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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
        2011.1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건설기술자들에게는 첨단 복합재료구조에 대한 이론이 너무 어려워서 간단하면서도 쉽게 적용할 수 있는 정확한 방법을 필요로 하고 있다. 단순지지된 적층판을 특별직교이방성 적층판 이론에 의하여 해석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형상비를 1 : 1 ~ 1 : 5 까지 변화시켜가며 해석을 수행하였다. 대부분의 교량이나 건물의 상판은 형상비가 큰 경우가 많은데, 이런 구조물의 평형방정식에 대한 종방항 모멘트항(M_x)의 영향은 매우 작아서, 더욱 간단한 해석이 가능하다. 본 논문에서는 특별직교이방성 적층판의 고유진동수에 대한 형상비의 영향을 연구하였으며 이 방법을 사용하면 충분히 정확한 값을 산출할 수 있다. 본 논문의 연구의 결과는 단순지지된 특별직교이방성 적층판의 해석에 이용할 수 있다.
        182.
        2011.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Further to Lee (2008) where Aspect is proposed to be located in VPlayers in Korean, this paper considers a wider range of data from the area of verb copying from Korean to consolidate the proposal. Parallel Chinese examples of the same verb copying construction are also considered to corroborate the current position. From a theoretical perspective, the results obtained surprisingly lead to the underlying head-initial structure in Korean as well. Thus Kaynean (1994) universal Spec-head-complement order hypothesis is supported, and head-parameter is rendered to fall out of the Universal Grammar, as recent Minimalist Program claims.
        183.
        2011.0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최근 들어 교량 구조물의 장대화 경향에 따라 국내에서도 장대교량의 건설이 진행 되고 있고, 컴퓨터의 발달과 계산 기술의 향상에 힘입어 고비용의 풍동실험을 대신 할 수 있는 전산유체역학의 다양한 수치 해석적 기법의 적용이 증가하고 있다. 그에 따라 경계조건에 대한 정확한 입력뿐만 아니라 정확한 모델링 또한 전산유체역학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자원의 한계로 경제적이면서 보다 정확한 효율적인 모델링 기법이 연구되고 있다. 효율적인 모델링 기법 중 가상경계법을 들 수 있는데, 기존의 가상경계법은 물체 형상의 외곽형상이 부드러운 경우 외삽법에 의한 운동량 가중방법으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교량 단면과 같이 날카로운 모서리를 갖거나 물체면을 이루는 면이 예각을 이루는 경우 보정점의 선별과 보간 방법에 따라 수치해석이 발산하는 문제점 대한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본 연구에서는 가상경계법에 의해 날카로운 물체 주위 유동 해석 기법 개발을 위하여 내삽법에 의한 운동량 보정 기법을 개발하고 삼각형 단면 주위의 유동 해석에 적용하여 변장비 변화가 공기력 계수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였다.
        184.
        2011.0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댐퍼는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로 인한 구조물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구조물에 도입되는 에너지 저감장치로써, 이에 대한 연구와 적용은 반세기에 걸쳐 진행되어 왔다. 특히 수동형 댐퍼의 대표격인 강재댐퍼는 197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형태의 연구가 수행되어 크고 작은 건축물에 적용되어 왔다. 본 연구에서는 국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슬릿형 강재댐퍼의 성능평가실험결과를 수집하여, 슬릿을 형성하는 스트럿 높이에 대한 폭비(형상비)에 항복강도 특성을 평가하였다. 주 평가 대상은 설계를 위한 항복강도이며, 실험결과대 설계식에 의한 결과를 비교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국내에서 최근 널리 사용되고 있는 강재댐퍼의 항복강도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위하여 국내외 실험결과를 대상으로 한 평가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기존 국내 제안식이 스트럿 형상비 0.2이하, 1의 휨거동 및 전단거동이 명확한 경우의 항복강도를 예측가능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렇지만 향후 보다 많은 실험결과를 통하여 스트럿 형상비 및 슬릿 형상에 대한 보완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판단되며, 일본에서와 같이 강재 댐퍼용 저항복강재의 개발이 필요한 것으로 판단된다.
