러한 전개과정 속에서 주거지의 내부구조변화와 공방지의 출현이 석기의 제작과 밀접한 관
련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인접한 석재 산지로부터 조달된 석재의 보관·선별·분할·분배는 공방지에
서 공동작업을 통해, 분배된 석재를 선택적으로 이용하는 석기의 세부제작공정은 개별주거지에서 행
해지는 병행적인 석기제작시스템의 확립과정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석기제작시스템의 확립과정은
건축기술의 차원에서의 주거구조의 변화와 취락내 독립적인 공방지 출현과 관련이 깊으며, 전문생산
체계로의 발전과정에서 과도기로서 농경 위주보다는 다양한 생계활동을 기반으로 삼아 계급사회로 이
행되는 과정으로 파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