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적인 관점에서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 구세군 창시자인 윌리엄 부츠, 그리고 독일의 디아코니아를 통한 사회개혁의 핵심적인 인물로서 비헤른 목사 등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이 알려졌 고, 이들에 관한 연구는 많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대단한 선교적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영국과 유럽교회에 큰 도전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찰머즈(Thomas Chalmers, 1780-1847)목사의 근린운동(Neighbourhood Movement)은 선교 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의 업적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찰머즈 목사의 근린운동은 교회가 디아코니아적 선교사 역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정책적 지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이 논문에서는 찰머즈 목사의 성장배경 과 그가 전개한 근린운동의 배경, 그리고 근린운동의 정책과 방향성뿐 만 아니라 그 근린운동을 통한 결과 및 영향성에 대하여 고찰함으로써 효과적인 디아코니아 선교사역을 위한 시사점을 제공하려고 한다.
인터넷투표는 전자정부 패러다임, 법원의 전자 소송 제도 도입 등과 같이 공공서비스와 IT기술을 접목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투표에 있어서도 IT 기술을 활용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논의이다. 인터넷투표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 데, 투표소 전자투표(Poll Site E-Voting, 이하 PSEV)방식과 원격 인터넷투표(Remote Internet E-Voting, 이하 REV)방식이 그것이다. 미국, 일본, 에스토니아 등 해외의 경우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인터넷투표의 활용이 시도되고 있으나,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공직선거에서는 이를 도입하지 않았고, 당내투표나 민간의 주주총회 등에서 활용되고 있다. 인터넷투표의 경우 투표율의 제고나 선거의 사회적 비용절감 등의 차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지만, 선거조작이나 해킹 등을 비롯한 보안의 문제, 직접선거 및 비밀선거의 원칙 침해나 유권자 의 개인정보 유출 등의 프라이버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이상 그 도입에 앞서 기술적, 법제 도적 보완이 우선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이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술적 차원에서 선거인명부 확정, 본인확 인, 투표 및 개표에 걸친 선거절차 진행과정에서의 정확성 확보와 프라이버시 보장을 위한 장치마련 이 요구된다. 또한 법제도적 차원에서 공직선거법 등 관련법령에서 인터넷투표의 개념정의를 시작으 로 개표방법ㆍ인터넷투표가능 PC의 운용 등 인터 넷투표 실시에 관한 세부적 사항을 규정해 두어야 하며 이는 유권자의 기본권으로서의 선거 4원칙인 보통ㆍ평등ㆍ직접ㆍ비밀 선거 원칙 보장과 유권자 전자등록에서의 개인정보의 보호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해킹이나 네트워크의 장애를 발생시키는 부정행위를 억제할 강력한 처벌규정 및 투표결과에 대한 쟁송 수단의 마련 역시 필요하다. 인터넷투표의 구체적 도입에 있어서는 국민적 합의를 이루기 위하여 처음에는 PSEV 방식과 기 존의 종이투표를 병행하는 방식으로 시작하여 각종 제도 마련 및 기술적 위험요소의 제거를 통해 단계적으로 REV방식으로 옮겨가는 한편, 재보궐 선거나 지방선거로부터 시작하여 총선 및 대선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그 도입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 글은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 이야기가 의도하는 바를 밝히려 하는 것이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요한계시록 기록 당시의 역사적 상황 이해와 요한계시록 11장에 나타난 문학적 상징에 대한 이해에 집중하여 요한의 문학적 ‧ 신학적 의도를 찾고자 하였다.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 속에서 요한이 지켜내려고 했던 것은 독자들의 충성스러운 신앙이었다. 따라서 요한은 두 증인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의 믿음을 강화하고 독자들에게도 예수와 동일시되는 충성스러운 증인이 되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신실한 선지적 증인의 패러다임을 제공하는 이러한 문학적 ‧ 신학적 고안은 박해와 같은 고난과 죽음의 정황 가운데 있는 독자들에게 하나님이 미래에 대해 가진 목적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에 대한 독자들의 관점과 태도를 형성하여 그러한 하나님의 목적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요청한다. 