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성주지역에 분포한 선사∼삼국시대 유적에 대해 정리하고, 지역 내 삼국시대 고 분의 편년과 성격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성주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것으로 보이고, 그 시작은 구석기시대 까지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성주읍과 선남면 일대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이 다수 출 토, 채집되었고, 지역을 관류하는 이천(伊川), 백천(白川), 신천(新川) 등의 소하천 유역에 형 성된 하안단구상에 구석기시대 유적들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신석기시대 유적은 아직 지역 내에서 확인된 바가 없지만, 성주와 인접한 김천지역의 송 죽리유적을 비롯하여 합천, 거창 등지에서도 신석기시대 유적들이 확인되는 것을 토대로 성 주지역 내에서도 신석기시대 문화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낙동강 및 지역 내 소하천 등지에 입석, 지석묘, 유물산포지 등 53개소 정도가 보고되어 있고, 성주지역에서 확인된 지석묘는 모두 165여기 이며, 입석은 6기이다. 초기철기∼원삼국시대 유적도 지역 내에서 다수가 조사되었는데, 특히 백전·예산리유 적은 원삼국시대 전기에 목관묘를 축조하고 철기를 사용한 세력이 당시 성주지역 내에서 성 장,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대외교류 등을 통해 철기류와 같은 선진 문물을 받아 들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후 삼국시대가 되면 지역 내 3대 고총고분군인 성산동고분군, 수죽·용각리고분군, 명 천리고분군을 중심으로 많은 수의 고분군이 조영되는데, 60여개소의 삼국시대 고분군이 지 역 내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 중 성산동고분군 내에서는 22호분, 48호분, 수죽·용각리고분 군에서는 수죽리고분군Ⅱ 30호분, 353호분, 명천리고분군 내에서는 6호분 등이 최근 발굴 조사되었고, 성산성과 할미산성에 대한 정밀지표조사도 최근 실시되는 등 다양하고 활발한 조사가 지역 내에서 진행되고 있다. 성주지역 내 삼국시대 고분에 대한 편년은 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성산동고분군을 중 심으로 이루어져 왔고, 지역색이 강한 성주양식 토기가 성주지역을 중심으로 일부 낙동강 이동지역까지 확인되며, 대형의 판석조 석곽 역시 성주지역을 중심으로 낙동강 중상류역에 넓게 분포하고 있다.
Pei Songzhi (Year 372-451)’s annotations on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have greatly revised, improved and enriched the original content of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written by Chen Shou. The linguistics and philology value of Pei’s annotations are remarkable, which are reflected in the following three aspects. Firstly, in terms of phonetics, there are 99 phonetic notations (for 96 Chinese characters) in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and the methods are mainly Zhiyin (including "Yinru") and Fanqie, moreover they reflect the phonetic characteristics from the Later Han Dynasty to the Eastern Jin Dynasty. Secondly, there are 98 lexical annotations in total, producing new words and new meanings, and most of them are still used by later generations. Lastly, there are 39 philology annotations. Pei Songzhi annotated the rare and incomprehensible characters in the text, and also listed many opinions for reference. Additionally, Pei Songzhi attached importance to the influence of glyphs on the meanings of Chinese characters, and focused on analyzing words and textual meanings from the perspective of philology. Pei Songzhi’s annotations are concise and clear, meticulous and rigorous, and also express his own views and opinions, with distinct personal characteristics. Pei’s annotations on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have profound research value and significance in linguistics and philology, which are worthy to be carefully explored, and the results will play an important role in enriching the research content of the history of Chinese language.
