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개인의 정신적 가치를 존중한다는 이름하에 개인이 가지는 종교적 믿음 역시 다양성의 측면에서 수용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에 반해 종교적 근본주의는 종교적 믿음의 순수성과 해석의 단일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두 관점들은 서로의 극단적인 지향점에만 치중한 채 근본적인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지 않고 있다. 그 물음이란 바로 (1) 종교의 근원은 무엇이며, (2) 결국 인간이 중심인 종교에서 다양성과 배타성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근원적인가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이러한 물음들 가운데 (1)을 그의 저작인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현상학적으로 탐구하고, 「믿으려는 의지」라는 논문에서 (2)를 믿음의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탐구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제임스가 두 저술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한 문제의식을 살펴보고, 그가 던지는 종교적 혹은 윤리적 시사점들이 가지는 현대성에 주목하여 그것이 현대 정신문명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에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글은 예이츠가 정의하고 있는 문명과 인간의 모습을 고찰하기 위한 것이다. 예이츠는 하나의 문명이 중심은 분명 존재하지만 영구적으로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탄생과 성장 및 소멸과정을 경유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삶 역시 항구적일 수 없으므로 예이츠는 인간의 사고를 문제의 핵심으로 설정하면서 실재 추구를 강조하고 있다.
Paying critical attention to the concept of ‘transportation’ and ‘circulation’, this essay examines the collection status of vocabulary in bilingual dictionaries of various languages in early-modern East Asia. By doing so, it follows the trajectory of translingual practice, and clarifies a part of the transition of modern East Asian civilization. The research method in this study is as follows. First, it confirms the concepts of ‘交通 (kotsu, kyothong)’ and ‘流通 (ryutsu, yuthong)’ by defining a monolingual dictionary in Japanese and Korean. Next, it selects words representing each concept after investigating the translation (English) of a modern Japanese-English dictionary and Korean-English dictionary. The translated words corresponding to those representing the concepts are extracted from some major early-modern bilingual dictionaries of Japanese and Korean. It, then, analyzes the aspect of changes from the late 19th century to the early 20th century by looking into the translations of those extracted (Japanese and Korean). Based on the above-mentioned research and analysis, it reveals significant developmental characteristics in translating the concept of ‘transportation’ and ‘circulation’ in East Asia.
본 연구에서는 일본에서 중국 지명과 인명을 어떻게 표기하고 읽는지에 대해서 한자문명의 공통자산으로서 한자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고찰한다. 먼저 일본어 안에는 음성언어가 한자를 중심으로 한 문자언어와 상호보완적인 의존관계에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한자가 일본어 안에서 시니피앙(signifiant)으로서 갖는 위상과 기능을 검토하고 그것이 중국 고유명사를 어떻게 적고 읽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와 직결됨을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근대 이후 일본에서 중국의 인명과 지명을 어떻게 표기하였으며 그것은 어떻게 변화하였는가하는 역사적 경위를 살펴본다. 또한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 안의 서로 다른 언어권 간에 지명과 인명을 차용할 때에 한자음을 취할 것인가 현지음을 취할 것인가라는 문제의 성질에 대해서도 고민해 본다.