요한은 독자들에게 두 증인 이야기라는 상징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에 능동적 참여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요한계시록 11장의 문학적 가치와 신학적 가치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공학적 안전설비 공기정화계통의 규제지침인 Reg. Guide 1.52(Rev.3)의 변경사항중 성능시험과 관련 한 운전가능성 시험시간 단축, HEPA 필터 현장누설시험용 시험물질 변경 및 활성탄 성능시험 Methyl Iodidie 투과허용율 상향 변경을 영광 5,6호기에 적용하고자, 모사실험장치와 현장 설비를 활용하여 기술 적 타당성을 확인하는 실험을 수행하였다. 10시간 이상의 장시간 운전가능성 시험을 통해 계통내 습분을 제거하여도 시험후 1∼4일만에 회복됨을 확인하여 운전가능성 시험은 기기적 운전가능성 점검에 적합한 매월 15분 이상의 시험을 수행하는 것이 타당함을 확인하였다. HEPA 필터 현장누설시험용 시험물질 변 경을 위해 DOP와 PAO의 에어로졸 입자크기, 발생량, 누설인지도를 비교한 결과 PAO는 원전에서도 DOP 대체시험물질로 사용 가능함을 확인하였다. 베드깊이 4 인치 이상의 활성탄여과기에 대한 Methyl Iodide의 투과율 허용치가 0.175 %에서 0.5 %로 상향 변경된 것은, ASTM D3803(1989)으로의 활성탄 성 능시험 방법 변경에 따른 것으로서, 30 ℃ 상대습도 95 %에서의 Methyl Iodide 투과허용율 0.5 %가 사용 중 활성탄의 성능을 시험하기에 충분히 보수적인 시험방법임을 확인하였다. 본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영 광 5,6호기는 인허가변경을 완료하였다.
Rev. Kil Sŏn-chu was amongst the first generation of indigenous Protestant Christian leaders. In 1897 he was converted to Christianity at the age of 29 and served as a lay Christian leader while he took a course of study intended for native local preachers. In 1907 he was ordained as a pastor and began preaching in the Changdaehyŏn Church, the central church in P’yŏngyang. In Korea, until recently he is known as the evangelistic pastor who stuck to saving soul and was indifferent to the national issues like Korean independence and cultural changes. In this paper I try to show that Kil Sŏn-chu was not only a devout evangelistic pastor but also was concerned with issues related to Korean independence and cultural changes. This study is divided into the five sections. Following the introduction, the second section gives a historical overview of Korean society at the time in which Kil Sŏn-chu lived, and offers his vitae. The third section deals with the ways that he was conscious of the Korean nation and expressed his willingness to devote himself to the Korean nation in his political and cultural activities. The fourth section traces the motives behind the development of eschatological worldview or faith by Kil Sŏn-chu and thereby explains the way his patriotic concern with the Korean nation was reflected in his eschatological faith. In Kil Sŏn-chu’s life there are shown three different aspects inthree subsequent periods. The first period is from his conversion to Christianity to before his decision to save his soul. He identified the Korean nation as people bound together by a shared history and state. He was engaged in political activities for Korean independence. The second period is from the decision to save his soul to before he was in prison. He was interested in the cultural elementsof the Korean nation. He considered culture as the means for the Korean nation to survive or exist further in this world. The third period is from his release from prison to his death. In his Eschatology, he developed his own concept of eschatology and propagated the gospel of Jesus’ coming being followed by the millennial and eternal world.
