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이츠의 시는 유토피아를 찾는 내용이 많다. 자신의 삶이 고통스러웠 음을 반증한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반평생 쫓아다닌 모드곤의 사랑을 얻지 못했고 사 회적으로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갈라진 아일랜드가 늘 서로 싸우고 헐뜯고 비난하는 세상을 경험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드니 또 다른 형태의 고통인 생로병사의 문제점에 직면한다. 그때마다 그의 시는 유토피아를 향한다. 늘 고통 속에서 몸부림 쳤던 시인 의 생은 어쩌면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예이츠는 예술가의 임무는 비극 속 에 신음하는 인간을 유토피아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결 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인의 유토피아는 결코 물질적인 장소의 개념이 아니다. 시인 은 자신의 마음 깊숙이 존재하는 생각, 사고의 프로세스, 자유롭게 상상하는 힘, 죽은 자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예술적 창조의 힘, 그리고 명상의 힘이라고 말한다. 시인에게 는 그 정신적인 힘 그 자체가 유토피아이다.
이 논문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조각상」 , 「델픽 오라클을 위한 소식」 , 그리고 「긴다리 파리」 의 순서에 대한 중요성을 탐구하려한다. 본 연구자는 이 세 시의 순서는 예이츠의 위대한 예술에 대한 견해를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즉 예이츠는 위대한 예술은 비극으로 시작해서 기쁨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섹스로 끝난다고 쓴 적이 있다. 예이츠는 예술을 신혼 첫날밤의 기쁨 같은 존재에 비유하기도 했다. 「조각상」은 비극적인 시이고 「델픽 오라클을 위한 소식」은 섹스의 기쁨을 노래한 시인데 이 기쁨은 예이츠에게는 천국이요 유토피아의 세계이다. 이 두 시 다음에 「긴다리 파리」가 위치한 점을 눈여겨보아야 하는데 이 시 역시 비극과 섹스라는 같은 주제를 다루어 앞서 제시된 같은 주제를 확장하고 강화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시를 통해 기쁨을 추구하려는 예이츠의 의도는 그의 정치적인 목적과 깊은 연관이 있다. 즉 아일랜드 국민을 유토피아로 이끄는 것이다. 여기서 시인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고대 그리스보다 더 위대한 문명의 요람으로 세계에 우뚝 설 미래의 아일랜드이다.
『나선계단과 기타 시들』의 구조는 가이어를 형상화한 것이다. 시집의 서시는 나선계단의 초입 즉 작은 원, 시집의 결론부분인 『젊은 그리고 나이든 여인』은 나선 계단의 마지막 부분 즉 큰 원을 연상시킨다. 이 가이어는 예이츠의 철학과 역사관을 나타내는데 시집의 시작을 신생 아일랜드 자유국의 분열된 정치판을 그리고 시집의 끝을 고대 유럽 특히 그리스의 신화와 희곡으로 맺는다. 이렇게 아일랜드와 고대 그리스를 가 이어로 연결시킨 예이츠의 의도는 분명하다. 비록 지금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분열되어 있지만 미래에는 아일랜드가 동서양을 아우르는 보다 포용적인 나라가 될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한 인류의 문화적 철학적 전통도 계승하게 될 거라는 시인 자신의 철학과 역사관을 표현한다.
비잔티움 시에는 이십세기 초 서구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모던시인들의 시도에 동참하려는 예이츠의 노력이 반영되어 있다.. 예이츠는 엘리옷 파운드와 마찬가지로 동양에서 그 해법을 찾으려 했다. 비잔티움 시는 서구의 독자들에게 새로운 영적 전통을 제공하려는 예이츠의 시도이며 비잔티움은 서구의 종교적인 전통과 동양의 영적인 생각이 어우러진 유토피아를 나타낸다. 이 두 편의 시에서 예이츠는 크리스천 내러티브 전통을 바탕으로 불교개념의 고통과 환생 그리고 인간 고통에 대한 동양 철학의 통찰을 조합하여 새로운 상징을 창조한다. 이 작업은 존재의 통합을 실현하려는 평생에 걸친 시인의 노력의 일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동양과 서양에 위치한 비잔티움은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새로운 예이츠식 종교의 상징이다.
