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미술가 마이클 스노우는 1971년에 캐나다의 북방 야생지 풍경을 담은 영화 <중 심지대>를 제작하였다. 북방 야생지는 1920년대 캐나다의 풍경화가 모임인 그룹 오브 세븐 이후 캐나다 미술에서 자주 다뤄져 온 독특한 주제이다. 그룹 오브 세븐의 작품에서 북방 야 생지는 태초의 신성한 장소로 표현되는데 이 같은 풍경에는 북방 야생지에서 캐나다의 역사 적 기원을 설립하고 통치권을 주장하려는 민족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의도가 반영되어 있 었다. 스노우는 <중심지대>에서 그룹 오브 세븐에 의해 만들어진 캐나다 풍경화 전통을 해체 한다. 그는 무한하게 회전하는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전지적인 단일 시점으로 그려진 그룹 오브 세븐의 북방 야생지 풍경을 탈중심적인 우주 풍경으로 전환한다. 또한 카메라 움직임에 의한 운동감각적 시각과 전자음에 의한 신경계적 청각을 통해 프레임의 물질적 표면을 접촉 하고 스치는 듯한 촉지적인 감각 경험을 생성한다. 즉 <중심지대>는 그룹 오브 세븐의 시각 중심적 풍경화에서 벗어나 영화 매체에 의해 야기되는 다감각적 풍경을 제시하면서 북방 야 생지에 대한 기존의 의미와 경험을 재구성한다.
1970년대에 등장해 진중하면서도 탁월한 마티에르가 강조된 추상회화를 보여준 권훈칠은 1980년대 후반 갑작스레 이탈리아 유학을 떠난다. 이탈리아 유학 동안에 그는 기존에 꾸준히 천 착해오던 스승 정창섭의 추상화에서 보여지던 마티에르를 강조하는 방식을 버리고 평소 개인적 으로 관심을 갖던 풍경화에 몰두한다. 풍경화는 그가 이탈리아에 오기 이전부터 꾸준히 그려오던 장르였다. 권훈칠의 이러한 풍경 중심의 화풍은 그가 로마에 유학하던 당시 영향받았던 오토첸 토, 즉 이탈리아의 19세기 회화와 연관이 있다. 당시 이탈리아는 통일운동으로 점철된 시대였고 조국의 땅과 풍경을 화폭에 담고자했던 이탈리아의 화가들을 마키아이올리(Macchiaioli)라고 불렀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그리고 피렌체에서 출발한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프랑스의 인상파 운동과 매우 비슷한 화풍을 지녔으나 다루는 주제, 애국심, 그리고 전통적인 르네상스 회화적 구 도 등을 활용하는 새로운 화파였다. 권훈칠이 이들에게 영향을 받아 한국의 풍경을 그린 수채화 들은 정적인 공간과 개인의 안식, 그리고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논문은 권훈칠의 풍경화에 나타나는 이탈리아 마티아이올리의 영향을 추적하며 그의 풍경화가 드러내는 의미를 고찰하고 있다.
