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a Buddhist gong that is hanging in Dongnakwon of Guryongsa temple located in Wongju city, Gangwon-do. This Buddhist gong belongs to the second type of late Joseon period due to have two ridgelines on the front and the sides. In addition this Buddhist gong has six sankrit character ‘ (oṃ)’. The oldest Buddhist gong with Sanskrit characters which was made during late Joseon period is the Buddhist gong made in 1666 with inscription ‘the Kangxi 5th Year of Jangcheonsa temple, in which the five Sanskrit characters of “oṃ ma ṇi pad me” were arranged in the form of a pentagon. But coming to the state the Buddhist gong made in 1770 with inscription ’Qianlong 35 year of Neunggasa temple, four Sanskrit characters of oṃ was changed into a rhombus form. In the Buddhist gong made in 1837 with inscription ’Daogwang 17 year, six Sanskrit character of oṃ was changed into a hexagonal form. The oldest Buddhist gong with six Sanskrit characters was made in 1837 with inscription ‘Dogwang 17th Year’, however, this Buddhist gong was lost. The manufacturing time of the Buddhist gong with the six Sanskrit characters can be set as the lower limit based on the Buddhist gong with inscription Daogwang 17th Year. However, the type of the Buddhist gong of Guryongsa temple belongs to the second type Buddhist gong of the late Joseon Dynasty, and the seconf type Buddhist gongs were mainly produced in the 18th century. Referring to the Buddhist gong of Sokcho Sinheungsa temple made in 1788, although that of Guryongsa temple had no inscriptions that could know the manufacturing time, it appears that the Buddhist gong with six Sanskrit characters prior to the Buddhist gong with inscription Daogwang 17th Year made by Kim Jong-deuk in 1837 was produced in the late 18th century.
이 글에서는 국립박물관과 불교박물관들이 개최한 불교미술 전시현황을 정리하고, 대중 화에 성공했던 전시 사례로서 ‘창령사 터 나한상 전시’를 분석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불교 미술 전시의 대중화 방안을 제안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불교미술 전시는 1990년대 기획전시의 공간이 확보되고 큐레이터들의 역량이 성장한 이후 학술적으로 깊이 있는 불교미술 전시를 개최할 수 있었다. 2005년 용산 이전ㆍ개관을 기점으로 특별전시 운영시스템을 구축하여 국립박물관의 학예 연구 역량과 국 제적인 위상을 드러내는 불교미술 전시들이 개최되었으며 최근에는 기존 전시 형식을 탈피하 는 기획을 통해 일반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한편, 불교박물관의 불교미술 전시는 사찰의 성보박물관과 불교중앙박물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종교적 위상과 고승 대덕의 업적, 그리고 사찰의 역사와 전통을 강조하고 있다. ‘창령사 터 나한상 전시’는 심오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 나한상을 설치 작품으로 재탄생 시켜 관람객이 불교미술에 빠져들고 사색에 잠길 수 있게 하였다. 다양한 전시연계 프로그램 의 운영과 SNS를 통한 홍보 역시 전시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나한상 전시 분석을 바탕으로 불교미술 전시의 대중화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첫째, 전시 주제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둘째, 전시연출의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셋째, 새로운 디지털 매체를 활용해야 한다. 넷째, 도록을 다양화해야 한다. 다섯째, 연계 교육 프로그 램을 개발하고 운영해야 한다. 여섯째, 다양한 전시행사를 기획해야 한다. 일곱째, 불교미술 의 콘텐츠가 지닌 개성과 역사성을 반영한 ‘캐릭터’를 개발하여 보급할 필요가 있다.
