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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Wang Hahn-sok. 2015. “A Reflective Confession on my Scholarship: Its Origins, Characteristics, and Achievements”. The Sociolinguistic Journal of Korea 23(3). 3~32. This paper builds on the special lecture that I gave at the 2015 Fall Meeting of the Sociolinguistic Society of Korea. The overall paper takes a kind of narrative form with reflective confession. Specifically, it consists of (1) scholarly genealogy of my study, (2) main characteristics of my study, (3) major achievements of my study, and (4) my special relationships with the Sociolinguistics Society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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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4.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W. B. 예이츠는 중국문학에 지속적 영향을 끼친 20세기 초 서양 작가 중의 하나로서 지금 중국에서 문학연구의 중심적 대상이 되고 있다. 중국의 예이츠연구는 3단계로 구분된다. 5.4혁명(1919)부터 194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이후(90년대 이후는 항시 상징주의가 주요 주제이다). 푸 두롱의 저서 W. B. 예이츠시의 상징주의 미학 (2006)은 이 분야의 이정표이다. 체계적으로 시인의 상징주의 논의를 분류 하고, 그의 작품에서 상징주의의 근원을 찾고 상징주의의 미학적 체계를 통찰력 있게 분석함으로써, 이 저서는 예이츠의 상징주의에 대한 중국학계의 연구를 요약한다. 이 저서는 세계 예이츠 연구에 커다란 자극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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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隱 權平鉉은 19세기 끄트머리인 1897년에 태어나 20세기 중반인 1969년까지 살면서 평생 한문지식인으로 자처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일제 식민지기를 거치고 다시 한국전쟁을 겪는 그야말로 평안한 날이 없는 날들이었다. 또한 그가 학문에 입문할 시기는 한문폐지론이 일었고, 儒學은 타파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문-유학을 자신의 학문으로 선택했고, 栗谷 李珥를 스승으로 받들었다. 특히 율곡의 四七說에 대한 독실한 믿음은 그와 다른 그 어떤 논의도 수용하지 않았다. 화은의 삶과 학문은 주변이나 시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여긴 바를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간 그의 강인한 정신의 징표이다. 그는 성현의 도를 지키는 것이 시대 변화를 追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비록 과거의 문자와 학문으로 전락한 한문과 유학이지만 거기에 새로운 미래를 위한 답이 있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예컨대 陰이 가득하면 반드시 陽이 다시 차오르는 이치와 같이 조국의 광복도 그런 이치 속에 이루어질 것이라 그는 믿었다. 그러나 그의 삶과 학문적 태도를 時宜라는 점에서 보면 아쉬움이 없지 않다. 하지만 철저하게 성현의 말씀을 따르고 체현하려 노력했던 20세기 마지막 유학자의 모습은 개인의 이익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이 행동을 바꾸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4.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조선의 16세기 『朱子大全』 刊行과 그 이후의 學問的 動向에 대해서 연구한 논문이다. 조선의 한문학은 주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 크다. 그러나 『朱子大全』의 간행보급은 16세기에 와서 이루어 진다. 이 책을 바탕으로 16세기 퇴계와 율곡을 거치면서 조선 성리학은 최고의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朱子大全』 간행이후 조선 선비들의 학풍은 변하였다. 『朱子大 全』의 간행은 성리학을 『性理大全』 중심에서 『朱子大全』 중심으 로 변환하게 하였다. 