이 연구는 한국 도시산업선교운동의 선구자 조지송의 생애, 산업선교정 책, 그의 노동자선교 신학 사상을 고찰하고, 그의 활동이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서 어떻게 보편성을 획득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조지송은 보수 적 친미 반공적인 신앙을 가지고 남한에 온 피난민이었다. 그는 산업전도 를 하면서 산업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비인간적으로 저임금과 장시간 노 동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현실을 발견했고,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선교 정책을 네 단계로 발전시켰다. 1 회사 사주와 협력하는 노동자 전도 2. 훈 련된 평신도를 통한 공장 전도 3. 노동조합을 통한 노동자 선교 4. 소그룹 안에서 여성 노동자의 의식화와 주체성 회복을 통해 산업현실을 개혁하는 산업선교. 조지송은 노동자 기독론과 노동조합 교회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변화된 노동자의 성숙한 인격과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는 헌신성에서 희망 와 용기를 발견했다. 독재정권과 비윤리적 기업과 협조해서 산업선교를 탄 압하는 제도교회를 거짓교회로 보았다. WCC와 CCA는 한국의 도시산업선 교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는데 그것은 한국의 도시산업선교운동이 세계교회 와 인류 노동사회를 향해 보편적인 희망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토착인 최초의 목사안수자 가운데 한 명인 김기범(金箕範)의 생애와 그 목회적 성격을 살펴보는데 그 주요한 목적이 있다. 19세기 말, 기독교 복음을 수용한 김기범은 미감리회의 전도인 직첩을 받고 오늘날의 인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초기 한국 개신교의 토착지도자였다. 복음전도를 향한 열정과 성실, 그리고 그 능력은 일찍이 선교사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정도였다. 그 결과 1901년 5월, 그는 동료 김창식과 함께 한국 개신교 역사에 있어 첫 번째 목사가 되는 명예를 얻는다. 그러나 병약했던 탓에 그는 지속해서 목회하기가 어려웠다. 때로는 선교사 혹은 교인들과의 갈등 도 있었다. 결국 김기범은 1912년 미감리회 한국연회에서 학습인 과정을 탈락함과 동시에 제명처분을 받았다. 이후 미감리회에서 그의 존재는 잊혀졌다. 그러한 이유로 김기범은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본 연구는 이점을 염두에 두고 김기범의 생애 복원에 주된 관심을 둔다. 동시에 그의 목회적 성격도 어떠했는지 함께 파악해 보도록 한다.
이 연구는 강두송 목사의 글 “婦人問題”을 중심으로 1920년대 초 그의 여성인권 신장에 관한 관점을 고찰하고 현재적 함의와 교훈을 살펴보려는데 목적을 둔다. 그는 고린도전서 11장 2절부터 16절까지를 본문 말씀으로 설정하여 이 글을 작성했으며 1922년 일본강점기에 출판된 『宗敎界諸名 士講演集』에 게재되어 있다. 강두송의 글 “婦人問題”에 나타난 여성인권에 대한 성경적 관점들과 그 현재적 함의에 부각된 주요 논지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린도전서 11장 2절부터 16절 말씀에 대한 그의 사적인 분석을 다루었다. 그는 이 본문에 기초하여 남녀의 인권과 인격의 동등성, 사도 바울의 고린도 여성 성도들을 향한 엄격한 훈계, 시대적 관례 순응과 온건한 개혁추진 등을 제시하고 있다. 둘째, 가정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차별대우, 가혹한 오이코스(οἶκος)의 울 타리 철폐, 동등한 교육기회의 부여, 퇴폐문화 퇴치 등에 관한 담론을 살펴 보았다.