        185.
        201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19세기 경상우도 학풍 속에서 趙性家(1824-1903)와 崔琡民(1837- 1905)의 활동을 분석하여 노사학이 어떻게 전개되어갔는가를 살펴본 것이다. 경상우도 지역은 19세기에 새로운 성관집단이 성장하면서 학파를 비교적 자유 롭게 선택할 수 있었고, 각 가문에서는 과거 급제나 학행에 뛰어난 인물 배출을 위해 노력한 결과 진주 일대의 학문 수준은 그 이전시기보다 훨씬 높아지는 결 과를 갖게 되었다. 각 가문에서는 書齋를 지어 학문에 몰두하였으며, 지리산과 덕천강의 풍경이 뛰어난 곳에는 樓亭을 지어 문장을 통해 당색을 뛰어넘어 교제하였다. 문장 외 에도 경학이나 성리학에 뜻을 둔 학자들은 호남의 기정진과 같은 저명한 학자 들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경상우도의 기정진의 문인들은 섬진강과 지리산을 따라 이어진 길을 따라 호남으로 나아갔는데, 곳곳에 숙박할 수 있는 객점과 시 문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족들이 분포되어 있어서 여행이 용이하였다. 또한 장 성의 김인후나 함양의 정여창의 후손 등 영,호남을 대표하는 사족들 간에 혼인 도 이루어지고 있어서 호남 지역을 왕래하는데 정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 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기정진의 명성이 높아지자 많은 학자들이 기정진을 찾 아와서 수학하게 된 것이다. 조성가와 최숙민은 19세기에 성장한 가문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경상우도에 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이다. 그들은 河達弘(1809-1877)등에 의해 전개된 시 단에 참여하여 다수의 시를 남겼으며, 장성의 기정진을 찾아가서 주리론에 바 탕을 둔 성리학에 잠심하였다. 조성가는 호남지역 문인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하달홍 이후 이 지역의 시단을 이끌었으며 영, 호남간의 노사학파의 가교 역할 을 하였다. 그는 崔益鉉이나 宋秉璿, 李震相 등이 찾아올 정도로 명망이 높았으 며, 관찰사나 목사 등 지방관과 함께 향약을 실시하여 향촌질서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또한 남계서원의 원장이 되어 강규를 새롭게 정하거나 조식의 신도비 의 일에 주도적으로 관여하였다. 또한 최숙민은 남인 출신이지만 기정진에게 수학한 인물로서 이항로나 이진 상의 문인들과도 교제하면서 기정진의 학설을 심즉리로 이해하였다. 그는 기정 진에게서 성리학을 수학한 이후 동문들과 강회를 자주 개최하였으며, 조식을 숭상하여 山川齋에서 德山講約의 강규를 정하는 등 강학에 힘써 산청과 단성, 진주 일대에 다수의 문인을 배출하였다. 그의 학문은 기정진의 학설을 추종하 여 매사에 천명 즉 천리를 구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삼강오륜의 도덕적 질서 를 중시하고, 의리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체 행동을 배격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 에 그는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도에 어긋난다고 반발하여 직접 언문을 지어 단성의 吏民들을 효유하여 결국 단발령을 철회하게 하였다. 이처럼 조성가와 최숙민은 각각 이 지역의 문단과 학계를 주도하면서 경상 우 도 지역에 의리에 바탕을 둔 노사학파의 학설이 굳게 뿌리내리게 하였던 것이다.