“Yu (于)” and “Yu (於)” both exist in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while the frequency of usages are different, with same and different usages. This paper takes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During Shaoxi Period of Song Dynasty (The Twenty-Four Histories in Collection of Various Editions) as the research material, and investigates the usages of the words “Yu (于)” and “Yu (於)” in it, also referring to the other three editions of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and checking each other to clarify the words and usages. In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Yu (於)” appears 4544 times, “Yu (于)” appears 861 times, and the usage ratio is 5.28:1. “Yu (於)” is more widely and frequently used than “Yu (于)”. These two words are used most abundantly as prepositions. The prepositions “Yu (于)” and “Yu (於)” can both guide the complements of time and place, as well as elicit action objects and express passiveness. Additionally, in the three pairs of common phrases, the usages and meanings of the corresponding words are same. The difference is that the preposition “Yu (於)” has more plentiful usages and fixed usages of “Yushi (於是)” and “Zaiyu (在於)”, moreover, “Yu (於)” is often used after war verbs, and “Yu (于)” is rarely used. Furthermore, “Yu (於)” can be used as an interjection, and “Yu (于)” in proper nouns cannot be written as “Yu (於)”. It can be seen that, different from the pre-Qin period, the grammatical function of “Yu (於)” in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is much stronger than that of “Yu (于)”, which reflects the trend that the weakening of the usages of “Yu (于)” in the Wei, Jin, Southern and Northern Dynasties, while the function of “Yu (於)” is gradually becoming stronger. Besides, there are many usages preserved through “Yu (於)” from ancient Chinese to modern Chinese.
본고는 네이버(NAVER) 카페 ‘삼국지 도원결의’라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담론을 분 석 대상으로 삼아, 국내 대중들의 ‘삼국연의 콘텐츠’의 수용과 재해석 양태를 살펴 보고 그 특징을 도출하였다. 현재 삼국연의 콘텐츠의 수용은 게임류로부터 시작되 기는 하나, 수용범위는 소설이나 사서 등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로 전이·확대되는 양 상을 보였다. 탈권위·탈위계를 추구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용 자들은 삼국 인물들의 영웅성에 주목하기보다는 유희의 대상으로 활용하기를 즐겼 고, 서열과 스펙을 중시하는 문화로 인하여 등수나 수치로써 인물 평가를 대신하는 경향을 보였다. 또 콘텐츠 수용자이자 생산자로서 삼국연의 의 시각적 재현에 높 은 관심을 보였다. 즉 담론을 통하여 살펴본 수용의 특징은 유희화, 계량화, 시각화 로 정리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삼국연의 영어 번역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니는 번역가 브레위트-타 일러의 번역 성취에 대한 고찰이다. 영국인 브레위트-타일러는 1880년 중국으로 건 너가서 40년 동안 중국의 주요 도시에 머무르며 인재 양성과 해관 및 우정 업무에 종사했다. 그는 푸저우선정학당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틈틈이 삼국연의를 번역하 여 홍콩의 영문월간지 차이나 리뷰에 발표했다. 1888년부터 손책의 사망 고사, 좌 자 고사, 초선 고사 등 삼국연의 일부를 번역했으며, 삼국연의에 관한 평론도 썼 다. 그는 영국문화와의 유사성 속에서 삼국연의를 이해하고 받아들였으며, 서양인 의 독서 수월성을 위해 의역과 축약의 번역방법을 동원하여 가독성 높은 완역본을 만들어내었고, 1925년 양장본 형식으로 캘리앤웰시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三國志演義』는 元代 建安 虞氏의 『三國志平話』를 시작으로 현전하는 통행본인 毛宗崗本에 이르기까지 약 350여 년의 발전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발전 과정 안에서 상업성을 목적으로 한 福建地方과 江南地方의 출판 경쟁이 시작됐고, 江南地方에서 刊行된 演義系列 版本과 福建 建陽地方에서 刊行된 志傳系列 版本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 두 系列의 版本은 回目과 內容 등에서 독자적인 특색을 갖고자 여러 가지 변화를 시도하였다. 두 系列의 版本들을 살펴보던 중 필자가 주목한 것은 『花關索傳』 과 『三國志演義』에 대한 영향 관계였다. 본 연구는 『三國志演義』에 『花關索傳』이 揷 入되면서 系列 분류 및 관련 版本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三國志演義 내에서 『花關索傳』이 점차 사라지게 된 근본적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毛宗崗을 비롯한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까지도 잘 보존되어 이어지는 關索과 관련된 전설과 민간 고사 등을 통해 『花關索傳』이 갖는 의미와 가치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We analyzed the records on the reign style and the calendrical data presented in the Samguksagi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and the epigraph of the Three Kingdoms (Silla, Goguryeo, and Baekje) period in Korea (B.C. 57 – A.D. 935) to verify the chronological tables of the period that are currently in use. For the epigraph of the Three Kingdoms of Korea, we utilized the database provided by the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By analyzing the records on the reign style, first, we found that the Yeonpyo (Chronological Table) of the Samguksagi is tabularized using the reign style of the Caowei for the period of Three Kingdoms of China (Caowei, Shuhan, and Sunwu) (A.D. 220 – 280). Second, we found that the reign style of the Silla was promulgated during the reign period of a king, which was usually promulgated when a king acceded in China. Third, we found that the reign styles presented in historical materials showed agreement with those of the Yeonpyo except for two cases in the Goguryeo. Concerning the records on the calendrical data, first, we confirmed that accession years of kings Michu, Beobheung, Seondeok, Minae, Gyeongmun, and Seongdeok. On the other hand, we found probable errors in the record of accession years for the kings Munja, Wideok, Aejang, and Heonan. Next, we found that the records of the length of a lunar month, leap month, and cyclic day showed agreement with the current chronological table except for several cases. In particular, cyclic days in the solar eclipse account had a relatively large number of discrepancies. We believe that these errors might have been caused by the inaccurate identification of a year in the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while determining the year by referring to Chinese historical documents. Finally, we found that the starting point was included while counting a year, at least from the Three Kingdoms period, similar to the current method of counting age in Korea. However, we point out that the starting point should be excluded when the term “after” is used in the expression. We believe that this study is very useful to verify the current chronological table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in Korea.