이 시의 중심 이야기 즉 여신 이퍼와 젊은 전사와의 사랑의 이야기는 보통 정치적, 예술적 의미로 받아드린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는 예이츠와 모드 곤과의 좌절된 사랑의 의미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 이를 어떻게 극복할건지에 대한 의미도 숨어 있다. 이퍼와 젊은 전사의 사랑 이야기 속에는 시인과 모드 곤과의 관계가 숨어 있다. 이퍼가 자신을 버린 젊은 전사를 원망하는 마음은 자신을 버린 모드 곤을 향한 예이츠의 마음이라는 말이다. 이퍼의 아픔은 고반이 빚은 술로 치유된다. 여기에서 술은 예술을 상징한다. 즉 시인은 스스로 좌절에서 벗어나는 길은 앞으로 창작활동 뿐이라는 점을 천명하고 있다.
미친 제인 연작시의 마지막 시는 그의 문학적 스승의 철학인 ‘육체적인 사랑은 영적인 미움에 근거한다’(‘sexual love is founded upon spiritual hate’)로 축약 되는 블레이크의 철학을 바탕으로 쓰였다. 이 철학이 잘 반영된 시가 바로 블레이크의 영적여행자이다. 이 시를 읽어보면 블레이크의 철학적 사유는 동양의 음양 이원론과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늙은 미친 제인은 예이츠 버전의 정신적 여행자이며 그의 문학적 스승의 사유를 자신의 연작시의 결론으로 차용함으로써 연작시 주제의 확장을 의도한다. 즉 이 연작시의 주요 요소인 사랑과 죽음을 여섯번 째 시에서는 존재의 통합(Unity of Being)에 필요한 서로 상반된 두 요소로 보지만 마지막 시에서는 사랑과 죽음을 두 개의 얼굴을 가진 한 몸으로 인식한다.
모던 예술가들은 메두사가 지닌 성적으로 매력적이면서도 죽음을 연상케 하는 기괴한 모습에 사랑에 빠졌다. 이 이중적인 이미지에서 심미적인 힘뿐만 아니라 우리의 관습을 타파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예이츠의 미친 제인이 바로 이 메두사의 디앤에이를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메두사 처럼 성적인 면과 폭력적인 면을 섞어 혁명적인 변화의 상징 역할을 한다. 이런 미친 제인은 예이츠는 그가 반대하는 방향으로 나갔던 아일랜드의 정치적 종교적 기득권 세력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누가 진짜 미쳤는가?
데이비드 홀드먼은 그의 저서 『인고의 고통』에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의 『일곱 숲에서』(In the Seven Woods, 1903)를 접근할 때 텍스트비평 이론이 얼마나 유용한지를 잘 보여준다. 홀드먼의 저서는 멕간의 텍스트비평 이론에 기반한 서지코드 (즉, 글씨체, 제본 형태, 인쇄 형태, 인쇄 재질, 삽화 등) 그리고 본 스타인이 콘텍스추얼 코드라고 명명한 시집의 순서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이 코드들은 결국 모더니즘의 핵심 가치 중의 하나인 서로 모순되는 개념의 통합과 지향점이 같다는 점을 주장한다. 이 책은 예이츠가 모더니즘을 받아들인 시기를 보통 1920년대 이후로 생각해온 학계의 의견을 1900년대 초반으로 수정하게 만든 중요한 연구로 평가받는다. 본 소고는 기본적으로 홀드먼이 분석한 비언어적인 코드와 콘텍스추얼 코드를 소개하고 홀드먼의 저서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신경 쓴 예이츠 시의 언어코드를 분석하여 예이츠의 언어가 이 시집에 사용된 비언어적인 코드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월터페이터가 1869년에 쓴 『르네상스 시대 : 예술과 시의 연구』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파트에 있는 모나리자 문장은 모더니즘과 모던 영미시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예이츠 시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 평론집에 나타난 페이터의 사상은 예이츠의 후기시 특히 가이어스 (“The Gyres”)와 청금석 부조 (“Lapis Lazuli”)에서 그 울림이 느껴진다. 모나리자 문장은 페이터의 역사관과 사회관을 반영하는데 그 정수는 역사와 세상은 늘 변한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예이츠의 두 시에는 모나리자 문장을 연상케 하는 표현들이 숨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비슷한 역사관을 토로한다. 즉 역사는 늘 변한다는 관념이다. 그래서 두 시는 공히 지금 어렵다고 슬퍼하지 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곧 좋은 시절이 다시 올 것을 믿으니까 말이다.
