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국어 한자어 연구』(노명희 2005)는 한국어의 한자어 파생형태론을 체계 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이 책에서는 한자어 기능단위를 중심으로 관형사와 접두사, 의존 명사와 접미사 사이에 놓인 접두한자어와 접미한자어 등 한국어 한자어들이 어떠한 양 상으로 실현되고 있는지를 보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단어와 접사 사이의 범주로 ‘어근’ 이라는 개념을 강조하였는데 이 책에서의 어근을 크게 한국어 단어 형성에서 적극적 역 할을 하는 활성어근과 한국어 단어 형성에서 공시적 역할을 하지 못하는 비활성어근으 로 나누고 활성어근은 다시 2음절의 강활성어근과 1음절의 약활성어근으로 구별하여 그 기능을 중심으로 접사성의 정도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의 근본적인 목적은 한 자어 파생 형태론의 체계를 세워 보자는 것이었으나 한자어가 지닌 복합적인 성격과 용 법상의 유동성 때문인지 생각처럼 뚜렷한 경계를 짓지 못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한국어 한자어의 연구를 위한 많은 주제들이 확장되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 았다는 점은 이 책의 분명한 장점이다.
본 논문은 예이츠의 작품의 춤의 모티브, 특히 “어신의 방랑”과 다른 시 들에서의 춤을 연구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예이츠의 시와 일본의 노극 『천의(天衣)』를 비교한다. 이 논문의 의의는 일부 평자들이 잘못 주장하듯 노극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예이츠 작품을 분석하는 근거로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본 연구는 파운드와 펜놀로사가 번역한 2편의 노극 『천의』와 『사랑의 마술봉』을 다루는 시리즈 중 첫 번째 연구이다. 본 논문은 예이츠가 노극을 접하기 전과 후의 춤의 이미져리를 포함하는 작품을 다룬다. 따라서 본 연구와 차기의 연구는 예이츠가 얼마나 노극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영향에 불구하고 노극에서 출발하였다고 하더 라도 그의 작품이 여전히 가치가 있는 지를 규명할 것이다.
예이츠의 일본의 노드라마와의 조우는 1916년『매의 우물』을 쓰게 하는데, 이 작품에서 그는 시극에서 직면한 여러 문제와 자신의 시적 문화주의의 애매한 표현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다. 노드라마를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에 예이츠는 대중적 연극개념에 반대한 자신의 미학적, 정치적 이상을 담아 재창조한다. 예술적으로, 예이트는 “극의 형식을 발명”해내는데, 이 형식은 반연극적, 반사실주의적 화법을 실행할 뿐 아니라, 일반대중을 포용하기를 거부하는 친밀한 극을 만든다. 정치적으로, 예이츠의 시적문화주의는 노에 영감을 받은 극에 적합한 신비주의철학과 결합한다. 시극은 이미지의 집중이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의식이어야 한다고 예이츠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공연 리추얼이 야기하는 주술적 상태는 부정적 양상을 초래한다. 매의 우물에서, 쿠훌린의 마지막 영웅적 행위는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주술의 결과이다. 이렇게 이 극은 초기극『캐스린 니 훌리한』에서 보이는 문화적 주술의 시학으로서의 문화주의의 지속성에 우리의 관심을 끌게 한다.
이 연구는 『매의 우물에서』에 예이츠의 극작품의 특징과 노극의 요소가 어떻게 재현되어 있는지를 분석한다. 더 나아가 이 연구는 예이츠의 극작품과 노극과 의 차이점을 분별하면서 지혜의 추구에 대한 그의 열망을 규명한다. 그는 노극을 접한 이후에 초기 극작품들과 아주 다른 새로운 극작품을 창작한다. 그의 극작품은 노극의 기본원리를 이용하였으나 아일랜드의 전설적인 영웅들을 작품에 등장시켜서 아일랜드 문학의 세계화를 창조한다. 더욱이 그는 쿠헐런과 같은 아일랜드 영웅들을 『매의 우물 에서』에 등장시켜서 소포클레스와 셰익스피어의 전통을 이어받는 세계적인 극작가로 탄생한다. 요컨대 그는 그의 극작품을 통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문화의 중 요성을 끊임없이 자각하여, 삶의 지혜로 활용하도록 하고 있다
1913년부터 1916년의 기간 동안 예이츠와 파운드는 영국 서섹스의 애 쉬다운 포리스트에 소재한 조그만 카티지에서 함께 겨울을 보냈다. 이른바 “스톤 카티 지 영혼의 워크샵”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이 문학적 공동작업은 모더니즘 운동의 효 시가 되었다. 그들의 문학적 공동작업의 결과 평온한 달의 부드러운 침묵의 산문집 과 해골의 꿈이라는 극이 탄생하였다. 전자는 1925년판 비전의 초판이전에 등장 한 예이츠의 시학의 가장 체계적인 이론서라 할 수 있고, 1917년 판 해골의 꿈은 일본의 니시키기와 같은 노극을 본격적인 모델로 하여 탄생한 것이다. 두 작품 다 예 이츠의 극이론과 시론의 이면에 자리잡은 열린 영혼의 시학의 미학적 선언문을 제시 하고 있다. 니시키기와 모토메주까 등의 노극을 모델로 예이츠는 그의 후기 극에서 “죽은 자의 환몽”의 극적 재현을 창안하게 된 것이다.