        186.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에서는 화훼장식품 해석의 다양성을 도출하기 위하여 '동(動)', '숲속에 내리는 비', '낯설음' 이라는 각각의 원제를 지닌 화훼장식품을 가지고 작품의 제목, 외관, 그리고 소재에 대한 감상자의 시각을 조사하고 분석했다. 감상자가 부여한 제목은 3작품 모두 대부분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였다. 각 작품에 대해 감상자가 부여한 이미지 제목을 이미지 유형별로 분류하여 분석한 결과 시각적 이미지가 가장 높았다. 그 다음은 촉각, 미각, 후각, 청각, 공감각 순이었다. 외관에 대한 감상자의 시각을 이미지 유형별로 분류한 결과 역시 시각적 이미지가 가장 높았다. 그 다음은 관념, 공감각, 자연물 등의 순이었다. 작품의 소재에 대한 이미지를 분석한 결과에서도 시각적 이미지가 가장 높았으며 다음으로는 자연물과 관념의 이미지가 높았다. 이상에서와 같이 동일한 화훼잘식품에 대해서도 감상자들의 시각은 다양하게 존재하였다. 이에 따라 예술의 보편적 특성 가운데 작품의 의미 전달과 해석의 다양성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는 작가와 감상자간의 소통 및 작품의 해석에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
        187.
        2010.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무용수의 심리적 체험을 긍정심리학 관점에서 탐색하고, 이를 바탕으로 무용에서의 긍정적 심리체험을 구조화할 목적으로 진행하였다. 무용전공대학생 110명을 대상으로 개방형설문을 실시해 무용 수행시의 심리체험을 수집하였으며 수집한 자료에 대한 귀납적범주화와, 귀납적범주화 결과의 구조타당도 검증 순으로 진행하였다. 연구결과 개방형 설문에서는 387사례의 원자료가 수집, 36항의 세부요인으로 범주화하였으며 36항의 세부요인은 자기표현, 성취감, 일체감, 유능감, 자기발견, 활력감, 몰입 등 7개의 일반요인으로 범주화 하였다. 세부영역을 기준으로 63항의 예비조사 문항을 개발하여 문항의 삭제와 요인 구조의 확인, 신뢰도 분석을 반복적으로 실시한 결과, 활력(vitality), 유능(competence), 성취(accomplishment), 표현(expression)의 4요인, 16항으로 무용수의 긍정 심리체험은 구조화되었다. 탐색적요인분석 결과를 토대로 한 확인적요인분석 결과, 대부분의 판단지표가 채택 가능한 범위에 있어 이 개념구조 모형은 수용 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향후 스포츠심리학과 무용학 연구에서 긍정심리학 관점을 반영한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188.
        200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명학파는 그 성립 초기, 즉 남명이 생존하던 시기와 그 문인집단이 왕성하 게 활동하던 시기인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반에는 우리나라 학계와 정계를 주도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때 남명의 문인 내암 정인홍이 ‘賊臣’으로 몰려 처 형을 당하고부터 상황은 急轉直下하였다. 반정 이후 남명학파적 성격을 유지한 채 정권에 참여할 수 없었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남명학파는 명목과 실상을 동시에 유지하기 어려웠고, 이러한 연유로 해서 17세기 중후반부터 차츰 退溪 學派化 내지는 栗谷學派化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도 내심 북인 세력으로 존재하던 남명학파의 일부가 1728년에 ‘戊申亂’을 일으키다 궤멸됨으로써 설상가상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 다. 이즈음에 이르게 되면 남명학파의 목숨은 거의 끊어진 듯이 보인다. 그러나 비록 미미하다 할지라도 진주 인근에서는 河世應·河必淸·李甲龍·李志容·李佑贇 등의 인물이 꾸준히 학맥을 이어왔던 것이 분명히 포착된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엽에 이르러 정조가 남명에 대한 제문을 직접 지어 사제케 한 뒤로 경상우도 지역의 사기가 올랐음인지 19세기에 들어서면 李源祚·張福樞·李震相·朴致馥 등 을 이어 金麟燮·許愈·崔琡民·鄭載圭·金鎭祜·郭鍾錫 등의 저명한 학자가 대거 굴 기하게 되었다. 