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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무덤은 피장자의 사회적 위치를 함축하고 있어 취락연구와 함께 규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이에 따 라 부장유물의 형식편년이 아닌 양식편년을 통해 무덤 편년 체계에 대한 객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부장유물의 형식편년을 통해 무덤의 편년을 했다면, 본고에서는 양식의 편년방법인 석촉과 석검의 순서배열보충법을 통해 동일문화권으로 평가하고 있는 대구지역 무덤 유구의 시간성을 검토하였다. 대구지역 청동기시대 무덤은 석촉·석검의 새로운 형식이 많이 출현하는 단계를 기점으로 하여 총 Ⅰ·Ⅱ·Ⅲ·Ⅳ기로 구분되어진다. 이를 통해 무덤의 변천을 살펴 획기에 따른 양상을 살폈다. 그 결과 Ⅰ기는 무경식석촉과 유구식석검, 유절식석검이 공반하며 재지계 계통 무덤이 축조되었다. Ⅱ기는 무덤에 송국리문화가 유입되는 시기로 송국리형묘제와 함께 무경식석촉과 유구식석검의 부장 은 소멸되고 평근이단경식석촉, 첨근이단경식석촉, 일단병식석검의 부장이 확인된다. 또한 혼축조평 수적식 석관묘와 구획묘가 등장하면서 후기의 사회로 진입한다. Ⅲ기에는 첨근일단경식석촉의 부장이 확인되기 시작하고 판석조평수적식 석관묘가 축조되기 시작한다. 또한 연접된 구획묘의 축조가 증가 하면서 피장자 간의 위계 차이가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Ⅳ기에는 이전시기 묘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무덤의 축조가 대폭 증가한다. 특히 혼축조평수적식 석관묘의 증가와 함께 석촉 제작의 단순화가 극대화된 능형식석촉이 공반하고 석검은 석검이 가지는 위신재로서의 성격이 가장 잘 반영된 석검 일단병식 Ⅳ식이 공반된다. 따라서 대구지역의 청동기시대 무덤 사회는 Ⅱ기에 송국리문화가 유입되지만, 재지계 무덤의 강한 전통성을 계승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6,300원
        2.
        2019.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취락고고학에서 주거지의 동시성을 파악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유물 과 유구를 총망라한 양식 편년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기존의 토기의 문양이나 주거지의 형식을 통하여 청동기시대의 시기와 단계를 설정하였던 관습에서 벗어나 문양, 무문토기 壺, 淺鉢, 적색마연토기의 壺ㆍ甕ㆍ鉢, 內彎口緣甕, 底部의 두께, 胴 下半部 의 傾斜度 등의 器形과 또 석촉과 有溝石斧, 반월형석도, 방추차 등의 형태적 차이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주거지와 수혈에서의 공반상을 통하여 순서배열보충법으로 양식을 편년하였다. 그 결과 110개의 유구에서 51단계의 시간적 차이를 구분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단계는 너무 세분된 편년이라 취락의 변천 과정을 살피기에는 어려움이 있어서, 각 단계에서 새로운 형식이 출현하는 경향을 살펴 9단계의 획기를 설정하였다. 그리고 점토대토기 단계에 발견할 수 있는 유물들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점토대토기 단계 직전의 재지계 유물의 변형으로서 先粘土帶土器文化(청동기시대 晩 期)를 설정할 수 있었다. 이 획기를 통하여 지좌리유적의 취락상은 협곡에 입지한 주변 취락으로 타 공동체와의 교류가 적어 전통문화의 존속기간이 긴 다소 폐쇄적인 성격을 밝힐 수 있었고, 청동기시대 전기ㆍ후기ㆍ만기의 문화가 혼재함을 알 수 있었다. 지면 관계상 차후에는 이 편년을 이용하여 지좌리유적 Ⅰ~Ⅸ기(기원전 1100년~550년 전후)의 취락 변천 과정을 살펴서 그 시대상을 복원하고자 한다.
        7,800원
        3.