본고는 『삼국연의』의 여성인물이 소설 속에서 어떻게 형상화 되었는지 살펴본 후, 여성 형상의 특징을 정리하였는데, 여성 등장인물은 자신만의 목소리나 감정을 발산하지 않고 개인적 욕망이 없는 것처럼 그려졌다. 『삼국연의』가 삭제해도 무방한 여성인물들을 ‘自我가 없는 존재’로 형상화한 것은 작가의 서사전략이다. 작가는 이들 여성인물들을 이용하여 중심인물들을 부각하고, 영웅을 판별하는 잣대로 이용했으며, ‘忠’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한 서사전략으로 활용하였다.
필자는 요시무라 레이 吉村怜의 불교미술에 등장하는 연화화생 도상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불교미술에 등장하는 연꽃 문양은 몇 변화 단계를 거쳐 불·보살·天人(飛天)으로 化生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토대로 관련 연구를 계속하면서 아래 사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요시무라가 주장한 연화화생 도상은 넓게는 화생 가운데 하나이며 더욱 넓게는 기의 표현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 모든 기의 표현은 조금씩 차이가 나지 만 범세계적으로 전개되었으며 불교미술에 국한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불교 전래 이전부터 도도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기(화생 연화화 생 포함)에 등장하는(표현하는) 여러 문양은 단순한 장식 문양으로 그치 지 않는다. 이들은 기(화생 연화화생 포함)를 표현하고 전달하며 상호 同格을 이루고 互換交互하며 連繫된다.> 필자는 위 견해를 1993년 발견 백제금동대향로 해석에 적용시켰다. 본고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부터 기의 표현이 이미 존재했다는 것을 알 리고, 더불어 백제금동대향로 제작 특히 연화화생 등 기의 표현도 당시(6 ∼7세기) 이웃나라(특히 중국)의 영향이 아닌 우리나라의 오랜 전통을 따 른 것임을 알릴 목적으로 출발하였다. 이 논문에서 例示한 토기와 청동기에서 보듯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기 화생 연화화생의 표현은 광범위하고 보편적으로 전 개, 전승되었다. 또한 앞애서 주장한 것처럼 기 화생 연화화생 표현 에 등장하는 여러 문양들은 상호 동격을 이루고 호환 交互하며 連繫된 상태를 어김없이 보여준다. 신석기시대 토기에는 주로 點文(점선문) 직선문 (연속)삼각문으로 표현하였고 기타 연화문 화염문 파상문 당초문 등으로 표현하였다. 이들을 통하여 산 태양 연꽃 또는 그 관련 기 화생을 표현하였는데 대 개 간단한 구성이다. 이 가운데 가장 흔한 (연속)삼각문(그 안 직선문 포 함)은 삼국시대에 이르면 분명 山文으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연화문을 나 타낸 웅기 송평동 출토 토기(도2), 연속 삼각문과 유사한 모습의 연화문 을 나타낸 통영 연대도 출토 토기(도7) 등을 통하여 볼 때 신석기시대에 도 蓮華化生山즉 ‘연꽃으로부터 山이 화생되는 표현’도 있음을 알 수 있 다. 이 山文이나 연화화 생산 표현을 계승, 발전시킨 도상 가운데 하나가 백제금동대향로이다. 청동기시대 기 화생 표현은 주토 청동기에 ‘짧고 조밀한 연속 직선 문’ 점문(점선문) 원문圓文(연속)삼각문 파형문巴形文당초문 등으로 나타냈다. 기본 바탕은 신석기시대의 것을 계승하였지만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치밀한 구성이다. 이들은 불교미술 등 후대에 깊 은 영향을 끼쳤다. 삼국시대(가야시대 포함) 토기에 보이는 기 화생 표현은 그 문양 등 에서 보듯 신석기시대 토기(기원전 5000년경∼기원전 2000년경)와 청동 기시대(기원전 2400년경∼기원전 600년경) 청동기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 이다. 기 화생 표현은 더욱 다양화되었고 확산되었으며 특히 연화화생 표현은 더욱 보편화되었다. 연속 산문을 위시하여 원문 半圓文당초 문 연화문 인동문 등으로 나타냈으며 역시 철저하게 상호 동격을 이 루고 호환 교호하며 연계된 구성을 보여 준다. 이상을 통하여 우리 선조들의 강역(오늘날 滿洲와 한반도 지역)에서 신석기시대부터 7세기 중엽에 이르기는 시기에 전개된 기 화생 연화 화생 표현은 독자적 영역을 이루며 전승된 것으로 결론 내릴 수 있다.