노신과 이광수의 1910년대 유학 시절의 체험과 이후 그러한 체험이 소설에 어떻게 반영되어 나타나는지를 몇 가지 공통되는 큰 주제 아래 그 차이와 동질성을 살펴보았다. 이번 발표문을 일단 마무리하면서 차후 보완해야 하고 또한 이번 논문과 연결하여 새로운 논문의 주제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필자 스스로 생각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우선 이번 발표문을 보완하는 데 있어서 좀 더 실증적인 자료(지금 현 상황에서 사실 유학 시절의 새로운 자료를 찾는 것이 어려워 보이긴 하지만)를 찾고 분석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새로운 자료를 찾는 데 초점을 두기보다는 그들의 유학 시절의 독서 체험(그에 대한 목록이나 그 영향 관계에 관한 논문은 적지 않지만)과 문화 체험(이에 대해선 좀 더 현지답사라든가 실증적인 자료 발굴과 분석이 앞으로도 있을 수 있다고 보며 그러한 작업을 차후 해나갈 계획으로 있다)에 대한 분석도 보충이 되어, 그들의 유학 체험에 대한 단순 비교가 아니라 근대 동아시아 지식인의 근대 문명에 대한 인식을 통한 동아시아 근대 담론의 형성이라는 큰 주제에 보다 적절한 소논문을 완성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노신과 이광수 두 작가 모두 유학 시절 문학에 뜻을 두었고, 그 문학을 통해 민족에게 도움이 되는 문인이 되고자 하였다. 그 유명한 환등 사건, 노신을 의학에서 문학으로 결정적으로 옮겨가게 만든 그 사건이나 이광수가 메이지 학원 시절, 러일 전쟁의 경험과 톨스토이주의에 경도하면서 민족 계몽으로서의 문학에 눈을 뜨고 1차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기차칸에서 겪었던 사건으로 더욱 민족 계몽을 자신의 책임으로 느끼는 사건 등에서 근대 한국과 중국을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문인이었던 두 사람의 공통적 운명과 시대 상황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새삼 떠오른다. 중국문학 내에서의 노신의 초기 사상에 관한 연구나 한국문학에서의 이광수의 초기 사상 연구는 상당히 진척이 되어 있으나 두 작가의 사상에 관한 비교 및 그를 통한 동아시아 근대 지식인의 근대 인식에 관한 총체적 연구는 되어 있지 못하다. 따라서 차후 연속 연구 과제로 두 작가의 유학 시절 체험과 초기 논설을 중심으로 한 비교 분석을 하고자 한다.
Yeats held a life-long interest in Japanese culture, and employed the images, knowledge and inspiration he gained from Japan in many of his literary works. On the whole, it was the Japanese literary form that was most significant in his development as a writer. It was through the translations of Ezra Pound and Ernest Fenollosa that Yeats became acquainted with Noh, the medieval Japanese drama. It is generally agreed that Yeats’s encounter with Noh marked a turning point in his career as a dramatist. The Noh led him to create “a form of drama, distinguished, indirect and symbolic...an aristocratic form.” In “Note to At the Hawk’s Well,” Yeats writes:
I have found my first model—and in literature, if we would not be parvenus, we must have a model—in the ‘Noh’ stage of aristocratic Japan.