그리고 『朱子大全』 속의 백록동 서원의 기록은 주세붕에 의해 소수서원을 창건하게 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번져나간 교육의 영향은 조선을 크게 변모시켰다. 『朱子大全』 속에 들어있던 주자의 시는 조선 선비들의 경모의 대 상이 되었다. 특히 <武夷櫂歌>의 영향은 조선 선비들로 하여금 <九曲歌>를 짓게 하였고, 조선 산수의 자연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하였다. 주희의 詩文은 조선 사림들의 문장의 전범이 되었으며, 조선의 문풍을 변화시켰다. 『朱子大全』 속의 이기철학의 영향은 조선의 철학적 사유의 틀을 바꾸게 하였다. 그 이후 벌어지는 이기철학은 조선의 학문을 더욱 깊고 오묘하게 발전하도록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향약에 대한 영향은 조선 의 풍속을 변화시켰으며 조선 사회를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밖에도 『朱子大全』의 영향은 여러 방면에서 생활문화와 사상의 기저를 변화시켰다. 위대한 책 한권이 세상을 바꾼다. 『朱子大全』 한권이 조선의 학문을 변화 시켰다. 16세기 『朱子大全』 한 책이 조선 의 선비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5.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자신의 학문을 이루기 위해 외국에 유학갈 수가 없었으며, 자신의 연구업적을 외국 학자들에게 알리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삼국시대에는 중국이나 인도의 승려들이 삼국에 들어와 불교를 전파하였고, 신라의 승려들도 중국이나 인도까지 유학하였다. 고려 때에도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받아들였으며, 고려 학자들이 북경 만권당에서 원나라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러나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학자들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 진암(眞菴) 이병헌(李炳憲, 1870-1940)은 시대가 바뀌면 학문도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강유위(康有爲)에게서 공자교(孔子敎)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학문을 외국에 알리기 위해 다섯 차례나 중국을 드나들었다. 조선왕조와 청나라가 모두 망한 20세기초에 주로 활동한 학자이기에 쇄국시대인 조선후기 학자들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교통과 통신이 발전한 20세기초에도 이병헌만큼 열심히 국제화에 앞장선 학자는 많지 않았다. 이병헌의 아들 이재교(李在敎)도 아버지 이병헌의 학문을 외국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케임브리지대학 동아시아도서관에 소장된 한국 고서 가운데 ‘Wade collection 5종’, ‘Aston collection 17종’, ‘선교사들이 기증한 초기(1890-1901) 성경 collection 62종’ 외에 수집 경로가 분명한 책은 이재교가 1959년에 영어 편지와 함께 기증한 『역경금문고통론(易經今文考通論)』 1종 뿐이다. 이 책 안에는 이재교가 도서관에 보내는 편지 이외에, 이재교가 지은 「경고유교연구동지(敬告儒敎硏究同志)」라는 글도 들어 있었다. 이병헌이 「읍고조선십삼도유림동포(泣告朝鮮十三道儒林同胞)」와 「경고역내동포유림(警告域內同胞儒林)」이라는 글을 써서 자신의 학문을 조선 유림들에게 널리 알렸는데, 이재교도 같은 방식으로 외국 학자들에게까지 편지를 보내어 공자금문경학(孔子今文經學)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려고 애썼다.
        6.
        2015.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이 주목하는 문제는 바흐연구와 신음악학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음악학의 지류 중 가장 보수적이라 평가받는 바흐연구는 과연 신음악학과 관련이 있는가 또는 없는가라는 질문을 다루고 있다는 의미이다. 1985년 미국의 음악학자 커만은 자신의 저서, 『음악을 생 각한다』를 통해 당시 음악학의 연구대상과 방법론 등을 비판하고 이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커만이 제시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커만 스스로에 의해 비평, 그리고 이후 학자들에 의해 신음악학이라 명명되었다. 그러나 과연 신음악학이 바흐연구에도 침투 하였는지, 또는 하지 못하였는지 논의하고 있는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글은 이러한 질 문을 염두에 두고 1950년대 이후 바흐연구가 지나온 행적을 분석함으로써 신음악학의 영향 력을 진단하려 한다.