한국에서 산업유산은 주로 광산이나 공장 등 대규모의 광업, 제조시설 혹은 상수도나 교량, 철도 등 토목관련 시설, 즉 협의의 산업유산 개념을 중심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산업의 발전에 있어 노동의 중요성은 간과할 수 없는 것이며, 특 히 대규모 산업생산이 가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사택단지와 같은 대규모 노동자 주택 단지의 건설이 기반이 되었다. 최근 산업유산이 보존과 활용의 대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데에도 불구하고, 많은 노동자주택들은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 채 사라져가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1930년대 후반 일제의 군수공업도시로 형성된 부평의 대표적인 사택인 미쓰비시 중공업의 사택과 1960년대 경제개발기 공업도시로 발전한 울산의 현존하는 사택인 한국화학공업사택을 대상으로 살펴보면 서 산업유산의 개념을 노동자주택과 도시경관을 포함하는 산업도시경관으로 확장하는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19세기 전반 동안 일본의 우키요에에 독립된 풍경이란 주제가 등장하여 대표적 유형으로 정착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우키요에의 본격적 출발은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의 《후지산 36경》(1830-1832)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호쿠 사이가 고안한 우키요에의 특징들은 안도 히로시게로 계승되어 풍경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우키요에로 발전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호쿠사이의 《후지산 36경》에서 나타나는 서양화의 기법들은 물론, 일본화 특유의 특징들과 서양화 기법들을 조화시키는 특유의 수법들이 18세기 말부터 어떤 방식과 과정으로 발전해 왔는지를 추적하고자 한다. 이로써 네덜란드 상인과 가톨릭 예수회 선교사들과 나가사키 데지마의 상관을 통해 일본에 소개된 서적 속의 삽화들과 동판화를 통해 알게 된 서양화의 기법들을 모사하는 수준을 뛰어넘어서, 일본의 회화적 전통과 어우러지게 혼합시켜가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풍경 우키요에의 차이와 특징들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복합적인 시점과 독특한 구도,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자연 묘사로 19세기 후반 서구 미술가들에게 광범한 영향을 미쳤던 풍경 우키요에 양식이 일본화에 서양화 기법을 도입하고 조화시키는 과정에서 비롯된 토착화의 결과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연구는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화성에 머문 8일 동안의 주요 행사를 그림으로 기록한 ≪화성능행도병(華城陵行圖屛)≫ 중 한 작품인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의 의례 속에 어떤 소리가 보이는지, 그리고 그 소리에 무슨 의미가 담겨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그림 속에 나타난 당시의 소리풍경을 고찰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먼저 ≪화성능행도병≫의 바탕이 되는 『원행을묘정리의궤』를 통해 <봉수당진찬도>에 나타난 의례의 순서와 절차, 쓰인 정재와 음악, 창에 대해 분석하였다. 정조가 직접 하교 하여 시행된 정재로는 헌선도, 포구락, 무고, 아박, 향발, 학무가 추어졌으며, 반주곡으로는 여민락, 환환곡, 오운개서조곡, 천세만세곡, 유황곡이 연주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정재와 함께 불린 창의 가사를 분석한 결과 송축, 나라의 풍요로움, 올바른 음악 추구, 어머니를 향한 자식의 효의 의미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정조는 이 의례를 통해 효를 강조함으로써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신원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그림에서는 상단에 많은 소리가 보였는데 정재를 추는 여령들 과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악공들의 모습이 두드러져보였다. 진찬연에서 종합적인 의식을 이끌며 진행하는 사회자 역할을 한 여집사와 정리사의 소리도 보이며 의빈척신에게 음식과 술이 부족한지 물어보며 나눠주는 여관들의 소리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봉수당진찬도>는 되도록 의례의 많은 소리를 화폭에 담아 재현함 으로써 정조의 정치적 의도를 충실히 반영하려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본 연구의 의의는 그림에 나타난 의례의 소리풍경을 분석하여 소리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정조 시대의 소리문화를 밝힌 데 있다.
본 연구는 중국의 28개 도시풍경명승구에서 선정한 200개 디지털 이미지를 대상으로 경관의 매력도에 영향을 미치는 경관요소 및 시각조형요소의 선호도를 분석하였으며, 그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내 관련 선행연구들을 종합하여 28가지 경관요소 및 7개 경관의 시각조형요소를 선정하였으며, 직관평가법을 이용하여 이들에 대한 선호도를 평가한 결과, 경관요소의 시각적 선호도는 꽃, 잔디, 유희시설 및 정원시설물의 순으로 나타났으며, 시각조형요소는 규모, 색상 및 상대위치의 선호도가 높은 것으로 분석되었다. 둘째, 요인분석 결과 28개 경관요소는 8개의 경관요인(관광서비스, 수경시설, 안전·지도시설, 매력물, 식물, 도로·광장, 자연풍경 및 지형요인)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 셋째, 도출된 경관요인 및 시각조형요소를 대상으로 피평가자들의 선호도 성향을 분석(T-검정, 분산분석)하였다. 경관요인의 경우 매력물 및 식물재료에서 성별에 따른 선호도 차이를 보였는데, 정원, 문화유적 등을 포함하는 매력물의 경우 여성이 남성보다 높은 점수를, 식물재료의 경우 남성이 여성보다 높은 점수를 주었다. 연령별로는 도로·광장인자의 경우 40세 이상의 평가자들이 20대 이하의 젊은 층에 비하여 높은 점수를 주었다. 시각조형요소 중 색상요소의 경우 여성이 남성보다 선호도가 높게 나타났다. 결론적으로 명승구 계획에 있어 자연경관뿐 아니라 안내판, 안전지도 등의 관광기반시설 설치가 중요한 경관요소임을 알 수 있었으며, 주 이용객의 특성을 반영한 설계가 이루어져야 함을 알 수 있었다.