        2018.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북한 서포항 유적은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 형성되어, 동북한 선사시대 문화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유적의 절대연대가 측정되지 못해서 북한학계에서도 중국과 비교연구 하면서 연대를 소급시킬 뿐이었다. 그런데 이 유적에서는 신석기문화층 뿐만 아니라 청동기시대문화층도 연해주문화와의 관련성이 토기 및 토우 등에서 뚜렷하게 관찰된다. 이미 서포항 청동기시대는 연해주 청동기문화와 관련지어져 왔으나 시니가이 문화의 서부1유형이 새롭게 고찰되고, 리도프카문화의 토기가 관찰됨에 따라서 서포항유적의 청동기시대층의 편년을 정리하고자 한다. 그 결과 서포항 청동기시대 4계의 단계로 구분되는데, 서포항 청동기 1단계는 유적의 5기가 해당된다. 7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시니가이 문화 서부 1유형의 파수가 한쪽만 달린 토기가 출토되는 등 토기와 석기가 모두 시니가이 문화 서부 1유형과 비슷하다. 서포항 청동기 2단계는 5호, 6기 퇴적층 일부 토기가 포함되며, 시니가이 문화의 서부 1유형과 동부 2유형이 공존하는 특징이 확인된다. 서포항 청동기 3단계는 2호 주거지와 이와 유사한 유물이 확인되는 7기 퇴적층 일부를 포함한다. 시니가이 문화의 서부 2유형과 동부 2유형이 함께 확인되는 단계이다. 서포항 청동기 4단계는 7기에서 확인되는데, 4호와 10호 주거지 및 7기 퇴적층 유물과 6기 퇴적층유물도 일부 포함되며, 주로 리도프카 문화와 관련성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시니가이 문화 및 리도프카 문화와 절대연대를 비교하면 1단계는 3300~3200년 전, 2단계는 3200~2900년 전, 3단계는 2900~2500년 전, 4단계는 2500~2300년 전으로 볼 수 있다. 서포항 5기보다 이른 시기의 동북한 청동기시대 유적은 범의구석 1호인데, 이곳에서 출토된 대부마연 토기가 마르가리토프카 문화의 돌대각목 혹은 이중구연의 적색마연토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따라서 동북한에서 청동기시대는 신석기시대부터 단절 없이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변화되며, 특히 서포항 유적의 5~7기에서는 연해주의 청동기시대문화인 시니가이문화, 리도프카문화 특징이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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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8.09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조선 왕실에서는 왕비나 세자의 책봉(冊封) 그리고 상존호(上尊號)를 위한 상옥책(上玉 冊) 의식을, 국가적 행사로서 성대하게 치르고 이를 의궤(儀軌) 기록으로 남겼다. ‘상옥책’ 은 왕실에 관한 공덕과 찬사의 글을 옥간(玉簡)에 새기고 이를 금분으로 메워서 옥책(玉冊) 으로 엮은 것을 올리는 의식이다. 즉 의식의 주된 내용이 옥책의 내용을 낭독하고, 이를 함 (函)에 담아 봉(封)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여기에 사용되었던 함은 二重의 함으로 내함(內函)과 외함(外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내함은 매우 특별하게 제작되었다. 주칠함(朱漆函)에 니금(泥金)으로 화려하게 장식 되어, 조선 시대 사가(私家)에서 사용한 함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던 것이다. 그 내함이 국립고궁박물관에 250여점 현존하고 있다. 본 논문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옥책 내함의 제작 시기를 밝혀보고, 이를 바탕으로 한 공예사적 회화사적인 변화양상과 옥책 내함이 의례품으로서 갖는 역사적 의미에 관한 발표자의 이전 연구를 바탕으로 하였다. 옥책 내함은 왕권 강화의 의미와 관련한 왕실공예품이며, 목 공예 금속공예 칠이나 섬유 공예, 니금 그림의 회화사적인 측면에 이르는 다양한 정보를 주는 중요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겠다. 이에 더하여 여기서 중점할 내용은, 옥책 내함의 시대별 변화양상을 동시대 제작으로 추정되는 내함 外의 다른 국가 제작 함(函)과 비교 검토하고자 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자 하였다. 연구자의 앞선 연구에서 옥책 내함의 시기별 변화양상의 흐름을 밝힌 바 있는데, 그것은 뚜렷한 구분을 보이는 것이었다. 이것은 동시대 흡사한 제작 방식을 갖는 다른 목조함의 제 작시기를 추정하는 근거로 활용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연구를 시도하였고, 이것은 제작시 기 파악이 어려운 목공예의 편년 연구에 기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은 한정된 수에 불과하여 그 연구의 시작이지만,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비교 대상의 확장과 더 나아간 다각도의 연구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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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8.