Based on the characteristics of texts, the scholarly history of the Joseon Dynasty is divided into two: one is Jingshu Shiyi (經書釋義 : Commentaries on the Confucian Scriptures of The Four Books and Five Classics) investigating the books of pre-Qin Confucianism and the annotations of Han-Tang period; the other is Yulu Shiyi (語錄釋疑 : Commentaries on the Analects) studying the analects of Song-Ming Neo-Confucianism. Having been recorded in colloquial languages, the analects are particularly significant due to their deep relationships to certain linguistic questions. For this reason, this paper introduces how their inflow and dispersion were made in Joseon and explores their specific aspects since Yulu Shiyi developed and produced a number of great achievements in Joseon’s scholarly history. It was during the Goryeo Dynasty that Neo-Confucianism was introduced to the Korean Peninsula for the first time, and it was not until the late 13th century that the full-scale acceptance of the doctrines began. The inflow process of the analects went through two stages. The first one was the late Goryeo during which Neo-Confucianism resting upon the literature of Zhuxi was introduced. The second one was the early Joseon during which the analects of the Song Neo-Confucianism such as Sishu Wujing Daquan《四書五經大全》 , Xingli Daquan《性理大全》 , Zhuzi Daquan《朱子大全》 , Zhuzi Yulei《朱子語類》 , Xinjing Fuzhu《心經附註》 , etc flew in. The predominant way in which the analects came to be dispersed was the compilation of annotations and dictionaries. As for the former, The Annotation of Zhuzi Yulei《朱子語類考文解義》 and more than a hundred annotation books on Xinjing Fuzhu《心經附註》 appeared; so did The Comprehensive Dictionary of the Analects of the Song Neo-Confucianism《語錄解》 , as for the latter. At the end of the paper, three supplements are presented: the analects of the Song Neo-Confucianism from Jangseogak Archives in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the bibliographical directory of the analects and annotations from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in Seoul National University, and the list of relevant researches in Korea and China.
이 논문은 예이츠와 테드 휴즈의 시 작품을 통해 자연과 문명에 대한 관점을 각기 어떻게 형상화하는지를 논하려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예이츠의 경우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자연은 인간이 이루는 문명의 세계와는 다른 곳으로, 독자적인 특징을 지닌 세계로 보지만 문명에서 떼어낼 수 없는 중요한 요소로 그린다. 테드 휴즈의 작품에서는 초기에서부터 자연의 강렬한 존재성을 형상화하여 그것이 지닌 힘과 에너지를 드러낸다. 이를 통해 휴즈 작품의 자연과 문명은 서로 대조되면서도 어느 지점에서 서로 상대를 융화시키거나 통합한다. 휴즈는 예이츠와는 완연히 다른 자연을 묘사하지만 자연이 문명과 맺는 관계를 시적 영감의 틀로 본다는 점에서 그의 연장선에서 읽을 근거를 제시한다.
I suggest a theory of World Peace Island of Jeju Island as Demilitarized Zone rather than Militarized Islands for Prosperity and Peace for Pacific Civilization upon Tolerance Philosophy of Islanders in this article. In order to reach a win-win policy for both Koreas as well as the other nations involved in the so-called “Six-Party Talks”, Korean leaders for a new age of Korean unification (including President, Lee Myung-bak, the 2012 leading Presidential candidates such as Congresswoman Park Geun-hye, Congressman, Sohn Hak-kyu,Chung Se-kyun and others) must recognize a new paradigm for Korean re- unification in the context of framework of peaceful coexistence of civilizations.Even though both President Lee Myung-bak and former President Roh Moo-hyun have emphasized the Swiss model for small nations to keep the peace (military armament) rather than the Costa Rican model (disarmament), the time has come for us to think seriously and incrementally about a new paradigm toward Jeju Island as Demilitarized World Peace Island. We should learn the lessons of non-militarized autonomous regions of Madeira of Portugal,Majorca of Spain, Spitz Bergen of Norway, Åland of Finland. We should create Jeju Island as World Peace Island for peaceful Pacific beyond trauma and ordeal of colonized or militarized fate of Pacific islands such as the Okinawa of Japan, the Hawaii of United States, the Sakhalin of Russia, the Hainan Dao of Mainland China. If Jeju Island will be designated as demilitarizedPeace Island through international treaty by the Six-Party Talks Countries (USA, China, Japan, South Korea, North Korea, and Russia) by an internationaltreaty of the United Nations, we should expect Jeju Island to play an important role not only in the prosperity of Pacific civilization but also peaceful coexistence between the two Koreas.