본 연구는 비행청소년의 우울과 풍경구성기법(LMT) 반응특성의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LMT가 비행청소년의 우울을 측정하는 진단 도구로서 풍경구성기법의 유용성을 검증하는데 알아보고자 하였다. 연구의 대상은 G시에 소재한 00소년원 110명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연구도구는 우울척도와 풍경구성기법(LMT)을 사용하였다. 풍경구 성기법(LMT) 평가지표는 LMT 시행절차에 근거하여 구성과 채색이라는 관점에서 8개의 전체지표를 설정하고, 구성지표와 채색지표로 분류하여 살펴보았다. 풍경구성기법(LMT)지표와 우울과의 관계는 교차분석을 실시하였다.
분석결과, 본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구성지표에서 구성의 통합성은 전체적 통합의 조화와 4-6개 이하의 통합과 조화의 비율이 유사하게 나타났고, 공간사용은 90%이상 사용하는 비율이 높았으며, 형태의 사실성에서는 6요소 이하로 표현하는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또한, 소묘선의 질은 보통과 불안정으로 표현하는 비율이 유사하게 나타났다. 채색지표에서 채색의 정도는 요소만 칠한 경우가 가장 많았으며, 채색의 적절성은 6개 이하의 요소를 적절하게 채색한 경우가 가장 많았다. 색의 수는 0∼9색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채색의 안정성은 보통이 높았다. 둘째, 우울수준에 따르는 비행 청소년의 풍경구성법(LMT) 반응특성은 우울 수준에 따라 유의미한 차이를 보였다. 구성지표 4개 중에서 통합성, 공간사용, 소묘선의 질에서, 채색지표 4개 중에서 채색의 적절성과 채색의 안정성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조(正祖, 재위 1776-1800)시대를 대표하는 국중(國中) 최고의 화가였던 김홍도 (金弘道, 1745-1806년 이후)는 문인 수준의 지적 소양까지 겸비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양반이 아니면 사회적 대우를 거의 받지 못했던 신분제 사회의 질곡은 김홍도 또한 넘기 힘든 벽이었다. 본고에서 필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형성 된 엄격한 신분제 사회라는 한계 속에서 김홍도가 느꼈을 비애와 자기 연민을 중심으로 이러한 그의 신분 의식이 어떻게 그의 작품 속에 드러나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신분제적 모순에서 김홍도가 느낀 소외감과 불만을 유추해보는데 가장 중요한 작품은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의 <송하취생도(松下吹笙圖)>이다. 이 그림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그림 오른쪽에 적혀있는 김홍도의 제발로 그 내용은 “생황의 [길고 짧은] 들쑥날쑥한 모습은 봉황의 날갯짓 같고 월당(月堂)에 울려 퍼지는 생황 소리는 용(龍)의 울음보다 처절하네(筠管參差排鳳翅, 月堂凄切勝龍吟)”이다. 김홍도가 느낀 신분제적 차별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것은 “용의 울음(龍吟)”이다. 중인 출신의 시인이었던 이득원(李得元, 1639-1682)은 한 시에서 “용처럼 으르렁거리고(龍吼) 빈산의 귀신처럼 울부짖는 칼”로 신분제적 차별 속에서 고통받았던 자신을 비유하였다. 그런데 이 제발에서 김홍도는 용의 울음보다도 더 처절한 생황 소리를 자신의 울분과 고뇌를 표현하는 상징으로 활용하였다. <단원도(檀園圖)>(1784년, 개인 소장)는 김홍도가 1781년에 자신의 집에서 강희언(姜熙彦, 1738-?), 정란(鄭瀾, 1725-?)과 같이 가진 모임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의 제발에서 김홍도는 이 모임을 ‘진솔회(眞率會)’로 지칭하였다. 그런데 이 진솔회는 북송시대를 대표하는 문인이었던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아회였던 ‘진솔회(眞率 會)’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김홍도가 자신의 모임을 사마광의 진솔회에 비유한 것은 그가 스스로에 대해 매우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홍도는 당시(唐詩), 송시(宋詩)에 대한 이해가 깊었으며 다수의 시의도(詩意圖)도 제작하였다. 