특히 俛宇 郭鍾錫(1846-1919)은 한주 이진상의 문인으로서 우도 지역은 물 론 좌도 지역을 포함하여 전국적 명망을 한 몸에 받는 대유가 되어, 고종의 지 우를 입었으나 망국의 현실을 되돌릴 수는 없었고, 경술국치 이후 1919년 파리 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조선 유림의 대표로서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를 보내 는 일을 주도한 뒤 일생을 마친 인물로, 그의 저술이 너무 호한하여 근래에 이 르도록 깊은 연구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면우 곽종석의 여러 면모 가운데 남명학을 계승하고 있는 측면을 부각하여 그 양상과 의미를 더듬어 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면우는 태어나고 자란 곳이 남명학파적 요소가 뿌리 깊은 곳이고, 혈연 을 중심으로 살펴본 그의 가계에서도 남명학파적 요소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학연의 측면에서 보면 한주 이진상의 학문을 계승하였으므로 퇴계학파적 요소 가 두드러진다. 둘째, 면우는 남명 정신의 핵심을 그의 ‘敬義’ 사상에서 찾고, 이 사상이 우도 지역 곳곳에서 면면히 전승되어 왔던 것이므로, 앞으로도 계속 전승해가야 한 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 면우는 「신명사부」를 크게 네 단락으로 구성하여 신명사의 유래, 靜的 居敬의 상태, 處事接物時에 私欲과 邪念이 일어나는 과정, 이를 廝殺하여 이른 바 ‘復其初’하는 과정 등을 신명사가 겪는 治亂의 역사로 상정하여 매우 역동적 으로 묘사하였는데, 이를 남명이 내세웠던 경의와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앞의 두 단락은 敬을 드러낸 것이고, 뒤의 두 단락은 義를 드러낸 것이다. 敬義를 직 접적으로 내세우지 않으면서 敬義의 의미를 매우 심도 있게 드러내었다. 넷째, 면우는 南冥을 매우 尊慕하였지만 退溪와 함께 崇尙하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는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의 학문적 전통이 희미해지면서 남인의 경 우 퇴계학파의 학문이 서서히 그 자리를 대체해 온 결과라 할 것이다. 남명의 사상 가운데 그 핵심이라 이를 ‘敬義’에 대한 계승 의지는 면우 또한 매우 투철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맞물려 있는 엄정한 출처와 실 천 지향의 측면은 다소 약화되고 성리학적 이론에 대한 면밀한 탐구가 있었으 니, 이는 대체로 퇴계학파적 면모의 확대로 인한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인다. 학 자로서 사우의 연원은 결정적이므로 면우의 문집에 퇴계학파적 면모가 두드러 지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남명학파로서의 자부심과 그에 대한 지향성이 뚜렷하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190.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형수와의 혼인이라는 혼속은 아시아・유럽・북부아프리카・아메리카 등 세계의 원주민 사이에 이루어졌던 혼속을 말한다. 인도나 일본의 소수민족 사이에는 최근까지도 위와 같은 혼속이 있었다고 보고되었다. 대완에서는 서조모와 혼인을 하였으며 흉노에서도 서모・형수・계수・며느리와 혼인할 수 있었다. 서역의 당항족은 백모・서모・형수・며느리와 혼인할 수 있고 돌궐에서는 후모・백숙모・형수와도 혼인할 수 있었다. 오・여진・몽골・부여 등에 서는 형수와 혼인하는 혼속이 있었다. 󰡔양서󰡕・󰡔남사󰡕・󰡔태평어람󰡕 등의 사서에 서는 고구려에서도 형수와 혼인하였다고 전한다. 형수와의 혼인이라는 혼속이 최초로 나타난 사서는 󰡔삼국사기󰡕이다. 고국천 왕이 뒤를 이을 아들 없이 죽자 우씨왕후는 시동생 연우와 통정하고 그를 왕위 에 앉히니 이가 산상왕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고국천왕 부분에 ‘立妃于 氏爲王后’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우씨가 고국천왕의 왕비가 되기 전에 이 미 ‘妃’였을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연나부의 명림씨 가문의 권세를 등에 업고 왕 후 우씨는 신대왕・고국천왕・산상왕・동천왕 등 4대에 걸쳐 왕후로 또는 왕태후 로 권세를 누렸다. 