예이츠, 엘리오트, 조이스등 모더니즘 문학작품 속에서 독자는 서구문명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모더니즘 문학은 르네상스 이후 4세기를 주도하면서 이루어낸 영국적 실용가치관이 주도한 현대문명을 비판한다. 가까이는 영국빅토리아 시대의 극단적인 형태의 정치, 경제, 도덕, 문화에 대한 공격인 것이다. 즉, 정치에 있어서는 제국주의, 경제에 있어서는 자본주의, 도덕과 문화에 있어서는 속물주의, 종교에 있어서는 기독교에 대한 반성과 해부를 그 특징으로 한다. 무엇보다 예술이 도덕, 정치, 종교의 시녀의 역할에서 벗어나 예술자체로 독립할 것을 주장한다. 따라서 예술은 그 실용성보다는 미 자체로 다시 태어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예이츠의 부르주아 문명에 대한 비판은 그의 영적이고 시골적인 것을 찬미하는 기질과 그의 18세기 앵글로 아이리쉬 문화에 대한 애착 그리고 순진하고 신선한 원시성을 지닌 아일랜드 풍물에 대한 매튜 아놀드 같은 이의 찬미에 힘입어 주로 실용적 가치관으로 무장한 아일랜드 중산 계급의 심미적인 결핍을 공격하는 양상을 띤다. 한편, “재림”이라는 시에서는 서구문명의 해체까지를 예언하며, 또 한편으로 “비잔틴으로의 항해”에서는 예술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세계를 그려낸다. 그의 문명비판의 특징을 좀 더 확실히 규명하기 위해, 서구 문명을 소유와 지배로 규정한 아도르노와 비교해 본 결과, 예이츠가 부르주아의 소유욕을 비판할 지라도 아도르노처럼, 서구 문명에 내재된 착취, 지배라는 사회학적 억압기재를 찾아내지 못했다. 돈과 실용적 가치관으로 무장한 자본주의에 심취한 부르주아는 죽음을 미적으로 승화시킬 능력이 없고 성적에너지를 자연스럽게 구가할 수 없었으므로 그의 공격 대상이 되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예이츠는 아도르노처럼, 문명을 지배와 억압이라는 사회학적인 차원으로 비판하기보다는 시적 가치와 미적인 삶을 충실히 구가할 수 없게 하는 파괴자로 인식한 것이다. 그런데 예이츠가 지배의 구조를 서구 문명 안에서 찾아내지 못한 것과 달리 그는 예술로만 지배되는 이상적 국가를 제시한 점은 그 역시 부르주아로서의 지배 욕구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이츠는 문명의 속성인 지배를 향유한 계급으로서 지배와 착취의 현장을 외면했으며 피지배자들을 동정하기보다 그들의 미적인 결핍을 지적했다. 특히 그가 예술로만 지배되는 파시즘적인 미학을 가진 것에서 그의 부르주아로서의 지배이데올로기는 살아있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예이츠와 대다수 아일랜드인의 공동 목표는 아일랜드적 문화를 만들려는 데서는 공통점을 보일지라도 정치와 경제적 독립을 이루는 면에 있어, 서로의 감각은 매우 큰 차이를 드러냈다고 평가된다. 그 당시 대다수의 아일랜드인들이 예이츠의 문학을 “노예의 깨어진 거울”로 평가 절하시킨 것이라든지 아일랜드 내에서 예이츠 미학에 대해 별로 호응이 없었던 것도 예이츠가 자신의 시에서 착취당하는 자와 착취의 현장을 외면한 것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즉, 정치와 경제, 사회계급에 민감했던 아일랜드 중산계층은 예이츠의 예술 지상국 창조를 하나의 환상으로 보았을 가능성과 자신들에 대한 예이츠의 공격을 새롭게 도전하는 노예에 대한 상전의 방어로 보았을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우리 역사에서 갑오경장을 전후한 시기에는 외부로부터 새로운 사조가 밀려들면서 모든 분야에서 변화가 요구되었으며,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한글은 국문으로서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 시기에 한글의 우수성은 대내외적으로 인정을 받았고 활용적 가치는 날로 증가하였으나, 실제로 어떻게 표기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통일된 안을 이루기 어려웠다.