이 글의 목적은 인명진 목사의 정치참여 활동을 11번으로 구분해서 분 석했고 끝으로 그 정치참여의 신학적 근거를 검토했다. 인명진은 1970년대 산업선교를 통해 노동자 인권과 권익을 대변했고 네차례 감옥 생활을 했 다. 1980년대 인명진은 강제 추방되고 외국에서 다양한 혁명 사례를 분석 했고, 정치 혁명이 아닌 신앙에 근거한 인간 변화의 공동체 운동을 대안으 로 생각하게 됐다. 1982~84년 한국사회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은 극좌로 이념화되어 인명진의 사상은 개량주의로 비판받는다. 1986 그는 민주화운 동 국민운동 본부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정치지도자 김영삼과 가까운 관 계를 맺고 그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했다. 이것이 훗날 보수 정당과 친분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됐다. 김영삼 정권하에서 그는 목사의 정체성을 지키면 서 행정개혁과 KBS 이사직에 참여했다. 2006년 보수 정당 한나라당이 부 정부패로 위기에 처했을 때 윤리위원장직을 맡아 부패한 정치인을 징계하 는 개혁에 참여했으나 정치구조를 바꿀 수 없는 한계를 경험했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된 이후 새누리당에서 97일 동안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탄핵을 수용하고 대국민 사과를 했고, 헌정질서를 따라 당에서 대통 령 후보를 배출하고 그 직을 사임했다. 그는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큰 비 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활동을 기독교 목회의 사회적 책임으로 여겼고, 죄인의 친구가 되어야 하며, 교회는 보수 진보를 떠나 소금 역할을 해야 한다는 신학적 주장을 했다. 한국교회사와 정치사에서 진보적 사회운 동을 했던 목사가 보수 정당을 대표해서 비상대책활동을 한 것은 아주 특 이한 정치참여 경험이다.
이 연구는 한석원(韓錫源) 목사의 “責任의 自覺”(1922)과 이 글이 갖는 현재적 함의를 내연(內燃)과 외연(外延)의 원리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려 는 데 목적이 있다. 그는 갈라디아서 6장 5절의 말씀(“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을 성경본문으로 설정하여 이 글을 저술했다. “責任의 自覺”은 1922년 7월 일제강점기에 출판된 『宗敎界諸名士講演集』(개신교 저명한 선각자들의 설교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한석원의 글 “責任의 自覺”에서 보여주는 핵심적인 논점들과 주요사안 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석원이 논하는 ‘내연’으로서의 책임의 자각에 대해서 고찰했으 며 고결한 인격, 경건한 신앙심, 탁월한 자격, 영성, 지속적인 각성, 성경읽 기와 기도, 잘못된 습관을 교정하는 일, 믿음과 행위의 일치(信行一致) 등 이 내연에 해당된다.
둘째, 한석원의 첫째 논지를 확장하여 계속해서 그가 논하는 ‘외연’으로 서의 책임의 자각에 대하여 다루었다. 그는 진정한 이타주의는 성경적 청지기 정신과 자기희생에서 비롯된다고 확신했으며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범주를 넘어서서(외연하여) 가정, 교회, 사회, 민족, 그리고 국가를 대상으 로 반드시 이타주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석원 목사가 남긴 의미심장한 발자취와 그가 남긴 주요 공적에 비추 어 볼 때 본 연구자는 향후 그와 연관된 연구를 외연함으로써 이 주제 외 에도 문서선교, 주일학교 교육활동, 청년운동, 기독교윤리관, 출판 목회사 역과 기독교 서적 보급 등 다양한 방면의 담론으로 연계될 수 있기를 기대 한다.
본 연구는 김창준(金昌俊) 목사의 설교 “最大의 模範”을 통해 ‘모범자 로서의 예수상’을 분석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는 베드로전서 2장 21절 말씀을 본문으로 설정하여 이 글을 작성했다. 본 연구에서는 김창준의 ‘모범자로서의 예수상’을 분석하기 위하여 1922년 『宗敎界 諸名士 講演集』 에 수록된 “最大의 模範”을 고찰했다.
첫째, ‘겸손’에 대해: 김창준이 생각한 그리스도인의 지고의 과업으로서 겸손의 기초적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폈으며, 그 원리들로서 예수 그 리스도의 비하(卑下), 비하의 실제적 체험과 실천, 그리스도인의 공평무사 (公平無私)한 태도 등에 대해 논했다.
둘째, ‘책임감’에 대해: 책임감과 관련된 의미심장한 교훈들을 다루었으며, 그 예로서 구원을 성취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헌신, 믿음과 행위의 일치 (信行一致), 자기성찰, 대소사 모든 소임에 최선을 다하는 신자의 삶 등을 고찰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열정적 사명감의 조화에 큰 비중을 두었다.