뿐만 아니라, 명림씨 가문의 대모 노릇까지 한다. 산상왕은 우씨로 말미암아 왕위에 올라 우씨를 왕후로 삼은 각시바치의 전형이다. 그러 나, 정치적 재능을 지녔던 산상왕은 연나부와 정략적 거리를 유지하며 진대법 을 실시하고 국상 을파소를 기용하는 등으로 연나부를 제어하였다. 산상왕과 우씨왕후 사이에 이루어진 형수와의 혼인 문제를 둘러싸고 당사자 인 산상왕과 우씨왕후는 물론 산상왕의 형제들인 발기・계수・고국천왕은 각기 다른 의식변화를 보여준다. 발기는 산상왕과 우씨왕후의 혼인을 역수와 천륜을 어긴 비례라고 하여 군사를 일으켜 싸웠으나 실패하고 만다. 산상왕의 명에 따 라 발기를 정벌하러 나섰던 계수도 산상왕이 국양하지 않은 것을 불의라고 하 면서도 남의 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종국을 멸망시키려 한 발기의 행위 역시 죽 어서 선인을 볼 때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발기를 왕의 예로 장사 지낸 뒤 산상왕은 우씨왕후와의 사이에 뒤를 이을 아 들이 없으므로 소후를 얻겠다는 뜻을 비친다. 산상왕이 주통촌녀와 상관한 것 을 안 우씨왕후는 질투하여 병사를 보내 주통촌녀를 죽이려고 한다. 이 과정에 서 주통촌녀의 유체가 자신의 후사임을 확인한 산상왕은 이를 우씨왕후에게 말 하여 주통촌녀에 대한 우씨왕후의 횡포를 제어하고 주통촌녀를 소후로 삼은 다 음 아들 교체를 태자로 봉하니 이가 동천왕이다. 산상왕의 의식은 다분히 정치 적이고 정략적이다. 왕의 아이를 임신한 주통촌녀를 병사를 보내 죽이려 한 투 기 죄를 짓고도 우씨왕후가 무사했던 것으로 보아 왕후와 연나부의 권력이 산 상왕을 능가했던 것 같다. 우씨왕후는 죽을 때 스스로의 행위를 첩실행이라고 부끄러워하면서 신하들에 게 자신을 구렁에 버리지 못하겠거든 산상왕릉 곁에 묻어 달라고 유언한다. 이 미 죽은 고국천왕은 무당의 입을 빌어 우씨왕후의 행위를 낯이 뜨거워 백성을 볼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산상왕과 우씨왕후의 혼인문제를 놓고 권근・서거정・안정복・최 보 등이 천륜을 어긴 수혼이라고 비판하였다. 󰡔경국대전󰡕과 󰡔증보문헌비고󰡕에 서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첩이나, 백모나 숙모, 형수나 계수와 혼인한 자를 극 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까지 형수와의 혼인이라는 유습 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191.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지리산의 역사적 성격의 변화에 초점을 두고 名山文化로서 智異山의 正體性을 조선 초・중기의 문헌사료를 통해서 구명한 것이다. 먼저 명산은 인간 이 인위적으로 창출하고 결정한 의미에 의해서 규정・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므 로 명산은 고정되는 경우보다 변화를 겪는 존재로서 사회적 생산물의 성격을 갖고 있어 문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명산문화는 명산이 의미하는 바의 정체성까지 수렴하는 보다 광의의 의미를 갖고 있다. 조선 초기 지리산은 太祖 李成桂에게 조선 건국과 관련해서 중요한 신성의 장 소이자 그들의 정치적 목적의 정당화를 위한 含意를 지닌 곳이었다. 한편 지리 산의 神聖은 卿·大夫·士・庶人이 숭배 대상으로 하였던 山神으로서 信仰性을 갖 고 있었다. 반면에 왕을 비롯한 위정자에게 지리산의 신성은 명산대천으로서 신성에 정치적 성격을 포함한 이중적 함의를 지녔다. 세종 같은 경우 전통문화 로서 명산대천의 신성을 인정하면서도 惑信하는 신성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 하여 금지하였다. 이처럼 鮮初 지리산의 정체성은 신성에서 신앙성・정치성 등 다양한 함의를 지녔다. 조선 중기 지리산은 지리산권역의 사림들과 수령들에게 仙遊・修養의 공간, 그리고 勳戚政治 개혁을 위한 모색의 공간으로서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럴 때 馬 崇祖가 지리산 天皇을 숭배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지리산이 신앙으로서 神聖性을 크게 잃어갔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지리산의 정 체성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 정치・사회적 함의가 커져갔다. 한편 賊徒 張永己 사 건에서 지리산이 인간의 삶 속으로 급속히 편입되는 사회성을 읽을 수 있다. 이 보다 더 사회성과 정치성을 보여주는 사건이 자칭 의병대장 宋儒眞 사건이다. 16세기 말 지리산은 王朝를 부정하였던 송유진을 따르는 한 무리의 활동 공간 이었다. 이는 그만큼 지리산의 정체성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193.