This study mainly focuses on Silla jo among Samguk Sagi bongi, and analyzes in 音韻學的(eumwunhakcheok) about names of 王(wang)s, names of bureaucrats and names of government services marked in two or more. I referenced 郭錫良(Kwakseongryang)'s 古音手冊{koeumsuchaek) for estimation of 上古音(sangkoeum) and 中古音chungkoeum). Also this study followed theory of 王力(wangryek) for the discrimination of 同音(dongeum) and 近音(keuneum). Among the names of the kings I could not ascertain historical evidence in whether ‘伐休(Beolhyu) and 發暉(Balhwi)', ‘味鄒(Michu) and 未古(Migo)’ and ‘炤知(Soji) and 毗處(Bicheo)’ are the same or similar sounds. Among above kings the name of a king 炤知(Soji)(照知(Choji)) was recorded in 毗處(Bicheo). It seems to have been documented in a changed form from a Chinese character meaning to a Korean native tongue. Both 炤(so)and 照(cho) in 炤知(Soji)(照知(Choji)) mean ‘光(kwang)’ which represents ‘bright, shining, and light'.(In 炤知(Soji) 知(ji) is a suffix which has no meaning.). 毗處(Bicheo) is the ‘빛(bit)’, the Korean word of 光(kwang). In other words, it is the reading sound of 毗處(Bicheo) representing a Korean word ‘빛(bit)(毗 : 비(bi) + 處 : ㅊ(처)(cheo) = 빛(bit)’. 南解次次雄(Namhaechachawung)'s 王妃(wangbi) 雲帝夫人(Wunjebuin) was recorded in 阿婁夫人(Arubuin) which seems to have been documented in a changed form from a Chinese character meaning to a Korean native tongue. 雲帝(wunje) is the name related to water물(水 : mul). 阿婁아루(aru) is the Korean native tongue of 雲帝(wunje). 阿婁(aru) is another written version of Korean native tongue ‘阿里(ari)’ which represents water. It is the last letter that is the only difference between 阿里(ari) and 阿婁(aru). It can be proved in phonological method. 里(ri) of 阿里(ari) and 婁(ru) of 阿婁(aru) are that 聲紐(seongnyu) is 雙聲(ssangseong) and also vowel or final consonant is similar which is changed each other because the ancient Chinese sounds are similar. That the name of a place ‘始林(sirim)' was rewritten to 雞林(kyerim) is that Korean native tongue 始林(sirim) was changed to Sino‐Korean word '雞林(Kyerim)'. In other words, ‘始 : 새(sae←音(eum) : 시(si))’ was changed to ‘鷄 : 새(sae←訓(hun) : 닭(dark))’.