        7.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竹坡 李而楨(1619∼1679)은 밀양 사람이다. 그의 학맥은 金宗直으로부터 시작하여 寒岡 鄭逑, 그리고 부친의 가학과 處士 鄭寔을 거쳐 장인이면서 스승인 朴壽春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생전에 미수가 탐방하여 만난 적도 있다.그의 스승인 박수춘은 『소학』의 규범을 따른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곽재우와 함께 火旺城 전투에 참가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을 조직하여 청군에 대항하려 하였다. 이 같은 스승 박수춘의 행적은 죽파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그의 장형은 성균관에 입학했으나 서울에 온 동생이 갑자기 죽자 벼슬할 생각을 끊고 낙향한다. 그리고 죽파가 41세 되던 해인 1659년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48세인 1666년에 모친상을 겪었다. 밀양에 살고 있던 죽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예림서원 移轉에 관한 것이다. 조선왕조 전기만 하더라도 점필재는 경상좌도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며 정치가로 중앙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오사화 이후로 급격하게 쇠퇴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경상우도에서는 남명과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학통이 중앙정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파가 활동하던 시기는 인조반정 이후로 당쟁이 점차 격화되기 시작했고, 예림서원의 이전은 죽파에게 큰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다만 예림서원 이건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어 차후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당시 밀양에서 김종직은 탄생하였고 禮林書院에서 제향되었다. 죽파는 예림서원 이전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1634년(인조12)에는 죽파의 아버지인 泗濱 李繼胤이 여헌 張顯光(1554∼1637)에게 서원이전과 神座配享에 자문하고 죽파는 밀양부사 이유달에게 「예림서원이건정문」을 올려서 지금의 상남면 예림리로 새터로 옮기고 예림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점필재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迂拙齋 朴漢柱는 東壁, 松溪 申季誠은 西壁에 배향하면서 간송 조임도가 「이건고유문」을 죽파는 「예림서원이건기��를 짓는다. 1652년(효종3) 예림서원 講堂을 증축할 때 밀양부사 김응조를 대신하여 죽파는 「예림서원강당상량문」을 짓는다. 1669년(현종10)에 예림서원에 賜額이 내려진다. 하지만 1678년(숙종4)에 講堂에 화재가 난다. 그리고 죽파가 운명하고 나서 1680년(숙종6)에 廟宇에 또 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位版이 타버린다. 이에 다시 부북면 후사포리로 옮겨 중건하게 된다. 1658년 미수가 죽파를 만난 것은 부친상을 당하고 여막에 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미수가 예림서원에 와서 목격한 것은 墓碣과 石床, 華表, 神道碑, 松溪閭表碑이다. 예림서원에 배향된 분은 점필재 김종직, 송계 장현광, 우졸재 박한주인데, 미수는 밀양에 와서 송계의 여표비를 언급하고 있지만 우졸재 박한주의 여표비는 언급하지 않았다. 『죽파집』의 「迂拙子朴先生閭表碑事呈道伯文」를 보면 여표비를 세우기 위한 노력이 나타나 있다. 아마 미수가 예림서원을 다녀간 후 우졸재여표비가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다만 여표비는 현종 16년에 건립된 것으로 迂拙齋實記의 年譜에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죽파가 道伯에게 올린 글의 관련성은 차후의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죽파는 출사하지는 않았지만 향촌사회에서 기여하는 것이 컸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인명 피해가 나고, 풍속이 무너지자 명나라 丘濬(1420-1495)의 『家禮儀節』과 우리나라 선현의 설을 엮어『家禮節要』를 편찬하고 제사를 勸勉한 일이 있다. 「鄕約立議序」를 써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藍田의 呂氏 향약을 실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8.