        2008.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기둥형상비를 실험 변수로 가지는 무량판 슬래브-기둥 접합부의 내진성능을 평가하는데 있다. 본 연구에서는 무량판 슬래브의 뚫림 전단파괴를 방지하기 위하여 본 연구와 병행하여 진행된 연구에서 개발된 연속 절곡된 전단보강근을 적용하였다. 기둥형상비에 따른 실험체는 각각 FIS1-05(0.5), FIS1- 10(1.0), FIS1-20(2.0) 이다. 실험체의 수평방향으로 정적 수평하중을 가력 하였으며, 중력하중비에 의한 일정 수직 하중을 적용하였다. 실험결과는 슬래브-기둥 접합부의 수평 변위 및 강도를 기준으로 평가하였다. 분석결과, FIS1-05, FIS1-20와 같은 장방형 기둥을 갖는 접합부의 성능이 FIS1-10와 같은 정방형 기둥을 갖는 접합부보다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194.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遺逸은 16세기 조선조 사대부문학의 작자층 가운데에서 학덕이나 재능을 지 녀 朝官이 될 자질을 갖추고도 벼슬하지 않고 재야에 은거하는 未入仕者를 말 한다. 士禍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근거지로 은거한 이들은 현실 을 외면하지 않고 끊임없는 학문연구와 심성수양을 통해 온전한 인격을 추구하 였으며, 향촌을 교화하고 도학을 전파하는 등 경색된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士 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사회적 비중과 신망이 조 정에서 벼슬하는 관료보다 더 높아져, 조정에서는 이들을 예우하여 徵召하였다. 곧 遺逸은 출사하지 않으면서도 지방에서 백성의 신망이 두텁던 당대 碩儒들로 서, 우리 역사상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 시대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삶의 터전은 산수자연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은거지에 대한 애정이 남 달랐고, 은거지 주변의 명산과 절경을 유람하는 것으로 이를 표출하였다. 유람 에서 만나는 자연경물에 자신의 심정을 붙여 술회하였는데, 그들에게 있어 산 수자연은 ‘본래 그러한 것, 본래 그러한 모습으로 존재했던 것’으로만 인식되지 않았다. 특히 16세기 조선조는 성리학 연구의 심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이 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성리학자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산수자연은 당대의 不正한 현실을 인식하는 자신의 의식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특히 은거지 중심의 유람에서 표출되는 산수자연은 현실에서의 좌절을 수양으로 승화시키는 지식인의 의식세계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예컨대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성리학자였던 만큼 자연경물을 통해 현실의 不 正 및 민생고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였고, 역사유적지를 접하면 그 시대를 회고 하고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현실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았다. 무엇보다 물러나 있지만 자아를 각성하고 심성수양에 진력했던 이들에게 산수자연은 士意識을 고취하는 매개로 작용하였다. 곧 당대 관료세계에 피동적으로 편입되기를 거부 하고 물러났던 조선조 士人의 의식을 산수자연으로 표출하였던 것이다.