예이츠는 『소금쟁이』 에 큐비스트 요소를 반영, 시 표현 방법의 가능성 을 확대한다. 『소금쟁이』 를 분석해보면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이 표현하는 성과 죽음의 분위기가 느껴지고 또한 피카소가 모델을 이등분 삼등분으로 분해시킨 후 재 구성하여 그린 『거울 앞의 소녀』 의 모습도 떠오른다. 전자가 모더니즘을 사로잡은 주 제 중의 하나라면 후자는 모던화를 겪으면서 발생한 단편화 현상과 연관이 있다. 『소금쟁이』 는 지난날의 자신의 모습을 분해하여 삼등분하여 재구성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지난 날 민족주의자로서, 시인으로서, 또 정치가로서의 삶의 편린들이다. 또한 젊 은 예이츠부터 노년의 예이츠까지 시인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성에 대한 탐닉과 죽음 에 대한 고뇌가 배어 있다. 이러한 그의 기억들이 이 시안에서 선, 면, 원, 그리고 도 형을 닮은 큐비스트의 언어로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예이츠는 그의 시에서 성적인 은유와 죽음이라는 소재를 즐겨 다루었다. 이는 그의 초기시부터 후기시까지 상당히 광범하게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를 다룬 초 기와 중기 그리고 후기의 시들을 비교해보면 성적인 메타포와 죽음에 대한 소재가 그 의 시적 또는 영적,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에는 사후 또는 영의 세계로의 유혹의 도구로 사용되다가 중기에 이르러 서는 죽은 아이리쉬 영웅들을 기억 속에서 소생시키려는 그의 의도를 느낀다. 후기에 는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분열이 가져온 한 정치적 영웅의 죽음을 반추하며 이러한 극한대립을 화해하고 녹이기 위한 비전으로 승화시킨다.
이 논문의 목적은 마이클 로바츠의 이중 비전이 어떻게 선불교 명상을 표현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시는 선 불교명상의 진행 단계에 따라 구성되 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명상의 기본적인 관심사 즉 이원론에 대한 문제, 시간의 개 념, 그리고 이세상의 한계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선 불교 명상의 요소들이 특정한 상징, 시의 세팅, 그리고 다양한 시적 테크닉을 통해 나타나 고 있다.
모던시의 특징 중의 하나는 서사 형태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모던시인들이 가장 높고 고귀한 형식의 시로 꼽는 서사시를 그들의 시대에 되살리려 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리고 학자들은 이 예로 에즈라 파운드의 캔토스와 티에 스 엘리엇의 황무지를 꼽는다. 나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도 이 모던시인의 그룹에 속해야 한다고 믿는다. 예이츠는 비록 캔토스나 황무지에 비견될만한 서사형태의 시를 쓰지는 않았지만 그가 쓴 많은 시들이 서사시의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는 예이츠 역시 파운드나 엘리엇처럼 전통을 존중하고 그 전통에서 시적영감을 얻을 뿐만 아니라 시적 연속성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예이츠의 『파넬의 장례식과 기타 시들』(Parnell’s Funeral and Other Poems)은 다른 예이츠의 시집과 마찬가지로 이 시집에 수록된 시 전체의 배열과 개별 시의 의미를 함께 고려해 볼 때 그 시집이 지향하는 주제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앞부분에 배치된 시들은 주로 그 당시 아일랜드의 정치적인 분열과 혼란을 다루고 뒤에 예이츠의 종교적인 신념을 다룬 초자연의 노래 (“Supernatural Songs”)를 배치했다. 이 연작시에는 영과 성, 남과 여, 너와 나, 나와 신, 신과 신, 어제와 내일, 밤과 낮, 순간과 영원이 하나 되고 일체되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그가 평생 추구해온 그의 정치적 종교적인 비전인 존재의 합일(unity of being)의 또 다른 표현이며 결국 시집 전반에 제시된 갈라진 아일랜드를 통합을 염원하는 시인의 처방전 역할을 하는 것이다.
초기 예이츠 시의 특징 중의 하나는 자연세계와 초자연 세계와의 관계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이츠가 성장하면서 초자연세계의 탐닉으로부터 점차 벗어나고자 하는 시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책임』의 서시 『회색바위』를 통해서 예이츠가 이전에 갖고 있던 초자연 세계에 대한 동경의 자세가 부정적인 측면이 가미된 애증의 자세로 바뀌게 된다. 이 시에서 시인은 한편으로는 초자연 세력인 뮤즈에서 신념을 받치고 있노라고 강조하지만 그 뮤즈가 속한 신의 집단에게는 전과는 다르게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세상너머 세력 즉 신비의 세계에 대해 애증을 함께 갖는 이중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신에 대한 달라진 태도는 사실 이 시가 실린 시집 『책임』의 전체적인 내용에서도 확인이 되는데 신비의 세계를 많이 다루었던 이전 시집들과는 다르게 여기에서는 대부분 사회적인 이슈들을 더 많이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서시의 아이러니는 자신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바로 그 신의 세계에 의지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다.