        2013.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弘堂 李秉灝(1892∼1964)은 宜寧 中橋里에서 태어났으며 저술로 『弘堂文集』을 남겼다. 홍당은 성품이 方正하고 流俗에 휩쓸리지 않는 耿介한 성품을 가졌다고 한다. 학문이 귀중하다는 것을 안 것은 俛宇 郭鍾錫 선생과 艾山 鄭載奎을 만나고 나서다. 한편 1910년 경술국치 이후 深齋先生(1873∼1933)이 은둔하여 정산서당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을 즈음, 23세가 된 弘堂은 1913[癸丑]년 심재선생을 알현하고 다음 해인 1914년 鼎山書堂에서 수학한다. 이곳에서 鄕約으로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講和會議가 1919년∼1920년 사이에 진행되었을 때, 유림 측에서는 1919년 3·1운동 후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하여 보내려고 하였던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에 관련된 俛宇 같은 분은 심재와 긴밀한 관계였는데, 옥고를 치르고 이어 운명하게 된다. 이 일은 홍당선생이 이런 애국계몽기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30세가 넘었을 때 홍당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으며 집안은 매우 화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文山亭과 中和堂에 서재가 있었고 학도를 모아 놓고 강학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文山亭은 삼성 이병철회장의 조부 文山 李洪錫翁이 건립한 것이다. 홍당은 중년이 된 이후에 馬港으로 왔다. 馬港에 우거하고 일을 때 주변에 있는 선비들과 자주 어울리면서도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단아한 모습으로 학문교류를 하며 즐거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학문을 연마하는데 있어서는 자신에게 엄격하였다. 仲兄이 운명하였을 때는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보냈고, 홍당보다 16년 전에 부인이 먼저 운명하게 되었을 때 다시 부인을 맞이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 문장가로 알려진 山康 卞榮晩(1889~1954)과도 일정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서책이 불타 俛宇 같은 분들의 글이 없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홍당은 향년 73세로 馬港에 운명한다. 이때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인 유생 수백 명이 조문하고 아쉬워하였다. 『弘堂文集』은 선생이 스스로 교정을 보고, 필사하게 하였는데, 스스로 讀書를 잊지 않고 일생을 살았다는 것을 同好人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라고 밝히고 있다. 특히 그의 문집을 보면 만년에 학문이 더욱 정교 해졌고, 論辨도 휼룡한 것이 많았다고 한다. 홍당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은 과거제도가 폐지되는 등 전통 사회가 변화하는 시기였다. 심재와 홍당은 宋學을 중심에 두고 학문을 한 분이다. 홍당이 고찰한 학문 세계 중에 유달리 퇴계 이황으로 이어지는 理氣論을 계승 발전시킨 내용이 자주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이런 학문적 연원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주희는 자신이 살던 시대를 불교에 맞선 유학이 위기를 맞은 시대로 파악하였듯이 홍당은 국난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자기가 살던 시대를 바라보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先祖와 연관지어 홍당의 인생행로를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11대 조상 芝峯은 명리를 떠난 선비였다. 芝峯은 임진왜란 때 火旺城 전투에서 곽재우와 같이 참전하였다. 홍당이 시대를 아파할 때 남명과 곽재우처럼 다시 深齋와 俛宇을 만났고 이것은 자신의 삶에 커다란 의미로 다가온 것으로 보인다. 홍당을 통하여 영남 의령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유학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
        2009.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My study is a critical examination of the historiography of Korean musical scholarship and a more comprehensive view of Korean music and history. The main goal of this study is to elaborate a new form of rhetoric and strategy for both historical and ethnographic studies of Korean music. By exploring the various attempts of earlier scholars to establish indigenous musical scholarship, my study details how musical scholarship can symbolically represent the core of historical tension and amnesia which has resulted in conflict between indigenous vs. foreign, tradition vs. modernity, and past vs. present in modern Korean society. Following the spirit of Michel Foucault’s dialogics and micropolitics, my study explores the following theme: why and how academic discourses have played an ambiguous role in encouraging, and at the same time discouraging monolithic and canonized language use and scholarly convention. Furthermore, my observation on discourse reveals the interaction produced between power and resistance in the larger process of institutionalization and the concomitant processes of de-institutionalization.
        10.