김홍도는 문 인적 소양을 갖춘 화가로 높은 자존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김홍도는 뛰어난 재주와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뜻을 펼칠 수 없었다. 중인으로서 그가 느낀 슬픔과 좌절감은 그의 그림 속에 녹아있다. 정조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도화서 화가였던 그의 화려한 명성 뒤에 숨어있었던 그의 신분 의식을 고려하지 않는 한 우리의 김홍도에 대한 이해는 절반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본 논문은 피터 브뢰헐의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1560년대)에 나타난 ‘노동’의 의미를 16 세기 네덜란드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해석하고자 한 것이다. 본 작품의 주제는 ‘구원에 이르는 현 세 삶의 방식’으로 ‘행동적 삶’과 ‘관상적 삶’이 본보기로 제시되었다. 또한 ‘교만’을 경계하고 도덕적 삶 을 실천하면 구원받을 것이라는 윤리지침이 제시되었다. 주목할 점은 ‘행동적 삶’이 ‘노동’으로 표현되 며 강조된 점, 가장 위협적인 악덕으로 ‘교만’이 묘사된 점, 그리고 이러한 삶의 방식이 ‘구원’과 연결된 다는 점이다. 본고에서는 본 작품의 주제를 당대 안트베르펀의 경제·종교적 상황과 도시민 문화의 틀 에서 고찰하였고, 16세기 네덜란드인들의 노동관과 현세 중심적인 삶의 태도가 반영된 것으로 분석하 였다.
본 논문은, 예이츠의 시, 산문, 자서선, 편지에 흩어진 증거와 여러 엑프 라시스 이론에 근거, 예이츠의 청금석 이 어떻게 중국고전시와 풍경화, 특히 도교에 서 보이는 중국전통미학을 반영하는 지 논의한다. 예이츠는 이질적인 중국문화와 대화 하는 매체로서 중국고전시와 풍경화를 사용하는데, 이로써 서양의 딜레마에서 벗어나 는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This study aims to rediscover the meaning and value of Soswaewon construction represented in Kim In-Hu's 48 poems on the basis of the concept and idea of soundscape. It classified the landscape resources through the various emotional elements such as the sense of sight, hearing, smell, touch, taste, and warmth described in the 48 poems of Soswaewon, and also interpreted the meaning and value of Soswaewon construction. Appreciating various sounds of Soswaewon, Kim In-Hu understood a sound as an important element of the landscape. Also, he abundantly wrote down the interesting changes of Soswaewon which vary depending on time or seasons. The 48 poems contain the scent and feel of Soswaewon as well as the soundscapes which can be heard with ears. A variety of sounds heard in Soswaewon are the whole senses which are combined with the chill of Soswaewon, the fragrance of trees and the mystery of the mountain, etc, and they mean the wider world much more than the value of physical sounds. Soundscapes of Soswaewon are becoming an emotional space which intactly conveys not only the musical inspiration but also the scent of life to us.