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고고학적 상대연대결정법으로 몬텔리우스의 형식학적 방법과 순서배열법이 대표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자는 유물 각각으로써, 후자는 유물의 공반 즉 유물복합체를 분석단위로 삼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런데, 유물 개개의 시간성을 따지는 것은 유물의 생산시점을 파악하기 위한 작업이고, 공반유물을 통한 상대연대의 규명은 유통 결과의 시간성을 시사하는 것이란 점에 궁극적인 차이가 있다. 소비지의 유물은 각 개인의 취향에 따라 유물의 존속기간이 천차만별이다. 즉 일찍 생산된 물건이라도 늦게 생산된 것보다 더 늦은 시기까지 존속할 수도 있다. 그리고 동일 형식의 물건이라도 그 폐기되는 시간성은 개인에 따라 각각 달리 나타난다. 그러므로 소비지의 유물을 통한 순서 배열법에는 고고학자가 요구하는 유물 또는 유구의 생산시점을 알려주지는 않다. 그리고 유물 각각을 대상으로 작성된 편년들은 모든 유구의 시간성을 파악하는 것에 제한적이기 때문에 한정된 연구에만 사용될 뿐이다. 결국 올바른 편년체계의 구축에 유용한 자료는 생산지에서의 공반유물 즉 유물복합체이고 이렇게 시간 성이 확정된 양식편년을 통하여 고고학의 목적에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소비지의 양식편년을 생산지의 양식편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도 모색할 수 있다.
        5,800원
        6.
        2017.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청동기시대 편인석부의 편년은 유물 그 자체의 시간적 위치보다는 새로운 기종 혹은 형식의 출현이 가 지는 의미가 중요하다. 편인석부는 일반적으로 목기를 제작하기 위한 가공구로 추정되며, 목기 제작 기술의 발달은 청동기시대 후기에 본격화되는 수전 농경과 관련이 깊다고 알려져 있다. 본고는 동남해안지역 편인석부의 기종을 분류하고 형식학-형식학적속성분석법과 순서배열보충법-을 통해 각 기종을 편년하여 형식 변천과 더불어 새로운 기종의 출현 시점을 검토하였다. 편인석부의 편년은 주상편인석부와 유구석부의 출현을 획기로 ⅠㆍⅡㆍⅢ기로 구분 되었으며, 각 획기가 가지는 의미를 동남 해안지역 청동기시대 문화상과 비교ㆍ검토하였다. 주상편인석부가 출현하는 Ⅱ기의 시작은 수전 농경의 개시적 성격을 보이는 전기 후반이다. 주상편인 석부의 출현과 발달은 후기 농경 사회로의 진입을 위한 목기 제작 공정의 정교화ㆍ체계화 과정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았다. 유구석부가 출현하는 Ⅲ기의 시작은 후기 전반으로 동남해안지역 환호의 출현과 병행 하는 시기이다. 유구석부와 환호의 출현이 직접적으로 관련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수장 혹은 유력개인의 등장으로 인해 계층화된 사회 구조 형성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환호 출현의 사회적 배경에 주목하였다. 수장이 지배하는 계층화된 취락 집단 내에서 목기를 제작하는 무리 중 작업 주도자의 존재를 가정 하였다. 청동기시대 후기에 유구석부의 수량이 주상편인석부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양상을 근거로 유구 석부가 이러한 작업주도자의 상징적 실사용 도구였을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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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6.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연구에서는 최근 관련 유적이 다수 조사된 춘천분지 일원 청동기~초기 철기시대 유적군의 획기와 편년 체계를 구축하였다. 춘천분지 청동기-초기 철기시대 I단계는 타원형 석상위석식노지 방형 주거지·이중구연거치문토기· 사장경호·무경식석촉·장방형어망추·장방형석도, II단계는 위석식노지 장방형 중심 주거지·각종 돌대 문토기·이중구연토기·구순각목토기·복합문토기·무경식석촉·장방형어망추·장방형석도, III단계는 (퇴화형 위석식노지+)수혈식노지 세장방형 중심 주거지·천발형토기·발형토기·호형토기·공열토기·적 색마연소호·무경식석촉·이단경식석촉·일단경식석촉·이단병식석검·타원형어망추·제형석도·주형석 도, IV단계는 수혈식노지 장방형 중심 주거지·기존 토기 외 다양한 적색마연토기(발형토기, 호, 대부소 호)·무경식석촉·일단경식석촉·타원형어망추·이(일)단병식석검·주상편인석부·주형석도·어형석도 등이 공반하는 단계이다. V단계는 전형적인 천전리식 주거지·무경식석촉·일단경식석촉·일체형석촉· 원통형어망추·일단병식석검·유경식석검·유구석부·주형석도·어형석도, VI단계는 소형 수혈식노지 방 형 중심 주거지·순수 무문토기 중심 토기·일체형석촉·일단병식석검·검병두식·유구석부·주형석도, VII단계는 소형 수혈식노지 말각방형 주거지·점토대토기·두형토기·흑색마연토기·조합식우각형파수· 우각형파수·봉상파수·삼각만입석촉·검병두식·유구석부·주형석도 등이 공반하는 단계이다. 