셋째, ‘이타적 사랑’에 대해: 김창준의 논리적 논증에 따라 이타적 사랑에 대해 살폈다. 그는 죄인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사도들과 초기 교회 성도들의 이웃을 위한 헌신적인 삶,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이타적 사랑을 피력했다.
부연하여, 본 연구자는 향후 김창준과 관련된 연구가 확장되어 이 주제 외에도 ‘그의 신앙과 삼일독립운동’, ‘그의 신앙과 사회주의 사상’, ‘그의 목회사역’ 등 다방면의 연구로 진척되기를 바란다.
배은희 목사는 대한제국 말기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숭덕학교를 운영하다 한일합병당시에 투옥되는 경험을 하였다. 이 투옥의 경험이 그의 독립운동의 씨앗이 되었다. 그는 3.1운동에 가담하였고 1919년 10월에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장로교 목회자 중심의 독립운동 조직인 대한국민회에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1921년부터 전주 서문외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유치원, 숭덕학교, 여성야학을 운영하였고 1927년 전주 신간회 회장을 하였으며, 1929년부터는 독신자선교회와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농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반대하다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그는 전주에서 임시시국대책위원회와 전주청년단을 조직하여 치안유지활동을 하였다. 그는 12월 28일 이후 반탁운동이 벌어지자 전주를 중심으로 이승만이 조직했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지부들을 조직하여 반탁운동에 참여하였고, 1946년 1월 13일에 전북지부를 조직하였다. 전북대표로 활동하며 2월 8일에 독촉국민회가 조직될 때 5명의 고문 아래 있는 18명으로 구성된 참여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는 독촉국민회에 가담한 이후에 이승만의 반탁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1947년 10월에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47년 7월에는 이승만의 승인을 받아 민족대표자대회를 조직하였고 김구의 비상국민회의와 통합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비상국민회의는 임정의 법통론을 주장하였던 반면에 민족대표자회의는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주장하여 통합에 실패하였다. 통합에 난항을 겪자 민족대표자대회와 독촉국민회가 연합하여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나섰고, 배은희는 총선거 실시를 위한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배은희는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운동을 추진했던 이승만의 정책에 독촉국민회와 민족대표자대회를 통해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목회자였다.
이 논문은 한국 장로교회의 기독교 사회주의 사상과 협동조합 운동에 대한 연구이다. 유재기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 정부수립 시대에 기독교 민족운동을 이끈 지도자 중 하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 때문에 그는 기독교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왔다. 그는 배민수, 최문식과 함께 1920년대와 1930년대의 한국 장로교회의 기독교 농촌운동을 시행하였다. 배민수의 기독교 농촌운동의 핵심 개념은 농촌의 복음화였고 최문식의 농촌운동의 핵심 사상은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반면에 유재기의 농촌운동의 핵심 개념은 기독교 사회주의 실천이었다.
그는 일본의 기독교 사회주의자인 가가와 토요히코와 스기야마 모토지로의 영향을 받았다. 유재기는 가가와 토요히코의 협동조합운동과 스기야마 모토지로의 농민학교를 모델로 세 단계의 기독교 농촌운동을 구상하고 실천하였다. 첫 단계는 농촌연구 둘째 단계는 농촌의 기독교화 셋째는 기독교적 경제공동체의 건설이었다. 그는 이에 따라 첫 단계의 농촌연구회 둘째 단계가 예수촌 건설 셋째 단계가 협동조합 구성이었다.
유재기는 한국 기독교계에 본격적으로 협동조합의 기원과 세계의 협동 조합 현황을 소개하였다. 1930년대에 한국 기독교회 내부에서 협동조합에 대한 지속적이고 깊은 관심을 가진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협동조합을 교회와 농촌마을에 확산시켜 교회와 농촌 마을의 경제적 관계를 재구성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농촌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소비자 협동 조합, 소비자 금융조합 그리고 생산자 협동조합으로 단계적 도입을 주장하 였다.