이 논문은 먼저 연금술의 과정이 의미하는 것을 살펴보고 그것의 상징적인 의미 그리고 그 과정이 예이츠가 시나 시집에 수록된 시들의 순서를 정하는데 어떻게 도움을 주었나를 연구한다. 연금술 과정이란 다름 아닌 납을 금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예이츠는 이 과정을 그의 시뿐만 아니라 그의 시집에도 이용하고 있다. 시와 시집 공히 알케미컬 내러티브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시와 시집이 혼돈의 상태에서 시작하여 정제된 상태로 끝을 맺거나 아니면 최소한도 도입부에 암시된 거친 상태를 순화시킬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마치기 때문이다. 나의 논지는 납에서 금으로의 변화는 예이츠가 자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그의 조국이 필요로 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논문은 오든의 어느 저녁 때 산책하면서 와 예이츠의 비잔티움으 로의 항해 와 학교 어린이들 사이에서 를 비교하여 이 시들의 공통관심사인 시간의 문제가 어떻게 다르게 다루어지고 있나를 논의한다. 오든은 기본적으로 시간의 힘과 독재에 대한 인간의 나약함과 무기력함에 대한 관망 또는 명상하는 자세 그 이상 이 하도 아닌 반면에 예이츠는 이 문제를 극복하고 초월하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이 는 두시인의 다른 시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결국 이 차이는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차이 를 구별 짓는 많은 요소 중의 하나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문학의 역할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으로 귀결되는데 예이츠는 낭만주의의 후예답게 문 학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데 반해 오든은 그러한 문학의 힘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이츠는 시인의 역할은 민중을 깨우치는 위대한 선 지자로 보는 반면에 오든은 현대사회에서 과학의 발달로 인해 시인의 사회적 위상이 많이 약해졌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세븐우드에서』에 수록된 시들은 각기 다른 독립적인 주제를 갖고 있지만 이 시들을 다시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상당히 교묘하게 꾸며져 한 이야기를 구성하게 된다. 이 이야기 속에는 주인공이 그 자신의 고뇌와 문제점들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며 이를 위해 태양과 달의 결혼이라는 상징으로 여겨지는 자신만의 성배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 그려진다. 이 성배는 신비주의 연금술의 산물이다. 예이츠가 여기에 매료된 것은 물질적인 영역에서 평범한 철을 철학자의 돌을 이용하여 금이나 은으로 변하게 하듯이 영적인 영역에서 인간의 몸을 완벽한 영혼의 소유자로 재탄생 시킬 수 있다는 이 시스템의 믿음 때문 이었다. 따라서 반인 반수가 의미하는 상징은 연금술적인 함의가 내재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븐우드에서』의 여정을 통해 시인이 끊임없이 반복하는 주제는 신비주의 연금술의 마지막 목적인 남성상과 영성상의 신비적인 결합은 이 세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신만의 성배를 찾기 위한 시인의 끈질긴 노력을 통해 우리는 시인의 예술적 상상력의 쉼 없는 진화를 목도하게 되며 이것이 바로 예이츠 예술의 정수이다
예이츠의 “The Double Vision of Michael Robartes”는 대개 그가 쓴 A Vision의 맥락에서 분석되어지고 있다. 즉 Ellmann, Bloom, Henn, 그리고 Bornstein 같은 비평가들은 시인이 서로 대립되는 세계로 분류한 제 일 장과 제 십오 장을 합일하려는 시도에 초점을 맞추어 이 시를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은 이 시는 전형적인 동양의 명상 과정을 모델로 그 구조가 이루어져있고 그 명상 의 목적은 육체나 영혼, 삶과 죽음, 그리고 움직임과 정지와 같은 서로 대립되는 세력의 조화로운 합일 뿐 만 아니라 동양과 서양의 합일이라는 예이츠의 정치적의식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그의 여러 글에서 주장했던 유럽과 아시아의 합일의 꿈이 자비를 의미하는 동양의 상징인 부처와 지성을 의미하는 서양의 상징인 스핑크스의 합일이라는 형식을 빌려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이것으 로 우리는 그가 민족주의의 한계를 느껴 서서히 민족주의자에서 세계주의자의 의식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대부분의 시가 그렇듯이 동양과 서양의 결혼의 가능성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지에 대한 시인의 명확한 대답은 유보되어 있는 형편이다. 이는 예이츠가 평생을 바쳐 풀려다 결국 풀지 못한 초월세계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