From this statement, we can see how significant the Noh-form was to Yeats in his development as a playwright. When Yeats was first introduced to Noh, he immediately perceived affinities with Irish legends and beliefs. The Noh was not something completely new or alien to Yeats. It was the discovery of an ideal, an ideal form for him to express his perennial themes of the tension between the physical and spiritual worlds. Yeats’s Noh-inspired plays are often categorized as “dance plays” and we can see that “dance” was an important symbol which Yeats developed through his experience with Noh. Yeats wrote in his “Introduction” to Certain Noble Plays of Japan that it was a Japanese dancer, Ito Michio, who inspired him to write his new play, At the Hawk’s Well (1916). In Noh, the dance which is usually danced by a supernatural figure, is placed at the centre. Here, the supernatural dominates the stage and the action develops toward a moment of enlightenment. Yeats precisely points out this fact and writes that in his new play, instead of “the players working themselves into a violence of passion...the music, beauty of form and voice all come to climax in pantomimic dance.” However, since Yeats intended Cuchulain as the central figure of At the Hawk’s Well, the theatrical effect of the dance had to differ from that of Noh. Another characteristic of this play is that it dramatizes the ‘transformation’ of the Guardian of the Well, the role which Ito Michio played, through spirit possession. This change in personality is conveyed by means of a change in costume(she throws off her cloak to reveal a dress suggesting a hawk). This is a method resembling ‘monogi(物着),’ one of the most important dramatic conventions of Noh. Yeats explores this device again, in The Only Jealousy of Emer(1919), another dance play modeled on Noh, but this time using different masks to show the change in personality. Yeats’s interest in this motif of spirit possession eventually led him to write The Words Upon the Window-Pane(1930), a play where he dramatizes a seancē. Here, the dramatic tension is concentrated mainly on a supernatural manifestation through the ‘protagonist’ who is a professional spiritual medium. In this paper, I have discussed Yeats’s relationship with Noh through a detailed analysis of At the Hawk’s Well. In this play, we can see many aspects of Noh. The simplified stage, the musicians, the mask, the dance, the use of a square blue cloth to represent a well; these are characteristics reminiscent of Noh. However, we must note that this play was not merely an imitation of Noh but a completely new form of creative writing. Richard Taylor indicates the influence of Yoro, a felicitous Waki-noh, or God Play on this play. A comparison of these two plays reveal that Yeats had no intention of following the Noh paradigms faithfully. However, the inspiration he gained from Noh opened a wide range of dramatic experiments enabling him to write a sequence of dance plays. In later plays such as The Words Upon the Window-Pane and Purgatory, Yeats succeeded in achieving a dramatic effect closer to that of Noh.
일본을 대표하는 고전연극 노(能)가 서양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일본이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19세기말부터였다. 일본과 서양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노는 번역을 통해 서양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 때 소개된 많은 번역 가운데 특히 유명한 것이 페놀로사․파운드의 번역이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은 학문적 성과를 토대로 한 정확한 번역과는 거리가 멀지만, 시극(詩劇)으로서의 노의 문학성을 알리는데 그 어느 번역집 보다 기여한 바가 크다. 노는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 간아미(觀阿彌 1333-1384), 제아미(世阿彌 1363-1443) 부자(父子)에 의해 대성되었다. 