Due to a mistranslation of Sanskrit to Chinese, East Asian Buddhist community misunderstands the original meaning of the fundamental word, ‘sachal(寺刹)’. Sanskrit chattra, a parasol on top of a venerated Indian stupa buried with Buddha’s sarira, became the symbol of majesty. The Indian stupa was transformed into a pagoda in China, and the highlighted parasol on the summit was transliterated into chaldara(刹多羅), an abbreviation for chal (刹), and finally designated the whole pagoda(塔). Sachal consists with lying low monastery and high-rise pagoda. Tapsa(塔寺), an archaic word of temple, is exactly the same as sachal, because chal means tap, pagoda. However, during the 7th century a Buddhist monk erroneously double-transliterated the Sanskrit ‘kshetra,’ meaning of land, into the same word as chal, even despite phonetic disaccord. Thereafter, sutra translators followed and copied the error for long centuries. It was the Japanese pioneer scholars that worsen the situation 100 years ago, to publish Sanskrit dictionaries with the errors insisting on phonetic transliteration, though pronunciation of ‘kshe-’ which is quite different from ‘cha-.’ Thereafter, upcoming scholars followed their fallacy without any verification. Fallacy of chal, meaning of land, dominates Buddhist community broadly, falling into conviction of collective fixed dogma in East Asia up to now. In the Buddhist community, it is the most important matter to recognize that the same language has become to refer completely different objects due to translation errors. As a research method, searching for corresponding Sanskrit words in translated sutras and dictionaries of Buddhism is predominant. Then, after analyzing the authenticity, the fallacy toward the truth will be corrected.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의 문수전에는 문수동자상과 문수보살상이 모셔 져 있다. 문수동자상은 1466년에 조성된 불상이며 1984년에 복장유물이 발 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조선 초기의 저고리인 명주 적삼과 무문사 적삼이 포 함되어 있다. 복장유물들은 일괄 보물 제793호로 지정되었는데 저고리의 문 화재명칭은 ‘명주 적삼’과 ‘생명주 적삼’이었다. 그러나 생명주 적삼의 소재 는 무문사이므로 명칭 변경이 필요하다. 1973년 문수보살상을 개금하는 과정에서 회장저고리 한 점이 발견되었 으며, 이 저고리는 1987년에 ‘세조대의 회장저고리’라는 문화재 명칭으로 중 요민속자료 제219호로 지정되었다. 문수보살상은 1661년에 조성되었는데 불상안에서 발견된 회장저고리는 조선 초기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어 저고리 의 원복장 불상은 문수보살상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문수동자상의 의숙공 주 발원문에 의하면 1466년에 8구의 불보살상(佛菩薩像)과 나한상 등을 조 성하여 문수사에 봉안했다는 내용이 있어 당시 조성되었던 다른 불상의 복장 물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회장저고리가 조선 초기의 저고 리이기는 하나 세조와의 관계가 확실한 것은 아니므로 ‘세조대의 회장저고 리’보다는 ‘회장저고리’로 변경하는 것이 합당하며 출처에 대한 보충 설명 또한 필요하다고 본다.