        200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단파 하계룡의 학행과 그의 시세계를 살펴본 것이다. 단파 하계룡은 세상에 크게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겉으로 보아서는 이렇다 할 벼슬을 한 것도 아니고, 남긴 약간의 저술이 󰡔단파유고󰡕라는 이름으로 후손에 의해 정리되어 출간된 것 이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다. 하지만, 그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삼불후 가운데 벼슬을 뺀 치와 덕을 누린 사람으로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당대의 대표 적 학자인 정재규와 권재규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가 당시에 이러한 평가를 받았던 까닭은 그의 선조 창주와 습정재로부터 물 려받은 가학, 그 가운데에서도 효성을 깊이 본받았고, 또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에서부터 이어져온 학문, 그 가운데에서도 실천적 행실을 배운 때문이었 다. 그래서 그는 집안에서는 위로 선조와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아래로 친족 과 자손들에게 돈목과 우애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향촌의 인사들에게 존모를 받았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일생과 삶의 지향은 그의 많지 않은 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첫 째는 과거가 자신이 갈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공령을 버리고 학문을 좇았 던 일을 노래한 것이고, 둘째는 자신의 부모형제와 선조가 있는 고향에 대한 그 리움을 노래한 것이다. 셋째는 효를 실천하는 차원에서 일생 심력을 기울여 추 진했던 선조에 대한 추념을 노래한 것이고, 넷째는 같은 선조 아래에서 우애 있 게 지내기 위해 노력하던 마음이 담긴 친족 간의 화목을 중시하던 뜻을 읊은 것 이다.
        11.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晩醒 朴致馥은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한 중국적 세계질서가 붕괴되는 시기에 영남 강우의 유학을 다시 일으킨 대표적 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 재 류치명을 사사하여 전통적인 퇴계학파에 속하면서도 남명 조식의 학문과 사 상을 수용하였으며, 유학을 현실의 맥락에서 재해석하고자 했던 성재 허전의 학문에도 심취했다. 만성은 당시 국가가 당면한 총체적 위기는 유교적 교훈을 따르지 않았던 데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보았으며, ‘진정한’ 유교적 정치사회질서를 회복하는 것만이 국가가 처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올바른 처방으로 보았다. 구체적으로는 ‘華夷論’을 수용하여 오랑캐인 서구세력의 침입으로부터 조선 을 보호해야 하며, 조선은 ‘中華’로 상징되는 유교적 가치와 질서의 옹호자여야 했다. ‘斥邪論’은 당시 집권층과 학파적 바탕을 같이하는 기호지역 유학자들의 지론이었는데, 만성을 통하여 영남의 유학자 가운데서도 이에 적극적으로 공감 하는 사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성은 비록 조선후기 일반의 유학자들이 갖 는 세계인식의 한계를 공유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눈을 통하여 당시 조 선지성들의 사유세계와 그들이 안고 있던 위기의 본질을 엿볼 수 있게 한다.
        12.
        200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진주의 해주정씨는 17세기 이후 진주 지역의 대표적 가문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 져 왔다 이 논문에서 말하는 晉州 의 海州鄭民는 農園 鄭文孚(1565-1624)의 후손 및 농포의 아우 鄭文益(1568-1639)의 후손을 말한다. 농포의 두 아들 鄭大榮 (1586-1658)과 鄭大隆(1599-1661) 및 농포의 아우 鄭文益등 三叔姪이 어떻게 해서 진주에 정착하여 진주 지역의 대표적 가문이 되었으며,남명학파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진주 지역에서 이들이 가진 학문의 성향은 어떠한가 하는 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진주의 해주정씨는 농포의 아우와 두 아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들이 처음 진주로 온 것은 避兵이 그 주된 목적이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전대의 혼인관계로 인 해 상속받았던 田莊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음도 또한 분명하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다시 서울 생활을 하려고 했었던 것 또한 확인되는 바였다. 그러나 농포가 李适의 난 이후 昌原府使시절에 지은 詠史詩로 인해 遊謀로 처형당하고,遺言 에 의해 그 아우와 아들들이 진주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부분은 좀 더 생각하게 하 는 점이 없지 않다. 광해군 시대 창원부사 시절의 詠史詩로 인해 반정 이후 인조 시대에 역모로 처형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으로서는 자료가 부족하여 증빙하기 곤란하지만,이는 당시의 집권층이 농포가 광해군 시절 북인으로서 내암 정인흥과의 관 련이 적지 않았다고 보았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물론 농포로서는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관련하여 환멸을 느끼고 자손들에게 정치적 은둔을 유언한 것이 아닌가 판단되는 것이다. 