예이츠의 성숙한 시에서 풍경은 이중적인 의미를 구현한다. 풍경은 한편으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자연의 유비적인 이미지 역할을 한다. 또 한편 풍경은 초월을 지향하는 상징의 열쇠로서 기능한다. 그의 시에 제시된 풍경은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본질상 지상의 상관물이 없는 초월적 상징에서 비롯된다. 그의 많은 시에서 풍경은 자연풍경과 감각적인 이미지에 의해 유혹되지만 심층적인 구조의 통일성과 의미는 비자연적이고 초월의 상징에서 나온다. 자연의 이미지는 초월의 상징을 외적으로 현시한 것이다. 하지만 초월의 상징은 현시되기 위해서 자연의 이미지가 필요하며 자연의 이미지에 의존하고 그것에 의해 동반된다.
This essay examines Rembrandt van Rijn(1606-1669)'s landscape etchings, focusing on their characteristic rendition of humans in a minuscule and shady form to embody the theme of rural life. Unlike conventional landscape paintings which foreground shepherds or farmers to convey peace and tranquility of idyllic atmosphere, Rembrandt's etchings of the same theme cover the humans and other objects with a dense hatching, rendering them nearly invisible. The mainstream view maintains that the painter intended to emphasize rural life itself by placing little distinction between humans and surrounding landscapes. This interpretation draws on the painter's personal history that he stayed for convalescence in the suburbs of Amsterdam in the late 1630s. Admitting the validity of the biographical approach as such, this study enacts a different angle to read the Rembrandt etchings in the social contexts. It pays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 Dutches of the mid-Seventeenth Century found in countrysides an emotional as well as physical resting place isolated from ever expanding cities. The trend among upper-classes was to purchase lands in rural areas where they built private resorts. Lower-middle classes, the largest segment of the population, couldn't afford such a luxury, but they sought the grace of nature in literature, meditations, and paintings. Therefore, there was a great demand for the landscape paintings portraying idyllic sceneries.
Rembrandt's landscape etchings were conceived of to meet the demands of the paintings market. Yet they were not just consumer-oriented commodities. A great religious meditator himself, Rembrandt induced the potential viewer to have three phases of artistic experience or spiritual awakening. First, the viewer distances herself from the landscape portrayed on an etching work, but she finds it hard to locate the main motifs. Next, a long hard gaze enables the viewer to see the motifs of lovers, shepherds, and saints, but shortly afterwards she wonders why their shapes are masked by thick hatching lines. Finally, the viewer comes to understand what the style signifies: the humans are part of nature, a mere creation of God. This study concludes that Rembrandt invited his contemporaries, who longed for rural life, to his landscape etchings where he encapsulated his message that the true meaning of natural life is the life of religious devotion.
Capriccio which has emersed in Italy of the 18th century is a new genre of the landscape painting. This genre represents reality, but it is very artificial product correspondingly its concept and character. It's birth place is distributed on various regions in Italy, but the main stage was Rome. Till the middle of the 18th century Rome was the Holy city of the Grand tour, the home of the Neo-Classicism and furthermore the field where archaeology and art history began to be instituted. On such historical situation the Capriccio came out and was recognized as the best popular genre in the visual art. It was favor of the art collection with the antiquity together and reflected the consciousness of the contemporary to the ancient. This study will examine the phenomena in the newly-developed archaeology and with few representative works of Giovanni Paolo Pannini as central term consider the Capriccio and the archaeological connotation. The systematical and institutional archeology which appeared at the age of the Enlightenment, on the contrary to the critical theories at the same time against capriccio, because it was regarded by them as paradoxical and too much sensitive, utilized it as a theoretical method very actively. Some among Historians and archaeologists did it, especially Francesco Bianchini distinguished the capriccio from simple imagination and made it a capacity of the knowledge. And through it he wanted to find out the historical truth. The visual art was influenced and encouraged by such attitude of the archaeology. However it's output spreaded out in various courses. While Giovanni Battista Piranesi, the best known Capriccist of the 18th century, tried to revive the antique through the epical value and his own imagination, Pannini gave priority to the strict historical research. In the such context Panni succeed Giovanni Battista Nolli who made the great map of the city Rome. Their Capriccio profited motive and was inspired by the historians and archaeologists such as Bianchini and Muratori. The Capriccio reflects not only the academic and popular interest for the antique, but also influenced on the upcoming scientific archaeology vice versa. It caused by their reasonable Interpretation and restoration of the antique through the visual medium. Finally as archaeological landscape Pannini's Capriccio is a historical case, in that the Capriccio applied the theoretical method of the archaeology to make art. It served as a momentum for the connotation to the archaeological thought.