이 글에서는 당시 국문 표기가 혼돈스러운 상황에서 한글의 실제 표기 양상을 보여 주는 문헌인 「國語綴字捷徑」(1908)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이 자료는 기독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Gale의 「한영자뎐」(1897)의 표기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당시의 한글 표기 양상을 모국어 화자의 관점에서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리하여 한글 정서법의 역사적 흐름을 기술하는 작업 의 일환으로, 이 책을 통해 개화기 당시의 실제적인 한글 표기의 양상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과정이 될 것이다.
에른스트 파베르(Ernst Faber, 1839-1899, 중국명: 花之安)는 독일 선교 사로서 중국선교에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그의 대표적 중문 저서인 자서 조동(1884)과 경학불염정(1898)은 19세기 동양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준 서적으로 당시 유교 사회의 형식주의를 지적하며 기독교 선교의 길을 제시했다. 본 연구는 그의 이 두 저서에 기초해 어떻게 격물치지를 이해해 나가는지 고찰했다. 특히 그는 격물치지에서 사물마다 궁리하는 과정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런 궁리가 인식 주체인 인간의 마음을 추구하는 길로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즉 격물은 마음을 정미하게 해 자세히 살피는 것으로, 이런 마음을 찾아 나가는 길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길이라고 보았 다. 오직 하나님만이 천하의 참 주인으로 이를 섬길 때 인간 마음의 지혜 가 격물의 길로 나갈 수 있다. 본 연구는 파베르가 격물치지에 대한 기독 교적 해석을 통해 중국 전통의 태극, 리를 하나님의 종처럼 그 창조와 주 재 시에 사용하는 도구로 보고자 함을 고찰했다. 분명, 파베르는 선교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절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태극, 리를 폐기하기보다 이를 하나님의 창조물로 보는 기독교적 관점을 견지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를 통해 19세기 기독교와 유교의 또 다른 대화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코스마스는 6세기 중엽에 알렉산드리아에서『기독교지형학』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지구가 둥글다는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미의 그리스 우주관을 비판하고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려는 목적으로 저술되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자신이 젊어서 항해무역을 하면서 여행을 했던 에티오피아와 타프로바네와 인도와 중국 지역과 이루어지는 중계무역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바다와 만을 통한 국제무역활동은 인류의 삶에 필요한 물자들을 유통시켜 상호간의 우의를 증진 시킨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는 당시 자신 이 직접 방문했던 에티오피아의 아둘레를 중심으로 향료를 비롯한 다양한 무역이 이루어지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방문하지 않았던 타프로바네에서 인도와 중국 등지와 이루어지는 비단과 향의 무역을 설명한다. 그는 특히 인도의 동물과 식물과 해양식물을 소개하면서 에티오피아의 동물들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각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중계무역을 편견 없이 문화횡단성의 시각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6세기 동서양을 통해 이루어지는 무역을 통해 이러한 상품교역과 함께 각 지역에 전해진 기독교의 활동들을 설명하여 기독교 확산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T. S. 