한국의 사찰에는 전통이 오래되었든 그렇지 않든 경판이나 책자가 전 해지고 있으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책자의 하나가 경중왕(經中王)으로 신앙 되는 『법화경』이라고 할 수 있다. 『법화경』의 ‘수지(受持)ㆍ독송(讀 經)ㆍ송경(誦經)ㆍ해설(解說)ㆍ서사(書寫)의 오종법사(五種法事) 사상은 불 교의 전통 의례 문화를 산출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수지하여 독송하고 송 경하며 해설하고 서사하는 신앙 문화는 한국불교의 법석의례(法席儀禮)로 서 17세기 중엽을 지나면서 영산작법(靈山作法)→영산재(靈山齋)라는 독 특한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무형문화로 발전하였다. 영산재는 망자의 칠칠재(七七齋)를 위해 『법화경』을 독송하고 명부의 시왕(十王)에게 권공하는 의례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혼령을 모시 는 시련(侍輦)의식, 혼령을 맞이하여 법문하는 대령(對靈)의식, 혼령을 목 욕하는 관욕(灌浴)의식, 저승돈을 만드는 조전(造錢)의식, 옹호도량(擁護 道場)를 청하는 신중작법(神衆作法)의식, 괘불탱화를 모시는 괘불이운(掛 佛移運)의식, 영산작법의식, 재승(齋僧)의 식당작법(食堂作法)의식, 명부권 공(冥府勸供)의식, 혼령에게 제사를 올리는 관음시식(觀音施食)을, 끝으로 봉송(奉送)의식 순서로 진행된다. 영산재에는 전통의 소리인 범패와 신업 공양(身業供養)이라는 작법무(作法舞)가 동반된다. 한국의 사찰에 『법화경』이 소장 전승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오종법사 를 봉행하고, 아울러 세계 인류의 無形遺産인 영산재와 같은 전통의 불 교문화를 설행(設行)하기 위해서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미상의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은 중국에서 찬술된 위경(僞經)으로 알려져 있으며, 돈황본과 중국, 한국, 일본에 수많 은 이본(異本)들이 존재한다. 이 경이 처음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통일 신라 때로 추정되며 고려와 조선시대에 활발히 유통되었다. 수많은 이본 중 정조대에 용주사에서 간행된 판본이 가장 완성도가 높으며 언문으로 주석이 되어 있어 불교의 효사상과 불교 전파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경전은 부모에 대한 효(孝)를 강조함으로써 유가(儒家)로부터 불교는 사회윤리와 도덕을 무너뜨리는 종교라는 비난에 대처하고 사대부와 서민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었던 경전이다. 이 경에 나타난 효사상은 연기(緣起)와 윤회(輪廻) 및 인과응보(因果應 報)를 바탕으로 한다. 부모의 한없는 자애(自愛)와 자식의 자발적 보은(報 恩)을 강조하며 부모 자식 간의 호혜적 평등과 보은의 무한성을 특징으로 하는 불교의 효사상은 유교의 남성 중심적이고 수직적이며 당위성을 강조하는 효사상과 대비된다. 불교에서는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곧 효행으로 이를 통해 부 모를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진정한 효이다. 불교의 효는 현생의 부모뿐만 아니라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의 모든 부모와 널리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대효로써 한층 승화된 효의 차원을 제시하고 있다.
중국 陝西 臨潼縣에 위치한 慶山寺는 1985년에 우연히 地宮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곳에서 출토된 <上方舍利塔記>를 통해서 唐 開元 29년(741)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산사 지궁에서는 금은제 舍利具를 비롯하여 淨甁, 錫杖, 香爐, 高足杯, 유리병 등의 다양한 기물이 모두 129점이 출토되었다. 그중에 황동으로 제작된 人面紋胡甁은 재질뿐만 아니라 기형과 도상이 중국 전통에서 벗어난 이질적인 요소가 농후하여 외래품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이 호병의 기형은 구연부가 새 부리형으로 되어 있고 손잡이 상단이 구연부로 바로 연결되며 짧고 두꺼운 권족의 형태에서 소그드 계통의 금속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호병의 동체에 여섯 개로 된 인면상은 종종 힌두교의 스칸다 상이라고 해석되기도 하지만 여러 인종과 종교가 혼합된 인도 서북부 사람들의 얼굴을 모방하여 표현했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경산사의 인면문 호병은 황동으로 제작된 소그드 계통의 금속기로 그 제작지는 인도 문화와 소그드 문화 그리고 불교문화가 융합된 인도 서북부 지역일 것이다. 