Courbet’s landscape was mostly created from 1855 to the four-year period of his exile in Switzerland and occupied the two third of his entire oeuvre. Landscape is important for shaping the artist’s subjectivity, aesthetic, and commercial strategy, but its rich significance has received insufficient attention in scholarship. Many critics and scholars consider Courbet’s turn from rural subjects to landscape as a betrayal of the Realist causes of social concerns and as tailoring to the market demand. This article discusses how Courbet’s landscape paintings achieve the dual goals of “truth to self” and “truth to nature” by departing from the depiction of rural labors and instilling emotional and aesthetic experience and environmental identity. There are three chief modes of representation at work: a positivist observation of material phenomenon and natural evolution; a visual recollection of body experience and local consciousness; an allegory of human condition derived from an understanding of nature as unbound desire and transient existence.
본 연구는 압화의 분야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 고 있는 풍경화 작품에 대해 조사하였다. 2000~2007 년 출품작 중에서 풍경화 80작품을 선택하여 풍경화작 품에 사용되는 식물소재 및 부재료 등을 조사하였다. 풍경화 작품에서 사용된 주요 식물소재의 종류를 조사 한 결과 초본식물 소재의 사용이 67%로 목본식물 소 재의 33%보다 사용되는 비중이 컸다. 많이 사용된 초 본식물 소재는 루모라고사리, 이끼, 아디안텀, 냉이 등 이었고, 목본식물 소재는 편백, 황금편백, 포도나무 등 이었다. 봄 풍경화작품에 많이 사용된 식물소재는 냉 이, 포도나무, 조팝나무 등이고, 여름 풍경화작품에는 편백, 세라기넬라, 아디안텀, 가을 풍경화작품은 기린 초, 편백, 단풍나무, 겨울 풍경화작품에는 포도나무, 백 묘국, 에버라스팅 순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식물 소재의 염색 유무조사에서 거의 대부분이 무염색 식물 소재였고, 일부 염색되는 식물소재는 조팝나무, 냉이, 쉬땅나무, 까치수염 등 흰색의 꽃과 편백, 세라기넬라 등의 잎이었다. 식물소재의 변색 정도에서 사계절 모두 변색이 잘 안 되는 소재가 67% 이상 사용되고 있었다. 식물소재 이외에 사용되는 부재료의 경우 바탕지는 압화전용 종이 65%, 한지 21%, 아크릴판 9% 등의 순이었고, 바탕지 위에 첨가된 부재료는 아크릴물감, 한지, 락카, 솜 등의 순으로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조 사되었다.
This paper investigates the images of landscapes in the poetry of W. B. Yeats and T. S. Eliot, the two greatest poets of the last century. Facing landscapes of the present world and the ancient as well, using his imagination, Yeats maximizes the poetic quality in his poetry. Some of his favorite landscapes, for example, include Innisfree, an islet in Sligo, Thor Ballylee in Coole Park, Byzantium, which delineate clear-cut images of his poetic themes. Either Yeats lived in Sligo with his mother's parents in his childhood, stayed in Lady Gregory’s house in the Coole Park, and owned and lived in the tower, Thor Ballylee in summer; or he admired the old Byzantium that he idealizes in his supreme poems. They serve as optimum metaphors for his poetry, making his poetry simple but rich in its imagery. On the other hand, Eliot focuses on delineating the life of modern man in his poetry by using cities, including London, Boston, Paris, and St. Louis. The people of the cities are being described as faithless and purposeless with their mind void. His depiction of the city further represents the whole modern civilization. The big city is the backdrop of such infertile imagery of modern 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