엘리엇은 20세기 시인 중에서도 여타의 시인과 확연하게 구별 되는 사상적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시인이었다. 엘리엇의 시학과 사상 에 대해서 행해진 기존의 연구는 철학적, 문화적, 종교적, 인류학적, 그 리고 심리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것들이 상당하다. 엘리엇은 당시의 심 리학, 철학, 인류학, 그리고 신비주의와 같은 종교적 사상의 방대한 학 문적 배경을 토대로 “자신의 종교적인 신념과 문학적 지표”를 형성하게 된다. 특히 엘리엇과 활동연대가 상당부분 중첩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Sigmund Freud)와의 연관성은, 이 두 사람의 시기적 문화적 중첩성을 고려해 볼 때, 직간접적인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세기 초부 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회, 문화, 예술 다방면에 걸쳐서 영향력이 줄어 들지 않고 있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엘리엇의 사상 및 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엘리엇이 문화와, 문명, 그리고 종교에 대해서 매우 깊고 진지 한 성찰을 행했던 것처럼, 프로이트 역시 다양한 저술을 통해 인류의 역사와 문명, 종교와 문화에 대한 많은 저작을 남겼다. 이런 점에서 본 논문은 엘리엇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인류의 문화, 문명, 종교라고 하는 아주 근원적인 요소에 대해서 각기 어떤 변별적 차이점을 지향하 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본 논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황혜화되고, 퇴락해 가는 영국과 서구 유럽의 문명에 대하여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 T. S. 엘리엇 이 그 문명 복구률 위하여 어떤 생각파 태도률 취했는지률 살펴본 것이다. 제l차 세계대전은 서구 유럽인들이 일찌기 경험환 적이 없는 대량 학살과 기독교의 전통적인 문화 유산올 파괴 • 황폐화시킨 대참사이었올 뿐만 아나라 정신적인 가치관에도 혼란올 가져온 위기의 근원이기도 했다. 대전이 끝난 1918년 이후, 유럽의 지성인들 은 유럽의 문명복구와 정신적 가치관의 회복에 대해서 다양한 방안들올 제시했다. 이러한 방안들 중 하나로 서구의 문화적 정체성올 탐구한 독일의 학자 쿠르티우스(Ernst Robert Curtius)는 독일의 문화 개념과 프랑스의 문명개념의 차이점 속에서 두 나라가 꽁유하는 보 편성올 찾는 노력율 보여주었다. 이 같은 쿠르티우스의 노력은 엘리 엇이나 다른 유럽의 지성인들에게도 상당한 자극을 주었다. 엘리엇은 쿠르티우스의 r프랑스 문명」이란 저서에서 독일과 프 랑스의 문화개념 속에 영국의 문화개념이 빼져있는 것올 지적하면 서 영국 문명의 근깐도 프랑스와 액율 함께 하는 고대 회랍과 로마 의 문명에 었다고 주장하였다. 아율러 유럽 문명의 정체성을 앨리엇 은 중세의 천 년에 걸쳐 유럽이 가톨릭 교회흘 중심으로 통합되었던 시대에서 찾으면서 전 후 서구 유럽의 문명 건셜올 위한 방안으 로 기독교 문명올 기초로 하는 유럽의 문화적 통합올 주창한다. 그 의 기독교의 문명부활 사상은 제l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국교회 당국이 시도하려고 했던 중세에 런던의 중심부에 건립된 교회의 파괴와 보수 작업에 대해 앨리엇이 어떤 태도률 취하였는가를 살펴봄 으로써 엿볼 수 있다. 영국의 교회 당국이 런던의 옛 교회들을 파괴하자고하는 결의에 반대하는 엘리엇의 이유는 근본적으로 국가의 공공기관은 필요에 의해서 과거에 건립된 젓이기 때문에 현재에 이르러 그 효율성이 떨어졌다고 해서 파괴되어서는 안된다는 보수주 의적 전통주의 사상올 보여주기도 하지만,그가 영국국교로 개종하고,영국의 신민이 되기 훨씬 이전,중세에 건립된 교회훌 파괴를 하고자 하는 집단과 맞서 투쟁한 얼례는 영국의 문명이 서구의 다 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기독교에 그 바탱올 두고 있다는 역사인식에서 비롯한다. 이러한 인식에 바탕옳 둔 엘리엇의 문명 복 구사상은 그로 하여금 영국의 문명복구는 오직 기독교의 사회 질서 훌 회복함으로써 가놓하고,서구 휴럽의 문명 회생도 기독교의 질서 만이 유일한 방안이라눈 기독교 유일흔옳 주장한다. 제l차 세계대전 이후 붕괴된 서구 유럽의 문명 북구훌 위하여 앨리엇이 제시한 기독교 문명사상윤 1930년대 초에 도우슨(Christopher Dawson)의 영향으로 강화되었지만,자신이 영국국교로 개종한 1927년 이전에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