그리고 이 호병은 개원 29년(741) 4월 8일에 4년간의 경산사 중건을 완성하고 성대하게 열린 불교의례에서 공양구로써 사용된 후에 특별히 매납되었던 것이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개명산(開明山)에 위치하는 청련사(靑蓮寺)는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의 대표 사찰이다. 청련사는 원래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 988번지 종남산(終南山) 무학봉(無學峯) 기슭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다가 근ㆍ현대기 불교 종단의 갈등과 해결책으로 2006년 왕십리에서 양주로 이건(移建) 결정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2010년 6월부터 경기도 양주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청련사에 봉안된 불화는 12건이 현전되고 있다. 현재까지 청련사 불화에 대해서는 학위논문을 비롯한 여러 보고서에 일부 소개된 바 있다. 이 글은 필자가 2017년 청련사 소장 불화를 전수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19세기부터 현재까지에 이르는 청련사의 역사를, 불화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청련사에 소장된 불화는 1866년 <치성광여래도>로부터 1970년대 <팔상도>에 이르기까지 주로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조성된 불화가 주를 이룬다. 그 가운데 가장 이른 연대의 기록을 보이는 <치성광여래도>는 화기에 복장시주(服藏施主)로 두 명의 상궁 이름이 확인된다. 이어 1880년에 조성된 <아미타불회도>, <현왕도>, <감로도> 세 점은 여러 상궁의 후원 속에 조성된 불화로 의미가 있다. 짜임새 있는 구도, 세밀한 필치, 표현 기법 등에서 불화승 축연의 기량을 살필 수 있는 불화로도 주목된다. 이 외에도 민간인들이 시주와 후원 속에 조성된 불화도 봉안되어 있다.
청련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청련사지(靑蓮寺誌)」에는 1849년 중창에는 시주를 권면하는 상궁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어 5년 뒤에는 왕실의 인척인 홍현주와 영의정을 역임한 권돈인이 불사를 시주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불화의 조성 기록에서 1880년 조성 불화 이외에 상궁이나 왕실의 인사가 후원 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청련사는 왕실 인척이나 당대의 권력가, 왕실과 관련된 상궁들의 불사(佛事) 후원을 집중적으로 받았으며 불화와 불전(佛殿)의 구조상 왕실의 원당으로서의 특징을 보인다.
청련사 불화는 19세 말~현대에 이르기까지 청련사의 역사를 고증하는 중요한 자료일 뿐 아니라 19세기~20세기까지 불화의 도상과 양식적 특징, 후원자와 화승을 총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 중의 하나로 의미가 깊다.
본 논문은 양주 청련사의 조선후기 불교조각 가운데 1670년에 조성된 대웅전의 아미타삼존상과, 1651년에 조성된 원통보전의 관세음보살상을 다룬 것이다. 이 두 조각상은 2017년 2월과 3월 두 차례에 걸친 복장 조사를 통해 제작 연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대웅전의 아미타삼존상은 1670년(강희 9, 庚戌)에 수조각승 녹원(鹿苑)을 비롯한 인종(印宗)ㆍ도운(道云)ㆍ유경(唯敬)ㆍ사운(思運)ㆍ성심(性諶) 등 6명이 참여해 조성한 17세기 후반의 불교조각으로, 확실한 조성 연도와 조각승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청련사 아미타삼존상은 1670년에 조성된 이후 1913년과 2000년에 개금불사가 이루어졌으며, 1940년에 복장품 일부는 도난되었다.
청련사 관세음보살상은 1651년(효종 2, 辛卯)에 전라도 흥양현 팔영산(八影山) 지장암(地藏庵)의 좌협시보살로 조성된 사실이 조성발원문에 기록되어 있다. 조성발원문의 내용을 통해 아미타삼존상 가운데 좌협시보살로 조성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1940년에 개금ㆍ중수하였던 원문(願文)이 발견되었다.