각 단계 의 시간적 범위는 기원전 12~11세기(I단계), 기원전 11~10세기(II단계), 기원전 9~8세기(III단계), 기원전 8~7세기(IV단계), 기원전 6~5세기(V단계), 기원전 4~3세기(VI단계), 기원전 3세기 전반~1세기 중엽(VII단 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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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4.04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성산성은 남성과 북성 2개의 성으로 이루어진 백제 한성기 토축산성이다. 이성산성에 대한 4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출토된 토기류는 원삼국기~백제 한성기에 해당하는 토기들로 미호천유역 원삼국기 이래의 재지적 요소를 갖고 있는 토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중심시기는 4세기 대에 해당하고 있다. 이성산성의 축조는 백제가 미호천유역의 정치세력을 병합한 직후인 4세기 중~후엽경에 백제 중앙의 주도하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 시기는 토기양상을 통해 볼 때, 남성(南城)이 북성(北城)보다 다소 이른 4세기 중엽, 그리고 북성이 4세기 후엽경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성산성 토기류에는 재지계 및 한성백제 토기외에 가야(김해)지역, 충남 서해안 및 영산강유역의 토기기종으로 판단되는 외래기종 토기류가 출토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들 외래기종 토기류는 대체로 4세기 후엽의 시기에 집중되고 있는데, 가야와 영산강유역권과의 교류상을 엿볼 수 있는 유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성산성은 백제 한성기 가야(김해) 및 영산강유역으로 연결되는 교류루트상의 중간지역에 위치한 지방 거점성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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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2.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은 중부지역 돌대문토기의 속성과 시간적 범위를 통한 편년연구이다. 중부지역 돌대문토기의 제작방법과 형태, 그리고 공반양상에 대한 검토결과 1ㆍ2ㆍ3단계의 단계별 변화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다만, 1단계의 경우 돌대의 부착위치에 따른 시간성과 유물들의 공반양상에 있어서 약하게 시간적인 흐름이 나타나고 있을 뿐 아직까지는 해당시기의 유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다수의 유적들이 2단계의동일한 시간적 범위안에 밀집되고 있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미사리유적을 논외로 하더라도 중부지역의 대부분 돌대문토기는 2단계에 위치하며, 공반관계상 청동기시대조기의 후반에 해당한다. 3단계에서는 주변의 다양한 토기문화유형과의 接變現像이 관찰되는데 구순외연각목토기ㆍ외반구연 공렬토기의 증가, 토기문양의 혼합(공렬, 구순각목 공반), 가락동계 이중구연토기의 점유율 증가와 같은 양상이 나타나고 있어 돌대문토기가 청동기시대 전기의 전반까지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결국, 중부지역에서 확인되는 돌대문토기의 시기를 설정함에 있어 전ㆍ후반을 구분할 만큼 뚜렷한근거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이는 토기뿐만 아니라 석기 및 주거지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도 명확한시기구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시간성이 확인되는 토기의 속성과 공반유물의 양상을 근거로 현재까지 확인된 중부지역 돌대문토기는 조기 후반의 양상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전기 중반을넘지 않는 시기에는 이미 전국적으로 확산되어진 다양한 토기문화 속에 쇠락한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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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2.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湖西地域의 前期주거지에서 출토된 무문토기 문양을 대상으로 편년한 것이다. 우선 여러문양의 분포권을 살펴본 후 차령산맥 이남과 이북으로 지역권을 설정하였으며, 문양의 세분류를 바탕으로 屬性配列法을 통해 편년하였다. 무문토기 문양 중 이중구연문은 이중구연의 점토대 幅과 융기정도에 따라 세분하였으며, 단사선문, 거치문, X자문 등은 시문위치에 따라 세분하였다. 그리고 공렬문과 돌류문은 시문방향에 따라 구분하였다. 속성배열법에 따른 결과 차령산맥 이남지역은 8단계로, 차령산맥 이북지역은 10단계로 편년되었다. 