유재기는 한국 기독교 사상가 중 드물게 나타났던 기독교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기독교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의 사상의 폭력적 이념과 다르다고 보았다. 기독교 사회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윤리적 교훈에 기초한 자발적 사랑의 정신으로 사회적 경제적 평등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유재기는 마르크스주의 진화론 그리고 세속화를 비판하였다. 그는 기독교 윤리적 실천이 이런 근대적 세속 사상에 대한 대안으로 여겼다.
최근 한국의 자본주의의 한계에 대한 여러 가지 경고음이 들려오고 있 다. 한국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유재기가 주장했던 기독교 사회주의와 기독교 협동조합 운동으로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에 의해 만주에 파송된 선교사 존 로스 (1842-1915)는 1877년부터 한글복음서를 번역하기 시작하였으며, 1882년 부터 1887년까지는 복음서와 신약성서를 최초로 발행하고 보급하기 시작 하였다. 그는 예수셩교요안복음젼셔 초판(1882)에서 소위 ‘간음한 여 인 이야기’(Adulteress Pericope)로 불리는 7:53-8:11 부분을 의도적으로 삭 제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는 예수셩교요안복음젼셔 초판 을 발행할 때에, 단순하게 기존에 번역되었던 중국어 문리역본이나 북경관 화역본, 영어 역본들, 또는 역사적인 그리스어성서 개정역본 가운데 바로 전(前)해에 옥스퍼드대학교 (University of Oxford)에서 발행되었던 역본을 그대로 번역하지 않았다. 이 연구가 살펴본 문헌적 증거들은 로스가 성서 사본비평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옥스퍼드 판 그리스어성서 개 정역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내산 사본(Codex Sainaiticus)의 요한복음 본문 취급을 따랐음을 암시한다. 1881년에 발행된 옥스퍼드 판에서는 요한 복음 7:53-8:11의 소위 ‘간음한 여인 이야기’가 그 앞뒤의 꺽쇠괄호 표시와 함께 여전히 본문에 포함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고대사본들이 이 부분을 생략했음을 표시하는 각주가 첨부되어 있다. 로스는 옥스퍼드 판의 이러한 소극적인 편집을 넘어서서 해당 구절의 과감한 삭제를 감행하였다. 기왕에성서번역의 원칙으로서 그리스어 용어들을 음역하는 등 그리스어 성서원 문을 최대한으로 존중하는 원칙을 보여주었던 로스는 요한복음 초판에서 시내산 사본(the Codex Sinaiticus)의 본문을 따라 ‘간음한 여인 이야기’를 삭제하였으며, 이는 주해를 첨가한 옥스퍼드 판의 원판인 웨스트코트(B. F. Westcott)와 호트(F. J. A. Hort)의 The New Testament in the Original Greek (1881)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삭제의 결정은 특별히 이제 복음을 향하여 ‘새로운’ 선교지인 한국을 위하여 당대 최선의 성서번 역본을 제공하겠다는 로스의 학문적 노력과 선교사적 열정의 반영이라고 보여진다.
Despite his popularity, the Rev. James S. Gale has not been given sufficient scholarly attention. How could it be? It appears that while Gale has been known as a missionary and a scholar of Korean studies, this two-fold identity has not been appreciated in a comprehensively way: scholars tend to interpret two aspects of his identity as contradictory ones or simply juxtaposed ones rather than as mutually interacted ones. In this context, in the area of Korean studies, they have seen him mainly as a Korean expert, without paying attention to his being a missionary; on the other hand, in the realm of Korean Christian studies, they have largely viewed him as a missionary, without properly relating this to his expertise in Korean studies. This article aims to overcome this discrepancy in the understanding of Gale in the contemporary studies, secular and Christian, in Korea. The thesis of this article is that the mutually integrated two-fold identity of Gale is the key to the understanding of his thought and work; that is, he was a scholar of Korean studies as a missionary.