이들에 의해 노는 종래의 민간예능의 제요소들을 흡수하면서 당시 지배계급의 미의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상징적이며 귀족적인 극예술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제아미는 무겐노(夢幻能)라고 하는 노 특유의 극형식을 창출하였는데, 그 후 많은 작품들이 이 형식을 빌어 쓰여지게 되었다. 무겐노의 극구성을 보면, 정처 없이 떠도는 승려가 긴 여행 끝에 어느 마을에 도착하는 것으로 극은 시작된다. 이 승려 앞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 또는 남자가 나타나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화자(話者)가 바로 이야기 속의 주인공임이 밝혀지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일단 모습을 감춘 주인공은 극의 후반에서는 생전의 모습으로 나타나 과거를 재현하고 춤을 춘다. 현세에 대한 미련, 추억들이 이들의 이른바 성불(成佛)을 막고 이승에서 떠돌게 하는 것이다. 승려는 이 영혼이 이승과의 인연을 끊을 수 있도록 염불을 드리고 이에 유령은 성불하게 된다. 작품에 따라서는 유령이 끝내 성불하지 못하고 영원히 이승을 방황하는 채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파운드의 소개에 의해 서양에 널리 알려지게 된 노는 많은 예술가들의 주목을 받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예이츠는 노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그의 작품 속에 노의 주제나 기법 등을 수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예이츠가 말년에 이르기까지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다름아닌 무겐노였다. 과거와 현재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자연계와 초자연계의 교류를 그리는 무겐노는 예이츠의 예술적 상상력을 자극하여 그가 오랜 기간 모색해왔던 아일랜드의 전승․신화의 세계를 극화하는 방법에 새로운 단서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본고는 파운드와 예이츠가 무겐노 형식으로 쓴 작품 「트리스탄」(1916)과 「연옥」(1939)을 중심으로 노가 이들의 작품에 끼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본 연구는 鄭載圭(老柏軒, 1843-1911) 시세계에 나타난 학문정신을 탐구하 기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는 영 남 기호학파의 문학세계, 그 일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재규의 삶과 문학에 저류하고 있는 것은 강한 호학정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활발한 저술활동과 강학활동은 모두 여기에 기반한 것이라 하겠다. 정재규의 시세계에는 수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이것은 그의 시세계가 학문적 연대를 통해 구성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창작활동은 학문을 위해서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재규의 학문 내용은 그 중심에 율곡학이 있었고, 그 주변에 남명학과 퇴계학 이 있었다. 이것은 그의 학문이 기호학에 연원을 두면서도 영남학으로 열려 있 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재규의 시세계에 등장하는 자연은 성리학적 이념과 굳건히 결합되어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시세계는 자연과 문학과 성리학이 일체를 이루며 작품군을 형 성할 수 있었다. 사물에 대한 이념적 인식과 그것의 시적 형상은 정재규의 시작 법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관념성으로 편향되어 있 다고 하기는 어렵다. 유례없는 위난의 시대를 맞아 위기의식에 입각하여 작품 을 창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복령과 단발령이라는 심각한 문화적 위기를 경 험하면서 明末 절의를 지키며 죽어간 중국 선비들을 시로 칭송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위정척사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정재규 시세계의 의미구조는 단순하지가 않다. 호학정신에 바탕하여 학문적 연대를 통해 작시활동을 전개하면서 선현의 도학을 계승하고자 했고, 또한 다 양한 사물에서 이치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것이 관념으로 흐를 수 있다 는 자각 하에 당대를 극도의 위기적 현실로 인식하면서 사회적 실천을 추구하 고자 했다. 그러나 정재규의 시는 실천정신과 결합되어 있다기 보다 성리학적 이념이 강하게 나타나는 작품이 우세하다. 이것은 그의 시세계가 전통적인 세 계관에 입각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자 성리학을 묵수하면서 현실대응을 시도한 당연한 결과라 아니할 수 없는데, 그의 시세계에 이러한 점이 확연히 드 러나 하나의 특징과 한계를 이룬다.
花林洞, 尋眞洞, 猿鶴洞 등 安義三洞은 예로부터 그 풍광이 아름다운 데다 뛰 어난 문인들의 자취가 서린 곳이기에 그 이름이 높았다. 심진동의 長水寺에는 노진이 젊은 시절 독서를 하였고 특히 <遊長水寺記>를 남겨 심진동의 이름을 후대에 길이 전해지게 하였다. 이 논문은 盧禛의 <遊長水寺記>를 중심으로 하 되, 杜慧의 <安陰長水寺與龍湫菴創修源流興廢錄>, 明察의 <安陰縣德裕山長水 寺大雄殿重營記>, 應允의 <德裕山尋眞洞記> 등의 새로운 자료를 통하여 장수 사의 역사를 밝혔다. 장수사는 나말여초 覺然이 창건하여 여말선초 無學이 중 창하였으며, 그 후 조선 초기 다시 朴習에 의하여 중창되어 그 집안의 원찰이 되었다. 그 후 1680년 화재로 장수사는 전소되고, 지금의 장수사 일주문이 있 는 곳으로 옮겨지었다. 1721년까지 건물이 하나씩 복원되어 大雄殿 외에, 八相 殿, 斗月寮, 滿月堂, 明鏡堂, 曺溪門, 天王門 등이 차례로 조성되었다. 또 1725 년 원래 장수사가 있던 자리에 용추암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장수 사에 노진이 유람을 하고 <遊長水寺記>를 지어 세상에 그 이름을 널리 알렸다. 조선 후기에는 沈錥, 南公轍 등 뛰어난 문인이 장수사를 소재로 한 시문을 제작 하였다. 이러한 글로 인하여 장수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이 오늘날까지 전하 게 되었다. 오늘날 장수사는 일주문만 남아 있고 근래에 세운 용추사가 그 명성 을 대신하고 있는데, 이러한 장수사를 빛낸 옛글을 통하여 장수사의 예전 모습 을 즐길 수 있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