이 편년결과를 검증하기 위해서 문양변천의 형식학적 해석, 주거지 형식과 공반유물상 그리고 C14 연대와도 부합되는지 검토하였으며, 좋은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차령산맥 이남지역과 이북지역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류의 흔적은 적은편이다. 차령산맥 구조곡에 위치한 천안 운전리유적에서 차령산맥 이남지역의 5단계가 이북지역의 4·5단계에 병행한다는 유물상을 확인하였다. 차령산맥 이남지역에서는 상마석계이중구연ㆍ횡대구획문과 같은 외래계문양이 이른시기부터 확인됨으로써 중국동북지방의 선진문물을 끊임없이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본고에서 편년한 한 단계의 시간폭을 C14연대에 따른다면 대략 30~50년 정도로서 1~2세대의 시간폭에 해당하며, 이를 통하여 동시기의 시간성을 확보하여 취락고고학을 연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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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2012.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영남지역의 청동기시대 취락은 크게 낙동강 중류를 중심으로 한 영남내륙지역, 태화강·형산강유역 및 동해안을 중심으로 한 영남동남부지역, 낙동강하류 및 남해안을 중심으로 한 영남남부지역으로 3개의 지역군으로 구분된다. 이들 지역군의 청동기문화는 재지문화와 새롭게 유입되는 송국리문화와 접변하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영남지역의 마제석촉은 경부의 유무와 형태에 따라 크게 무경식(Ⅰ류), 이단경식(Ⅱ류), 일단경식(Ⅲ류)로 구분되며, 총길이, 총길이/촉신폭, 촉신부의 형태, 경부의 단면형태, 촉신하단부형태 등의 제속성을 기준으로 여러 가지의 형식으로 나누어진다. 영남지역의 마제석촉은 무경식→이단경식→일단경식의 변화가 인정되며, 그 형식변화는 지역군별로 차이를 보인다. 이는 재지문화와 송국리문화의 접변과 확산과정으로 설명된다. 마제석촉의 형식변화와 주거지의 구조, 심발형토기의 변화 등의 조합을 통한 영남지역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분석대상에서 제외된 미사리유형과 가락동유형의 주거지(Ⅰ기)와 원형점토대토기단계의 주거지(Ⅵ기)를 포함하여 모두 6단계로 설정할 수 있다. 단계별 시기는 방사성탄소연대를 참고하면, Ⅰ기는 전기 전엽(B.C. 15세기~B.C. 13세기), Ⅱ기는 전기 중엽(B.C. 13세기~B.C. 10세기), Ⅲ기는 전기 후엽(B.C. 10세기~B.C. 9세기), Ⅳ기는 중기 전반(B.C. 9세기~B.C. 8세기), Ⅴ기는 중기 후반(B.C. 8세기~B.C. 4세기), Ⅵ기는 후기(B.C. 4세기)으로 편년할 수 있다. Ⅳ기는 청동기시대 전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단계로 영남지역에 송국리문화가 유입되며, 석촉은 ⅢA1a식이 소멸되고 ⅢA1b식, ⅢA2b식이 출현하는 시점이다. Ⅳ기에 유입되는 송국리문화는 영남내륙지역과 영남남부지역부터 확산되는데, 영남동남부지역에는 전기의 재지문화 즉, 역삼동유형, 흔암리유형을 계승하여 보수성이 강한 검단리유형을 형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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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2009.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남한지역 무문토기의 편년은 돌대문토기를 표지로 한 早期의 설정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미사리·옥방 5지구유적 등과 같이 돌대문토기만을 반출하는 주거지가 조기의 표지적인 유적이며, 옥방 5지구·수가리유적의 연대측정 결과를 근거로 조기를 신석기시대 말기와 병행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 突帶文土器외에도 二重口緣土器등 조기에 다양한 토기가 병존했을 가능성을 염두해 둔 견해가 있다. 미사리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로서는 조기의 유물조합상황을 파악하기 어렵고, 옥방5지구와 동일하거나 더 높은 연대측정자료들이 많기 때문에 신석기말기까지 조기를 올려보기는 어렵다. 무문토기시대 조기는 돌대문토기·이중구연토기의 주류속에 鋸齒文土器·孔列文土器·橫帶區劃文土器등이 병존하였으며, 신석기시대 말기 다음에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무문토기시대 전기는 2000년대 이후 역삼동식토기·가락동식토기·흔암리식토기가 병존하는 것으로 논의가 정립되었으나, 최근 複合文에서 단순문으로의 변화, 즉 가락동식토기·흔암리식토기→역삼동식토기로의 변화가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삼동식토기가 뒤늦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지역에서 장기간 존속하였다는 지역적인 특징으로 보아야 한다. 전기의 특징은 돌대문토기가 소멸되며, 이중구연토기는 類似二重口緣의 형태로 변화하며, 역삼동식토기·흔암리식토기 등 孔列文系土器의 확산과 더불어 지역적 특징이 나타난다. 남한의 무문토기 조기는 동북한지역 보다는 요동~서북한지역과의 관련성이 높은데, 쌍타자·대취자Ⅲ기, 신암리Ⅱ기, 공귀리·심귀리Ⅰ기, 세죽리Ⅱ1기, 구룡강Ⅰ기, 흥성Ⅲ기, 오동Ⅱ기, 서포항Ⅴ기등과 병행한다.