청련사 원통보전의 관세음보살상이 어떠한 이유로 청련사로 이안(移安)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조선 말기에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왕실 관련 사찰에 여러 지역의 불상들이 이동된 경우가 많았던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양주 청련사의 관음보살상도 화계사와 흥천사처럼 왕실과의 인연으로 고흥능가사의 지장암에서 청련사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While going into troops for writing in the vignette style(小品文) in opposition to the Classical Chinese(古文), Yi Ok stopped by Songgwangsa Temple in Wanju. The things he felt during this stop were recorded in the Temple Chapter ( 寺觀) written in 1795. Therefore, the present dissertation evaluates the Songgwangsa Temple of the time based on this Temple Chapter . Data in the Temple Chapter draws attention to the fact that it records the layout of the temple in detail. Thus the study was able to confirm the change in layout by reviewing relevant records about repair. This reveals that the form of layout in general has been maintained although there were changes involving the relocation of the buildings and their names. Furthermore, the original Buddhist building was changed to a quarter for the monks. Also, in terms of layout after the 18th century, there are frequent name changes of the Myeongbujeon(冥府殿) and Nahanjeon(羅漢殿). After two repairs, in order to find the appearance of a Daeungjeon(Main Buddhist hall) with a two-storied structure of five bays at the front, the study evaluated the Geugnakjeon at Muryangsa Temple and the Daeungbojeon at Magoksa Temple. The evaluation revealed that the ‘Jeol’ used in the Temple Chapter were small pillars erected on a ridgepole just like the Geugnakjeon at Muryangsa Temple, and that the angle rafters were installed to corner bays in rectangular form. The intellectual Yi Ok left behind invaluable architectural data that reveals the Songgwangsa Temple of the 18th century.
려말선초 혼란기에 불교는 타락하고 활발했던 조영의 분위기는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 사찰건축의 명맥을 유지된 몇 가지 중요한 원인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건물짓는 기술자가 바로 승장 대목 자신들이라는 점과 혼란기를 틈타 엄격함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스럽게 영조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그대로 건물에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사찰 전각 측면공포에 대한 등간격배열방식이다. 그 동안 이 문제에 대해 심도갚은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규정짓는 자세에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보다 심도있는 연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고찰되었다.
삼척의 불교문화는 선덕여왕 11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오대산에 들어가 관음보살의 聖蹟을 찾던 중 두타산에 이르러 흑련대를 처음으로 창건하여 현재 삼화사의 시초가 되었다는 삼화사사적, 이 후 선종이 전국적으로 퍼진 통 일기에 범일국사가 강릉의 굴산사를 세운 이래 삼척지역에도 불적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아 신라 하대에는 유입, 전파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불교문화의 전래 이후 고려시대 말까지 호국불교로 크게 발전하였고, 강원도의 사찰의 불교는 더욱 신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 강원도에 분포하는 불교유적, 유물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 지 않아 전반적으로 불교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본 글은 강원도 삼척시·동해시·태백시를 중심으로 문헌조사를 통해 폐사지의 현황을 살펴보고, 현지조사를 통해 사지가 유존하거나 출토된 석조물, 와편 등을 함께 검토하였다. 문헌기록과 현지조사를 통해 삼척·동해·태백 내에서 폐사지는 현재 총 61개가 확인되었다. 삼척 34개소, 동해 11개소, 태백 16개소이며, 연구소에서 확인한 폐사지는 삼척 4개소, 동해 3개소, 태백 5개소이다. 현재 삼척지역의 폐사지는 완전히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사지로 추 정되거나 구전되는 곳을 확인한 결과 유구나 유물이 확인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자연재해 및 현상변경으로 등으로 인하여 명확히 소재지를 파악할 수 없는 곳들이 요소에서 확인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 폐사지 조사를 통하여 시·발굴된 유적은 흥전리사지, 지상사지, 본적사지 등이 있다. 그 중 최근 흥전리사지가 시·발 굴조를 통하여 건물지, 석축, 탑지 등을 확인하였고, ‘국통’명 비편, 청동제 장식, 철제 초두 등 통일신라시대의 불교문화를 확인하였다. 따라서 종합정비계획을 수반한 정밀발굴조사가 이루진다면 인근의 폐사지와 비교연구는 물론 강원도의 불 교문화를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