Such characteristics of his being a scholar of Korean studies as a missionary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he prepared himself as a missionary in Korea through cultural identification, through which he gradually overcome his paternalism; second, he equipped himself with expertise in Korean studies, which enabled him to be a first-class cultural missionary, namely, a theologian of missionary indigenization; and last, he bequeathed his legacy as a missionary scholar, which paves the way for Korean studies as mission. Thus, he challenged the understanding of both missionary works and a missionary.
이 글은 작곡가 진은숙(1961- )의 작곡과정에서 발견되는 특유한 음악적 사고와 작업방식 에 대해 고찰한다. 필자가 파악하는 진은숙의 작곡방식은 여러 가지 재료의 (재료가 본래 속 해 있던) 구체적 맥락을 취하지 않고 재료 자체만을 떼어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다시 말해 추상화를 거쳐 개인화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것으로 개인화한 재료들을 작품에서 새로운 맥락 안으로 융합시키는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작업방식 또는 태도는 순수 기악음악뿐 아니라 텍스트를 가진 인성(人聲)작품이나 동양의 전통악기를 사용한 작품에서 도 발견되는 특징이다. 이 글에서는 진은숙 작품전반에서 드러나는 이같은 양상을 살피며, 생황협주곡 《슈》(2009/2010)의 예를 통해 진은숙의 음악어법을 ‘추상화’와 ‘재맥락화’라는 개념으로 해석해본다.
It is well-known that the Rev. Kyung-Chik Han was very active in world mission. Interestingly, however, there has been few, if not any, studies on his ministry of world mission. This study reviews his ministry of world mission, summarizing it into several patterns, clarifying its main issues, and evaluating its historical legacy.
His ministry of world mission can be divided into several patterns, which is closely related to the development of his pastoral ministry. The patterns are as follows: first, the period of pasturing a migrant church (1945-1950); second, that of representing the Korean Church to the world churches (1950-1955); third, that of participating in ecumenical mission (1955-1966); and last, that of participating in evangelical mission (1966-2000).
We may recapitulate the Rev. Han’s ministry of world mission as follows. To begin with, let us examine his strong points: first, with the idea of evangelism being the core, he expanded his ministry, starting from national evangelization to world mission; second, he carried out both gospel ministry and relief ministry; third, he greatly contributed to the mobilization of the Youngrak Presbyterian Church and its daughter churches for world mission; fourth, he enhanced the church’s awareness about the world churches, and thus let it naturally accept the challenge of world mission. However, it is necessary to point out his weaknesses: first, his framework of the two-faced ministry, gospel and relief, gradually became behind the times, as he failed to respond to the new ideas of world mission; second, his role in introducing the ideas of ecumenical mission to the Korean Church was limited; third, thus the Korean Church in general, including him, remained under the influence of the viewpoint of traditional mission; fourth, owing to his close relationship with the evangelicals, his leadership was gradually confined to the evangelical camp. In conclusion, it can be safely said that he was a missionary activist rather than missionary thinker, and that he contributed to the mobilization for mission rather than the vitalization of missiology.
This article is a hermeneutical evaluation of the life, the ministry and the theology of Rev. Sang-Bok Kim, for the purpose of inspiring and teaching the next generation. First and foremost, prior to evaluating his ministry and his theology one must first observe his life to understand the depth of his spirituality and the formation of his values and beliefs. We will look at his life through three different stages. First, his life in Korea (1939.1.11∼1965.8): north (Pyongyang) and south (Pusan and Seoul); second, his life in America (1965.8∼1990.5): studying abroad, teaching and ministry; and lastly, his life again in Korea (1990.6∼2011.1): his life based on his ministry at Hallelujah Church. Understanding his life through these three different stages will provide us insight with regard to the direction of his ministry and its characteristics. Furthermore, his ministry can be divided into teaching ministry and pastoral ministry. Within his pastoral ministry we will be able to see him as a ‘pastor-teacher’ (Eph. 4:11) through the vision, the method and the characteristics of his ministry. Lastly, his theology is understood as well as criticized generally on his view of Bible (‘plenary verbal inspiration’) and in particular his view of pneumatology and eschatology and ecclesiology and woman ordination, and WC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