In this study, solar eclipse records were investigated during the Three Kingdoms era of ancient Korea using astronomical calculations and numerical simulations. Under the condition that the solar eclipses were actually observed at the well known capitals of the Three Kingdoms, I investigated the probabilities that the optimal observation areas of the Early Silla, Goguryeo, and Baekje records would appear around Chinese continent. I found higher probabilities than those suggested by Park and La (1994), although the numerical values are still low, especially in the case of the Early Silla records. On the other hand, the probability that the optimal observation area of the Later Silla records will be present around South Korea is only 13.6%, although the area shows a good match with the known capital. I also analyzed the number distribution of the eclipse records for the Three Kingdoms (except for the latter Silla's) according to the observers' locations: at the optimal observation areas and at the known capitals. And then I compared with the number distribution of all eclipses observable from those locations. From the χ2-test, I found that the Goguryeo and Baekje records had better representation of their population distributions at the latter regions (χ2=27.93 and 205.5) than at the former ones (χ2=34.19 and 211.5). Therefore, it is difficult to conclude that the observers' locations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were either near China, as suggested by Park and La, or in the Korean peninsula, solely based on these results. It is thus recommended that more studies are required to confirm the real observers' locations during the Three Kingdoms era.
우리나라 불교수용에 따른 토속신앙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에 의 해 연구되어 왔지만, 山寺의 확산으로 인한 보살주처신앙의 성립 및 그 연관성 에 대해서는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삼국시대 산지 사찰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토속적 산신신앙과의 갈등 및 극복, 그 리고 통일 이후 화엄 신앙의 정착과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보살주처신앙이 우리 나라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삼국시대 불교 전래 이후 불교신앙이 대중화됨에 따라 왕경 근처의 평지에 사 찰이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山地에도 사찰이 건립되었고, 이 현상은 지방으로 까지 번져갔다. 그 과정에서 山寺의 승려와 토속의 산신 숭배자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갈등의 양상은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었겠지만 대체로 불교신앙이 산신신앙을 압도하였고, 산은 불교신앙 공간으로 탈바꿈해갔다.
통일 이후에도 왕실에 의한 山神祭는 계속되었고, 전국의 名山을 三山‧五岳‧二十四山으로 나누어 大祀‧中祀‧小祀를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제사가 불 교신앙을 약화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名山에 사찰을 세움으로써 불교의 기도처를 전국에 확대하였다. 이는 왕경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던 신라불국토 의 염원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으로부터 전래 된 화엄신앙의 한 형태인 보살주처신앙을 수용하여 우리나라의 오대산, 천관산, 낙산 등에 보살이 상주한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이는 불국토를 실현하고자 했던 신라인의 염원이 발현된 것이기도 했다. 그리 고 그러한 염원이 더욱 확대되면서 산에는 磨崖佛이 새겨지고 새로운 불교설화 가 만들어졌으며, 더 많은 산에 사찰들이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세월 이 흐르면서 산 이름이 사찰명으로 변화되기도 하고 사찰명이 산 이름으로 바 뀌기도 하면서 산에 불교적 신비성이 가미되어왔다.
게임개발환경의 빠른 성장에 맞춰 게임시장은 더욱 실질적인 게임기술을 필요로 하지만 중국 온라인 게임은 같은 장르의 대부분 게임 스타일이 비슷하며 게임유저 선호에 밀접한 독창성에 대한 부분은 미흡하다. 따라서 전 세계에 거친 유저들이 동시에 이용하는 온라인 게임의 경우 각 나라만의 게임그래픽 선호도의 지침이 중요한 사항인데 반해 제작국가의 불분명성에 기인한 디자인이 만연하다. 한국, 중국, 일본은 이미 유명한 스토리텔링의 주제인 "삼국지"를 기반으로 중국의 전통문화와 자기나라의 상황을 결합하여 게임 디자인을 진행하였다. 각 나라의 독특한 게임디자인 스타일은 분명히 존재하며 산업적 활용성 차원의 게임디자인에 도움이 되는 연구가치로써 중요한 배경을 이룬다. 본 연구는 각 나라의 25개의 "삼국지 게임"을 주제로 한 온라인 게임을 연구대상으로 게임 배경 디자인 요소를 회귀분석을 통한 비교분석을 진행하여 각 나라의 디자인 특징을 설명, 향후 동종연구자들 및 실질적인 게임그래픽 디자이너의 게임디자인 개발에 효율적인 방향을 제언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