        195.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19세기 江右地域의 대학자 晩醒 朴致馥의 남명학 계승양상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본 것이다. 본고는 만성의 학문이 定齋 柳致明을 통한 퇴계학파의 학설을 수용한 점과 性齋 許傳를 통해 근기 남인계 星湖學의 實用主義를 수용 한 점에 주목하여, 만성이 이 두 학문을 겸함으로써 전통의 학설을 바탕으로 하 면서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致用의 학문을 한 것으로 평가하였 다. 이런 점에서 그의 학문성향은 寒洲 李震相의 心卽理說이나 蘆沙 奇正鎭의 主理論이 전통의 성리설을 바탕으로 새로운 설을 전개한 것과 다르다. 또한 양 자를 兼取하였다는 점에서 퇴계학파나 성호학파의 학문성향과도 변별된다. 그 리고 학문이 침체되었던 강우지역에서 새로운 학문을 선도하였다는 점에서 학 술사적 의의가 크다. 본고에서 논한 만성의 남명학 계승양상은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만성의 南冥遺蹟 探訪과 追崇事業으로는, 山天齋・白雲洞 등 남명유적을 찾아 추모한 것과 산해정 중건 기문을 지은 것을 들 수 있다. 둘째, 南冥의 文廟從祀 를 위한 노력으로는, 만성이 1888년 疏頭가 되어 상소문을 올린 것을 들 수 있 다. 셋째, 만성은 許眉叟의 문집 󰡔記言󰡕에 남명을 사실과 다르게 폄하한 「答學 者書」를 삭제해 줄 것과 「德山碑」의 개정을 요청하였고, 󰡔南冥集󰡕 重刊을 위해 교감을 보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넷째, 만성의 現實認識의 측면에서 본 南冥精 神 繼承으로는, 「上時弊疏」에 나타난 현실인식과 민생구제정신이 남명의 상소 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섯째, 만성의 南冥에 대한 認識 및 論評으로 는, 남명을 소미성으로 상징되는 처사로만 보지 않고 傅說・富弼처럼 賢相名丞 의 자질을 가진 인물로 평가했고, 남명의 학문을 程子・朱子를 계승한 正學으로 보았으며, ‘秋霜烈日 千仞壁立’으로 일컬어지는 남명의 기상에 대해 敬義學을 전제함으로써 伯夷와 다른 성향으로 재평가하였고, 山海亭의 山海에 대한 해석 을 통해 남명의 정신지향을 泰山보다 높고 瀛海보다 크다고 평했다.
        196.