        5,800원
        13.
        2008.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wooden pagoda sites which have been confirmed in Baekjae's former territory so far have flattened surface of the earth or foundation pert made by digging up the earth. In particular, the latter is found more often in the pagoda sites of Baekjae, which is essential and absolutely necessary because of the characteristics of pagoda structure. The wooden pagoda sites with foundation part made by digging up the earth under the stylobate are found at Yongjeongli ruined temple site of Woongjin area, and at Neung-sa temple site, Wangheung-sa temple site, Geumgang-sa temple site, and Mireuk-sa temple site of Sabi period. They are also observed at Hwanglyong-sa nine-storied wooden pagoda of Shilla and at Biin five-storied stone pagoda of early Goryeo. They are important data improving that the construction technologies of Baekjae continued to be applied to build stone or wooden pagodas, transcending time and space. Recently, the site assumed as a wood pagoda site of Hanseong area was examined in Gyeongdang sect ion of Pungnap mud fortification. If this is proved to be a real wooden pagoda site, this digging-up construction technology of foundation part ann be concluded to be a traditional engineering technology of Baekjae which was frequently used from Hanseong period to Sabi period. On the other hand, this digging-up construction technology of foundation part has been found only at pagoda sites and main building sites of temple ruins, and it helps examine their symbo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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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명의 연보는 无悶堂 朴絪이 1628년 덕산에서 남명의 둘째 아들인 칠원 군수을 지낸 慕亭 曺次磨로부터 부탁을 받고 1636년 편찬을 하였 다. 그 후 謙齋 河弘度, 澗松 趙任道, 林谷 林眞., 寒沙 姜大遂 등 私淑人들의 수정 보완을 거쳐 1700년 발간된 .南冥先生別集.에 실려 처음 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 후 1814년 무민당의 후손들이 .무민당 집.을 발간하면서 집안에 전해오던 무민당 手稿本이라고 추정되는 .남 명연보.를 저본으로 삼은 연보를 수록하여, 3종류의 연보가 전하고 있 다. 연보가 발간된 후 내암관련 문자 삭제, 구암과의 절교 문제 등으로 논란이 있었는데 내암 관련 문자는 삭제하는 것으로 정리한 반면 구암 과의 절교 문제에 있어서는 상세하게 기록해야 한다는 무민당의 견해 가 수고본에 그대로 기술되어 있으며, 반면 .남명선생별집.과 후에 발 간된 .무민당집.에는 내용은 대동소이하나 그 분량은 현저하게 줄어들 었다. 1800년대 들어 남명학파 학자들의 문집이 이 지역에서 많이 발간돼 남명 생애에 대한 자료가 많이 발견되어 보충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또 연보의 내용도 일부분 거칠고 오류가 있다고 생각해 1897년 남명 선생편년을 간행했다. 남명편년은 그동안 제기되었던 연보의 오류들 을 바로 잡았을 뿐 아니라 대체로 연보의 기술 내용을 보충하고 있다. 특히 연보에는 덕계 수우당 한강 등 소수 문인들의 受學에 관한 기사가 있는데 반해 편년에는 남명 문인들의 受學에 관한 기사가 현저하게 늘었다. 이는 남명의 遺文들이 전해지지 않은 것이 너무 많아 당시 지역 선비들의 문집에서 관련 자료들을 구해 이를 보충하는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