해주정씨가 진주에 정착한 초기에는 南冥學派를 영도하는 위치에 있던 謙齋 河弘度의 지우를 업어 남인으로 입지를 굳히는 듯하였으나,1665년을 전후하여 농포의 신원에 앞장섰던 澤堂 李植의 아들畏齋 李端夏에게 집지하는 인물이 나타나면서 서서히 노론화한 것이다. 그러나 노론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것은 경종때 남인으로부터 심각한 핍박을 받은 뒤 영조가 즉위한 이후 이에 대한 보복성 핍박을 남인에게 가함으로부터d였다. 이 일이 일어난 지 20여 년 후에 얼어난 宗川書院 禍變의 주동자가 이 가문에서 나옴으로써 남명학파를 주도하던 남인과의 관계가 극히 악화되었고,근가 지역의 노론 학자들로부터 학업을 전수함으로써 이 지역의 남명학파에 대해서는 상대 척으로 관심이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진주의 해주정씨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남인과의 관계도 대체로 나빴다고 할 수 있고,남명학파에 대한 관심의 정도 또한 보잘것없다고 할 수 있지 만,문집이나 유고 등을 남겼다는 이가 58 인이나 있다는 것은 학문에 대한 관심만큼은 여타 가문에 뒤지지 않으려 하였던 결과로 보인다. 남명학파라는 범위를 벗어나서 생각해 보면, 이와 같은 사실로 인해 해주정씨가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경남 지역의 학문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3.
        200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study examins the prestigious scholarship genealogy and trend of scholars who lived in the right side of Kyungsang province in the 19th century. In the right side region of Kyungsang province in 19th century, Lee Jin Sang(李震相) and Kwak Jong Seok(郭鐘錫) overtured the theory that the mind(心) is just Li(理). The theory criticized an old theory that the mind includes Li and Ki(氣) or the theory that the mind is just Ki. The theory is unique on the basic understanding that the mind is ruling Li and put an emphasis on the reality of the mind. The theory is for the quest of an answer in the Ki-centered theory(主氣說) which dominated the period. In the later half of 186, the right side region of Kyungsang province accommodated many other theories from another regions. First of all, Huh Jeon who is from Pocheon Kyunggi province promoted the scholarship trend of right side of Kyungsang province and the studies of etiquette. In addition to that the Li-centered theory(主理說) which was suggested by Ki Jeong Jin from Jeol la province was actively accepted. The scholars from right side region of Kyungsang province also accepted Lee Hang Lo's Li centered theory. Thereby the scholars who lived in the right side of Kyungsang province united themselves setting them free from Confucian party oriented mind or scholarship genealogy. The scholars who live in the right side of Kyungsang province held many seminars. And they also held Hyangeumjurye(鄕飮酒禮 : banquet for identifying young and old). In Sancheong. 1877, seminar and banquet were the example in case. By taking this opportunity, the scholarship trend of promoting Nam Myeong(南冥 : representative Confucian scholar) vividly revived. Also by taking the chance, the scholars who lived in the right side of Kyungsang province newly established their theory and set to put their best effort to promote and research the meaning of Nam Myeong' philosophy. In te following year, they held seminar at Seon Seok temple(禪石寺) in Seong Ju. The meeting also has an important meaning to unite the scholars who live at the right side of Kyungsang province. The seminar and scholar's activity at the right side region of Kyungsang province in the 19th century has greatly contributed to the confucian independent movement by uniting representative of confucian scholars all through the nation in 1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