        2007.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연구는 플랫 플레이트 구조에서 직사각형 외부기둥-슬래브 접합부의 뚫림전단강도에 관한 실험결과에 관하여 다룬다. 직사각형 기둥의 형상비 증가에 따른 뚫림전단거동을 평가하기 위해 위험단면의 길이를 일정한 값이 되도록 기둥 단면크기를 산정하고 총 8개의 실험체를 계획하였다. 두 수준의 콘크리트 압축강도(f'c=24, 40MPa)에 대하여 기둥단면의 형상비(βc=C1
        197.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주지하다시피 남명 몰후 인조반정 이전까지 약 50년 동안은 남명학파가 역사 의 전면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던 시기라 할 수 있거니와, 인조반정으로 인 해 남명학파를 이끌던 내암 정인홍이 적신으로 몰려 처형된 뒤로부터 남명학파 는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북인이었던 남명학파가 인조반정 이후 󰡔남명집󰡕에 실린 정인홍의 흔적을 없애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부류와 소극적인 부류가 대립하면서 남인과 서인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이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남인은 퇴계학파화하고 서인은 율곡학파화하였다. 그러나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江右 지역의 인물 가운데 남인화 또는 서인화한 두드러진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체로 남명 학파의 학문정신을 나름대로 계승해 왔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리고 이러한 지역적 분위기는 남인화 또는 서인화한 인물의 경우도 남명학파의 학문정신을 근본적으로 배제한 채 퇴계학파 또는 율곡학파의 학문을 수용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영조 4년(서기 1728년)에 일어난 무신사태 때 강우 지역에서 동계 정온의 현 손 정희량과 도촌 조응인의 5대손 조성좌가 세력을 규합하여 안의․거창․합천․삼 가를 한 때 점령했던 일이 일어났다. 이 일로 인해 강우 지역은 반역향이라는 인식이 심화되었으며, 이 지역의 선비들도 그 기상이 저하되고 남명학파로서의 학문정신에 대한 자긍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면 학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16-17세기의 학 문적 영화를 다시 보는 듯하였다. 당시 강우지역의 학자들의 남명학 계승양상 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우선, 조선말기에 이르기까지 경상우도 지역에서는 그들이 비록 영남 남인 정 재 유치명의 문인이거나 기호남인 성재 허전의 문인이거나 호남 노론 노사 기 정진의 문인이거나 간에 남명의 경의 사상에 대한 계승의 의지가 확고함을 알 수 있다. 특히 퇴계를 경모하면서 한주의 주리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후산 허유가, 남명의 신명사도와 신명사명에 대한 정밀한 주해를 하면서 경상우도의 당대 선후배 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여 완성시켰던 점은 남명 사상의 근저를 확고히 하려는 의식의 소산이었다. 출처관 또한 남명의 영향이 당시까지 깊이 남아 있었다. 만성・단계・후산・노 백헌・물천・면우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었음에도 과거로 발신한 사람은 단계 김인섭 뿐이다. 그런데 그 단계가 조정에서 물러난 뒤 수령들의 횡포가 극에 달 한 것을 보고 그 아버지와 함께 민란을 주도한 것은, 남명의 출처관과 현실비판 의 정신이 변모된 양상으로 후대에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남명이 남긴 시황계의 영향은 조선말기에 이르면 상당히 퇴색해지고, 성리학 이론에 관한 탐구를 배격하였던 남명의 정신도 많이 허물어졌다. 그러나 남명의 경의 사상과 출처관 등은 조선말기까지도 확고하고, 실천을 중 시하는 학풍 또한 깊이 젖어 있어서 성리설에 대한 학설 전개를 못마땅해 하는 분위기가 1900년 무렵에도 광범위하게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겉으 로 드러난 학맥상으로 보면 남명학파가 와해되어 사라진 듯하여도 실상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인 것이다.
        198.
        200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was to investigate the characteristics of urban ecotopes and to classify ecotopes systematically from them. Total of 15 characteristics for classification of ecotopes were selected, and there were categorized 3 factors, that is abiotic, biotic and anthropological factors. The ecotope types in the study area were classified into 67. The classification of ecotope was made with SPSS for Windows Version 10.0 on the basis of the 15 characteristics. As the results of cluster analysis using the average linkage method between groups, groups of ecotope type were divided into 15 clusters. It was known that there was not a great difference in an affinity as the result of overlapping the maps of ecotope type and land use type. This research suggested characteristics for classification of ecotopes, but there was a limit to get the objective method for grade classification because of lacking in the basic data, the research of characteristics will be accomplished continuously.